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화 〉 151 친해지는 약을 드셔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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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알코올에 찌들어 흐리멍텅한 정신을 가지고 있을 때 보다 원활한 의사소통이 가능한 기묘한 짐승이다.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는 게 제정신으로는 하기 힘든 일이어서 그런 걸까. 크기만 한 대가리로 허튼 수작을 부리는 것보단 취기에 휘둘려 진심을 내뱉는 쪽이 훨씬 이로웠다.
무슨 말을 할지 단어를 골라 조합하는 일은 또 얼마나 귀찮은가. 차라리 서로 필터 따위는 치워버리고 나누는 대화가 편한 법이다. 그러다 간혹 대참사가 발생한다는 단점을 고려해도 그랬다.
적당히 오른 취기는 벙어리도 입을 열게 만든다. 취미가 안 맞아, 코드가 안 맞아, 성격이 안 맞아... 인간 관계를 틀어막는 온갖 장애물을 술 하나로 타파할 수 있다니. 술은 인간 관계의 치트키요, 반칙이라.
관계 개선에 어려움을 겪는 머저리들이 술에 의존하게 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은 끝내 부정한 방법에 손을 대기 마련이잖나.
그러니까 나도 마찬가지였다.
"땅콩도 있는데. 꺼내줄까?"
"어, 아냐. 이 정도면 충분한 걸."
이건 정말 상투적인 대화인데.
사실 민아가 무슨 대답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 손은 이미 찬장에 넣어둔 땅콩을 뜯고 있었으니까. 작은 탁자에 올라오는 안주가 하나 둘 늘어날 때마다 몸 둘 바를 모르고 움찔거리는 반응이 재밌어서 멈출 수가 없었다.
뭐가 더 있나. 평소 안주를 늘어놓고 먹는 편이 아닌지라 떠오르는 게 많지 않았다. 라면 은 너무 과한 거 같고.
아무렴, 이 정도면 이미 진수성찬이다.
탁
땅콩이 든 작은 접시를 내려놓고는 민아의 얼굴을 쳐다봤다. 한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방황하는 시선이며, 어디에 둘지 몰라 어색하게 움찔거리는 손까지. 이제 막 성인으로 접어든 여성은 전신으로 어리벙벙한 감정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당황할 일인가? 애초에 지인의 자취방에 찾아왔다면 할만한 일이라고 해봤자 음주밖에 더 있나. 늦든 빠르든 이건 정해진 결과였다. 순서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일이 시작되기 전에 마시는 술은 일종의 윤활유 역할을 수행한다. 어린 아가씨는 그런 것도 모르고 땅콩 하나를 집어들었다. 손이 선뜻 맥주 캔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녀가 주저하는 까닭은 해가 중천에 떠있는 시간 때문일까, 이제 막 교류를 시작한 사람의 자취방이라는 어색한 공간 때문일까. 둘 모두일 가능성도 충분했다. 새로운 환경에서 경계심을 끌어올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니까. 주는대로 술이나 받아먹는 놈이 더 이상한 놈이겠지.
그러나... 대낮의 자취방이면, 이보다 더 완벽한 주점은 없는 것이다. 물꼬만 트이면 몇 병이고 술을 퍼마실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이곳이었다.
뒷감당 생각을 잊을 정도로 집주인과 친해야 한다는 전제가 붙어있지만, 그건 순서를 바꿔 생각해도 큰 지장이 없다. 지금부터 친해지면 될 일이 아닌가. 술이라는 치트키가 있는데 그게 뭐 별건가.
아, 생각하는 사이에 벌써 한 캔을 다 마셨다.
치익
"소맥할래?"
"...일단 맥주부터 마실게."
그래. 맥주 코팅으로 위장을 보호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민아는 그 작은 손으로 맥주잔을 들어올렸다. 집에 단 두 개 존재하는, 프리미엄 잔. 둥근 주둥이에 입을 가져다 붙인 그녀는 목구멍으로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부었다.
문득 뒤풀이 때 쪼망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도 잔을 마주하는 족족 커다란 맥주잔을 비워냈던 것이다. 옅게 상기된 얼굴로 건내주는 과일을 받아먹는 모습이 꽤나 귀여웠지. 똘주인가 뭔가가 꽐라가 되어 댈런의 부축을 받을 무렵에도, 쪼망의 눈은 똘망똘망했던 것 같다.
내 안에서 민아의 호감도가 하나 올라갔다.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은 일단 호감이 간다. 술 친구는 언제나 드물고 귀하거든.
땅콩을 집어먹는 게 다람쥐를 닮았다는 점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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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이 맥주 맛있다. 헤헤. 혜진이 너는 언제부터 자취하고 있는 거야? 나는 집에서 방송하고 있어서 조금 부럽다. 사실 나도 자취하려고 방을 알아보고 있거든. 집에서는 방송 시간에 제약도 많이 받구..."
