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 152 낯선 곳에 방문하면 조심해야지
* * *
마이크를 켰는데도 당장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치직하는 소리를 들었을까. 채팅창은 슬금슬금 방송 시작을 알리는 멘트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걸 보고 있자니 괜히 이 정적을 깨부수기가 싫어졌다. 여기서 내가 아니라 민아가 입을 열면 어떤 반응이 일어날지. 목소리만으로 정체를 알아낼 수 있을지가 궁금했다. 일단 내가 아니라는 건 눈치챌 수 있을 텐데.
슬쩍 민아를 바라보니 입을 앙 다물고 있는 모습이다. 눈이 땡그래졌다. 방송을 키겠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정말 켜진 걸 보고 놀란 눈치였다. 경직된 얼굴을 보아하니 술기운도 조금은 날아간 듯했다. 볼에 감도는 옅은 홍조가 아니라면 취한 티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과연 늘어지던 말투도 정상적으로 돌아왔을지. 돌연 민아가 어떻게 말할지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옆구리를 찔렀다.
"햑!"
[???]
[ ㅜㅑ]
[아니 뭔소리야;;]
[선생님??]
[어떤 계집이 비명소리를 내었어]
단말마로는 술기운을 파악할 수가 없구나.
뒤로 돌아 나를 쳐다보는 눈초리가 제법 매서웠다. 동글동글한 눈매를 억지로 삐뚜름하게 만들고는, 미간에 힘을 팍 줘서 험악한 인상을 만들려는 게 꽤나 노력이 가상했다. 토끼나 다람쥐가 맹렬히 하악질을 한다고 생각해보라. 본성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물론, 대개는 효과를 보는 일도 드물었다.
"아아. 안녕하세요."
나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인사말을 내뱉었다. 침대에 앉은 상태로 말하려니 마이크가 너무 멀어서, 의자를 조금 밀어내고 내 몸뚱이를 밀어넣었다. 자연스레 내 팔뚝에 맞닿은 민아의 몸이 움츠러드는 게 느껴졌다. 제 스스로 말을 못한다는 약점을 만들었으니 놀리기가 한결 수월하다.
캠을 공개하지 않았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나는 시청자와 쪼망을 동시에 놀리고 있는 셈이다. 시청자와 민아가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킨 방송이었는데, 이렇게 놀리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예기치 않게 방송이 길어질지도 모르겠다.
이상하게 별다른 걱정이 없었다. 술을 마신 날에는 유독 변덕이 심해지는 것이다.
"아, 아. 잘 들리나보네. 원래 오늘은 휴방을 하려고 했거든요. 근데 갑자기 방송을 하고 싶어져서요. 그럴 때가 있잖아요."
말을 하고 채팅창을 확인하니 수긍하는 채팅과 개소리라 매도하는 채팅이 반반씩 균형을 이뤘다. 앞서 민아가 내지른 비명에 대해 의아해하는 채팅도 남아있는 게, 역시 고음의 비명 소리가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나와 함께 채팅을 훑던 민아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는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게 재밌어서 다시 옆구리 찌르는 시늉을 하니 기겁을 하며 멀어졌다. 몸을 기댈 곳이 사라지니 마이크를 대고 있는 것도 불편한데.
"일로 와."
마이크를 떨어뜨리고 말하니 조금 머뭇거리다가 의자를 끌고 가까이 다가온다. 내 손끝을 유심히 지켜보면서도 순순히 말을 따르는 게 재밌었다. 의자를 붙잡아 달아나지 못하게 해놓고 캠을 켜버릴까. 당혹감이 극에 달하면 쪼망은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다.
아니, 그건 시청자들이 더 좋아할 거 같으니 그만두자.
옆에 사람이 있기 때문일까. 이상하게도 불안한 마음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가만히 있으면 늘어지는 몸뚱이가 조금 불편할 뿐이었다. 지금은, 그저 민아의 반응이 궁금했다. 시청자들의 반응도. 남을 놀래키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잠시만, 마실 것 좀 가져올게."
일부러 마이크에 들릴 정도로 크게 말했다. 우리 상황을 모르는 시청자들은, 저게 누구를 향한 말인지 알아차리지 못할 터였다. 나는 민아에게 시간을 준 셈이다. 그대로 없는 사람인 척 입을 다물고 있거나,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거나.
합방은 의외로 재밌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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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으, 어떻게 하라는 거야!'
