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36화 〉 136 ­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136/243)

〈 136화 〉 136 ­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 * *

"뭐야, 벌써 나가?"

"응. 언니 집 먼저 들리기로 했어."

"다녀와. 아­. 혹시 팬미팅하면 나 싸인 한 장만 받아다 줘."

"싸인? 누구."

"GB 게이밍 데카 선수."

"언니가 그런 데를 갈까 모르겠네... 일단 알았어. 가능하면 받아볼게."

철컥.

좋은 날이다.

혜민이 현관문을 닫자마자 선선한 바깥 공기가 그녀를 둘러쌌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쾌청한 하늘임에도 피부가 따갑지 않았다. 하늘이 높아지는 계절이 다가온 덕일까. 들뜬 마음이 한층 더 부풀어 올랐다.

오래 기다렸던 날이다. 방학의 시간은 덧없이 흘러가기 마련인데, 약속 날을 정한 이후로는 그게 점점 더뎌진 것 같았다. 마음을 가득 채운 기대감 때문이다.

첫 소풍을 나가는 기분으로, 대회와 관련된 이런저런 정보들을 알아보며 계획을 세우는 것도 즐거웠다. 언니와 함께 제대로 된 외출을 하는 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릴 적을 제외하면 처음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한 것 같았다.

그녀의 발이 익숙한 정류장을 찾아 걸었다. 이젠 언니의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도 어색하지 않았다. 몇 차례의 방문 이후로 편의를 위한 생필품을 사다놨을 정도였다. 칫솔이나 베개 따위의 물건들.

이불을 하나 사야겠다는 언니의 의견은 혜민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원룸의 침대는 두 자매가 충분히 누울 수 있을 만큼 컸으니까.

버스에 앉아, 오늘 일정을 다시 한번 살펴본 다음이다. 기분 좋은 날씨에 들떠있던 혜민의 마음에 작은 걱정이 싹 텄다. 지금까지 혜진의 답장이 없었던 탓이다. 분명 집을 나서기 전에 문자를 보내놨을 텐데. 아직 문자 옆 숫자도 사라지지 않은 걸 보면 읽지도 않은 것이 분명했다.

설마 오늘도 밤을 샜는지. 분명 게시판에 올린 공지글까지 보고 잠들었는데, 방송이 일찍 종료됐다고 너무 금방 안심해버린게 문제일까.

혜민은 혜진이 늦잠을 자는 것보다 컨디션 조절을 못하는 게 더 걱정이었다. 그 연약하고 야윈 몸으로 잠까지 부족했다간, 오늘 일정을 절반도 소화하지 못하고 녹초가 될 테니까. 그토록 기대했던 날이 엉망이 되는 건 막아야하는 일이었다.

지금껏 기다린 시간과 비교하면 찰나에 지나지 않을 텐데, 버스 안에서 창밖을 내다보는 시간이 꽤나 길게 느껴졌다. 시간은 상대적이라는 표현이 이보다 직접적으로 와닿는 때는 없는 법이다. 알람이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한 손으로 부여잡고, 혜민의 머리는 제 언니에 대한 생각으로 분주했다.

버스에서 내려, 복잡한 골목길을 어플도 키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순간까지 핸드폰은 울리지 않았다.

띡띡띡띡, 철컥.

"언니!"

쏴아아아­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대답을 대신했다.

현관과 부엌이 이어져있는 구조의 원룸이다. 부엌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화장실 앞으로, 마치 허물을 벗은듯 대충 널부러진 옷가지가 언니를 대신해 혜민은 반겼다. 화장실 문 너머로 들리는 물소리가 마치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문자를 받지 않은 건, 씻고 있었기 때문이었나.

조용히 안으로 들어선 혜민이 떨어진 옷가지를 주워들었다. 고무줄 반바지와 목이 늘어난 반팔 티셔츠. 속옷도 없었다.

또, 불편하다고 이런 옷을... 저번에 혜민이 가득 싸 들고 온 옷가지에는 분명 그녀가 엄선한 잠옷들도 많았는데. 그 귀여운 옷들을 어디에 내팽개치고 이런 옷만 입는 건지.

스윽­

정리한 옷을 세탁 바구니에 넣어둔 혜민이 언니의 침대를 쓸어내렸다. 두더지가 굴을 파고 나온 것처럼 둥글게 말려있는 이불의 안쪽이다. 혜진이 몸을 뉘었던 잠자리는 아직 온기가 남아 따뜻했다. 침대의 주인이 방금 일어난 모양이다. 그래도 밤을 꼴딱 새우지는 않았다는 생각에 초조함이 가라앉았다.

