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화 〉 137 직계일 수도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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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심부에 위치한 e스포츠 경기장은 내 생각보다 훨씬 컸다.
역 근처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랬다. 고층으로 빌딩 숲을 이루는 주변 건물들 사이에서, 홀로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건물은 인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형태는... 코끼리를 집어삼킨 보아뱀이 떠오르는데. 사각은 아니었으나 돔구장이라 말할 정도도 아닌 미묘한 곡선이 참 혁신적이다 싶었다. 이게 현대 건축인가. 효율이나 기능성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것이 딱 내 취향이었다.
혜민이와 손을 잡고 역에서 나와, 가로수가 인상적인 길을 조금만 걸으면 금방 그 묘한 형태의 건물과 마주할 수 있다. 마치 수문장처럼 입구를 장식하는 동상들 덕분에 길을 헷갈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나열된 동상들은 전부 게임 속 캐릭터 같았는데, 그중 내가 알아본 건 나이트폴의 타이틀 캐릭터 뿐이었다. 평균보다 조금 기다란 아밍소드를 하늘을 향해 높이 들어올리고 있는 기사.
동상 옆에서 사진을 찍고 가자는 혜민이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해서, 나는 동상 가까이에 서서 동상의 질감이며 색감 따위의 디테일한 요소들을 전부 확인할 수 있었다.
손가락은 브이자를 그리느라 바빴다. 정말 바빴다. 나이트폴로 사진을 찍은 이후 다른 모든 동상에서 촬영을 이어나가야 했으니까. 셀카로 만족하지 못하고, 지나가던 사람을 붙잡아 사진을 찍어달라고... 나는 혜민이가 타인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거는 모습을 그때 처음 목격했다. 여고생에겐 사진을 찍어야한다는 유전정보가 새겨져있는 걸까.
촬영을 마치고 혜민이 보여준 결과물에서 내 얼굴은 하나같이 굳은 채였다. 얼굴은 정색을 하고는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그리는 모습이 참 기묘하기 짝이 없었다. 동생은 그걸 보며 불평을 토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사진을 찍을 때 표정을 관리하는 건 내가 세상에서 가장 못하는 일 중 하나였다. 인간에겐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는 것들이 한두 개쯤은 존재하는 법이다.
그 잠깐 사이 벌써부터 지긋지긋하게 느껴지는 동상들을 지나치면 드디어 건물의 출입구에 다다를 수 있었다.
입구에서 올려다본 경기장은 위압감부터 남달랐다. 실외에서 경기를 펼치는 스포츠의 거대한 운동장 정도는 아니었으나, 큰 규모의 극장에는 비교할 수 있겠다 싶었다. 세부적인 요소들만 뒤바꾸면 예술의 전당이라 말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내가 직관을 갔던 경기장은 이렇게 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런 순간에 새삼스레 나이트폴 e스포츠의 규모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건물 내부는 깔끔했다. 신축 건물이라는 티를 짱짱하게 내보이는 유리벽부터, 별다른 조형물도 없이 탁 트인 공간이 실내임에도 개방감을 선사했다.
시선을 돌리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벽면에 마치 영화관의 포스터처럼 커다란 나이트폴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NPL. 우습게도 그걸 보고난 이후에야 내가 뭘 보러왔는지가 실감이 가기 시작했다. 밖에만 나서면 묘하게 머리가 굳는 것 같은 이상한 몸이다.
혜민이는... 역시 표정 변화가 많지 않았다. 아까 사진을 찍을 때는 그보다 해맑을 수가 없을 것 같았는데. 하기야 이런 걸 봤다고 감격했으면 그게 더 이상했겠지.
"시간이 좀 남았네. 조금 둘러볼까?"
"응. 경기장 밖에도 볼 거 많다고 했어."
누가. 블로그 리뷰나 SNS 발 정보일까? 나도 아무런 사전조사 없이 직관에 나선 건 아니었으나, 디테일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난 거창한 여행 계획을 세울 때에도 큼지막한 목적지를 제외한 세부 사항은 항상 공란으로 남겨두는 스타일이었다. 큰 계획 사이의 공백은 현장에서 알아서 채우는 것이다. 물론, 그런 생각 때문에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기는 일도 없지는 않았으나... 아무튼 그것조차 여행의 묘미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으니까.
경기 시작 전의 공백 시간을, 내가 계획할 일은 없었다는 뜻이다.
