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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3화 〉 133 ­ 무단 교체는 반칙이지 (133/243)

〈 133화 〉 133 ­ 무단 교체는 반칙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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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함없이 재빠르고 능숙한 상대였다.

공간이 한정된 골목길에서, 내가 가진 자원으로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장기전으로 끌고 가는 건 불가능하다. 상대가 쏘아대는 모든 공격을 완벽한 타이밍에 쳐내거나 피할 수 있다면 모르겠으나­ 그게 가능했으면 당장 프로를 하든가 했겠지.

일격에도 변칙적인 수를 섞어오는 적을 상대로 수비를 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시간이 지날 때마다 몸이 깎이는 게 느껴졌다. 찌르고, 당기고, 베어내는. 공격의 배합부터 스태미나를 생각하는 완급 조절까지 찌르고 드러갈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결전 대회 때와는 다른 빌드라, 이전과 같은 화려함은 보이지 않았음에도 까다로운 건 마찬가지였다. 좁은 공간에서 무상이 날뛰는 공간만 유독 넓은 것처럼 다가왔다. 빌드에 대해 의견을 피력할 만한 능력이 있는 것이다. 프로라는 이름이 무색해지지 않을 정도로.

그러니까, 내가 폭주하는 순간만 노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챙­

앞으로 두 방. 아니, 출혈까지 고려하면 한 방일까. 간신히 타이밍을 맞춰 맞닿은 대검이 무상이 내지른 일격을 비껴냈다. 피부 가죽을 찢고 핏방울이 튀어올랐다. 붉게 달아오른 화면이 내게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기다리던 시간을 다가왔음을 알리는 독촉이다.

무상의 발은 이전보다 더 분주하게 움직였다. 나만큼은 아니어도, 이제 곧 광전사의 트리거가 발동된다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는 거겠지.

폭주를 발동시키고 느긋하게 몸을 움직일 여유는 없었다. 증가한 속도에 맞춰 대응을 바꿀 정도의 역량을 가진 상대였다.

노림수는, 공격을 한 번 더 허용한 바로 그 순간에 던져야 할 터.

챙­, 피슉.

지금이다.

시야를 붉게 물들이던 테두리 부근에 마치 핏줄이 일어서는 것처럼 선홍색 줄기가 모여들었다. 버서크의 전조를 알리는 현상이다. 버서크와 연계되는 나이트폴의 모든 특성은 이 전조가 나타난 직후 일괄적으로 함께 발동한다.

잔뿌리처럼 넓게 퍼진 붉은색 핏줄이 그 선명함을 최대로 발하는 순간.

나는 앞으로 돌진했다.

질주 커맨드를 입력함과 동시에 시야 중심에 있던 무상이 크게 확대됐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속도였다. 이 갑작스러운 속도감의 전환 때문에 광전사 빌드가 높은 숙련도를 필요로 한다는 평가를 듣는 것이다. 마주한 상대는 물론이고, 조작하는 당사자조차 쉽게 적응할 수 없는 급격한 변화.

내겐 기어를 바꿔 넣는 것처럼 너무나 익숙한 순간이었다.

쾅­!

기습적인 차징에 무상의 몸이 튕겨지듯 밀려났다. 그 와중에 반응해서 검을 들어올린 건지, 엉성하게 휘두른 검 때문에 상처가 늘어났다. 화면 테두리의 붉은색이 조금 더 짙어졌다. 좁은 지형이 아니었다면 온전히 반응할 수도 있었을까.

무상이 튕겨난 직후 자세를 바로잡기 위해 버둥거렸다. 바닥을 짚은 왼손이 땅을 밀어내고, 굽혀진 무릎이 조금씩 몸을 일으킨다. 집중력이 극한에 달했는지 그 작은 동작을 하나하나를 전부 인식할 수 있었다. 내가 차징의 반동을 모두 추스른 것도, 모두 다.

뒤는 없었다.

동작을 짧게 가져가기 위해 검신의 중앙을 거머쥔 파지법을 바로 잡았다. 양손이 검 자루를 잡자, 육중한 대검이 처음으로 제 존재감을 온전히 드러냈다.

허리춤으로 크게 당긴 대검에서 빛무리가 모여들었다. 언제 봐도 요란하기 짝이 없는 전조. 검의 손잡이를 허리로 바짝 붙인다. 공격을 피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폭주하는 순간의 가속을 이용한 연계기였다.

횡으로 내지른 대검이 빛무리와 함께 좁은 골목길을 반으로 가로질렀다.

카가각­!

