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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0화 〉 140 ­ 잘 모르겠고, 일단 한잔 (140/243)

〈 140화 〉 140 ­ 잘 모르겠고, 일단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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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은 티를 보이면 죽여버린다, 였나.

팬미팅 전 팀의 주장인 찬혁이 무상에게 박아넣은 말이었다. 사실 저것보단 조금 유한 말투이긴 했다. 조금이라도 문제를 일으키면 단단히 각오하라는 듯 빛내던 흉흉한 눈초리가 문제였지.

첫 승의 여운이 가시지 않는 상황에서 갑작스레 들어온 훈수였다. 무상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럴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도 애써 찾아와준 팬들을 무시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은 것이다.

그래도 찬혁이 저런 주의를 줬던 까닭을, 무상은 내심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 옆에 앉은 진수의 태도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팀의 둘째가는 베테랑은 지금 온몸을 흐느적거리며 전신으로 귀찮음을 표현하는 중이었다.

숙소에서도 하기 싫은 일은 곧 죽어도 하지 않는 인간이다. 아무리 그래도 팬미팅을 준비하는 순간에 저렇게 티를 낼 줄은 몰랐는데. 태도를 지적하며 점차 언성을 높이는 찬혁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런 태도가 팬을 대할 때에도 유지되지 않기를 바래야 할까.

프로 경력이 오래되면 저럴 수도 있는 건지. 오늘 첫 경기를 끝마친 무상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지금 오히려 가슴이 벅찼다. 데뷔전을 치르기도 전 자신이 누군지 찾아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팬들이 자신의 플레이를 보고 환호성을 지른다는 사실에. 경기가 끝나고 사인을 받기 위해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받는다는 건 훌륭한 일이었다. 팬미팅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면, 오늘 있었던 경기를 몇 번이고 다시 돌려볼 것이다. 경기에 집중하느라 실감하지 못했던 현장의 분위기나 채팅창의 반응 따위를 느긋하게 만끽하고 싶었다.

승리는 그 자체로도 짜릿했으나, 딸려오는 부산물들이 가치를 더하는 법이다. 그건 프로게이머를 시작한 순간부터 무상의 안에서 확립된 생각이었다.

그러니, 팬미팅도 만끽해야겠지.

"오늘 경기 너무 잘봤어요! 진짜 신인인 줄 몰랐다니까요."

"네, 고마워요."

목소리를 높이며 테이블로 몸을 기울인 여성팬이 활짝 미소지었다.

인터뷰라기보다 팬들과의 의사소통 시간에 가까웠던 질의 시간을 마치고, 방금 사인을 시작한 참이다.

가까이에서 팬의 얼굴을 마주하는 건 또 색다른 경험이었다. 압도적인 승리 이후의 만남이라 그런지, 마주한 팬들 모두가 긍정적인 감정을 내비쳤다. 감정은 같은 감정을 유도한다고 그랬나. 무상의 얼굴도 덩달아 밝아졌다.

팀원들의 말처럼, 팬미팅에 모여든 사람들 중에서는 여성 팬의 비중이 많은 것 같았다. 사인을 받기 위해 나열한 앞줄이 특히 그랬다. 경기가 끝난 직후 바로 줄을 서기 시작한 걸까. 종종 음료나 작은 간식거리를 건내주는 손길에 기분이 좋았다. 달콤한 향기가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악수를 위해 마주잡은 손이 부드럽다고 생각할 때쯤, 무상은 여성 팬에 대해 설명하던 진수의 음흉한 얼굴이 떠올라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진수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팀원들 중 자신의 여성 팬이 가장 많다며 자랑하던 그 덜떨어진 선배. 본받을만한 인간이 아니었다.

"다음 경기도 힘내세요! 파이팅!"

"감사합니다."

유난히 쾌활한 인상의 팬을 보내고 난 다음이다.

다음 사람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린 무상은, 천천히 다가서는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이전의 팬들과는 확연히 다른 인상이었다.

하얀 피부에 음영이 진 눈. 날카로운 눈매가 똑바로 무상의 얼굴을 향했다. 그와 눈이 마주치고도 웃음을 짓거나 표정을 펴지 않는다. 살짝 찡그린 미간 때문에 안 그래도 차가운 인상이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힘이 빠진듯 느긋한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손을 뻗는 몸동작에서조차 나른함이 묻어나왔다. 무상은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눈을 마주한 상태 그대로 묶여버린 것 같았다.

