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42화 〉 142 ­ 한 다리만 건너면 (142/243)

〈 142화 〉 142 ­ 한 다리만 건너면

* * *

술은 먹이지 말자. 되도록이면.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든 혜민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잡티 하나 없는 깨끗한 얼굴에선, 아직 성인이되지 않은 소녀의 앳됨 같은 것이 묻어나왔다. 이맘때의 혜진도 이런 얼굴을 하고 있었을지. 과거의 자신을 모른다는 것도 참 우스운 일이다.

난 조용히 혜민이의 몸 위로 이불을 당겨덮었다. 밤이 추워지기 시작하는 날이다.

얼마간 시간이 흘렀는데도 맥주캔은 서늘한 냉기를 품고 있었다. 잡아쥔 손으로 약간의 물기가 묻어나온다. 검은 라벨을 두른 흑맥주. 라거와 달리 탄산기가 없는 밍밍함이 마음에 들어서 애음하는 술이다. 반쯤 남아있는 맥주가 캔 속에서 출렁거렸다.

혜민이가 잠들기 전 먹다 남긴 맥주였다. 일반 맥주보다 훨씬 낫다나. 술 한 번 먹어보지 않은 순진한 동생의 취향은 백지장이었다. 그 위에 처음으로 붓질을 하는 사람이 나라는 사실이, 뭔가 묘한 감흥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 비뚤어진 감성을 성취감이라고 일컬어도 되는 걸까. 나는 잘 모르겠다.

한쪽 등이 수명을 다해 흐리멍텅한 천장 불을 바라봤을 때, 안 그래도 희미한 불빛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아롱거렸다.

취기가 도는구나. 여전히 가성비가 좋은 몸이다. 음식물을 조금만 집어넣어도 쉽게 포만감을 느끼듯이, 술을 살짝만 부어도 금방 취기가 올라오는.

혜민이 누워있는 침대 모퉁이로 몸을 기울인다. 뻐근한 허리춤에서부터 노곤한 피로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이럴 때 잠이 들어야 할 텐데. 한바탕 난리가 지나간 후의 정신은 왠지 모르게 또랑또랑했다.

책상에 올려놓고 방치한 핸드폰이 그제서야 눈에 들어온다.

진동마저 꺼둔 핸드폰은 참 조용해서 좋았다. 이렇게 보면 일반 사물과 다를 바가 없은 것이다. 편의점에서 술 보따리를 싸들고 기분 좋게 돌아와 핸드폰을 열었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은 내게 언제나 적용되는 진리와 같은 말이었다. 핸드폰은 가만히, 인터넷 서칭용으로 사용될 때 가장 빛난다. 적어도 나한테는 그랬다.

내키지 않았지만 핸드폰을 들어올린다. 밝게 빛나는 화면에서 신규 메세지를 알리는 목록이 기다랗게 몸을 펼쳤다. 성현, 주호, 주연, 쪼망, 스벅... 플랫폼 대전을 위해 만들었던 채널까지. 잔뜩 늘어선 알림을 훑고있자니 한숨이 나올 지경이다.

나는 맥주를 목으로 넘겼다. 차가움이 덜한 맥주는 이전보다 훨씬 밍밍했다. 심심한 씁쓸함이 혀에 감긴다. 술이 들어왔음에도 정신은 오히려 더 멀쩡해지는 것 같았다. 맥주를 마시면서 소주를 생각하는 것도,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잔뜩 쌓인 문자들이 전부 처리해야 되는 짐덩이처럼 느껴졌다.

예전부터 숙제를 싫어했던 성격은 지금도 여전했다. 내 손은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알림을 피해 인터넷 창을 열었다. 익숙한 인터페이스를 지나, 북마크에 추가된 저컴 게시판을 찾아 움직인다. 그 몇 초 안되는 움직임에도 딜레이가 생겨났다.

사실 이것도 확인하기가 싫은 것이다. 완전한 도피였다. 내 눈으로 직시하기 전까지는 잠정적 문제로만 남아있을 뿐이니까. 나는 그게 현실적인 문제로 눈앞에 나타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동생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했던 것이 거짓말은 아니었음에도, 지금의 나는 걱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걱정은 정말로 정신을 좀먹는 것이다. 그걸 스스로 조절할 수 없다는 사실도 그렇고. 지금도 걱정과 함께 될 대로 돼라는, 초연한 생각이 공존했다.