본래 츠바이의 길이를 생각하면 생각하기 힘든 일격이다. 검이 제대로 힘을 받지도 못한 상태였다. 좁은 공간에서 휘두른 일격은 돌로 만들어진 벽에 틀어막혀 빈틈만 드러낼 것이 뻔했다.

강화를 받지 못했다면, 분명 그랬겠지.

빛을 내뿜는 이펙트는 단순히 화려함을 위한 장식이 아니었다. 굳건한 방패를 무너뜨릴 정도의 힘이 실려있는 강격이다. 거인이 휘두른 것처럼, 강대한 힘을 품은 대검은 하얀 벽의 표면을 사정없이 긁어대며 무상에게 쇄도했다.

이 순간에 한해서. 좁은 공간이라는 제약은 오히려 적의 회피 동작을 틀어막는 이점으로 작용했다.

찬란한 빛살이 무상의 허리춤에 기다란 직선을 긋고 지나갔다.

뒤늦게 빛이 남긴 잔상을 타고 붉은 피가 비산했다. 대검을 타고 떨어진 벽의 잔해가 핏물과 섞여 하얀 성지를 더럽혔다.

첫 번째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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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잠ㅅ;만요

.

.

.

...숙소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무상의 첫 목숨을 가져간 직후였다. 채팅 하나를 남기고 사라진 그는 몇 분 동안이나 아무런 말이 없었다. 가까운 곳에서 리스폰이 됐을 텐데. 당연하다는 듯 캐릭터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지난 전투의 요란함이 거짓말인 것처럼, 골목길에는 적막이 내려앉았다.

전투의 여파로 바짝 끓어올랐던 집중력이 느닷없는 휴식으로 차갑게 식어버린 기분이다. 불완전 연소가 이런 것일까. 회복을 마치고 선명해진 시야로 난잡한 전투의 흔적이 그대로 들어오는데, 정작 싸울 상대를 잃어버린 나는 외로운 들개마냥 버려진 꼴이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지.

애타는 마음에 들어올린 컵도 허전하게 비어있었다.

무상:왔습니다.

무상:다시 가실까요?

아, 왔다.

Nord11:네. 오세요.

프로와 붙는다는 사실에 정말 설레기라도 했던 걸까. 그 잠깐의 공백이 길게도 느껴졌다.

다소 싱겁게 느껴졌던 배치 게임을 치르고 난 이후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커뮤니티 등지에서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랭크에 따라 썰어낼 때의 손맛이 다르다는 표현은 제법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채팅을 치고 달려오기라도 했는지 무상은 금방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전과 같은 세팅이었다. 좀 전까지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된 채 길바닥에 널부러져 있던 바로 그 모습이다. 무기 정도는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은 고집을 꺾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그게 더 좋았다.

굳이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음은 필요하지 않았다. 도망칠 곳 없는 좁은 골목길에서, 양 끝에 자리 잡고서는 서로 검을 들어올린다. 그게 준비가 완료됐음을 알리는 수신호였다.

이전의 패배에서 생각한 것이 있었던 건지, 이번에는 빠르게 거리를 좁히지 않았다. 기동성의 차이 때문에 공격의 우선권은 그쪽이 가지고 있을 텐데.

기민하게 스탭을 밟지도 않고, 어깨 높이로 검을 높게 들어올리고는 한 발자국씩 천천히 거리를 좁힐 뿐이었다. 스타일을 바꿨나. 어쩌면 특성 활용도 못하고 일격에 나자빠진 것을 의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 내가 접근해야겠지.

앞으로 이동하면서 서서히 속도를 높였다.

결투를 천천히 끌고갈 생각은 없었다. 특성으로 상처가 치유됐다곤 하나, 만전의 상태와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는 수준이다. 어차피 공격 몇 번을 허용하면 곧바로 버서크 상태로 넘어갈 게 뻔했다. 무상이 시간을 준 덕분에 폭주의 쿨타임도 지나간지 오래였다. 낮은 체력이 오히려 이점으로 작용할 수 있는 상황이다. 주저할 순간이 아니었다.

타다닥­

내가 달리는 것에 맞춰 마주 달려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무상은 의외로 별다른 대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로 접근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뿌리를 박은 것처럼 그 자리에 굳건히 서서 방어 자세를 취하는 모습이다.

스타일을 완전히 뒤바꾼 것 같았다. 에스톡의 얇은 검신으로 츠바이를 방어하지는 않을 테고, 아마 공격하는 순간에 맞춰 카운터를 노려올 터. 내가 연이은 공세를 모두 흘려냈던 이전 상황을 염두에 둔 모양이다.

콰악­!