건물 내부에는 경기와 관련된 이벤트 부스를 제외해도 다양한 편의 시설들이 존재했다. 편의점이나 카페는 물론이고 가벼운 식사가 가능한 프렌차이즈 음식점까지. 굳이 번거롭게 맛집을 알아볼 필요는 없었던 모양이다. 물론 이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나도 눈치라는 건 있는 사람이니까.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보면 심상치 않은 복장의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걸 볼 수 있었는데... 개막전을 맞이해 나이트폴 코스프레를 하고 대회에 방문한 사람들이었다.
처음엔 뚜렷한 스토리 라인도 없는 게임에 무슨 코스프레인가 싶었는데, 대충 중세와 관련된 옷을 입으면 전부 나이트폴 코스프레로 인정해주는 관습 같은 게 있는 것 같았다. 너덜너덜한 경갑부터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중갑 기사까지 그 종류가 다양했다. 일반인과 전문가의 차이일까. 진짜 철을 사용하는 건 아닐텐데 대체 무슨 소재로 만든 건지. 촬영을 요청하는 사람도 꽤나 많아보였다.
인파가 서서히 몰려올 때는 솔직히, 이쪽에도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을 줄 알았다. 카페에서 받아든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들고 경기장 쪽으로 걸어가다 느낀 시선들 때문이다. 종종 이쪽을 바라보는 사람들 중에 혜민이의 나이도 모르고 번호를 따려는 마음을 가진 인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런 사람이 없는 걸 보면, 나도 모르는 새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의 번호를 묻는 행위가 촌스러운 일이 되어버린 모양이다. 아니면 내 존재가 괜찮은 방파제로 작용했거나.
안 그래도 까탈스러운 인상인데 지금은 잔뜩 구겨진 미간이 자꾸 의식되는 순간이다. 혜민이 손가락을 뻗어 미간을 꾹 눌러도, 마치 늘어난 고무줄이 본래 길이로 돌아가는 것처럼 내 미간은 다시 구겨지기 일수였다.
점점 모여드는 인파가 무의식에서부터 불쾌하게 느껴졌던 걸까.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 얼굴에는 자신의 감정이 묻어나오는 법 아닌가. 불쾌하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는데 내 감정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표정 관리도 무던한 노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아무튼, 타인이 접근하지 않는다는 건 이유가 무엇이든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혜민과 나는 커피 한 잔씩을 손에 쥐고 경기장으로 향했다.
이제, 경기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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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에 건축이 완료된 e스포츠센터는 건물의 독특한 외형만큼이나 실내 경기장으로도 많은 주목을 받았다.
천 명이 넘는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관객석의 규모는 둘째치고, 선수들이 경기를 펼치는 공간을 둘러싸듯 만들어진 경기장의 구조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중심을 두고 원형으로 위치한 관객석은 바깥으로 갈수록 점차 층이 높아져서, 구조만 보면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관객들은 선수들이 입장하는 모습부터, 키보드와 마우스를 쥐고 경기를 펼치는 모습까지 생생히 바라볼 수 있었다.
모든 좌석에서 경기를 제대로 관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경기장 중앙에는 4개의 와이드 스크린이 거대한 기둥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직관을 다녀온 후기들이 전부 호평 일색이라, 이 경기장에서 시즌을 시작하고 끝마친 저번 NPL은 매 경기 표를 구하는 것부터가 어려운 일이었다. 매번 매표 시작과 동시에 표가 매진된 탓이다.
우승권 팀이 맞붙는 빅매치라도 있는 날이면, 뒷거래로 오가는 표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일이 커뮤니티 등지에서 실시간으로 중계되고는 했다.
그만큼 e스포츠에서 NPL이 가지는 위상이 크기 때문이리라.
당연히, 몇 달의 휴식기를 마치고 새 시즌을 시작하는 개막전에 쏠리는 관심사도 클 수밖에 없었으니.
큰 경기가 있을 때만 프로 리그를 중계하는 칼고가 리그 중계 방송을 시작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많은 변경점이 있는 시즌입니다. 저번주에 시즌을 시작한 해외 리그에서도 기존에 보지 못했던 다양한 빌드와 전략들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니 만큼, 오늘 있을 개막전에서도 선수들이 어떤 준비를 하고 나왔을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네요."
"네, 맞습니다. 우선 변경점에 대해 가볍게 설명드리자면"》
<ㅇㅇ님이 1,000원="" 후원!=""/>
승부예측 ㄱㄱ
"아, 천 원 후원 감사합니다. 금방 켜드릴게요. 개막전이니까 선수 소개도 제대로 보고 가죠."
[gb올인ㄱㄱㄱㄱㄱ]
[진짜 큰거온다]
[칼고님은 어디 응원하시나용?]
