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화 〉 139 줄을 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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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게임도 일방적이었다.
중반부터 킬 스코어가 월등히 벌어지는, 압도적인 게임. 개인기량에 그토록 큰 차이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 작은 요소들 하나하나가 모여 저런 격차를 만들어냈겠지.
고성으로 뒤바뀐 전장에서, 유기적으로 진형을 바꾸며 성을 압박하는 GB 게이밍의 경기력은 확실히 수준이 높았다. 별것도 아닌 연계 동작에서 여유가 묻어나오는 것 같았다.
스크린에서 피가 튈 때마다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대부분 GB 쪽의 득점이다. 무상에게 받은 티켓이 GB 게이밍 측 좌석이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지금 경기장에 모여든 관중들 대부분이 GB를 응원하는 팬이어서 그런 건지. 커다란 경기장 좌석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전부 한쪽의 승리를 응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나도 그랬다. 티켓을 선물받은 처지에 다른 팀을 응원할 정도로 염치가 없지는 않았으니까. 그래도, 이토록 일방적인 구도를 보면 없던 동정심도 고개를 치켜드는 것이다. 나 하나라도 약팀을 응원하는게 어떻겠냐는... 그런 생각이.
승자와 패자가 나뉘는 경기에서 패자는 언제나 승자를 위한 조연이 되는 법이다. 마지막까지 분전을 펼치며 저항한다고 한들, 그건 승자를 더 돋보이기 위한 역할에 불과했다. 승부의 세계는 냉혹하다. 그 상투적 표현이 아직까지 유효한 까닭은 분명 그게 지금도 통용되는 말이기 때문이겠지.
개막전 경기에서, GB는 완벽한 주인공의 롤을 수행하고 있었다. 괜히 내 안의 청개구리 심보가 솟을 정도로.
성벽을 넘어서자 게임의 구도는 완전히 넘어갔다. 데카라고 했나. 양손검을 사용하는 GB의 플레이어가 저항하는 레진 선수들을 잇달아 베어내며 본성을 향한 길을 열었다. 그 압도적인 광경에 다시 한 번 함성이 울려퍼진다. 승자를 위한 개선가였다.
모두가 승자를 확신한 경기장에서, 중계진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부스 안에서 선수들이 헤드셋을 벗어던졌다. 승리의 기쁨이 묻어나오는 얼굴들. 벽에 막혀 들리지 않을 환호가 왠지 모르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래. 압도적인 전력차가 어떻든, 승리는 언제나 기쁠 테니까.
"이겨서 다행이네, 언니."
다행... 인가?
게임이 끝나고 분석 데스크의 경기 분석이 이어지는 와중이다. 경기가 진행되는 내내 손을 만지작거리던 혜민이 입을 열었다.
나이트폴 입문자인 동생은 GB 게이밍의 승리가 확정되었을 때도 그리 기뻐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게임 내용에 흥미가 없다기 보다는, 누가 이기든 상관 없다는 느낌이 강했다. 아마 특정 팀의 팬이 될만큼 NPL을 챙겨보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그런데 저런 말을 하는 걸 보면, 내가 GB 게이밍의 팬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누가 이겨도 상관 없었는데."
"무슨 소리야. 저 팀이 언니 빌드도 썼잖아. 그럼 무조건 이겨야지. 그래야 언니 방송도 잘 될 거 아니야."
말을 하면서 내 얼굴을 쳐다보는 눈빛이 단호하기 짝이 없었다. 프로 리그의 영향력인가. 정작 방송을 하는 당사자인 나는 신경쓰지 않았는데도, 혜민이는 그걸 중요하게 생각한 모양이다.
요즘 보면 나보다도 내 방송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구독자라는 것도 거짓말이 아니겠지. 매일 보내오는 문자 내용에 방송에 대한 코멘트가 포함된 것 하며... 내 민낯을 아는 사람이 그렇게 열심히 방송을 지켜보고 있다는 건 참 불편한 일이었다. 아이디를 알아내면 밴이라도 할 텐데. 아이피 밴을 때려두면 쉽게 생방을 보지는 못하지 않을까.
"그리고 주호가 사인도 받아달라고 했거든. 졌으면 그것도 힘들었지."
"...주호가?"
"응. 데카 선수 사인 받아달라고. 경기 끝나고 가볍게 팬미팅 한다고 했으니까, 그때 받으면 될 거야."
무슨 팬미팅까지.
선수들 앞에 줄을 서서 사인 받을 걸 생각하면 구겨지는 얼굴을 막을 수 없었다. 줄 서는 행위는 내가 꼽는 최악의 기다림이었다. 시간을 낭비하는 최악의 방법이 아닌가.
