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34화 〉 134 ­ 나랑 같이 (134/243)

〈 134화 〉 134 ­ 나랑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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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발! 내가 이겼다­!"

"...진수형, 그렇게 좋아하는 거 맞아요?"

"추한 꼬라지 봐라. 프로가 아마추어 이겼다고 아주 그냥..."

"뭐, 뭐! 니들은 한 번씩 뒤졌으면서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냐? 그리고 저 사람 꽤 잘해, 진짜. 여자 프로 애들은 그냥 줫바를 거 같은데, 그냥 스트리머로 남아있는 거 완전 인력 낭비라고."

"앗. 위험 발언."

"...잘하긴 해. 일대일 결전으로 한정하면 탑티어인 건 확실하고."

"아무튼 나는 안 죽고 이겼다! 당분간 니들이 내 밑이라는 거지. 알아들었냐?"

"이럴라고 한다고 했냐? 이거 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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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노르드님 도와주신거 너무 감사합니다! 작지만 보답으로 개막전 티켓 보내드릴게요. 몇 주 뒤에 시작할 저희팀 개막전 경기입니다. 공식 사이트에서 아래 적힌 코드 입력하시면 온라인 티켓 수령 가능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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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저희 이기면 가벼운 팬미팅도 하니까, 꼭 와서 응원해주세요!

보답을 기대한 일은 아니었는데, 곤란한 선물을 받아버렸다.

어두운 방에서 조명 역할을 수행하는 모니터가 유독 밝게 빛났다. 새롭게 추가된 베타코드 친구 목록이 신규 메세지를 알리며 깜빡거렸다.

따지고 보면 이게 내가 의사소통 수단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매체였다. 이 목록에 들어온 걸 생각하면, 이제 무상을 진짜 인맥으로 바라봐도 되는 걸까. 직접 맞붙기까지 했는데도 막상 친구 목록에 들어온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아니,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닌가.

그렇게 훑어보면 친구 목록을 채운 몇 안 되는 닉네임이 대체로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스트리머들이 대부분에, 나이트폴 프로가 한 명.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이게 무슨 인맥이라고. 안 그래도 수가 적은데 정기적으로 연락하는 사람은 더욱 적었다. 유명한 사람들이면 뭐하나, 친분이 이렇게 얇은데. 이래서야 이름 뿐인 수집품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나는 아직까지 켜져 있던 나이트폴을 종료했다.

치열했던 게임이 끝난 다음이다. 한껏 끌어올린 집중력이 열기를 다하자, 전신에 노곤함이 퍼져나갔다. 별 생각도 하지 않고 무심히 검을 휘두르던 랭크 때와는 격이 다른 피로감이다. 대회 이후로는 이렇게 집중해서 게임을 했던 게 얼마만인지.

당분이 부족한지 뒤통수에서부터 지끈거리는 두통이 찾아왔다. 늦은 시간이지만 뭔가 먹어야겠다. 야식이 아니라 마지막 끼니라고 생각하면 괜찮지 않을까. 피로한 몸에 몽롱한 정신이 붕 떠오르는 것 같았다. 피곤해.

좋다고 웃는 이모티콘을 날려대며 친구 코드를 보내오던 무상이 제법 얄밉게 느껴졌다.

티켓은 정말 의외였다. 프로 리그가 개막한다는 사실이야 어디선가 흘러들어와 알고 있었지만, 나와는 관련이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나이트폴 리그라는 것에 흥미가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다만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내가 아는 프로팀은 무상이 속한 GB게이밍이 전부였으니.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을 건내주는 것이, 마치 실컷 두들겨놓고는 반창고 하나를 던져주는 모습처럼 보여서... 마냥 고맙지만은 않았다. 아니면 호의를 호의로 받지 못하는 내 뒤틀린 심보가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두 번째와 세 번째. 그건 분명 무상이 아니었던 거 같은데. 뭐라 따지기 위해 키보드를 두들기려던 손을 간신히 억제한지라, 내 의문에 대한 정답을 확인하지도 못했다. 지고 나서 그런 질문을 던지면 뭔가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는 머저리의 변명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지.

