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화 〉 148 할 수 없는 것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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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달아 마주한 무리만 세 번째다.
햇빛을 조명삼아 빛나는 성당 내부는 웅장한 외관만큼이나 멋드러진 느낌이 있었다. 게임 그래픽 기술에 대한 지식이 있는 것 아니었으나, 눈을 돌릴 때마다 다른 각도로 반사되는 빛을 보다보면 새삼스러운 감탄을 내뱉게 되는 것이다. 디테일을 따지기 전에 역시 그래픽부터 좋아야 한다고, 강하게 강조하던 사람들도 이해가 간다.
적을 마주하기 직전 심심한 왼손은 습관처럼 도발키를 연타했다. 무기가 평소와 다른 탓에, 묵직한 검날을 쓸어내리는 익숙한 동작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내 캐릭터는 날렵한 검날을 허공에 대고 이리저리 휘둘렀다. 쇠붙이가 움직일 때마다 성당을 가득 채운 빛을 머금는 것 같았다. 이렇게만 보면 순위권에 들어갈 정도로 멋진 모션인데. 공간에 제약을 받는다는 게 문제였지만, 성당에 한해서는 츠바이에 준하는 수준까지 올라올 수 있겠다.
띠링
뭔가에 몰두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라 하지 않았나.
흡사 좀비 웨이브처럼 계속 몰려드는 적을 상대하다 보면, 어느샌가 게임에 몰두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그야 그랬다. 안 그러면 금방이라도 눈먼 칼에 찔려 비명횡사하고 말 테니까.
띠링
이렇게 막무가내로 움직이는 건 내 취향과 거리가 멀었으나... 지금은 그게 좋았다.
머리는 후속 대처를 생각하느라 바쁘다. 일부러 과하게 마우스를 돌려댔다. 고감도의 마우스를 팔까지 동원해 크게 움직이면, 흡사 팽이가 된 것처럼 화면 전체가 휙휙 돌아가는 걸 경험할 수 있다.
어지러운 시야 속에서 상대의 움직임을 훑어본다. 지금 나를 둘러싼 상대는 세 명. 정면에 있던 하나는 다리를 굽힌 것으로 보아 돌진을 준비하는 모양새다. 좌측에 창을 든 놈은 아마 거리를 유지한 채 창을 찔러 올 거고. 나머지 하나, 후방에 있는 놈이 문제인데... 이건 소리에 의존할 수 밖에 없나. 셋을 동시에 같은 시야에 둘 수는 없으니 포기할 건 포기해야 한다.
띠링
우선순위를 정했으면, 망설일 필요는 없지.
연계의 여지를 주지 않고 정면으로 뛰어든다.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던 놈이 첫 번째 목표였다. 선입력을 한듯, 내가 뛰쳐나간 것과 동시에 진각을 밟은 상대가 어정쩡하게 검을 내리쳤다. 경로를 생각하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갈까. 검이 세워진 걸 보면 캔슬도 불가능한 상황이다.
내가 먼저 달려든 것으로 타점을 완전히 놓쳐버렸다. 힘이 제대로 실린 것도 아니고, 바로 회수할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동작도 아니다. 주도권이 완전히 내 쪽으로 넘어왔다.
패링을 할 수도 있겠으나, 여기선 후속도 염두에 둬야겠지.
한걸음 더 간격에 파고든다.
어설프게 내리친 검이 시야 한쪽에서 흐릿하게 스쳐 지나간다. 한순간에 수염 가득한 머리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오른손이 자연스레 마우스를 끌어당기듯 움직이고, 앞으로 내밀어 적을 찌를 것 같이 뻗어나간 검이 뱀처럼 미끄러졌다.
서걱, 하는 익숙한 타격감. 내구도를 포기한 대신 예리한 검날은 드러난 살결을 부드럽게 썰어넘겼다. 화면의 떨림과 이어폰을 타고 들리는 소리가 곧 나이트폴의 타격감이었다. 츠바이를 휘두를 때 들리는, 뭔가 박살나는 듯한 소리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굳이 시선을 돌려 결과를 확인할 필요는 없다. 달려나가던 기세를 억지로 죽이지 않고, 자연스레 앞으로 이동한다. 후방에서 뛰쳐오는 적에게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함이다.
물리엔진에 따라 몇 걸음인가를 더 전진한 다음, 자세가 안정됐을 때. 바로 고개를 뒤로 젖힌다. 그제서야 방금 베어낸 플레이어 하나가 털썩하고 쓰러졌다.
남은 두 플레이어는 쓰러지는 시체 너머로 멀뚱멀뚱 서 있었다. 아무리 개인전이라지만, 대응이 너무 느리다. 저래서야 봇이랑 별반 다를 바가 없지 않나. 방금 상황이 공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을 텐데. 랭크와 무관한 일반 게임의 한계라는 걸 알면서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좀 더 아찔했으면 좋겠다.