사람은 이렇게나 모순적이다.

내 저컴 게시판은 상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모여드는 사람들이 많으면 모든 커뮤니티는 대개 비슷한 양상을 보이며 변화하는 것이다. 내가 방송을 하지 않을 때 수용소 느낌으로 활용되는 곳이어서 그런지, 점점 사람이 늘어나던 게시판은 어느덧 제법 큰 규모로 성장해버렸다.

트래픽이 너무 많다며 저컴 운영자가 메일을 보내온 지도 벌써 한 달이 넘게 흘렀다. 최근엔 팬 카페를 만들까 하고 주연과 상의가 오갈 정도였다. 이제 대수롭지 않게 여길 문제가 아니겠지. 이용자 수가 과하게 많았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했다. 주말인 걸 감안해도 너무 많은 숫자였다. 무슨 일이 있긴 했었구나. 부디 내가 생각한 일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손가락을 움직여 스트롤을 내린다는 게 망설여지는 순간이다. 이럴 때 방송을 키면 어그로가 절정에 이르겠지. 스트리머 다운 생각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난 인기글을 클릭했다.

게시판에서 추천을 많이 받은 글들이다. 오늘 있었던 일을 대략적으로 훑어보기에 최적화된 목록이었다. 시간 순서로 정황을 파악하기 위해, 나는 우선 글의 제목도 읽지 않은 채 오늘 첫 번째 인기글을 찾고자 손가락을 움직였다.

내려도 내려도 끝이 없다.

하루에 인기글 페이지 하나가 가득차는 일이 흔했던가. 아닌 것 같은데... 아무리 게시판이 활성화됐다지만 방송도 하지 않은 날 이토록 활동이 많은 건 이상한 일이었다.

관심이 많은 건 좋았지만, 과도한 관심은 언제나 문제를 야기했다. 내가 손캠을 켰던 그 무렵처럼. 평소보다 두 배는 많은 듯한 방문자 수가 계속 눈에 걸리더니만.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기는 했던 것 같았다.

그래, 좆됐다는 말이다.

페이지를 넘기고 넘겨, 나는 드디어 오늘자 첫 번째 인기글을 찾아냈다. 제목만 봐도 휴방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는 평범한 게시글이다.

시간의 선후 관계. 이러고 있으니 곧 태풍이 불어닥치기 직전 고요한 하늘을 관측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과연, 이때는 평온했구나. 폭풍전야란 이토록 조용하구나­ 하고.

페이지를 앞으로 당겼다.

이전 페이지의 게시글보다 월등히 높은 조회수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제목만 봐도 대충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글은 대부분 압축적이기 마련이니. 아마 개막전 경기를 앞두고 빌드가 공개된 시점인 것 같았다. 대회에서 익숙한 빌드를 목도한 시청자들이 게시판에 찾아와 난리를 친 것 같았다. 높아진 조회수가 납득이 갔다.

그 이전 페이지도... 빌드와 관련된 내용이다. 본인이 지켜보는 스트리머가 만들어낸 괴상한 빌드가 프로 리그에서 나온다는 게, 여간 신기한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게시글의 내용들이 대체로 비슷했다.

진작부터 빌드의 잠재력을 알아봤다는 듯 너스레를 떨거나, 저게 대회에서 나올 줄 몰랐다며 호들갑을 떨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걸 사용한 프로 선수가 무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는 저결 대회 이야기를 떠들어대는 글도 종종 보였다.

천천히 목록을 훑었다. 이대로 빌드에 대한 이야기만 꽃 피우면 좋겠는데. 그래, 사실 걱정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관중석 카메라에 잡힌 게 뭐가 대수라고. 노르드와 혜진을 잇는 접점은 나이트폴이라는 게임 하나밖에 없지 않나.

맑은 날 번개 맞을 확률을 걱정하면서 집을 나서는 사람은 질타를 받기 마련이다. 걱정도 태산이다, 라면서.

'방금전 레전드 관중.jpg'... 여기도 있잖아.

