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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화 〉 150 ­ 진도는 빠를수록 좋다, 아마도 (150/243)

〈 150화 〉 150 ­ 진도는 빠를수록 좋다, 아마도

* * *

"­저, 저번 방송도 너무 좋았어요, 아니. 좋았어! 으응. 아하하. 아직 반말이 되게 어색하네, 그지?"

관계의 진척은 만남의 횟수와 비례한다. 일반적으론.

본디 인간을 잘 알기 위해선 여러 번의 만남을 통해 보다 깊은 관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으며, 그건 수십 번이 될 수도 있고 수백 번이 될 수도 있다. 한두 번 만남을 가졌을 때 파장이 잘 맞는다 생각했던 사람도 알아갈수록 구린내를 풍길 수 있는 법이다. 당연히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고.

사람 사이의 관계란 참으로 오묘한 것이다. 학창 시절 그렇게 마음 맞고 친하다 생각했던 친구도... 정작 세월이 지나고 나면 쉽게 멀어지고 만다. 정작 데면데면했던 녀석과는 질리도록 교분을 맺을 수도 있고.

그러니까 사람 사귀는 일에 구분을 두어서는 안 된다. 친구가 많은 것도 뛰어난 능력이요, 일종의 재능이다. 발이 넓은 사람은 그 외면이 어떻든 대개 속 깊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한두 번의 인연으로 만들어진 인연을 정성스레 어루만지며 지속하는 일은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으니까.

...정말로 그렇다. 만남을 갖고 대화를 나눈다는 건 생각보다 귀찮은 일이거든. 심지어 코드도 잘 안 맞는 것 같은 상대와 함께라면.

달그락­

"음, 혜진씨. 아니아니, 혜진아."

"응."

"마카롱 어때? 괜찮지? 여기 인터넷에서도 엄청 유명해. 디저트도 전부 직접 만든다고­"

사각거리는 감촉. 굳은 설탕이 포크 끝에서 잘게 바스라진다. 내게 음식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형형색색의 당분들은, 혀가 마비될 정도로 달았다. 맛 없다고 말하면 이 당분을 소화하느라 바쁠 신체기관에게 실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혀 뿌리 부근에 맴돌던 생각을 커피와 함께 집어삼켰다. 쓰디쓴 액체가 지나가자 달달함에 중독되었던 혀도 조금은 씻겨나가는 것 같았다.

여기는 디저트보단 커피 맛집이라고 해야 하지 않나. 난 설탕 덩어리에 무슨 맛 차이가 있는지 잘 모르겠는데. 적어도 디저트에 있어서 내 머리는 심각한 수준으로 폐쇄적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나는 카페보다는 술집을 선호했다. 조용한 카페보다 소란스러운 술집이 더 자유롭게 이야기가 오갈 수 있지. 조용한 술집이면 두 배는 더 좋고.

하지만 당연하게도, 인간 관계에선 배려와 양보라는 게 필요한 법이다.

"응. 맛있네, 이거. 이것도 같이 먹자."

"아, 진짜? 헤헤, 이러니까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생각난다."

나는 쪼망­ 아니. 민아의 포크가 움직이는 걸 보고서는 고개를 들었다.

동글동글한 느낌의 작은 얼굴, 목덜미를 살짝 뒤덮는 길이로 정리된 갈색 단발. 커다란 눈망울에 살짝 처진 눈꼬리가 부드러운 인상을 만들었다. 뭔가를 입에 집어넣을 때마다 볼이 부풀어오르는 것이, 도토리를 물고 우물거리는 다람쥐를 연상시켰다. 옅은 화장기가 감도는 얼굴이 귀엽고 순한 이미지를 배가 시키는 것 같았다.

쪼망이라는 닉네임이 자연스럽게 머리에 맴돌았다.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그 어감 자체가 그녀와 어울리는 느낌이다. 베이지색 니트가 그녀를 감싸는 외피처럼 보였다. 나와 시선을 마주하고 싱그럽게 휘는 눈을 보면... 역시나 동물들이 떠오른다. 사람이 다가서는 것을 겁내지 않는 온순한 초식 동물이.

확실히, 거절하기 쉽지 않은 사람이다.

쪼망의 합방 제안은 한 주 내내 이어졌다. 사실 문자가 이어질수록 제안은 묘하게 변질됐는데, 구체적인 계획이나 목적 따위는 없고 일단 만나자는 느낌이 강했다. 따지고 보면 합방 제안도 아닌 셈이다.

캠방을 시작한 이후 방송에 대한 걱정으로 머리를 쥐어짜던 때였다. 나는 여유가 없는 사람이다. 눈앞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남아있으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사람과 만나면서 에너지를 회복한다는 사람도 있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 붙이며 쪼망의 제안을 거절하고는 했던 것이다. 아마 그녀도 그걸 대충은 눈치챘을 텐데.