당당히 물어보기 위해선 이겼어야 했는데... 같은 빌드를 사용하는 한 사람이 그렇게 변칙적으로 변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지. 첫 죽음 이후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기가 힘들었다. 저걸 조작하고 있는 모니터 뒤의 플레이어가 누구인지가 얼마나 궁금하던지.

상대가 프로였음에도 패배가 주는 분함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이길만한 기회는 충분했기에 더욱 그랬다. 추측을 확인하기 위해 똑같은 수를 던지는 짓만 하지 않았어도... 그만두자. 더이상의 후회는 추해질 뿐일 테니까.

딸깍­

무상이 손수 링크까지 걸어준 건 나이트폴 프로 리그의 공식 사이트였다.

NPL. 대문을 장식한 로고가 꽤나 고풍스러웠다.

자동 재생으로 흘러나오는 리그 티저 영상에서 웅장한 배경음이 울려퍼졌다. 음악을 듣겠다고 최근 구매한 비싼 스피커가 과하다싶을 정도로 제 존재감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늦은 밤 그 커다란 소리가 과하게 느껴져서, 나는 황급히 볼륨을 조절해야 했다.

e스포츠라. 취미를 게임으로 적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살아온 내게는 빼놓을 수 없는 삶의 낙 중 하나였지.

대학 시절 야구나 축구를 보러가자는 권유를 모두 내치던 내가 유일하게 직관을 해본 스포츠도 e스포츠가 아니던가. 현장을 가득 채운 인파를 보고 혀를 내두르면서도 결국 제법 즐겁게 관람했던 기억이 남아있었다. 꽤나 오래되어 퇴색된 기억이긴 했으나, 무상이 건내준 티켓이 케케묵은 기억의 먼지를 털어내는 것 같았다.

배너가 눈에 띄는 곳에 존재한 덕분에 코드를 입력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혜진이 된 이후로는 이런 종류의 직관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코드를 입력하자마자 화면에 출력된 온라인 티켓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신문물을 바라보는 원숭이라도 된 기분이다. 내가 대학로에서 공연을 보던 때만 하더라도­ 아니, 이건 너무 오래된 감성이겠지.

친절하게도 티켓은 좌석의 위치까지 그래픽으로 표시해주고 있었다. 코드에 배정된 티켓은 두 장이었다. 대강 보기에도 구하기가 어려울 것 같은 앞자리다. 선수들에게 양도되는 자리는 대개 이런 것일까. 개막전에 이 정도의 자리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생각보다 귀한 선물을 받았을지도.

두 장이라.

티켓 아래 표기된 날짜가 도드라져 보였다. 기분이 묘했다. 지금껏 제대로 본 적 없는 나이트폴 프로 게임에 대한 기대감과, 사람 많은 곳을 나가야 한다는 귀찮음이 상반된 의견을 제시했다. 머릿속에서 때아닌 회의가 시작됐다. 각자가 이런저런 근거들을 가져와 설득에 나서는 것이다.

공짜로 티켓을 받은,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직관을 가보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는 위치도 그렇게 멀지 않았고. 내겐 외출도 습관을 들여야 하는 일이었다. 의식하지 않으면, 익숙하고 편한 원룸 안에 계속 쳐박혀 있으려는 관성이 작용할 테니까.

나름 합리적이며 논리를 가진 것처럼 근거를 물고 오는 생각들은, 따지고 보면 다 감정에 기반을 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내가 고르는 선택지는 대체로 감정이 향하는 쪽이었다. 쌓아올린 근거들은 사실 합리화를 위한 재료들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이유가 있으니, 이 결정이 타당하다고 말하기 위한... 스스로를 위한 변명책.