내 경험상 기다림으로 쌓이는 불만과 짜증을 단번에 해소시킬만큼 가치가 있는 대상은 거의 없었다. 놀이공원을 혐오하는 것도 줄 때문이었는데.
그래도, 경기장에 오지도 못한 주호를 생각하면... 빌어먹을.
"언니? 가지 말까? 너무 불편하면 그냥 안 가도 돼. 바로 저녁 먹으러 가도"
"아냐. 주호 부탁인데 들어줘야지."
언제나 그렇듯, 세상엔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존재하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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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전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단단한 경기력에 놀라셨을 것 같아요. 팬분들이 기대하셨던 것만큼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첫 경기인데 긴장되는 건 없으셨나요?"
"물론 긴장됐죠. 그런데"》
인터뷰 따위를 듣고 있을 정신이 아니었다.
성현의 시선이 모니터가 아닌 핸드폰을 향한지도 오래였다. 시청자들이 갑자기 꺼져버린 캠 화면에 대해 의문을 표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의 방송은 집중을 한다는 이유로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였다.
그보다는, 머리를 가득 채운 의문을 해소하는 게 먼저였다.
성현의 손이 핸드폰 화면을 이리저리 왕복했다. 답장이 오지 않는 탓이다. 경기를 보기 위해 알람을 꺼둔 것일까. 아니, 따지고 보면 혜진은 평소에도 문자를 늦게 확인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외출을 한 상태라면 평소보다 더 늦게 확인할 가능성이 높겠지. 어쩌면, 한참 뒤에나 답장이 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혜진의 답장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메세지가 올라왔음을 알리는 알림은 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메세지가 올라온 건 플랫폼 대전을 위해 개설했던, 스트리머들의 채널이다. 대회가 끝난 이후에도 유지되던 곳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사용빈도가 현저히 낮아졌다. 대화가 필요한 경우 대부분 개인 메세지로 해결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랬던 채널이 지금은 신규 메세지가 미친듯이 올라오는 중이었다. 대회가 한창 진행되던 때에도 채널이 이 정도로 활성화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방송을 하고 있는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대화에 참가한 채널은 놀랄 만큼 북적거렸다.
역시, 리그를 보고 놀란 건 성현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다. 채널 활성화의 포문은 스벅이 열었는데, 아무런 설명도 없이 카메라에 잡힌 혜진의 얼굴을 캡처하여 올린 게 전부였다. 그 사진 한 장에 경기를 보고 있지 않던 사람들도 단번에 대화에 참여했다. 그런 대화에 잘 섞이지 않는 성현조차 채널을 확인했을 정도였으니, 다른 스트리머들의 반응이야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채널이 시끄러운 와중에도 당사자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빌드에 대해서 궁금하신 분들이 많을 거 같아요. 첫 경기에서 보여주신 빌드가 그만큼 놀라웠습니다. 새롭게 추가된 특성과 기존 광전사 빌드를 혼합한 느낌의 빌드였죠. 이걸 어떻게 준비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아, 사실 이 빌드 제가 만든 게 아니구요. 노르드라는 다른 플레이어의 빌드에요. 그분이 인터넷 방송 플랫폼에서 방송을 하시는 분인데"》
다른 생각을 하는 중에도 노르드라는 닉네임은 귀에 박혀들었다.
성현은 고개를 들어올렸다. 마이크를 받아든 무상이 천천히 말을 이어간다. 긴장했는지 조금씩 말을 더듬기는 했으나, 첫 인터뷰라는 걸 감안하면 꽤나 안정적인 모습이었다.
좋은 플레이를 보여준 신인에게 우호적이던 채팅창이, '노르드'라는 키워드에 반응해 빠른 속도로 올라갔다.
[무상 오피셜떴다ㅋㅋㅋㅋㅋㅋㅋ]
[노르드빌드 맞았잖아 등신들아ㅋㅋㅋㅋ]
[이럴 때 방송안키고뭐해!!!!!]
[노르드게시판 도배하러 갑니다 ㅂ]
[노르드! 킹르드! 황르드! 갓르드!]
[갓르드 공식전 1승 적립ㄷㄷㄷ]
[당장 노르드빌드로 랭크 돌리러 간다]
[앞으로 마법사죽이기 비웃는새끼들 다 모가지 잘라버림 겜알못들ㅋㅋ]
[마죽은 에바지..]