늦은 밤까지 이어지는 오늘의 일정을 수정할 필요는 없어보였다.

철컥­

"어느날~ 그대 있던, 빈자리를­ 어?"

"언니?"

샤워를 마치고 나온 혜진과 혜민의 눈이 마주쳤다.

목에 수건 하나를 걸치고, 화장실에서 걸어나온 혜민의 언니는 폭이 넓은 반바지만 입은 상태였다. 제 언니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회색의 추레한 반바지다. 이전에도 혜진이 입고 있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저게 그렇게 편하다나. 아무리 집이라지만 혜민이 용납할 수 없는 옷가지였다.

아마 혜민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눈이 마주친 상태로 잠시 멍하니 있더니, 혜진의 새하얀 얼굴에 분홍빛 홍조가 일어났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혜민은 기분이 좋았다. 제 언니의 못보던 표정을 하나 발견했다는 사실에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혜민의 올라간 입꼬리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혜진은 당황한듯 머뭇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머리는 또 대충 말리고 나온 모양이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매끄러운 흑발을 타고 물방울이 떨어졌다. 드러난 상반신의 피부가 조명을 받은 것처럼 새하얗게 빛났다.

"머리는 말리고 나와야지, 언니."

"어? 어. 그렇지."

"근데 그건 무슨 노래야? 언니 노래 잘한다."

쿨럭­

마른 기침이 대답을 대신했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씻느라 문자도 못 받았네."

"내가 아침 일찍 온다고 했잖아."

"이렇게 일찍 올 줄은 몰랐지..."

"언니 준비하는 거 도와주려고 그랬지."

"뭘 도와줘. 내가 애도 아니고."

"언니 또 대충 보이는 거 주워 입고 나가려고 했잖아."

"..."

위이잉­

따듯한 바람이 혜진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혜민의 손과 함께였다. 방금 같은 모습을 보면 평소 머릿결 관리를 신경 쓰지도 않을 텐데, 혜진의 머리카락은 아직도 부드러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매끈한 감촉이 자신의 그것과 흡사한 것 같아서, 혜민은 괜히 머리를 두어 번 정도 흔들었다. 부드러운 머릿결이 뒷덜미를 간지럽히고 지나갔다.

화장품이 모여있는 탁자는 저번에 봤을 때와 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다. 혜민이 가져온 스킨도 그대로였다. 먼지가 쌓이지는 않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일까. 몇 번의 잔소리를 들은 이후로는 청소라도 말끔히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지런히 진열된 모양새가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혜민은 제 언니가 자취를 시작한 이후로 제대로 화장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집 안에서 두문불출하던 시절에도 화장한 혜진을 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지금 정도는 아니었다.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건지.

그녀는 아직도 혜진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혜민아? 바람이 뜨거워."

"아, 미안...

언니, 내가 화장해줄까?"

"어?"

다 마른 머리카락이 혜민의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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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탁, 탁.

발을 내딛을 때마다 올려묶은 머리카락이 찰랑이며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성가시다.

반복되는 감각에는 익숙해지기 마련이라고, 머리를 묶는 순간 두피를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은 이제 거의 사라지고 없었는데. 이 간지러운 감각은 의식 밖으로 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빗자루 따위로 뒷덜미를 문대고 있는 것 같은 낯선 감각이다.

머리카락에 가려져있던 뒷목이 모두 드러나 시원하기는 했으나, 다리를 움직이는 지금은 불편함이 더 크게 다가왔다. 여자들은 왜 머리를 묶고 다니는 걸까. 혜민이의 호들갑만 아니었어도... 진작 머리를 짧게 잘라내는 거였는데.

불편함을 한 번 인식하고 나니, 자연스레 얼굴에도 손이 갔다. 피부에 닿는 묘한 끈적거림. 분칠을 최대한으로 막았는데도 이 정도라니. 놀랍기 짝이 없다. 얼굴만 허옇게 뜰 정도로 뭔가를 펴바른 여성들은 대체 어떤 무게를 감당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쳐바른 화장품을 무게로 환산해도 될 것 같다.

"저쪽... 아, 이 건물이다. 이제 금방이야, 언니."

"응."

앞서 걷는 혜민이는 핸드폰을 보면서도 걸음에 망설임이 없었다.

간혹 지나가는 행인과 어깨를 맞부딪칠 거 같으면 손을 잡아당기는 건 나의 몫이었다. 이게 오늘을 위해 꼼꼼히 스케줄을 만들어낸 동생을 위해 내가 해야 하는 일이겠지. 혜민이가 안내한 식당은 그만큼 훌륭한 곳이었다.