여성은 무상의 앞까지 도달하고는, 고개를 숙여 앉은 무상을 내려다봤다. 가까이에서 바라본 그녀의 얼굴은 이전보다 더 선명했다. 찌푸린 미간도 흠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색과 붉은 입술이 서로를 강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런 말을 내뱉지도 않고, 눈을 마주한 상태로 그를 쳐다본다.

정적이 숨막히게 다가왔다.

예쁜 사람이었다. 눈을 돌리기 힘들 정도로.

"무상님?"

그녀는 낮게 읊조리듯 말했다.

"아, 아. 네. 안... 안녕하세요."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소리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부끄러움에 귀가 달아오른다. 사람 얼굴에 한눈이 팔려 말을 더듬는 꼴이란.

당혹감과 부끄러움이 뒤섞인 무상의 머릿속은 지금 엉망이었다. 이런 사람이 사인을 받기 위해 찾아온 팬이라는 사실이 거짓말 같았다.

"경기 잘 봤어요."

목소리까지 좋다니. 이건 불공평하지 않나.

스윽­

여성은 별다른 말 없이 사인지를 내밀었다. 이것도 이전 팬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첫 경기에 대한 소감을 말하거나, 일방적으로 칭찬을 쏟아내거나, 앞으로 기대한다는 덕담을 건내거나... 선수와 팬 사이에 오갈만한 상투적인 대화도 없이 둘 사이엔 침묵이 내려앉았다.

사인을 위해 펜을 든 손이 조금씩 떨려오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익숙하지 않은 사인인데. 복잡한 머리는 여전히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종이를 보고 있는데도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분위기도 남달랐는데, 일반인이 아니라거나. 미성을 생각하면 혹시­

"빌드, 좋았어요."

여전히 작은 목소리다. 그런데도 무상의 귀에는 현장의 어떤 소리보다 선명히 들려왔다.

"아... 감사합니다."

"트리거 타이밍을 노린 카운터, 기억 나네요."

...뭐.

무상은 움직이던 손도 멈추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녀가 내뱉은 말이 그만큼 인상적이었던 탓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첫 번째 세트에서 가장 결정적이었던 장면. 여성이 말한 것처럼 폭주가 발동되는 시점을 노리고 카운터를 성공시킨 바로 그 장면이었다. 그걸 정확히 집어냈다는 사실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면 빌드를 언급하는 것도 특이했다. 대부분의 여성 팬들은, 경기에 대한 칭찬을 하더라도 빌드를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직접 나이트폴을 플레이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니까. 대부분 가장 직관적인 하이라이트 장면이나 킬 스코어를 가져와 이야기하는 것이다. 빌드 같은 게 아니라.

고개를 올려 바라본 여성은, 여전한 무표정으로 사인지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그래도 이전보다는 기분이 나아진 것 같았다. 잔뜩 찌푸리고 있던 미간을 피고는, 가느다란 손으로 셔츠 소매 밑쪽을 만지작거렸다.

하얀 손이 무상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저 손으로 나이트폴을 한다고. 또 한 번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 무상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처음부터 끝까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신비한 베일을 두른 것 같은.

"사인 끝났나요?"

"아, 네. 가져가셔도 돼요."

사인을 받는 팬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말투였다.

그녀는 그 섬세한 손을 뻗어 종이를 들어올렸다. 자리에 선 채로 사인을 바라보는 눈빛에 오히려 무상이 눈치를 봐야할 것 같았다. 주객이 전도된 기분이다. 사인을 받는 건 사실 자신이 아니었는지.

잠깐 사인을 쳐다보던 여성은 고맙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예상치 못한 예의바른 인사에 무상도 덩달아 고개를 내렸다.

언제 고개를 들어올리나 눈치를 보고 있을 무렵이다. 고개를 숙인 그녀가 무상 쪽으로 몸을 가까이 붙였다. 갑작스러운 접근에 무상은 마비라도 된 것처럼 바짝 몸을 굳혔다. 코끝으로 부드러운 라벤더 향이 맴돌았다.

그게 무상을 숨 막히게 했다.

"두 번째랑 세 번째, 그거 무상님 아니었죠."

"에... 예?"

"승리 축하해요. 다음엔 츠바이도 기대할게요."

고개를 번쩍 들어올린 무상이, 혜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그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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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수고했어."

"응? 뭘 수고해. 같이 기다렸는데."