"반 년쯤 됐나."
"와, 되게 신기하다. 내 주변에는 기껏해야 기숙사 들어간 친구들 뿐이라서. 어떻게 자취하게 된 거야? 혼자 살려고 하면 준비해야 할 것도"
"쫓겨났거든. 자의반 타의반으로."
정확히 말하면 혜진의 의지지, 내 의지는 아니다. 내가 저지른 일도 아닌데 책임은 내가 져야 한다니. 이것도 참 억울한 일이다.
"...어? 어, 그 미안."
"뭘 미안해. 집 나갈 때 원룸 받은 사람인데 무슨."
정말로 그랬다.
때때로 생각하는 것인데, 내가 혜진이 되지 않았을 때의 만약이다. 혜진이라는 사람은 이 원룸 안에서 어떻게 살아갔을지.
집을 나왔을 때 받은 천만 원으로, 아등바등 몇 달을 버티다가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갔을까? 아니면 히키코모리 성질을 깨부수고 알바라도 시작해, 홀로 살아갈 길을 찾아보려 했을까? 그도 아니면...
가정은 언제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결론이 도달하는 지점은 다 똑같다. 부질없는 생각이라고. '만약'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말이다. 일어날 수도 있었던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한낱 망상에 지나지 않는.
나는 소주병을 들어 비어있는 맥주잔을 채워넣었다. 한잔 분량에서 끊기엔 애매한 정도로 남아있는 액체를, 과감히 전부 때려붓는다. 투명한 액체가 꽤나 높은 곳까지 차올랐다.
"이 방은 어때? 어떤 것 같아? 혼자 살고 있는 사람의 방인데."
"으응, 생각한 거랑은 조금 다르네. 근데 나는 혜진이 너처럼은 못 살 거 같아. 지금 내 방만 해도 얼마나 더러운데."
"그런 건 전혀 상관없는 거야. 원래 발 디딜 공간만 있으면 사람 사는데는 지장이 없거든."
"그래도 깔끔하게 하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혼자 살아도, 음. 친구들이 올 수도 있고~. 지금처럼."
"아무도 신경쓰지 않아. 네 의사가 중요하지."
동그란 눈이 내 눈과 마주쳤다.
두서없는 이야기가 오가는 중이었다. 지금의 화제는 민아의 기약 없는 자취 계획이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격언을 실감하지 못하는, 젊은 20대의 소박해 보이는 꿈. 술이 날림공사로 만들어낸 일시적 인간 관계가 생각보다 기꺼웠다. 사람의 온기가 부쩍 따스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 법이다.
주는 술을 거절하지 않던 민아는, 어느새 얼굴에 옅은 홍조를 띄운 채였다. 사람의 인상은 살짝 풀린 눈 하나로 이렇게나 달라질 수 있었다. 고추라도 달고 있었으면 다른 감흥을 느끼지 않았을는지.
어처구니 없는 생각에 취기가 올랐음을 자각하게 된다.
"어? 소주가 없네... 내가 나갔다 올까~."
민아의 조그만 손이 소주병 주둥이를 잡고 흔들었다. 탁자 공간이 모자라 바닥에 줄 세워둔 소주병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세 병. 평소 냉장고에 채워두는 비축분을 전부 소진한 셈이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주가 떨어졌다고 웅얼거린 민아는 정말 술을 사러 나가려는 것처럼 몸을 일으켰다. 몽롱하게 풀린 눈동자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아니, 아니지. 쪼망씨는 이제 제 캠 설정을 봐주셔야죠."
"쪼망, 쪼망씨! 쪼망씨는 안 돼. 민아라고 불러야지. 미나라고 불러죠. 그럼 나도 혜진이를 도와줄게."
갑자기 무척이나 유쾌해졌다.
난 소주병들을 민아의 발치에서 치우고, 연행하듯 팔짱을 끼고는 그녀를 컴퓨터 의자에 앉혀놨다. 얇은 셔츠 위로 와닿는 온기가 따스하다. 술을 마시면 열이 오르는 타입인가.
내가 팔뚝을 붙잡자, 몸을 기대며 얼굴을 부벼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굉장히 경을 칠 것 같은 술버릇인데.
"네, 네. 민아씨. 방송 초짜 노르드를 도와주세요."
"헤, 노르드는 방송 초짜가 아닌걸요. 무~려! 대기업 쭝의 대기업이라구요~."
"하지만 캠 설정도 혼자 못 잡는 캠방 초보자인데요. 민아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응, 도와줄게! 대신 나 좀 주물러줘어. 조금 추운 것 같아."
