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43화 〉 143 ­ 개인 정보가 너덜너덜해 (143/243)

〈 143화 〉 143 ­ 개인 정보가 너덜너덜해

* * *

도심지에선 아침이 되어도 닭이 울지 않는다.

잊고 싶은 것과는 별개로, 습관처럼 생활의 일부로 달라붙은 잔재들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생활 패턴을 완전히 뒤집어버린 지가 언젠데 아직도 아침이면 닭의 울음소리가 떠오르는 걸까. 뻑뻑한 눈을 껌벅이며 시간을 확인한 주연은 이제 곧 해가 뜰 시간임을 재차 확인했다.

사실 굳이 시간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기계처럼 작동하는 신체가 지금이 아침이라는 정보를 누구보다 빠르게 알려왔으니까. 뒷목이 뻐근하게 저려오기 시작하는 시점. 비가 오기 전 관절이 저리듯, 해가 뜨기 전 나타나는 일상적인 신호였다.

평소보다 훨씬 찝찝한 아침이다. 기분 좋은 아침을 맞이한 적이 없다는 걸 차치하고서라도.

아무리 많은 시간이 걸려도 해가 뜰 때쯤에는 영상 하나가 완성되었어야 했는데. 오늘 주연은 영상을 완성하지 못했다.

완성은커녕 조금의 진전도 없었다. 본래 편집 프로그램이 한창 돌아가고 있을 모니터는 지금 인터넷 브라우저 창만 띄워져 있는 상태였다. 그것도 양쪽 모두. 당장 업로드할 영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불쾌한 마음을 가라앉히기가 힘들었다. 다른 일에 한눈이 팔려 본분을 소홀히 하는 건 혜진이 밤샘 방송을 할 때로 충분했다.

늦은 밤부터 몸집을 불린 떡밥은 새벽 내내 식을 줄 모르고 굴러갔다. 여러 커뮤니티를 오가며 억측을 먹고 자란 소식들은, 그대로 노르드의 게시판으로 흘러와 장작을 더하고 있는 것이다. 관리자 역할을 수행중인 주연이 도저히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딸깍­

유일하게 건진 게 있다면, 혜진이 포착된 움짤 하나 뿐이겠지.

딸깍­

지금 노르드 직관녀랑 연결하는 새끼들 대부분이 노르드 육수 출신들임.

손캠 공개했던 영상만 보고 노르드 얼굴 예쁠 수밖에 없다고 갤에서 개지랄하던 새끼들ㅇㅇ

이새끼들은 손이랑 목소리만 가지고 상상속의 노르드를 만들어서 상상딸치는 븅신들임. 지들이 가진 온갖 판타지란 판타지는 다 집어넣어서ㅇㅇ

자기들이 물고 빠는 노르드가 멸치에 평범하거나 못생긴 얼굴이라는 건 절대 인정 못한다는거지. 예쁠거야, 여신일거야 지랄하면서 자위하는거임. 즈그들 주인 잘난게 자기 잘난 줄 아는 새끼들 태반이니ㅋㅋ

망상충들 병신짓이 얼마나 심하면 직관한 존예 일반인 데려다가 이게 노르드라고 연결하고 앉았냐ㅋㅋㅋㅋ 내미는 증거라고 해봐야 손모양 유사하다는 거랑 무상이 노르드 언급한 인터뷰뿐임.

이게 어떻게 노르드=직관녀로 연결되냐고. 정상적인 사고 가진 새끼들이면 믿을 수가 없는건데ㅋㅋ

상식적으로 노르드가 저렇게 예뻤으면 바로 캠부터 켰지. 그 게임실력에 저 외모다? 지금보다 수십배 규모로 성장해서 저통령 자리까지 넘볼 수 있음ㅇㅇ

얼공 리스크 같은거 무시해도 될만큼의 메리트지.

씨발 육수새끼들은 얼마나 지성이 부족하면 이런 당연한 사실도 외면하고 주인 빨아제낄수있는거냐???