"아냐. 나랑 주호 생각해서 기다려준 거잖아. 언니 혼자였으면 그냥 갔을 거 다 알아."

과연, 여동생의 감은 좋은 것이다.

사인회를 끝마치고 나온 다음이다. 선선한 바깥 공기를 들이마신 순간, 상쾌함이 몸 전체를 감싸 안았다. 머리에 내려앉았던 피로도 조금은 무게를 덜어낸 기분이다. 들끓었던 열이 식고 있었다.

가장 귀찮은 숙제를 끝낸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사인을 받는 게 그렇게 귀찮을 줄은 몰랐다. 정확히 말하면 사인을 받기 위해 줄을 서는 게. 혜민이의 말마따나, 주호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갔겠지. 그만큼 숨 막히는 순간이었다.

아무튼, 힘든 일은 힘들었던 만큼의 뿌듯함을 선사하는 법이다. 일을 끝마친 지금은 속이 시원했다. 주호도 이 정도면 직관을 가지 못한 서운함을 조금은 덜어내지 않을까.

무상의 벙찐 표정도 나름 재미있는 요소였다.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는 표정. 그래도 티켓을 건내줬으니 당연히 찾아올 줄 알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적당히 운을 띄웠는데 알아보지 못한 건 의문이었다.

경기장에 있던 시간이 꽤나 길었던 모양이다. 어느새 태양이 진 하늘은 서서히 밤을 준비하는 모양새였다.

일정을 준비했다던 혜민이는, 피로에 젖은 내 얼굴을 보며 망설이는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일정이길래. 벤치에 앉아 잠깐 쉬는 중에도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즉석에서 계획을 수정하기라도 하는 걸까.

난 조용히 벤치에 앉아 눈을 감았다. 앉아 있으려니 노곤한 졸음이 밀려오는 기분이다. 격한 운동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가냘픈 몸은 실외 활동을 오래 버티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집 밖을 나선 순간부터 게이지가 소모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오늘을 간절히 기다렸다던 동생의 계획을 모두 소화하고 싶다는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이 상태로 끌려다녀봤자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며 걷기만 할 게 분명했다.

집 침대에 눕고 싶었다. 아니면 PC방이라거나. 아니면 노래방, 아니면 술이라도 한 잔... 떠오르는 목록들이 전부 비루했다. 혜민이가 참 좋아하겠군.

...아. 이건 진짜 좋아할 수도 있지 않을까.

"혜민아, 오늘 언니 집에서 자고 갈래?"

"­어? 진짜로? 나야 좋지. 무조건 좋아."

고개를 숙였던 동생이 얼굴을 번쩍 들어올렸다.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나는 것이, 들떴다는 게 티가 났다.

이번이 처음인 것도 아닌데. 내가 먼저 제안을 했다는 사실이 제법 기뻤던 모양이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극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이게 본론도 아닌데 벌써부터 좋아하는 걸 보면, 일정 캔슬에 대한 불만을 풀어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응. 그럼 언니 집 가서 같이 술 한잔하자. 언니가 술 가르쳐줄게."

차분한 동생의 눈이 동그랗게 확장되는 것이, 꽤나 볼만하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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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고:야

칼고:야 (17:16)

칼고:야 뭐해

칼고:뭔 정신으로 직관을 가 ㅡㅡ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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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고:폰을 끄고 다니냐?

칼고:너 얼굴 커뮤니티에 캡처돼서 올라왔다고 (18:30)

칼고:신상이라도 파이면 어쩔거야 이거 (18:31)

칼고:전화도 안받네 이 인간이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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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d:???

Nord:뭔소리에요. 왜 플대채널도 난리났대 (19:27)

칼고:ㅅㅂ.. 저쪽 채널에 링크 있으니까 들어가봐요

칼고:너 직관가서 카메라 잡힌거 인기글 올라왔다고 (19:30)

Nord:???

Nord:그게 뭐라고 캡처를 하지;; (19:31)

칼고:생각이 없나 진짜 ㅡㅡ

칼고:님 게시판도 확인해봐요 혹시 어떻게 연관점 찾아서 신상찾았을수도 있으니까 (19:32)

Nord:아 (19:32)

Nord:일단 술마시러 갈게요. 뭐 죄 지은 것도 아닌데 ㅎ; (19:34)

칼고:????

칼고:진짜 미쳤나

칼고:야

칼고:야 (19:35)

칼고:ㅅㅂ진짜 갔네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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