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 135 내일은 날씨가 좋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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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계권이요?"
"어. 방송에서 리그 공식 방송 중계하려면 필요한 건데, 신청서 양식 맞춰서 메일만 보내면 돼요. 아직 안 했죠? 했을 리가 없지."
"아니... 했을 수도 있죠."
"그래서 보냈어요?"
"아뇨."
하
바람 빠진 소리와 흡사한 한숨이 칼고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모니터를 주시하는 눈. 키보드와 마우스를 붙잡은 손은 여전히 분주하게 움직이는 와중이다. 빠른 스탭으로 대형 둔기를 휘두르는 중갑 기사의 헛손질을 유도하고는, 무기를 회수하기 전 달려나가 갑옷의 틈새를 베어냈다. 뒤늦게 비명 소리와 함께 피가 떨어졌다.
칼고는 마우스를 돌려 바닥에 쓰러지는 적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 다음 입을 마이크에 가까이 붙였다.
"거봐. 한 경기라도 볼 거면 후회하지 말고 빨리 신청해놔요. 리그 도중에 하려면 복잡하고 귀찮으니까."
몇 구째인지 모를 시체를 뒤로 하고 성지 중앙의 대성당으로 걸어갈 때였다. 아군이 적을 쓰러뜨렸다는 킬 로그가 두 번 연달아 화면 상단을 장식했다. 연속 킬을 상징하는 불길이 닉네임을 따라 화려하게 불타올랐다.
'Nord11'. 이젠 익숙한 광경이다.
"으음... 신청 해놓고 안 봐도 되는 건가? 솔직히 볼지 안 볼지 모르겠는데요. 저 사실 리그 본 적이 없어요."
툭
예상치 못한 답변에 칼고의 발걸음도 멈춰섰다. 프로 리그를 본 적이 없다고? 저 실력에.
웬 허무맹랑한 거짓말이냐는 생각이 먼저 들었으나, 그는 곧장 떠오른 생각을 접어뒀다. 굳이 저런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동안 노르드가 보여준 엉뚱함을 고려하면 저건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래, 안 볼 수도 있지. 축구를 좋아하는 모든 사람이 프로 축구를 챙겨보는 건 아니었으니까.
"아니. 아예 본 적이 없다고? 매칭 돌리면 프로도 만나는 사람이."
"아, 엘튜브에서 몇 번 찾아보긴 했어요. 채팅창에서 하도 언급이 되니까."
게임은 이미 종반으로 치닫는 상황이었다. 시간이 지나서가 아니다. 양측이 대성당에 도달하기도 전, 드와 칼고의 손에서 지나치게 일방적인 킬 스코어가 나왔기 때문이다.
기괴한 빌드를 사용한다고 말이 많더니. 막상 듀오로 게임을 하다 보면 파트너의 빌드에 대해 불만을 품을 새가 없었다. 극적인 순간도, 위기 상황도 없다. 어느샌가 이미 게임의 승기가 이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부드러운 승차감이다.
그 암살 특화의 기괴한 빌드만 아니면 노르드는 언제나 최상의 파트너였다.
남은 적의 목숨을 모두 합쳐봐야 아군의 절반이나 될까. 이미 승기를 가져간 게임이다. 첫 데스 이후로 악에 받친 듯 달려오던 적 플레이어들도 더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항복이 가능한 시간만 기다리고 있겠지.
이걸로 몇 연승인지. 5연승을 달성한 이후로는 셈을 멈춘지라 채팅창을 봐야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깃발을 꼽기 위해 성당으로 걸어가는 길이다. 템포가 비슷하다고 가정하면, 성당에 도달할 즈음 노르드와 마주할 가능성이 높았다. 남은 스태미나를 가늠한 칼고가 조금씩 속도를 높였다.
"흠... GB게이밍은 잘하는 팀인가요?"
"GB? GB잘하지. 우승도 여러 번 했을 텐데. 이번 시즌도 우승 후보일걸."
"오..."
나름 감탄사라고 내뱉은 것 같은데, 감정이 묻어나오지 않는 탓에 칼고에겐 그게 비꼬는 것처럼 들려왔다. 정말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건가.
자고로 NPL팀에는 건드리면 큰 화를 부르는 거대한 팬덤을 거느린 팀이 몇 개 존재했는데... GB 게이밍도 그 중 하나였다. 나이트폴 프로 리그의 한 축을 담당하는, 명문으로 유명한 프로 팀. 소속 선수들의 면면만 살펴봐도 이름값이 대단한 팀이었다.