뭐가 그리 절실한지, 연락이 끊이질 않더라.

결국 이렇게 만나게 된 걸 생각하면... 그녀가 승리한 셈이다.

"민아야."

"으,응?"

내 부름과 동시에 눈을 크게 뜨고는 나를 올려다본다. 안 그래도 동글동글한 눈매가 예쁜 원형을 만들었다.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자고 한 것도, 말을 놓자고 한 것도 모두 본인일 텐데. 정작 스스로가 적응하지 못하고 어색해하는 모습이 순진무구하게 다가왔다. 20대 여성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모습이다. 아무리 그래도 저게 연기일 수는 없겠지.

나도 반말이 입에 익지는 않았으나, 저리 당황하는 얼굴을 보면 반대급부로 침착해질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 말을 꺼내는 게 맞나 싶지만. 빙빙 돌아가봤자 목적지로 향하는 길만 늘어질 뿐이니까.

"우리 집으로 가자. 생각해봤는데 그게 맞겠어."

아.

저 눈, 더 커질 수도 있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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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진짜로?"

대답이 뒤늦게 튀어나왔다.

민아는 자신의 얼굴이 뜨거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아마 지금쯤 귓볼까지 붉게 변했을 게 분명했다. 얼빠진 대답에, 아마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으리라. 이게 무슨 망신인지. 한 박자 늦게 수치심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동갑내기 친구는 나이를 알게 된 이후로도 동갑 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여유가 묻어나오는 것이, 지켜보고 있으면 품격마저 엿보였다. 분명 같은 나이일 텐데 이 차이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볼수록 동경하는 마음은 커져만 가는 것이다.

지금도 그랬다. 자연스레 내뱉은 한마디로 자신을 당황하게 만들더니, 정작 본인은 태연하게 커피 잔을 들어올린다. 소리도 내지 않고 커피를 마시는 모습에서 기품 같은 게 느껴졌다.

멋드러지게 굽은 손가락은 둥근 컵 손잡이의 끝부분을 잡은 채였다. 목 칼라부터 단추까지 검은색 일색인 와이셔츠가 창백한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얼굴로 시선을 들어올리면, 세상과 관련 없다는 듯 무심히 내려앉은 눈꺼풀이 갈색빛이 감도는 눈동자를 반쯤 가리고 있는 모습이다. 냉미녀란 이런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닐까. 혜진은 이 고풍스러운 카페와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이런 사람의 집에 가도 되는 걸까. 더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에 적극적으로 밀어붙일 때는 언제고, 막상 얼굴을 마주하니 잔뜩 위축되어 있는 꼴이다.

자괴감이 몰려온다. 혜진이 지금 자신을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을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밀쳐내도 끈덕지게 달려드는 모습에, 어쩔 수 없이 제안을 받아준 게 아닌가 하고. 민아는 또 내면에 깊은 구멍을 파기 시작했다. 당황 속에서 얼굴을 꾸미는 미소만 더 밝아졌다.

"너, 너무 좋지! 캠 설정도 내가 봐줄게. 나, 그래도 사람 안 부르려고 많이 공부했거든. 방송 설정 잡는 것도 돈이 엄청 들더라고... 점심 먹고 들어갈까? 으응, 이럴 줄 알았으면 카페보다 식당 먼저 찾아볼 걸 그랬네. 내가 생각이 좀 짧았다."

"아니야. 바로 집으로 가면 되니까. 가깝거든."

...지금 바로?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빠르지 않나. 민아는 혜진을 자기 집에 초대할 생각만 해봤지, 혜진의 집에 초대받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혜진은 자기 구역을 철저히 지킬 것 같은 이미지가 강했던 탓이다. 울타리를 크게 치고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서는... 그러니까 이런 흐름은 상정하지 못한 일이었다.

"배고프면 뭐라도 해줄게. 별로 대단한 건 없지만."

"아니아니아니, 나 안 배고파! 응. 그, 그럼 일단 나갈까...?"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상황파악을 위해 머리를 굴리면서도, 민아는 혜진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혜진의 집... 그 노르드의 집. 혜진이 캠방을 할 때 뒤로 비치던 공간이 머릿속에서 아른거렸다. 상상은 쓸데없는 생각들을 더해서 망상으로 부풀어오른다. 제멋대로 혜진의 집을 구현하기 시작한 민아는, 이미 카운터에서 계산을 시작한 혜진을 뒤늦게 발견하고 헐레벌떡 뛰쳐나갔다.

결국 계산은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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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아는 혜진을 따라 걸었다.

카페 앞에서 택시를 타고, 약 십오 분 정도 이동한 것 같다. 택시가 멈춰선 곳은 건물들이 무리를 이룬 주택가 앞이었다. 차에서 내린 혜진은 건물과 건물 사이 골목길처럼 만들어진 길을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민아에게는 별다른 설명도 없었다.