ㅇㅇ:존나기네 3줄요약해 ㅂㅅ아

ㅇㅇ:저컴 노르드게시판 새끼들이 ㄹㅇ 가관임. 갤에선 노르드 아니라는 주장이 훨씬 강한데 저긴 거의 맹신하는 분위기임ㅋㅋ 논리적으로 노르드 아닌 이유 설명해도 걍 꺼지라고 하더라. 광신도들임 ㄹㅇ

­ㅇㅇ:저컴 게시판은 거의 팬들이니까 당연하지. 노르드 팬들은 거의 무지성으로 맞다고 생각함ㅋ 짤방 직관녀가 적당히 예뻐야지

gusdn98*:내가 봤는데 노르드맞음

­ㅇㅇ:육수새끼 한명 더 검거

­ㅇㅇ:병신 육수련으로 메모해놨네ㅋㅋ 기록은 거짓말을 안하노

ㅇㅇ:근데 혹할만한 것도 사실임. 직관녀 신상을 파려고 해도 나오는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보통 저렇게 생겼으면 뭐든 간에 sns로 찾아볼 수 있는데 아예 활동을 안한다는 뜻이잖아ㅋㅋ 신상파서 뭐 안나오는게 노르드랑 똑같지 않냐?

­ㅇㅇ:그런게 다 개소리라고. 죄다 심증이고 정확한 물증이 없잖아. 직관녀가 그냥 sns 안하는 사람일수도 있는데 그딴게 증거가 될 수 있음?

­ㅇㅇ:그니까 심증이 많은 걸로 충분히 떡밥이 구를 수 있다고. 실제로 지금 갤에서 하루종일 노르드얘기만 하고 있잖아.

ㅇㅇ:무슨 떡밥이 아침까지 구르냐. 노르드 인기가 많긴한가보네

­ㅇㅇ:하필 개밥새끼가 직접 언급해서 유입 더 많아짐... 노르드라고 주장하는 새끼들도 인터뷰 언급 많이하고

ㅇㅇ:ㄹㅇ 죄다 심증이지 정확한 물증이 없음ㅋ 노르드 본명도 모르는 새끼들이 손모양이니 뭐니 하는 거 존나 우습다. 팩트는 노르드가 예뻤으면 진작 캠방했을거라는거. 아마도 아니고 진작 전업 수준으로 활동하는 겜스인데ㅋㅋ

탁, 탁, 타닥, 탁­

오른손 새끼손가락이 엔터를 누르기 직전이다. 들끓는 분노를 담아 키보드를 두들기던 주연이 돌연 바쁘게 움직이던 손을 멈춰세웠다.

감정이 듬뿍 실린 댓글을 남겨봤자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는 뻔했다. 노르드에 대한 쉴드는 되려 저 피라냐들에게 먹이를 던져주는 역할밖에 못 할 것이다. 댓글로 박터지게 싸워서 끝내 승리한다고 한들, 그게 혜진에게 도움이 되지는 않으리라.

잠깐 멈칫한 주연은 이내 자신이 적었던 문장을 몽땅 지워버렸다. 페이지 로딩에 걸리는 시간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글들은 대개 이런 식이었다. 방대한 커뮤니티는 오고 가는 유동 인구도 워낙 많아서, 매순간 게시판을 확인하는 주연도 도대체 어디서 루머가 시작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관중석 카메라에 잡힌 혜진이 노르드라는 추측. 이 자극적인 떡밥은 노르드의 유명세와 움짤의 임팩트에 힘입어 무서운 속도로 퍼져나갔다. 이제와 그 뿌리를 찾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괜히 주연만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의 입장에선 마른 하늘의 날벼락과 같은 소식이었으니.

주연은 혜진이 개막전 직관에 간다는 사실을 당일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공식 중계 방송에서 혜진의 얼굴을 발견하고 얼마나 놀랐던가. 혜진의 사생활에 깊게 침투해선 안된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스탠스가 잘못된 게 아닌지, 수십 번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나 무방비한 사람. 역시, 혜진에게는 편집자를 넘어선 매니저가 필요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같이 살았다면 이런 불상사가 생길 일도 없었을 텐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주연이 직접 관리하는 노르드의 저컴 게시판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커뮤니티에선 움짤의 여성이 노르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는 과정에서 노르드를 헐뜯는 사람이 많아진 건 문제였으나, 물증이 명확해서 반박의 여지가 없는 것보다는 이 편이 훨씬 나았다. 적어도 시치미를 떼거나 부인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열려있었으니까.

