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화 〉 138 진작에 말을 좀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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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아!
경기장 중앙의 거대한 스크린에서, 붉은 눈을 번뜩이는 무상이 방패를 든 레진 선수를 깔끔하게 베어넘겼다. 적절한 타이밍에 시점을 바꾼 옵저버가 그 모습을 정확히 포착했다. 빠르게 클로즈업되는 화면에서 검을 타고 떨어지는 핏방울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한층 더 볼륨을 키우는 해설진의 목소리와 더불어, 관중석 곳곳에서 함성이 터져나온다. 그 커다란 소리가 피부에 직접 와닿았다. 팔뚝에서부터 소름이 오른다.
과연. 직관은 느껴지는 현장감이 달랐다.
"아! 무상 선수의 첫 킬 데뷔전 첫 번째 킬 포인트입니다! 낮은 방어도를 바탕으로, 폭주가 발동되는 타이밍을 노려 완벽한 카운터를 성공시켰네요! 지금껏 유리한 구도로 전투를 이끌어가던 소우 선수가 한 방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걸 위한 빌드였을까요?"
환호성이 잦아들고 웅성거리는 소리만 배경음으로 남았다. 흥분한 해설 소리가 그 공백을 타고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여기가 오늘 경기의 하이라이트일까. 엘튜브 채널을 가득 채웠던 하이라이트 영상 중 하나가 될지도 모르는 장면이었다. 나는 여운이 남은 팔뚝을 왼손으로 쓸어내렸다.
스크린은 트리거를 발동시키는 과정에서 상처를 입은 무상을 비추는 중이었다. 특성의 여파로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이 생중계되기 시작했다. 해설진들은 그 모습을 보고 또 빌드에 대한 호들갑을 떨었다. 오, 하고 감탄사를 흘리는 관중들도 그렇고. 인상 하나는 제대로 남긴 셈이다.
성당에 도달하기 전, 일대일 교전에서 승리하고 곧 이어질 연전을 준비하는. 빌드를 만들 때부터 구상했던 그림이 프로 무대에서 완벽히 실현되고 있었다. 나는 그게 츠바이가 아니라는 점이 아쉬울 뿐이었다.
스윽, 하고 혜민이 내 오른손을 잡아왔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동생과 눈이 마주쳤다. 빌드를 공개한 시점부터 나를 바라보던 눈빛이 점점 더 노골적으로 바뀌는 기분이다.
그새 나이트폴이라는 게임에 익숙해졌는지, 아니면 내 방송을 그렇게 열심히 본 건지. 혜민은 무상의 빌드를 보고 그게 무슨 빌드인지 대번에 눈치챈 모양이다. 아마 방금 전 장면으로 확신을 얻었겠지. 난 이게 자랑할만한 일인지 긴가민가했다. 어깨를 으쓱하고 동생에게 뻗댈 일도 아닌 것 같은데.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찔러대는 탓에 더 버티기가 힘들었다.
"왜?"
얼굴을 마주하고 묻자, 혜민이는 내 팔을 당기더니 귓가로 입을 옮겼다.
"언니, 저거 언니가 만든 빌드맞지?"
...얘는 왜 속삭이는 거야. 귀 간지럽게.
"응. 티켓도 그래서 받은 거야."
혜민이는 내 대답을 듣고는 그제야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게 궁금했던 것 뿐일까. 진작 물어보면 됐을 문제를, 경기가 시작하고 한참 뒤에야 물어보는 저의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제 딴에는 스스로 추리라도 해보려던 건지. 아무튼 흐뭇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으니 다행이었다.
나도 다시 눈을 옮겼다.
무상에게 선물받은 티켓은 과연 일반적인 자리가 아니었다. 좌석 중에서도 중앙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위치한 명당이다. 스크린에서 조금만 고개를 내리면, 선수들이 앉아 게임을 플레이하는 모습을 육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투명한 벽으로 만들어진 부스는 당연히 GB 게이밍의 자리였다. 마우스를 잡은 선수들의 손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방음 처리가 확실하게 되어있다는 점이 조금 아쉬웠다. 다급히 오더하는 내용을 약간이나마 훔쳐듣고 싶었는데. 역동적으로 턱관절을 움직이는 선수가 보이는데도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나는 프로스러운 발성으로 게임 내용을 풀어내는 중계진보다 선수들의 말소리가 더 궁금했다. 넓은 성지 맵의 특성상 팀적인 시야로 움직이기가 쉽지 않은 상황일 터였다. 지금도 화면은 곳곳에서 발생하는 소규모 교전에 따라 이리저리 전환되는 중이었다.
흐르는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치열한 교전 하나를 모두 중계하고 나면, 미처 잡아주지 못한 다른 전투를 리플레이로 재현했다. 누가 누구를 죽였다는 킬로그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속도감 있는 게임에, 중계진의 말도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래,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다.
직관은 재밌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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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솔랭패왕이라고 무상 헐뜯던 헤이러들, 개막전부터 무상한테 난자당해버렸죠??