...노르드가 위험 발언을 하기 전에, 입을 틀어막는 편이 좋겠지.
"인기 엄청 많은 팀이에요. 팬덤 큰 걸로도 유명하고. 거기 엘튜브 공식 채널 구독자만 몇 십만 명이야."
그래도 눈치는 있는 모양이다. 칼고의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둘 사이에 내려앉은 잠깐의 정적을 깨부순 건 마이크 소리가 아니라 나이트폴의 시스템 효과음이었다. 누군가의 학살을 알리는 웅장한 북 소리가 전장에 울려퍼졌다.
역시, 노르드의 킬이었다.
"...또? 많이도 죽였네. 사람은 대체 어떻게 찾는"
"그럼, 개막전도 사람들이 많이 보겠네요."
"응? 당연하죠. 왜, 중계하려고?"
"아뇨. 해도 개막전은 안 할 거예요."
칼고가 의문을 제기하기 전이다. 화면 상단부에 점령을 알리는 커다란 카운트 다운이 출력되기 시작됐다. 칼고와 노르드가 적군과 교전하며 성당으로 다가서는 사이, 운 좋게 적과 마주치지 않고 진군한 아군이 벌써 성당에 도착한 것 같았다. 점령을 의미하는 깃발의 푸른빛이 아군의 승리가 임박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칼고님은 개막전 중계하실 거예요?"
노르드의 차분한 목소리가, 성당의 종소리를 뚫고 칼고의 귀를 간지럽혔다.
"...나는 매번 했으니까. 왜요?"
노르드는 대답도 없이 웃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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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약속 하나를 정해두면, 시간은 의외로 금방 흘러가는 법이다. 무상에게 티켓을 받은 지가 언제라고. 벌써 개막전 날이 다가왔다.
평소처럼 방송을 하면서도, 여가 시간에는 빠짐 없이 NPL의 과거 경기들을 챙겨봤더랬다. 경기장까지 찾아갔는데 리그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으면 곤란할 테니까.
유명한 해외 가수가 내한한다는 소식에 잘 알지도 못하면서 티켓부터 구하고 본 경험이 남긴 교훈이 있었다. 떼창을 하며 몸을 신나게 흔들어대는 사람들 옆에서 어찌나 무안하던지.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이 세상 어디에 가져와도 쉽게 적용이 되곤 했다. 즐기기 위해서 알아둬야 한다는 게 귀찮긴 했으나, 어쨌든 나를 위한 선택이었다.
사실 이번 경우엔 귀찮은 일도 아니었다. 프로 게임은 확실히 보는 맛이 있더라. 결전 대회에서 봤던 직관적인 관전 시스템이 팀 게임에서는 더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전장 전체를 내려다보는 스카이 뷰. 전투 양상에 따라 실시간으로 확대되는 시점을 보면 프로 리그가 꽤 오랫동안 발전해왔다는 걸 직감할 수 있는 것이다. 개발자가 얼마나 관전자 시점에 공을 들였는지도.
리그가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겠지. 게임을 플레이한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도, 검을 든 기사가 적 기사의 방어를 뚫고 칼을 박아넣는 장면을 보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을 것이다. 원초적인 폭력에는 그만한 쾌락이 동반했다. 내겐 역시 직접 플레이하는 쪽이 더 와닿았지만, 수준 높은 경기를 지켜보는 것도 지루한 일은 아니었다.
재미없는 숙제를 반복해서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여가 시간을 온통 리그 영상 시청으로 채운 것도, 다 나름의 재미가 있으니까 가능했던 일이었다.
지이잉
책상에 올라간 핸드폰이 몸을 떨어댔다. ...누가 보낸 문자인지 안 봐도 뻔하다. 오늘만 이게 몇 번째 문자인지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언니! 오늘도 늦게 자는 거 아니지? 나 아침 일찍 갈 테니까 너무 늦게 자면 안돼.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개막전 날을 준비하는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권유 문자를 보낸 다음날부터였다. 개막전 당일을 위한 혜민이의 빌드업이 시작된 건.