[칼고는 매번 중립을 가장한 강팀충임ㅇㅇ]
[해설진 의상에 힘빡줬네ㅋㅋㅋㅋ 머리 왁스칠한거보소]
[오늘 무상나오나?]
[노르드 이년은 대체 뭐하나요 칼고님]
[성지맵 바로 대회 포함이야? 개판나겄네]
칼고는 분주히 눈을 움직였다.
프로 리그 중계는 꽤 오랜만이었다. 방송을 시작하기 전, 기존에 저장해둔 방송 설정에 이상이 없는지 수 차례 확인했음에도 여전히 신경쓰이는 것들이 적지 않았다.
NPL은 나이트폴 개발사에서 공식적으로 지원하는 프로 리그였다. 스트리머들에게 중계를 허용하는 대신, 중계 방송을 송출할 때 지켜야하는 규칙들이 존재했다. 스폰서의 배너를 가리면 안된다는 식의 작은 규칙들이다.
하나씩 보면 사소한 것들인데 그게 모두 모이면 세팅에도 영향을 주는지라 여러번 체크할 필요가 있었다. 칼고는 자신의 송출 화면을 재차 바라봤다.
규칙에 어긋나는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자신의 캠과 채팅창의 위치까지 모두 확인했을 무렵에는 이미 양팀 선수들이 경기장에 입장한 뒤였다. 방송 설정을 만지며 해설진들의 말을 흘려듣던 칼고가 그제야 중계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GB 게이밍과 레진 블랙의 경기였다.
중위권 전력으로 평가받는 레진은 제쳐두고서라도, GB가 경기를 펼친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개막전에 향하는 관심은 보장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아무튼 항상 우승권 전력이라 평가받는 프로팀이었으니까. 카메라가 비추는 곳마다 GB를 응원하는 치어풀이 가득한 것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레진을 응원하는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이래서야 기울어진 저울이다. 칼고가 시작한 승부 예측 투표에서도 압도적인 차이로 GB의 승리를 예측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나마 있는 소수의 사람들도 대부분은 큰 배당을 노린 역배충에 불과하겠지.
그가 딱히 언더독을 응원하는 성격이 아니었음에도, 이 결과를 보면 괜히 레진을 응원하고 싶어질 정도였다.
《"지금 보이는 것처럼, 복잡한 도심지를 뚫고 먼저 대성당에 도달해 점령에 성공하는 측이 승리하는 구조의 맵입니다. 좁은 지형이 많은 만큼 기존에 사용되지 않은 다양한 빌드들이 나올 수 있는 맵이기도 하죠. 선수들의 선택이 궁금합니다!"》
글쎄, 대부분의 시청자는 GB가 얼마나 압도적으로 승리할지를 더 궁금해하는 것 같은데.
내심 시큰둥한 생각들이 떠오르는 건, 일방적인 응원 양상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일까.
해설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선수들의 빌드창이 출력되기 시작했다. 나이트폴 인게임의 그 복잡한 빌드맵이 아니라, 가시성을 위해 핵심적인 특성만 표시하게끔 만든 깔끔한 형태의 레이아웃이다.
시가전을 의식했는지 양팀 모두 비교적 가볍고 조작이 편한 무기를 선택한 게 인상적이었다. 빌드들을 훑어봐도, 기동성을 살리기 위한...
붉은 눈을 빛내는, 성난 얼굴을 표현한 아이콘.
저건 분명 버서크인데.
《"어... 무상 선수의 빌드가 굉장히 독특한데요. 우선 장비부터가 그렇습니다. 방어구가 굉장히 빈약한 세팅이에요. 전체적으로 중량을 최소한으로 제한한 모습이 눈에 띕니다. 이건 어떤 특성을 위한 선택일까요? 빌드맵을 자세히 살펴봐야"》
[저게 뭔빌드임?;;]
[무상ㅋㅋㅋㅋㅋㅋㅋㅋ]
[노르드빌드인데???]
[장비세팅이 다른데]
[무친놈... 진짜 개무친놈...]
[광전사에 신의부름 섞는 미1친련이 누가 또있음?]
[저걸 대회에서 쓴다고?]
[선생님... 선생님의 가르침은 틀리지 않았읍니다..]
[쉬,,,불 노르드 방송켜!!!!]
[저거 저결에서 노르드한테 처맞더니 돌아버렸구만]
[개막전 레전드각떳다ㅋㅋㅋㅋㅋㅋ]
추측이 사실이라고 밝혀진 순간, 칼고의 머릿속으로 노르드와 나눴던 지난 채팅들이 스쳐가는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GB 게이밍을 계속 언급했던... 혜진의 지난 채팅들이.
아마도 저건, 노르드가 직접 전수한 빌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