숨 고를 시간까지 얻었잖아.
띠링
한껏 예민해진 감각 속으로 불쾌한 알람소리와 함께 학살자가 나타났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얼마나 들어오는 거야. 미션, 미션... 기능을 꺼버리던가 해야지, 이거.
몇 번이나 듣는 건지. 미니맵에선 아마 붉은색 포인트가 미친듯이 깜빡거리고 있을 것이다. 그 참을 수 없는 어그로에 주변에 있는 모든 플레이어가 이쪽으로 달려와야 할 텐데. 눈앞의 두 명이 전부인 이유는, 이 학살이 세 번째 반복되고 있기 때문일까.
남은 시간은... 약 3분.
둘을 처리하고, 한 명만 더 잡을 수 있으면 딱 30킬이다. 목표는 채우고 봐야겠지.
나는 마우스를 다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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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숨어 다니는 거야. 랭크도 아닌데."
[너같으면 나오겠냐고]
[양학그만해.. 멈춰]
[와씨 29킬ㅋㅋㅋㅋㅋ 사람이냐]
[맵보고 빨간점 피해다니네; 그런 겜이었음?]
[노르드 존나 잘하네 진짜]
[눈나 빡집중한 표정 너무 예뻐요 ㅠㅠ]
[30킬 미션 실패ㄷㄷ]
게임이 방금 끝난 참이다. 승리를 상징하는 깃발이 나부끼는 가운데, 혜진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결과창을 바라봤다. 화면 상단부에 표기된 익숙한 닉네임 옆으로 29라는 숫자가 자리했다. 목표치를 달성하지 못한 게 그리 불만스러운지, 데이터를 바라보는 혜진의 눈썹이 삐뚜름하게 기울었다.
<다노상 님이="" 10,000원="" 후원!=""/>
그만 외면하고 미션 좀 확인해주세요 선생님
게임을 할 때는 위급한 순간에도 그토록 평온해보였던 혜진이다. 게임이 끝난 후에는 달랐다. 방송 화면 하단부에 위치한 작은 화면 속 여성이, 후원 효과음과 TTS 목소리를 듣자 눈에 띄게 주춤거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것이다. 미션창이 있는 부근이었다.
"30킬 달성, 트리플, 캠방, 캠 화면 한 시간 동안 이백...?"
게임을 시작할 무렵 단출했던 목록이 지금은 유난히 길었다. 간략하게 서술한 미션들 밑으로 적힌 금액이 심상치 않았다. 두어 개를 제외하곤 전부 캠방과 관련된 미션이었는데, 나열된 금액을 전부 총합하면 이백만 원이 넘어가는 금액이 축적되어 있었다.
데스 매치가 진행된 시간이 약 20분에 불과하다는 걸 감안하면... 과할 정도로 커다란 액수였다.
화면 속 혜진의 얼굴이 굳은 것도 잠깐.
마우스 포인터가 빠르게 움직였다
띠링 <미션실패!/>
"실패! 안타깝네요..."
[?????]
[아니 200을 걷어차??]
[배가 불렀네 진짜]
[캠방을 얼마나 싫어하는거야]
[걍 캠만 확대하라고 돈줄테니까 ㅡㅡ]
말릴 새도 없이 빠른 결단이었다.
연달아 미션이 실패했음을 알리는 효과음이 울려퍼졌다. 제일 커다란 액수가 걸렸던 미션을 취소하더니, 밑으로 길게 나열된 미션도 전부 실패 처리로 끝이 났다. 왼쪽 상단을 차지하던 미션창이 금새 깔끔하게 지워졌다. 그제야 혜진의 굳은 얼굴이 평온함을 되찾았다. 성난 민심과는 동떨어진 반응이었다.
주는 돈 마다하는 스트리머라니.
"저는 캠방을 못합니다. 그럴 능력이 없는 사람이에요. 노래도 못하고 춤도 못 춘다고."
[아니 그냥 아무것도 안해도 된다고 ㅅ,ㅂ]
[얼굴이 능력임]
[이 사람 캠방 뭔지 모름?]
[님 면상이 컨텐츠인데]
[꾸미고 옷만 갈아입어도 꿀잼임;;;]
[영도만 켜놔 저수가 알아서 방송해줌 ㅇㅇ]
[캠 설정만 좀 만지면 완벽한데]
"아무것도 안 하고 어떻게 한 시간을 버텨요.
...캠 설정? 이거 설정 만진 건데."
[?]
[어딜봐서]
[나 여캠 팔로워 30명 오버 찐육수인데 개지,랄임 ㅎㅎ 이딴 설정 첨봄]
[잼민이도 님보단 설정 잘만질듯]
[대체 뭘 보고 만진거죠?]
[어떤 여캠이 조명도없이 방송하냐고ㅋㅋ]
[근데 이게 훨씬 좋아요 ㅠ 이대로 가지]
[아니 불이나 좀 켜봐 방 존내게 어둡네]
"조명은 너무 과하죠... 그럼 얼굴이 잘 나올 거 아니야."