아무도 예상못한 신규 빌드가져와서 레진 그냥 개박살내버렸죠???
언제나 그렇듯 gb는 헤이러들에게 결과로 보여주죠? 이번시즌도 gb가 우승권으로 앞서나가죠? 개밥이라 비난하던 무지성 쥐까들 주둥이 붙잡고 아무말도 못하죠????
ㅇㅇ:이거 보니까 이제 진짜 리그 시작했나싶다... 그립지 않았다 씨발럼들아
ㅇㅇ:개밥새끼들 1세트 끝나자마자 바로 등판하노ㅋ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suomi67*:무상 빌드보고 놀라긴 했음ㅋ 신인이 저런 맛이 있어야지. 개막전 첫경기부터 저런 빌드 박아버리는 패기ㅋㅋㅋ
ㅇㅇ:패기는 ㅇㅈ인데 빌드는 솔직히 너무 불안했음ㅋ 중반에 뒤질 위기 빈스가 몇번이나 커버쳐서 살아난거지 거의 뒤질뻔함
다른 팀도 아니고 GB정도 되는 팀이 바로 채용해서 사용할 정도면 말 다했지ㅋㅋ
갤에서 양학 빌드라느니 방송용 빌드라더니 입 존나털던 새끼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네ㅋㅋㅋ 실상은 프로들이 개막전에서 사용할정도로 실전성있는 빌드였죠?
갤에서 지 랭크 퀸이니 킹이니 ㅇㅈㄹ하면서 빌드 깎아내릴 때부터 알아봤다. 이래서 모르면 가만히라도 있으라고 하는거지. 인방충 빌드라고 보지도 않고 욕하는 새끼들 다 뒤져라 그냥
ㅇㅇ:노르드팬임? 지금 아무도 노르드 욕 안하는데 혼자 예전 글 운운하면서 풀발기하고 있네ㅋㅋ
ㅇㅇ:뭘 아무도 안해ㅋㅋㅋㅋ 경기 직전만해도 무상 빌드보면서 비웃던 새끼들이 한트럭인데
냥냥코로*:노르드는 신이야
아메바13*:장비 중량 신경써서 수정하면 쓸만할거같다는 의견은 갤에서도 나왔었음. 특성들은 꽤 잘 맞물리는 빌드였으니까... 근데 솔랭에선 써먹기 힘든 빌드인건 맞아. 운영 난이도가 너무 높다. 1세트 무상도 거의 실수 없이 플레이한 거 같은데 너무 위태로웠음. 룩미만 유저가 잡으면 어떤 꼴 날지 안봐도 뻔함.
ㅇㅇ:아무리 어려워도 목적성이 명확하면 괜찮은 빌드지ㅋ 그래서 노르드보고 빌드 잘만들었다고한거임. 아무튼 어떤 식으로 플레이하는지는 본인이 잘 보여줬으니까. 오늘 같은 그림 나오면 다른 팀들도 무조건 연구해볼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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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중앙에 깃발이 올라갑니다! 레진은 더이상 막아낼 힘이 없는 것 같은데요! 네,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주면서, 1세트는 GB 게이밍이 가져갑니다!"》
[노르드 1승ㄷㄷㄷㄷ]
[무상 데뷔전 임팩트 지리네ㅋㅋㅋㅋㅋ]
[역배야~ 잘먹을게~~~~]
[꺼억]
[올해도 우승후보인듯? 걍 개잘함]
[멤버바뀐게 무상밖에 없는데 당연하죠]
[칼고님 표정이 왜그래욬ㅋㅋㅋㅋ]
[딱봐도 레진 응원했구만 뭘]
"네, 포인트 정산 바로 해드릴게요."
칼고는 물로 입을 헹궜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커피가 평소보다 썼던 탓이다.
무상의 빌드를 본 이후로 레진을 응원하는 마음이 이전보다 훨씬 커진 상태였다. 그걸 겉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게 거슬렸다. 무상이 대치하는 장면을 볼 때는, 내심 옛날부터 고수하던 중립적 태도를 걷어차고 레진을 응원하고 싶을 정도였다. 무상이 저 빌드로 활약하는 장면은 보기 싫었던 것이다.
아무튼, 지금 혜진은 GB를 응원하고 있을 테니까.
채팅은 중계진의 멘트에 따라 이전 경기를 복기하는 중이었다. GB 게이밍의 승리는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였다. 관심사는 누가 승리를 했는지가 아니라, 경기 내용이 얼마나 압도적이었으며 어떤 선수가 활약했는지에 초점이 맞춰져있었다.
개중에서도 가장 많이 언급되는 건 데뷔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무상이었다. 파격적인 빌드와 함께였다. 빌드의 상세 정보를 띄워놓고, 빌드의 완성도에 대해 논하는 모습이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그걸 누가 만들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가 만들었다는 빌드를 들고 와서는 게임 내내 마법사만 쫓아다니던 인간이 아니던가. 그걸 떠올리면 프로 리그에서 지목될 정도의 빌드를 만들었다는 게 실감나지 않는 것이다.