나름대로 단정히 정리된 골목길이다. 터진 쓰레기 봉투라든지, 파리가 잔뜩 꼬인 음식물 쓰레기 통이라든지. 동네의 미관을 헤칠 법한 사물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런 소리 없이 조용한 걸 보면 그저 사람이 적게 다니는 길일지도 몰랐다.

가득 늘어선 주택들 사이에선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골목길 사이사이를 누비는 고양이도, 한 명쯤 지나갈 법한 사람도 없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인기척이 드문 동네였다. 해가 중천에 오른 낮에야 별다른 느낌이 없었지만, 불빛이 줄어들 무렵 지나가면 제법 음산한 분위기가 날 것도 같았다. 앞서 나가는 혜진을 따라 걸으며 민아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혜진이 다리를 멈추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띡, 띡, 띡, 띠리링­

"실내화는 이쪽."

"아, 응."

토끼 귀가 달린, 귀여운 실내화.

민아는 자기 발을 감싼 귀여운 토끼를 보고 잠깐 머뭇거렸다. 혜진의 이미지와는 너무 동떨어진 디자인인데. 설마 그녀가 토끼를 좋아하는 걸까. 방 안으로 들어서면 온갖 곳에서 토끼 디자인이 튀어나온다던가. 그게 무슨 반전 매력인지.

발등으로 토끼 귀가 길게 뻗어난 형태의 실내화는, 민아의 취향에 스트레이트로 들어오는 귀여운 디자인이었다. 그녀는 놀란 기색을 숨기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특이할 것 없는 원룸이다.

현관으로 이어진 좁은 복도를 따라 들어오면, 싱크대와 마주한 화장실이 보인다. 열린 틈으로 살짝 드러난 화장실은 깔끔하게 정리된 모습이었다.

더 안쪽으로 들어서면 곧장 생활 공간이 드러났다. 싱글 사이즈의 침대와 컴퓨터 책상. 벽에 붙어선 조립식 옷걸이와 작은 상자들. 반대쪽 벽면에는 작은 크기의 책장이 층층이 쌓여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가구들의 색깔이 남색 내지는 검은색으로 통일된 것이 방을 더 깔끔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정리정돈마저 완벽한, 단정한 방이다.

그게 왠지 삭막하게 느껴졌다. 곳곳에서 묻어나오는 사람의 흔적을 제외하면, 모델 하우스라 말해도 무방할 정도로 색깔이 없는 공간이다. 혜진은 방을 꾸미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의자가 접이식밖에 없어서. 침대나 컴퓨터 의자에 앉아있어."

"아냐! 난 바닥에 앉아도 돼."

"그건 내가 안돼."

민아는 결국 침대 모퉁이에 걸터앉았다.

침대에서 컴퓨터 책상을 바라보면, 모니터가 그대로 시야에 들어온다. 모니터 위에 설치된 둥근 카메라가 자신과 눈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민아의 시선이 책상 위를 훑고 지나간다. 특이한 점이라곤 없어보이는, 일반적인 키보드와 마우스. 그게 노르드의 장비라고 생각하니 뭔가 다르게 와닿는 것이다. 숨겨진 특별함이 있지는 않을까 하고.

생각해보면 이곳이 노르드가 방송을 하는 스튜디오나 마찬가지였다. 매번, 만 명이 넘는 시청자가 방송을 보러오는 곳. 그리고 자신 또한­

"흠. 뭐 마실래? 녹차랑 커피, 맥주랑 소주. 와인도 좀 남았네."

"...어? 어, 난 녹차로 괜찮아."

뭔가 많은 게 섞여있던 것 같은데.

치익­

청량감 가득한 소리에 민아가 시선을 돌렸다. 냉장고 앞에 선 혜진은, 그 매끄러운 흑발을 쓸어넘기며 캔을 입에 가져다대는 중이었다. 민아의 뛰어난 시력은 캔 라벨에 새겨진 글씨를 선명히 포착했다.

...맥주잖아.

"한 캔 줄까? 집에 맥주가 많거든. 저번에 가득 사다 놔서."

"...우리 방송하는 거 아니었어?"

"응. 설정 바뀐 거 확인하려면 켜보긴 해야지."

"근데 벌써부터­ 앗, 차가!"

원룸은 작은 공간이었다. 냉장고부터 민아가 앉아있는 침대까지는 몇 걸음이면 충분했다.

그녀가 입을 연 순간 가까워진 혜진은 차가운 맥주 캔을 민아의 목덜미에 가져다 댔다. 습기 머금은 냉기에 목덜미로부터 소름이 퍼져나간다.

머리는 여전히 상황 파악을 못하고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그런 건 신경쓰는 거 아니야."

그러고 민아를 쳐다보는 얼굴엔, 드물게도 미소가 걸려있어서.

민아는 대답도 못하고 혜진만 바라봤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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