그리고 지금 내 감정은 개막전을 가고 싶다는 쪽으로 기우는 중이었다.

...같이 갈 사람을 한 명 구해야겠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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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d:님 (01:17)

칼고:왜요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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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고:아니 말을 해 (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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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d:아 아무것도 아님; 칼고님은 유명해서 안될듯(02:15)

칼고:뭔소리야 ㅅㅂ (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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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이잉­

늦은 밤이었다.

필기구를 들고 책상 한쪽을 두드리던 혜민의 손이 속도를 더했다. 이 늦은 시간에 문자를. 문자를 보낼 사람이 한정된 자신의 인간 관계를 생각하면, 누구인지 쉽게 장담할 법도 한데.

시간대를 생각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가장 유력한 유정은 지금 잠에 들 시간이기 때문이다. 슬쩍 짜증이 밀려왔다. 누군지도 모를 사람에게 공부를 방해 받은 탓이다.

문자를 보낸 당사자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화면 상단부에 표시된 이름을 확인한 혜민이 벌떡 일어나 자세를 바로 잡았다. 예측하지 못한 일에 대한 당혹스러움과 기쁜 마음이 혼재되어 일어났다.

제 언니가 먼저 문자를 보내오다니. 드문 일이었다. 매일같이 보내는 안부 문자에도 짧은 답장만을 돌려주던 사람이 아니던가. 그렇다고 전화를 하기도 애매해서, 혜민은 제 언니의 상태를 방송을 보고 확인할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휴방이 길어지는 날에는 언니를 걱정하는 그녀의 마음도 덩달아 커지고는 했다. 주고받은 문자로는 얼굴색을 확인하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혜민은 몸 관리에 소질이 없는 자신의 언니가 혹시 또 술을 한 사발 들이키고 쓰러지지는 않았는지 마음 졸이는 일이 많았다.

몇 번이나 그녀의 집에 찾아가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는 것도 문제였다. 방학 기간 몇 주만이라도 그녀와 함께 살고 싶다는 자신의 소박한 요청은 혜진에게 거절당한지 오래였으니까. 그게 방송을 위한 것임을 알면서도, 내심 서운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일로 문자를 보내왔는지. 혜민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혜민아 시간되면 같이 NPL 개막전 보러 갈래? 나이트폴 프로 리그라고, 프로게이머들 경기야. 내가 티켓 두 장을 받았거든. 주호한테도 물어봤는데 자는지 답장이 없네.

2주 뒤 토요일인데 괜찮으면 답장해줘. 재미 없을 거 같으면 무리해서 같이 안 가도 괜찮고 ^^

서운한 마음이 씻겨지듯 사라졌다.

받은 문자의 첫 줄을 읽은 순간이다. NPL이고 나발이고, 혜민에겐 외출 기피인 언니가 자신에게 저런 제안을 건냈다는 사실 자체가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잘은 몰라도 개막전이면 사람이 가득 모여드는 곳일 텐데. 자취를 하면서 격변하더니, 이젠 바깥으로 발을 내딛는 일에도 망설임이 없어진 것 같았다.

곧장 나머지 문자 내용을 모두 훑은 혜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답장을 안 한다는 자신의 활동적인 쌍둥이 동생은 운동을 하고 온 대가로 일찍 잠에 들었을 게 분명했다. 그게 너무나 다행이었다.

나이트폴 프로 리그라면 혜민도 주호를 통해 들어본 바가 있었다. 마치 해외 축구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눈을 번쩍이며 좋아했던 것 같은데. 아마 자신보다 먼저 문자를 받았다면, 언니의 제안을 덥썩 받아들였겠지.

잘못하면 언니의 옆자리를 뺏길 뻔한 게 아닌가. 쌍둥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뒷전이었다.

'응... 너무, 좋아. 나랑... 같이, 가자...'

빠르게 답장을 보낸 혜민이 들뜬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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