공격을 위해 밟은 진각이 발밑에 널부러진 돌 부스러기 따위를 박살냈다. 짧게 잡은 대검을 적의 흉부에 찔러넣었다. 카운터를 의식한 눈이 검 손잡이를 쥔 무상의 오른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대응을 위해 여지를 남겨둔 일격이다. 여기서, 무상의 스탠스가 드러나겠지.

탁, 탁, 탁.

무상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연이어 백스탭을 밟았다. 두 세번의 움직임으로 내지른 찌르기를 흘려내고, 추격을 방지하려는 듯 앞으로 뻗은 얇은 검신이 허공에서 유려하게 움직였다.

완벽한 회피 동작이었다. 공격 일변도로 몰아치던 이전 전투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깔끔한 후퇴였다. 물러선 상태로 다시 자세를 바로잡는 것까지. 좁혀진 거리를 제외하고는 전투 양상에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제자리로 돌아간 에스톡을 여유있게 슬며시 내미는 모습이, 마치 성난 황소의 돌격을 받아내는 투우사처럼 느껴졌다.

검 끝을 위아래로 까딱이는... 도발 모션.

...작전을 바꾸긴 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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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씨­ 도발은 왜 하는데요! 매너 없다고 생각할 거 아니에요, 진짜!"

"와, 씨바 칼 흔들리는 것만 봐도 개열받네, 저거. 역시 찬혁이가 짬을 허투루 먹지는 않았어. 니가와의 정점! 개씹혁! 개밥혁!"

"개밥 그거 프런트에서 하지 말라고 엄청 부탁하던데."

"왜, 원래 이런 건 유쾌하게 받아들여야 덜 쓰여. 아, 넌 아직 쓰지마라. 신인들이 쓰면 팬들이 건방지다고 욕하니까."

"저는 짬 먹어도 형처럼 안 될 거예요, 진짜."

팀원들과 헛소리를 주고받을 때였다.

화면에선 붉은 광전사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었다. 한발짝 물러나서 바라본 광전사도 흉흉한 기세를 풍기는 건 다를 바 없었다. 그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키보드와 마우스를 쥔 찬혁은 요령 좋게 대검을 흘려냈다.

공격을 모두 피해내기엔 좁아터진 지형이었음에도.

'알고 있으면 맞을 일이 없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선배였다. 자신과 노르드의 일차전을 뒤에서 실컷 관전해놓고는, 제 지위까지 밀어붙이며 자신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앉더니. 그 시간에 공략법이라도 생각해둔 모양이다. 공격을 모두 피하면서 카운터 각을 노리는 저 플레이 스타일이 얄밉게 느껴졌다.

뒤에서 지켜본 빌드가 그렇게 쓸만해 보였을까. 아니면 치열한 전투에 신이 난 팀의 막내를 놀리고 싶었을까. 무상의 속에서 열이 끓어올랐다. 형만 아니었어도 뒤통수로 손이 날아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오, 역시 찬혁쿤."

어느새 자기 의자를 가져와 앉은 진수가 감탄사를 흘렸다. 버서크를 발동한 노르드의 공격을 흘리고 목구멍을 찌르는데 성공한 찬혁을 향한 찬사였다.

노르드가 보여준 건 이전과 같은 타이밍을 노린 일격이었다. 가속하는 순간 신의 부름까지 사용해서 일격을 날리는­ 일종의 일격필살. 무상의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아무리 한 번 봤다곤 하지만 완벽하게 카운터에 성공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불편했다. 저걸 받아치는 건 나여야 했는데.

찬혁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광전사가 흩뿌린 빛무리가 아직까지 화면에 남아있는 것 같았다. 노르드가 끝까지 카운터를 의식해온 탓에, 순간적으로 급소를 놓치고 역으로 당할 뻔했다.

그것도 무상이 당한 것과 똑같은 일격에. 그랬으면 당분간 놀림거리가 됐을 게 분명했다.

"...쫌 치네, 확실히."

"애 자리 뺏어놓고는 뭘 폼을 잡고 있어. 상이 부들부들 떠는 거 안 보여?"

찬혁은 앉은 자리에서 고개만 돌려 무상을 바라봤다. 정색하고 입을 비쭉 내밀고 있는 꼴이, 확실히 단단히 화가 난듯 싶었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궁금한 게 생기면 직접 시험해보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이 자신의 천성이었으니.

다행히... 방금 전 교전으로 확신을 얻은 참이다.

"야, 내가 미안하니까 개막식 입장권 하나줄게. 무상이 넌 이미 가족들한테 나눠줬다고 했지? 저 사람한테 하나 줘. 빌드 연구 도와준 대가라고 말하고."

시무룩하게 쳐져 있던 막내의 눈이, 한순간에 번쩍하고 뜨이는 건 꽤나 볼만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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