민아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취기 때문이 아니다. 기분 좋게 올라오던 술기운은 혜진이 갑작스레 방송을 켠 순간 빠르게 날아간지 오래였다.
캠 설정을 마쳤을 즈음 곧장 방송을 시작하더니, 빠르게 모여드는 시청자 앞에서 옆구리를 찔러대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예상할 수 있겠는가. 자신도 모르게 내지른 비명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서 맴돌고 있는 것 같았다. 얼굴에 뜨거운 열기가 올라왔다.
혜진은 정녕 이상한 사람이었다. 태연히 자신을 집으로 초대하더니, 자연스럽게 술을 마시기 시작하고. 분위기에 휩쓸려 함께 술을 마셨더니 어느 순간 자신이 방송 모니터 앞에 앉아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권을 뺏기고 끌려다니기만 했던 것 같았다.
술을 마시면서부터는, 혜진에게서 눈을 떼기도 힘들었다. 어떻게 사람의 몸이 저렇게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휘어지는지. 술기운 때문에 힘이 풀린 몸이 나른하게 움직이면 무의식적으로 시선이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뭔가 벽을 친 것 같은 태도도 한순간에 뒤바뀌어서, 그 차갑던 눈초리가 부드럽게 풀려서는 웃음기를 머금고 반달처럼 휘어지기도 했다. 그럼 또 인상이 극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넋을 잃고 웃는 얼굴을 쳐다보고 있으면, 뭘 그렇게 뚫어지게 보냐는 질책이 돌아왔다. 이게 몇 번이나 되풀이됐는지 모른다.
민아는 고개를 돌려 혜진이 있는 쪽을 확인했다. 마실 걸 가지러간다는 그녀는, 작은 포트에 물을 채워넣고는 끓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자신과 눈을 마주하고는 샐쭉하게 웃더니 손을 입에다 대고 말하는 시늉을 반복했다.
역시, 곤란에 빠진 모습을 지켜보면서 즐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술을 마시기 전에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작정하고 놀리려는 모양이다. 진중하고 차가워 보이던 혜진은 어디로 갔을까. 어쩌면, 적당히 취기가 올라온 저 모습이 혜진의 본심일지도 모른다. 급속도로 가까워진 거리감이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이대로 마냥 휘둘리고 싶지는 않았다.
"큼, 큼. 저, 안녕하세요!"
[뭐여]
[누구임??]
[언년이야]
[????]
삽시간에 잔뜩 올라가는 채팅창이 너무나 어색했다. 입을 열기 전 했던 다짐은 무수한 갈고리를 마주한 순간 바로 무너져버렸다. 방송을 켠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렇게 많은 시청자가 모여들었는지. 힐끔 바라본 시청자 숫자가 곧장 부담감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 중 쪼망이라는 스트리머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무리 크게 잡아도 절반이 안 될 것 같았다.
"저, 저는 노르드 동료 스트리머 쪼망이라고 하는데요. 오늘 특별히 집에 초대를 받아서, 그, 게스트로 참가하게 됐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정리되지 않은 문장이 두서없이 쏟아졌다. 민아는 지금 자신이 무슨 정신으로 말하고 있는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평소같으면 올라오는 채팅을 하나하나 읽으면서 천천히 생각을 정리할 텐데. 노르드의 채팅창은 그 속도부터가 어지러울 지경이라, 읽고 있으면 폭포에 떨어져내린 것처럼 정신없이 휩쓸리기 바빴다.
마음의 준비도 하지 않은 채로 맞닥뜨릴 문제가 아니었다. 방황하는 민아의 눈이 그대로 혜진에게 향했다.
누가봐도, 도움을 요청하는 눈짓이었다.
탁
"아아, 진정들하시고. 공지도 없이 방송 킨 것도 다 쪼망씨 덕분입니다. 저는 원래 오늘 방송 안 하려고 했거든요. 저녁 방송이라니, 이상하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도 쪼망님께 감사하셔야 돼요."
[진짜 상상도못했네]
[그럼 둘이 같은 곳에 있는거임?]
[쪼망 이 불여시같은련,,, 우리 센세는 못준다]
[저녁방송이 뭐가 이상한데요 제발..]
[현실합방이면 캠을 켜!!!!]
[이분 술한잔하셨구만]
[쪼망이 누군데 10련들아 ㅋㅋ]
[아까 신음소리도 쪼망이었나보네ㄷㄷ 대체 뭔짓을 했길래...]