[??? 이분 뭐라는건지 설명좀]
[일부러 이러지]
[노르드식 소통 진짜 대가리 얼얼하네]
[엘튜브 여캠세팅좀 보셈..]
[직관때처럼만 해주세요ㅠ 그때 넘 예뻤는데]
"어차피 게임할 건데 예쁘게 입어서 뭐해요. 불편하기만 하지."
평행선 같은 소통이 이어졌다.
합의안을 찾을 수 없는 논쟁이다. 캠 확대와 같은 간단한 일을 왜 저렇게 걷어차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채팅을 훑으면서 멘트를 이어가던 혜진은, 말을 내뱉기 전 왼손으로 목덜미와 쇄골을 연달아 쓸어내렸다. 찌르는 듯한 감각이 점차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좀처럼 다른 곳으로 신경을 분산하기가 힘들었다.
"세팅이 뭐가 어떻길래 자꾸 여캠? 제대로 본 적이 없는데. 아, 쪼망님은 알아요."
[그럼 쪼망한테 물어보라고]
[똘주는 취급도 안하네.. 노르드 실망이야]
[대기업이라 유망주랑만 어울립니다. 하꼬 언급하지 말아주세요]
[쪼망이랑은 합방도 했잖아]
"쪼망님한테요? 그럴 필요가 있나. 이미 칼고에몽한테 직접 물어보고 만진 건데요."
...
여전히,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불이 번지듯 물음표가 화르륵 올라온다.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 부근을 문지르던 혜진이 멍한 얼굴로 가속하는 채팅창을 바라봤다. 뜨거운 반응이다. 저런 반응을 보면, 무지는 역시 죄였던 모양이다. 칼고나 쪼망이나 방송 캠은 비슷하게 나왔던 것 같은데, 누구한테 물어보는지는 별 상관이 없지 않나. 여캠은 무슨 특별한 세팅이라도 하는 건가. 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 건지.
의문으로 가득 차던 채팅창은, 이내 스트리머가 방송도 안 보냐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쪼망과 칼고 수준에서 멈춘 노르드의 인맥에 한계를 느낀 모양이다. 후원으로 날아온 노쇠한 TTS 목소리가 추궁하는 어투로 캐물었다.
혜진에게는 별로 할 말이 없는 질문이었다. 실제로 몇몇 게임 방송을 제외하면 다른 방송은 거의 보지 않았으니까.
"잘 안 보는데... 다른 거 보느라 바빠서."
[대체 뭘 보는거임]
[칼고 언급좀 하지말아주세요... 더 언급하면 화나서 칼고 언팔하러 갑니다.]
[NPL?]
[근데 나도 노르드밖에 안봄 ㅎ;]
[다른 방송 안볼수도 있지 뭐 저렇게 물어보냐ㅋㅋㅋ 꼰대새기가 있네]
[노르드 취미 공개...]
[다른게 머임]
"다른 거요? 뭐 여러가지 있죠. 외로운 미식가나 시골어부 같은 거... 엘튜브에 다 있어요."
[틀]
[뭔 씹아재픽만;;]
[네다틀]
[선생님...]
[연세가?]
[낚시 ㅈㄴ 좋아하시네요^^]
[킹셔맨 ㄱ]
[대체 무슨 삶을 사시는 겁니까]
분위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점점 질문이 많아지는 느낌이다.
채팅창과 소통을 이어가는 내내, 어깨를 문지르던 손에 점차 힘이 더해졌다. 뭐가 불편한지 연달아 찌푸리는 미간은 덤이었다. 정신이 어지러우니 채팅 하나하나에 휘둘리는 것 같았다. 평소 같으면 신경쓰지도 않았을 질문에 대답하고 있는 걸 보면.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혜진이 마우스를 움직였다. 곧바로 북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경쟁전 매칭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일단 다음 게임부터 할게요. 랭크도 올려야 하니까... 이번 시즌은 더 높이 가봐야죠."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채팅창을 바라보던 고개가 다시 정면으로 향한다. 그 미묘한 각도 차이로 시야 속 채팅창이 사라졌다.
커다란 변화가 아니었음에도, 눈치 빠른 시청자들은 혜진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을 진작 알아차린 것 같았다. 곧장 소통이나 좀 더 하라는 후원이 날아왔다. 좀처럼 사생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노르드가 입을 여는 모습에 자극을 받은 모양이다. 시야 바깥에서 흐릿하게 보이는 채팅창의 실루엣이 빨리도 움직였다.
혜진은 부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정면만 바라봤다. 연승을 거듭한 끝에 mmr이 과하게 높아진 탓인지, 매칭이 잡히는 시간이 평소보다 오래 걸렸다.
게임이나 계속할걸.
중심 잡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