진짜 경을 치겠는데.
나는 칭얼대는 민아의 청을 들어 그녀의 목덜미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여기도 살짝 따뜻한 것이, 정말 추위를 느끼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방금까지 맥주캔을 쥐고 있던 내 손이 훨씬 차가운 것 같은데. 민아는 좋다고 중얼거리며 턱을 내려 내 손에 부비적거렸다. 좋다는데 뭐 어쩌겠나. 나는 모를 일이지.
침대 모서리에 앉아 책상 앞에 앉은 민아를 주물럭거리고 있는 꼴이 누가 보면 참 우습게 느껴지지 않을까 싶었다.
취한 와중에도 머리는 온전히 굴러가는 건지, 민아는 제법 멀쩡히 마우스를 움직이며 캠 설정을 만지기 시작했다. 나는 의자 등받이에 턱을 기대고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음, 이렇게 보기만 해서는 기억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세부 설정을 하나하나 건드는 것이 꽤나 복잡해 보였다.
"으응, 진짜 거의 기본 설정이구나. 감마도 안 만져놨네... 이 정도면 원본 화질이야."
"원본으로 나와도 별 문제는 없지 않나? 보통은 어떻게 쓰는데."
"혜진이 너는 괜찮은 거 같아. 얼굴에 굴욕이 없는 걸. 그치만 보통은 외부 조명까지 설치해서 보정 넣는 경우가 많아. 화장으로도 커버가 안 되는 모공이 있으니까..."
"그래? 나는 근데 조명은 따로 안 쓸 거야. 눈에 너무 안 좋을 거 같아서."
"으응, 알았어."
민아는 몇 분인가 더 설정을 만지작거리고는, 곧장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모니터 위에 설치된 둥근 카메라에 빨간 불빛이 들어왔다. 화면 가운데에 민아의 얼굴이 비쳤다.
얼마간 설정을 건드린 보람이 있는지 송출된 화면은 내가 사용하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하나 남은 형광등 때문에 뿌옇게 내리쬐는 실내의 조명 상태는 여전했는데, 카메라에 잡힌 민아의 얼굴은 선명하고 밝았다.
힘 풀린 눈꼬리나 옅은 분홍빛이 감도는 볼따구가 전부 의도된 화장처럼 느껴졌다. 이런 것도 보정이 하는 역할인가. 이럼 대놓고 술을 마셔도 모를 것 같은데.
민아는 카메라 쪽을 쳐다보더니 환한 얼굴로 미소지었다. 갑자기 쪼개다니, 이게 캠방 전문가의 표정관리인가. 민아가 웃는 모습이 담긴 캠 화면은 전반적으로 화사한 느낌이 가득했다. 이런 세부 설정이 가능했다니. 역시 사람은 공부를 하고 볼 일이다.
그런데 나는 화사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중충하게는 안돼?"
"응?"
"좀 우중충한데 선명하게. 이건 너무 화사해서 거부감이 드네."
"으응, 밝기를 조금 낮추면 될 것 같은데... 그럼 얼굴에 음영이 생길 거야."
"그게 좋겠어."
"..."
나는 민아의 살결을 톡톡 건드리면서 요구사항을 읊어갔다. 뒷목에서 귀로 이어지는 라인을 조심히 어루만질 때마다 움찔하고 몸을 웅크리는 게 꽤나 재밌었다. 얼굴에 붉은기가 강해지는 것이 취기가 올라오는 듯했는데, 이젠 내가 민아의 온기로 손을 녹이는 지경이었다.
계속 움찔하면서도 설정을 이어나가는 게, 보고 있으면 고마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슨 선물이라도 해줘야겠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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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이~. 응? 옆에, 비밀방으로 켜보면 되는 거 아냐? 폰으로 확인해도 되잖아."
"그게 더 귀찮은 거 같은데."
"아냐아냐, 역시 아냐. 내가 다 확인해줄게! 나, 나 폰 여기 있어! 그니까 방송은 일단 다음에 키자. 응?"
"합방하자고 한 건 너였잖아."
"...아무리 그래도, 응. 너무 많이 마신 거 같은 걸. 나 음주 방송 같은 거 해본 적 없단 말이야..."
"내가 도와줄게. 전문가거든. 아, 방송 켜졌다."
"어?"
[저녁방송이라니]
[ㄴㅎㄴㅎ]
[또 공지 안하고 켰네,,,]
[알람 나만 안울림?]
[]
[시간대를 보니까 오늘은 노캠인가요 선생님...]
[마이크켜라]
[키는 김에 캠도 같이좀]
[이 시간에 방송? 진짜 웬일이야]
"아, 아. 마이크 킬게."
"아아아아니, 나 마음의 준비가 필요"
툭, 치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