[이게 무슨 조합이냐;]
민아는 혜진이 건낸 컵을 들고 엉거주춤하게 물러났다. 마이크를 잡은 혜진이 허리를 굽히고 모니터 앞자리를 차지해, 물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혜진의 입 밖으로 나오는 말투며 표정 따위가 그녀의 눈앞에 생생하게 다가왔다.
대면하고 대화를 나눌 때와는 또 다른, 노르드의 모습이다. 채팅창이 시시각각 요동치는 와중에도 혜진의 얼굴에서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두손으로 마주잡은 컵에서 따뜻한 온기가 올라온다. 녹차였다. 자연스레 코까지 올라오는 익숙한 향기가 마음에 안정을 주는 것 같았다.
"자. 쪼망씨. 안정이 좀 되셨나요? 캠 킬라니까."
"...어?"
"괜찮아. 지금 딱 좋아. 얼굴도 예쁘네, 쪼망씨."
"아니아니아니"
말릴 새도 없었다.
마우스 클릭 몇 번에, 민아가 그토록 염려하던 일이 그대로 실현된다.
우측 모니터 상단에 설치된 카메라에 붉은빛이 번쩍였다. 화면 하단에 이미 실행되어버린 캠 화면을 어찌하지도 못하고, 이 순간을 턱 없이 길게 체감하는 중인 민아는 실시간으로 송출되고 있는 방송 화면을 확인하기 위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혜진의 의견에 따라 조금 어둡게 설정된 화면 속으로, 두 여성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밝은 베이지색 상의와 새까만 검은색 셔츠가 대비되어서... 극명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물론 민아의 시선에는 놀란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빠지게 입을 벌리고 있는 자신의 얼굴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각하고 나서도 표정 관리가 쉽지 않은 까닭은, 그만큼 당황했기 때문일까.
민아는 곧장 양손으로 얼굴을 뒤덮었다. 점차 뜨겁게 열기를 더하는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이건 무슨 창피함인지. 상기된 볼, 평소보다 약간 처진 듯한 눈꼬리, 옅은 화장기, 눈 화장이 살짝 번진 것도 전부. 혜진의, 노르드의 카메라는 그녀의 치부를 모두 포착하는 것 같았다. 방송 화면에 나오는 자신의 얼굴이 왜 이리 어색한지, 민아는 얼굴을 들어올리기가 힘들었다.
혜진은 아무렇지 않은 듯 등을 돌리더니 어디선가 접이식 의자를 끌고 왔다. 그때까지도 회복하지 못하고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민아는 제 목덜미를 살며시 두드리는 손가락의 감촉을 느끼고는 고개를 저었다. 손가락을 교차하며 톡톡 두드리는 것이 점차 괴상한 리듬을 타고 움직였다.
"우리 쪼망씨가 조금 부끄러운가 보네요. 님들이 자꾸 쳐다보니까 그래요. 그러니까 화면 좀 줄이겠습니다."
...고개를 숙였는데도 채팅창의 아우성이 들려오는 기분이다.
여전히 목덜미를 두드리는 손가락이 별것도 아니라는 둥 그녀를 희롱했다. 얼굴로 치솟은 열이 조금씩 식어가고, 자신의 닉네임을 계속 언급하며 놀려대는 혜진의 목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그제서야 민아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요동치는 채팅창을, 어떻게 읽어가면 좋을까.
방송 화면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화면 하단부, 크기를 줄인 캠 화면에서 나란히 앉은 자신과 혜진의 모습이 보인다. 움츠려든 자신과 달리 혜진은 여유롭게 잔을 입에다 대고 있었다. 오늘 몇 번이나 다시 내용물을 채워넣었던, 맥주잔이다. 이 와중에 또 술을 마시고 있는 건가. 대체 어떤 신경을 가졌는지...
아니, 이렇게 된 이상 술이나 더 마시는 게 정신건강에 이로울지도 모른다.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편할 텐데. 방송사고, 방송사고는 캠을 켠 순간 이미 발생한 게 아닌가. 이런 몰골로 방송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맥주줄까? 녹차로는 조금 부족해 보이는데."
때마침 저런 제안을 하는 것도 그렇다. 민아와 눈을 마주한 혜진은 다시 한쪽 입꼬리를 샐그러지게 만들고는 미소지었다. 넘어가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쉽게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검은 셔츠 때문에 혜진의 창백한 피부색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이렇게 보면 정말 위험한 제안을 건내오는 느낌이다.
민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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