여론이 끓어오르는 힘이 심상치 않았다. 평소처럼 모른척하고 방송을 진행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본인이 나서서 언급하지 않으면 호기심 왕성한 시청자들이 채팅과 후원으로 계속 압박해오겠지. 그런 상황에서 무시하고 방송을 진행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혜진이 아니라고 딱 잘라 부인한다고 한들 논란처럼 피어오른 불길을 진화할 수 있을까.

당황 속에 보낸 문자는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답장이 돌아왔다.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의 문자였다. 커뮤니티가 돌아가는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 혜진과 방송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눈 주연은, 그녀가 얼굴 공개를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혜진은 경계선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스트리머이자 게이머인 노르드와 현실 속 혜진을 구분하는 명확한 경계선.

그럼 그게 침범당하기 직전인 지금은 꽤나 커다란 위기 순간일 수도 있지 않나.

주연에겐 그게 너무나 뚜렷하게 느껴졌다.

###

"언니, 나 갈게."

"응. 조심히 들어가. 주호한테 사인 잘 건내주고."

"응... 언니 오늘 방송할 거야?"

"어? 음. 잘 모르겠는데."

그래, 잘 모르겠다.

철컥­

현관문을 닫았다. 익숙한 원룸이 공허했다. 좁은 방이라 그런지, 사람 한 명이 머물고 간 빈자리가 생각보다 훨씬 크게 느껴진다.

나는 실내화를 끌며 걸었다. 방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이 밑바닥에 붙어 딸려왔다. 나인지 혜민인지. 주인을 알 수 없는 애매한 길이였다. 색깔도 같아서 좀처럼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빗자루로 쓸어내리듯 바닥을 밀면서 돌아다니면, 머리카락 몇 가닥이 더 걸려들었다. 괜스레 이 작업을 계속 반복한다. 침대 아래쪽에 대충 걸쳐둔 작은 청소기가 자신을 써달라는 듯 존재감을 발산했다. 나는 그걸 무시하고 천천히 머리카락을 헤아렸다.

하나, 둘, 셋...

지이잉­

빌어먹을.

이번엔 또 누구인가. 사무적이지 않은 사적인 인간관계를 관리하는 건 내게 너무 힘든 과제였다. 늦은 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이어진 문자 세례를 모두 처리한 뒤로도 핸드폰은 쉬지 않고 울려댔다. 진동을 끄고 외면해봤자 숙제가 쌓이는 건 변하지 않는 터라, 난 웅웅거리는 진동소리를 질리도록 감내해야 하는 처지였다.

이게 다 업보인가.

오늘 방송하시나요?

이번 상대는 주연이었다. 역시 마냥 무시하고 지나칠 수 없는 사람이다. 평소 방송에 도움을 주는 부분도 그렇고, 어젯밤부터 난리가 난 게시판을 늦은 시간까지 관리하고 있는 게 주연임을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과분한 도움을 주는 편집자였다. 본인은 늘 팬심이니 당연하다고 말하지만.

내 인간관계란 비루하고 간소해서, 알고 지내는 사람 전부가 방송과 관련된 사람들 뿐이었다. 노르드를 알거나, 노르드인 혜진을 알거나. 어제 있었던 작은... 작은 사건을 모르는 이가 단 한 명도 없다는 뜻이다.

주변인들이 보내오는 걱정과 염려가 오히려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무슨 큰 사고라도 터진 것처럼 다들 안부를 물어오는지. 호들갑이 괴롭다. 게시판에서 움짤을 보고 저게 노르드다 아니다 하는 논쟁이 벌어진 것도­ 머리가 아팠다.

만취라도 했다면 그냥 방송을 켜서 얼굴 공개를 해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보통 술이 들어가면 뒷감당은 고려하지 않으니까. 지극히 상식인에 가까운 내 머리는 납득할 수 없는, 무책임한 일처리다.

답장을 해야 되는데. 일단 오늘은 없다고 해둘까.

지이잉­

또.

지겹지도 않은지 핸드폰은 이제 내 손 안에서도 울려댔다. 곧장 액정 가운데에 떠오른 문자 메세지는, 커다랗게 쪼망의 이름을 표시했다. 최민아. 전날 보내온 문자가 눈에 선했다. 평소처럼 이모티콘을 가득 우겨넣은 문자였는데.

혜진씨, 혹시 동생분이 영인고 다니나요!?

뭐야.

벌써 신상이 털렸다고...?

* *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