성현이 알려준 것과 동일한 움짤이다. 화면에 잡힌 무표정한 여성이 브이 자를 들어올리는, 대수롭지 않은 영상. 뭔 정신으로 저렇게 반응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다른 생각을 하던 중 갑자기 화면에 잡혀, 나도 모르게 사진을 찍을 때 취하던 포즈를 잡았던 것 같은데. 치어풀 카드나 손 따위로 얼굴을 가리는 행위는 괜히 호들갑을 떠는 것처럼 느껴져서 싫었다.

옆자리에 앉았던 혜민이는 카메라에 잡힌 줄도 모르고 핸드폰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정도로 짧은 순간이다. 저 장면 이후 곧장 카메라는 다른 곳으로 넘어갔으니까. 그러니, 내가 이게 화제가 될 거라고 생각할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저 짧은 시간 카메라에 잡힌 여자 둘이 대체 뭐라고.

댓글들이... 내 생각을 거세게 반박하더라.

달린 댓글이 백 개를 넘어서 나는 그냥 읽기를 포기했다. 낯부끄러워서 보기 힘든 내용이 많았던 탓이다. 노르드와는 달리, 실제 얼굴을 두고 쏟아지는 칭찬은 제대로 수용하기가 힘들었다. 사지가 뒤틀리는 기분이다. 나는 곧장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곧이어 이어진 2세트 경기 때문일까. 당장 관중석에 찍힌 내 모습이 게시판 내에서 중심 화제로 떠오르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당연히 그래야 했다. 아무리 그래도 일반 시청자 입장에서 저건 일반인A일 뿐이니까. 꽉 막혔던 속이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다. 나이트폴과 관련된 이야기가 유난히 반가웠다.

GB에 대한 칭찬, 빌드와 관련된 이야기, 1세트 하이라이트 장면, 해설진들의 코멘트, 이럴 때 휴방을 하고 있는 게시판 주인에 대한 힐난... 그리고 무상의 인터뷰. 몇 페이지 가량을 가득 채운 인기글의 내용이었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선이다.

그 중 무상의 비중이 상당히 컸는데, 경기가 끝난 뒤의 인터뷰에서 노르드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게 게시판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것 같았다.

이건 나도 몰랐던 내용이다. 사인을 받기 위해선 맨 앞줄을 선점해야 한다는 혜민이의 말에 따라 게임이 끝나자마자 경기장 밖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당연히 인터뷰도 보지 못했는데... 닉네임까지 직접 언급해줄 줄은 몰랐다. 알았으면 무상과 만났을 때 뭐라도 건내줬을 텐데.

당연히, 프로의 입에서 직접 언급됐다는 이유로 인터뷰와 관련된 게시글이 많이도 올라왔던 모양이다. 인터뷰 전체 영상부터 내가 언급된 부분까지. 인기글 한 페이지 가량을 인터뷰 관련 내용이 빼곡히 채웠다. 이쯤되면 안심을 할만하지 않나. 걱정은 괜한 걱정으로 끝날 때가 가장 행복한 법인데.

마지막 한 페이지. 아마 지금도 갱신되고 있을지 모르는, 첫 번째 페이지다.

화면을 터치해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이다. 비교적 최신형에 가까운 핸드폰은, 로딩에 걸리는 시간도 없이 곧바로 명령을 수행했다. 내 눈은 자연스레 페이지 가장 맨 위를 차지한 게시글의 제목을 포착했다.

'V녀가 노르드인 논리적 이유 5가지.fact'

...불과 8분 전에 올라온 글이었다.

###

"그럼 내일 방송도 정규 방송 시간에 시작할게요. 다들 좋은 밤 되세용!"

[ㅉㅂ~]

[쪼바]

[안돼 방금 왔는뎅 ㅠㅠ]

[내일 봅시다~~]

[오늘 왜케 일찍꺼...]

[ㅂㅂ]

방송이... 꺼졌나.

쪼망, 민아는 곧장 몸을 일으켰다. 방송 시간 내내 의자에 의지한 전신이 뻐근하게 움츠려드는 것 같았다. 기지개에 따라 뚜둑, 하는 소리를 내는 것이 오늘따라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휴방 없이 달린 대가가 찾아오는 것일까.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민아의 손이 황급히 휴대폰으로 향했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손이 베타코드와 문자 메세지 알림을 확인했다. 주욱 나열된 목록 중에서 찾던 이름이 없다는 걸 확인한 민아의 몸이 축하고 쳐졌다.