리그 정보, 경기를 하는 팀에 대한 정보, 당일 날 경기장까지의 교통 수단, 근처 맛집, 입고 갈 옷... 나열하자면 끝이 없었다. 주구장창 직관 날 이야기를 계속 하던 혜민은 이내 그 날의 계획표까지 만들었다. 아침에 내 원룸에 찾아오는 것을 시작으로 시간표가 돌아가는.
보내오는 문자에서 설렘이나 기쁨 따위의 감정들이 잔뜩 묻어나오는 것 같아서, 나는 말리지도 못하고 연거푸 동생의 의견에 동의하는 답장을 보낼 뿐이었다. 저렇게 좋아하는 데 옆에서 초를 칠 수도 없지 않은가.
다소 과한 감이 있었지만... 기뻐하는 쪽이 보람찬 것도 사실이었다. 당일 날까지 별다른 반응이 없었으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였을 테니까.
저 정도로 기뻐하면 무료로 받은 티켓으로 대단한 일을 해낸 셈이다. 어울리지 않게 장문의 문자로 아쉬움을 표한 주호의 일을 제외하면, 혜민에게 티켓을 건낸 것도 잘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
막상 걱정이 되는 건 다른 점이었는데.
입을 옷은 골랐냐며, 자신이 생각해둔 패션을 제안해오는 혜민이었다.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저번에 혜민이 잔뜩 가져온 옷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보기만 해도 자극적인 저 천 쪼가리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우선, 방송 공지나 적어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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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음 방송에서 뵙겠습니... 이런 멘트는 필요 없나.
글을 끝마치는 것도 일이였다. 안 쓰던 공지를 쓰려니까 머리가 아팠다. 뭐든 안 하던 일을 하려면 성가시고 귀찮은 법이라더니, 글을 길게 쓰는 것도 일이구나.
최근 내가 하는 일이라 해봐야 방송이 대부분이었으니, 휴방 공지도 방송으로 하는 게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오늘 방송을 끝낼 즈음에 박아버릴 걸 그랬나. 아니면 대충 녹화 파일을 떠서라도 아니, 그럴 바엔 공지 하나 쓰는 쪽이 더 편하겠지.
적잖이 써둔 공지를 대충 읽어버리고는 확인을 눌렀다. 실시간으로 게시판에 상주하는 사람들이 있는 탓인지, 새로고침을 한 번 누르자마자 댓글이 달렸다는 알람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방송을 하겠다는 공지도 대개 이런 식이었지. 유독 눈물을 흘리는 이모티콘이 많이 달렸던 것 같은데.
나는 바로 브라우저를 종료했다. 댓글을 읽기 시작하면 새로고침의 연쇄에 빠져버릴 게 분명했으니까. 반응은 나중에 확인하는 쪽이 편한 것이다.
[213]
내일 방송은 쉽니다.
최근 매일같이 방송을 했던지라, 이렇게 휴방 공지를 남깁니다. 혹시 왜 방송이 안 켜졌나 하고 당황하실 수도 있으니까요. 시청자 여러분을 배려하는 제 마음을 알아주세요. ^0^
요즘 날씨가 좋네요. 밖으로 나가면 조금씩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게 여름이 다 지나갔나 싶습니다. 조금만 시간이 더 지나면 산책하기에 딱 좋은 날이 찾아오겠죠. 이런 날에 술이 정말 잘 들어가는데 아쉽네요.
대신 엘튜브 신규 영상이 두 개 올라올 예정입니다 편집자님의 노고에 박수를. 아마 칼고님과 듀오를 했던 게임과 빌드 연구 영상이 올라가지 않을까요. 사실 저도 잘 모릅니다. 영상이 올라오면 그 때 확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여러분이 말씀해주신대로 NPL 중계 허가는 받아놨습니다. 생각보다 절차가 간단하더라구요. 모든 경기를 중계하지는 않을 거고, 가끔 생각이 나거나 중요한 경기가 있으면 할 것 같네요. 기준은 없습니다.
최근 과거 NPL 명경기들을 찾아봤는데, 꽤나 재밌는 경기가 많더라구요. 방송을 쉬는 시간에 챙겨보고 있습니다. 이러다 익숙한 팀이 생기면 응원차 중계를 시작하지 않을까요? 아님 말고요 ㅎㅎ;
추신.
아, 휴방은 일요일까지 연장될 수도 있습니다. 그냥 주말엔 방송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주세요. 그러다 알람이라도 울리면 깜짝 선물 같은 느낌에 기분이 좋겠죠? 이것도 아님 말고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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