공식 방송에서 닉네임만 언급되지 않을 뿐이다. 노르드의 방송 규모를 생각하면 이미 커뮤니티에선 빌드를 만든 사람이 그녀라는 걸 모두 알고 있는 상태일 것이다.
개막전의 효과로 모여든 많은 시청자 중에는 노르드를 찾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때 그녀가 대회 중계 방송을 켰으면 어땠을지. 잠깐 상상한 칼고의 머리가 아찔해졌다.
경기 분석을 마치고 잠시 갈 곳을 잃은 카메라는 관객석을 비추기 시작했다. 응원하는 팀을 위한 개성적인 치어풀이 경기 사이의 하프타임을 채워 넣었다. 손그림으로 선수들을 그려넣은 팬아트부터, 미리 준비한 합성 사진까지 그 종류가 다양했다.
카메라에 포착된 사람들의 반응도 그랬다. 경기장의 대형 스크린을 자신의 얼굴로 가득 채우는 게 부담스러운지, 한 여성은 렌즈가 자신을 향하자 기겁을 하며 얼굴을 가렸다. 커플이었을까. 그 옆에 앉은 남성이 황급히 치어풀 카드를 들어올려 여성의 얼굴을 대신 막는다. 커플에 비우호적인 시청자들이 욕설 섞인 채팅으로 채팅창을 밀어붙였다.
관객석을 훑는 것처럼 이동하던 카메라가 돌연 움직임을 멈췄다. 경기장과 가까운 좌석의 맨 앞줄이다. 두 명의 여성이 화면에 잡혔다. 한 쪽은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다른 쪽은 핸드폰에 집중하고 있었다.
함께 방문했는지 가까이 밀착한 모습이다. 자세히 보면 우측에 앉은 여성의 손이 왼쪽 여성의 손을 붙잡고 있는 상태였다. 그걸 신경쓰지도 않는 걸까. 좌측에 앉은 여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커피를 들어올렸다. 아직 스크린을 확인하지 못했는지, 커피를 홀짝거리는 태도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하얀 피부와 윤기나는 검은색 머리카락, 날렵하게 뻗은 눈매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가만히 모니터를 쳐다보던 성현의 머리가 사고를 멈췄다.
오른쪽에 앉은 여성의 얼굴에는 앳된 모습이 남아있었다. 옅은 화장기 때문일까. 날카로운 눈매도 앳된 인상을 모두 가려주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몸이 호흡을 따라 조금씩 흔들릴 때마다 어깨 높이에서 정리한 단발이 부드럽게 찰랑거렸다.
단정한 베이지색 블라우스가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오른손에 든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놓지 않고, 가끔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작에서 의뭉스러움이 묻어나왔다.
손을 붙잡힌 여성은 차가운 인상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중인지, 낮게 깔린 눈은 좀처럼 정면을 바라보지 않았다. 올려묶은 머리카락 때문에 하얀 목덜미가 훤히 드러났다. 경기 종료와 동시에 켜진 밝은 조명빛이 목덜미를 타고 내려와 선명한 윤곽을 그려넣었다.
옅은 보라빛 셔츠는 소매를 반쯤 걷어올린 상태였다. 커피를 잡은 손부터 팔로 이어지는 하얀 선이 매끄러웠다.
자매일까. 두 여성이 풍기는 분위기가 묘하게 흡사했다.
정적이 흐른다고, 성현은 생각했다. 늘 소란스럽고 활기가 가득찬 경기장의 모습을 보면서 떠올릴 생각이 아니었음에도 그랬다. 그는 채팅창을 확인할 생각도 못하고 모니터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빌드 따위가 나온 것을 확인했을 때보다, 더 현실감을 느끼기 어려운 것이다. 왜 지금 화면에 저 사람이 나오고 있는지... 다른 생각은 떠올리기 힘들었다.
이윽고 반쯤 감겨있던 혜진의 눈이 스크린을 향해 올라갔다.
눈을 깜빡이기를, 몇 번일까.
상황파악이 느린 건지. 여성, 혜진은 자신의 얼굴로 가득찬 스크린을 보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른 관객들이 그랬던 것처럼 황급히 얼굴을 가리지도, 카메라와 마주보며 미소 짓지도 않았다. 얼굴 표정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커피를 몇 번 더 홀짝이더니, 왼손으로 쥐고 있던 커피를 홀더에 집어넣었다. 그러더니 왼손을 들어올려 손가락을 펼쳐 브이 자를 만들었다. 사진을 찍을 때나 취하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모양이었다. 어느새 카메라를 찾았는지 시선은 렌즈 정 가운데를 바라보고 있는 채였다. 여전히 무표정인 얼굴이 기묘하기 짝이 없었다.
제정신이 아니구나.
성현은 표정관리도 잊어버리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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