고등학생한테 데이트의 주도권을 쥐어준 느낌이라는 건, 아무나 체험할 수 없는 경험이다. 먼저 카드를 꺼내는 동생을 만류하는 것도.

탁, 탁.

여동생과 손을 잡고 길을 걷다보면, 길거리의 온갖 시선을 전부 끌어들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고 만다. 타인의 시선이 전부 자신을 향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건 전형적인 사춘기의 특성이었지. 그렇다면 나는 지금 때아닌 사춘기에 휘말려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왜 이쪽도, 저쪽도 전부 우리를 쳐다보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이건 일종의 정신병인가. 뭐든 정도를 넘어서면 병이 된다고, 나도 모르는 새 자의식과잉이 지나치게 커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면 방송의 영향이라던가. 시청자들의 시선에 익숙해지다보니, 현실 세계에서도 모두가 내게 주목을 하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착각에 빠져버린지도.

지금도 그랬다.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던 젊은 남성이, 앞서 걸어가는 혜민이를 보고는 시선을 멈췄다. 어쩌면 나와 함께 걷는 혜민이가 자연스레 시선을 불러 모을 만큼 예쁜 걸지도 모른다. 확실히 한껏 꾸미고 나온 혜민이가 그만큼 예쁘기는 했으나­ 아직 고등학생이지 않나.

고등학생이라는 타이틀을 어디 붙여놔야 하는게 아닐까. 기왕이면 교복을 입고... 아니, 그럼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

"혜민이 너, 치마가 너무 짧은 감이 있어."

"...언니?"

결국 꼰대스러운 말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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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읍­ 후.

"긴장돼?"

"...모르겠어요. 떨리지는 않는데, 이상하게 가슴이 뛴다고 해야 되나."

"얌마, 그게 떨리는 거지 뭐야? 신인이 긴장하는 것만큼 당연한 게 어딨냐."

"쌩판 신인은 아니라고요. 2부도 뛰었는데."

"NPL 첫 경기면 그냥 다 신인이라 하는 거야."

개막전을 준비하는 대기실이었다. 경기가 있는 팀을 위해 마련된 공간에서, 무상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지도 않고 쉼호흡을 반복했다. 누가봐도 긴장한 티가 역력한 모습이다.

평소 능청스러운 모습과는 달랐다. 경기가 곧 시작되기 때문일까. 점심 시간만 해도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던 무상은, 이제서야 대회의 압박감을 실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늘 첫 1부 리그의 데뷔전을 치르는 신인을 달래주기 위한 건지, 어느샌가 주변에 팀원들이 모여들었다. 하나 둘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농담을 내뱉기 시작했다. 장난으로 긴장을 풀어보려는 의도였다.

평소같으면 조롱기 가득 섞인 형들의 농담에 발끈하고 일어설 법 한데도,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앉은 무상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경기 시작도 전에 벌써부터 그러고 있네. 팬들이 볼 맛이 나겠냐? 오늘 잘해야 될 거 아니야. 따로 여자까지 불렀는데."

무상의 몸이 움찔거렸다.

"여자? 여자 누구. 얘 여친 없잖아."

"아, 준현이는 그때 없었구나. 얘 초대권 여자한테 줬거든. 우리 연습한 빌드도 그 사람이 만든 거야. 그 저스틴에서 방송하는­"

"아익! 그런 식으로 말하면 어쩌자는 거예요! 무슨, 무슨 여자를 불러!"

"이야, 맞는 말하니까 발끈하는 거 봐라. 이거 직빵이네. 잘 보여야 되는 거 맞잖아, 임마."

"아, 그런 거 신경 안 쓴다고요!"

극적인 반응이었다.

GB 게이밍의 팀원들은 막내가 정신을 차린 것보다는 찰진 타격감을 보여준다는 점이 더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선수들이 모인 대기실이 무상을 놀리는 분위기로 달아올랐다.

당이 부족하다고 중얼거리며, 테이블에 쌓이듯 올려진 사탕 하나를 꺼내든 진수가 뒤늦게 대화에 참여했다.

"야, 근데 오는 건 맞아? 그 사람 얼굴 공개도 안 했다며. 그럼 카메라 잡히는 것도 민감하지 않나?"

"...올 거예요. 응원한다고도 했는데."

자신이 없게 중얼거리는 모습이, 간절한 속마음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는 지라.

GB 게이밍의 대기실은, 한동안 무상을 놀리는 팀원들의 목소리로 시끌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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