문자를 보낸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답장이 없다는 말인가. 바로 전화번호부를 펼친 민아가 머뭇거리다 핸드폰을 내려놨다. 아무리 그래도 이 시간에 통화를 걸 용기는 나지 않았다.

머리가 어지럽게 돌아갔다. 느닷없이 단체 채널에 올라왔던 혜진의 움짤이 잊혀지지 않았다. 방송 중 계속 울려대는 알림을 듣고 핸드폰을 들어올린 순간, 얼마나 놀랐던지. 얼굴이 나가고 있는 상황도 잊어버리고 티를 내버리지 않았나. 곧바로 수습을 해서 망정이지, 방송을 시작한 초창기였으면 아무말도 못하고 버벅거렸을 게 분명했다.

그만큼 놀랄 수밖에 없는 장면이었다. 민아가 잠시 시청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게임을 중단했을 정도로. 방송을 대기화면으로 전환한 민아는 상황파악을 마치고 혜진에게 문자부터 보냈다. 뭐라 할 말은 없었으나, 아무튼 큰일이 낫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리그 중계 화면에 잡히고도 그렇게 태연했던 모습을 보면, 혹시 조만간 얼굴을 공개하려고 했던 것일까?

민아에게 남은 건 추측뿐이었다. 최근 자주 연락을 주고 받으며 조금 친밀해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민아에게 혜진은 베일에 싸인 사람이었다. 더 친해지고 싶은데도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 그래서 아무 질문이나 내뱉기도 힘들었다.

민아는 자리에서 벗어나 방문을 열었다.

궁금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라는 사실은 제쳐두고, 지금은 방송을 막 종료한 시점이다. 방송에 집중하느라 뒤로 미뤘던 각종 욕구들이 뒤늦게 그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우선 화장실부터 갔다가, 야식에 대한 깊은 고뇌를 계속해야겠지. 치킨을 먹은 지도 오래됐으니 오늘 정도는 양보해도 괜찮을 것이다.

덜컥­

"방송 이제 끝났어?"

방문을 열고 나온 시점이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동생 유정이 거실 쪽에서 모습을 내비쳤다. 꽤나 늦은 시각이다. 평소 같으면 방 안에서 머물고 있었을 텐데, 거실에 앉아있는 것이 어색하게 다가왔다.

"응. 왜 거실에서 그러고 있어?"

"보여줄 거 있어서."

보여줄 거라니.

유정은 소파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얼굴이 번쩍거리는 것이, 장난기가 가득 묻어나오는 표정이었다.

유정이 이런 얼굴을 하고 있을 때는 보통 친한 사람을 놀리는 경우가 많았다. 네 살 터울인 제 언니도 장난기 가득한 유정의 단골 타겟 중 하나였다는 건 가족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고. 순간 꺼림칙함을 느낀 민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대체 뭘 보여주겠다고.

"언니도 NPL인가 뭔가 하는 거 알지? 오늘 내 친구가 거기 직관갔는데 카메라에 찍혔거든. 우리 학교 애들 지금 그거 때문에 난리야."

뭐라고?

NPL이면, 민아가 모를 수가 없는 내용이다. 불과 방금 전만 하더라도 개막전과 관련된 고민을 하고 있지 않았나. 생각해보면 관중 카메라에 잡혔다는 것도 비슷한 내용이었다. 유난히 관중석을 많이 잡아준 날이었던 건지. 아니면­

순간 민아의 머릿속으로 혜진이 잡힌 움짤이 스쳐 지나갔다. 시선을 잡아끄는 혜진 옆으로 누가 앉아있었던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불쑥, 유정이 들이민 스마트폰을 받아든 민아가 자연스레 화면을 눈에 담았다.

당연하다는 듯 혜진의 모습이 담긴 움짤을 보고, 민아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한 다리만 건너면 모든 사람이 아는 사이라더니.

옛말에는 틀린 말이 없는 것이다.

* *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