[GB 게이밍 선수도 챙겨보는 킹갓방송]
[무상 저결에서 쳐맞더니 노르드 제자 되버렸넼ㅋㅋㅋㅋㅋ]
열기가 대단했다. 흔히 볼 수 있는 일이 아닌 탓이다. 프로 무대에서 새로운 빌드를 시도해 활약한 선수가, 승자 인터뷰에서 빌드를 만든 제작자를 언급하다니. 그것도 빌드를 만든 당사자가 제법 유명한 방송인이다.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노르드를 모르는 사람도, 어렴풋이 이름만 들어봤던 사람도. 모두 호기심을 품을 법했다. 여자라는 사실까지 알려지면 더 난리가 나겠지. NPL은 그 정도로 영향력이 큰 대회였다.
방송인들이 그토록 바라던 인지도의 확장이다. 분명, 친한 스트리머로서 이 상황을 축복해야 했으나...
성현의 손가락이 초조하게 책상 한쪽을 두드렸다. 카메라에 포착된 혜진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뻔뻔하게 손으로 브이까지 만들었던, 그 장면이다. 그때 채팅창의 반응이 어땠었나. 혜진이 화면을 채웠던 잠깐 사이, 대체 얼마나 많은 시청자가 격한 반응을 보이며 호기심을 표했던가.
아마 벌써 커뮤니티에선 그 장면을 캡처한 사진이 무수히 돌아다닐 게 분명했다.
...혜진은 이 문제에 대한 뒷감당을 생각이나 하고 있을지.
그럴리가 없다고, 성현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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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많았다.
웅성웅성대는 소리가 공간 전체를 감싸 안은 것 같았다. 꽤나 커다란 홀이 조잘거리는 소음으로 가득찼다. 작은 팬미팅이라고 말할 수 없는 규모였다. GB 게이밍이라는 팀이 인기가 많다는 사실을 이렇게 실감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끔찍한 방식의 증명이었다.
향수 냄새와 화장품 냄새가 뒤섞인 듯한 불쾌한 냄새가 은은하게 흘러들어왔다. 괜히 몸이 끈적거리는 느낌이다. 땀냄새보다는 낫다고 말해야 할까.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불쾌함이 스물스물 기어올랐다.
조용히 주변을 둘러봤다. 비교적 균형이 맞는 성비였다. 굳이 따지자면 여성의 비율이 조금 더 높은 편인가. 나이트폴 유저의 성비를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모습이었으나, 리그를 보는 시청자 모두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는 아닌 것이다.
남자들 중에는 직관 같은 건 귀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으니. 이 정도면 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균형잡힌 성비라고 봐도 무방했다.
갑자기 이 중 게임을 하고 있는 여성이 몇이나 될지가 궁금해졌다. 무슨 계기로 나이트폴 프로 리그에 관심을 갖게 됐는지. 이렇게나 사람이 많은데, 대규모 쟁을 통해 생존자 몇 명만 추리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럼 곧장 사인을 받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텐데.
"언니."
"응?"
혜민이 오른팔을 살며시 잡아끌었다. 마주하는 눈빛에 걱정이 맴돌았다. 내가 사람 가득한 곳을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는 동생이다. 표정을 보고 불편함을 눈치챈 모양이다. 팔을 뒤쪽으로 당기는 것이, 지금 당장 인파를 뚫고 빠져나갈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괜찮아. 앞줄이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되겠지."
"...응. 불편하면 그냥 가자. 사인은 안 받아도 되니까."
...저렇게 말하는데, 내가 징징거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진행은 지지부진했다. 선수들은 꽤나 빨리 입장했는데, 곧바로 사인을 진행하는 게 아니라 인터뷰 비스무리한 무언가를 하느라 바빴다. 선수 입장과 동시에 한층 볼륨을 더한 소음이 내 귓가를 찌르듯 압박했다. 저게 일반적인 팬들의 반응인가. 무슨 아이돌 팬미팅도 아니고... 선수들의 말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게 잘못이라 할 수도 없어서 더 골이 아팠다.
양떼 사이에 끼어든 개새끼가 된 기분이다.
정신을 못차리고 멍하니 천장만 쳐다봤다. 빈약한 몸뚱이는 벌써 체력이 바닥나 침대를 그리워하는 중이었다. 간혹 말을 걸어오는 혜민이와 대화를 나누고, 온갖 잡생각을 굴리면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드디어 줄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곧, 우리가 사인을 받을 차례였다.
지긋지긋하다는 심정으로, 무거운 발을 내딛기를 몇 번.
나는, 드디어 선수라는 인간의 얼굴을 마주했다.
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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