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화 〉 153 자고 가라는 사람은 보통 위험하다
* * *
시청자는 얼추 이만 명을 넘어섰다.
벌써 한 시간이 넘어가는 방송 런타임에도 불구하고, 미리보기로 확인되는 노르드의 방송 화면은 조금 이상했다.
화면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새까만 검은색이다. 화면 우측으로 작게 띄워둔 채팅창이 올라가고, 그 밑으로 조그만 창 하나가 위치했다. 방송 화면을 9개로 쪼갠다면 그 중 한 칸을 차지할 수 있을 정도의 작은 크기. 조명이 부족한지 전반적으로 뿌옇게 뜨는 듯한 묘한 캠 화면이다.
참신한 여백의 미였다.
그 비효율적인 설정을 유지한 상태로 방송은 이어졌다. 시각의 공백을 채울 흔한 노래 하나 나오지 않는다.
노르드와 쪼망이 잔을 기울이느라 입을 열 수 없을 때는, 방송이 순간적으로 정적에 잠겼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기묘한 방송이었으나... 굳이 따진다면 이건 함께 술을 마시는 먹방에 가까웠다. 작은 캠 화면 속 두 여성이 천천히 음주를 이어가는 느긋한 방송.
잔이 비어갈수록 오고 가는 대화가 늘어나는 게 시청자들의 흥미를 더했다. 누가 뭐라 해도, 결국 재미가 없으면 시청자들은 떠나가기 마련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늘어나고 있는 시청자의 숫자는 노르드와 쪼망 사이에 오가는 대화가 어떤 식으로든 매력적으로 비춰졌기 때문이리라.
얼굴이 공개된 이후로도, 노르드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은 커지면 커졌지 줄어들 일이 없었다. 술기운에 취해 간혹 튀어나오는 사적인 대화는 목마른 시청자들에게 꽤나 자극적인 소재를 제공했다.
아무튼, 노르드는 평소 사생활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응? 아냐아냐. 버스타고 가면 금방이잖아. 응. 다, 다음엔 나랑 같이 갈까? 직관 되게 재밌다고 하던데..."
"사람이 너무 많아. 그때도 사인 기다리는 거 고역이었어."
"사인? 아, 팬미팅 같은 건가? GB는 인기가 워낙 많으니까아... 그럼 선수들 사인 다 받아온 거야?"
"어. 동생이 부탁해서."
어느샌가 자연스럽게 반말을 주고 받는다.
민아는 흘끔 채팅창을 확인했다. 가라앉은 듯 보였던 취기는 쏟아부은 맥주에 의해 다시 발화해서,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다. 잠깐 채팅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지금 시청자들의 반응이 어떤가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었다.
자신의 방송이라면 가슴이 철렁일만한 상황이다. 원활한 소통은 커녕 둘이서 대화만 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보면 현실에서 만나 합방을 하는 건 민아에게도 첫경험이었다. 방송을 시작하고는 자기 방송을 구상하는 일에 바빠서, 다른 스트리머와 가까워지기는 커녕 하루하루 컨텐츠를 짜고 편집하는 게 전부였으니까. 갑자기 켜진 방송에 크게 당황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경험 부족이요, 애초에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건 그녀의 장기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 민아의 마음은 생각보다 편한했는데.
옆자리, 책상 한쪽에 팔을 얹어두고는 그녀의 눈을 주시하는 혜진의 존재감 때문이었다.
"응, 혜... 노, 노르드는 채팅창을 엄청 작게 띄워두네. 이러면 게임할 때 채팅창 보기 힘들지 않아? 나는 이것보다 두 배는 큰데도 많이 놓치게 되던데."
"그래서 잘 안 보잖아."
"...어?"
[ㅅ,ㅂ 어쩐지]
[이 시대 불통의 아이콘]
[쪼망님한테 이상한거 가르쳐주지 말아주세요;]
[쪼망 얼빠진 표정ㅋㅋㅋㅋㅋ]
[저,,,저뇬 뻔뻔한 표정좀 보소,,, 낯짝 두께 수준,,,]
[캠 키워달라고 78트째]
<달펭이 님이="" 10,000원="" 후원!=""/>
두분 혹시 동갑이신가요? 반말이 자연스럽네요
"엇..."
습관처럼 후원 소리에 반응한 민아가 잠시 머뭇거렸다.
새삼스럽지만 노르드에 대해선 베일에 감춰진 것들이 많았다. 그 중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는 얼굴이 밝혀진 다음에도, 그녀의 신상에 대해선 아직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혜진의 외모를 생각하면 당장 인터넷 어딘가에서 목격담이 나올 법도 한데, 아직까지 조용한 걸 보면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다. 하다못해 학창 시절의 동창이 튀어나올 수도 있는 노릇아닌가.
이렇게 많은 시청자들 사이에서 노르드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민아 자신인 셈이다. 얼굴도, 본명도, 나이도... 심지어 주소까지 알고 있는 수준이니까.
귀한 정보는 감추고 있는 것도 일이다. 민아는 재차 입을 조심해야겠다는 다짐을 반복했다. 여태 혜진이 숨기려했던 정보가 자신 때문에 퍼져나가는 일은 없어야만 했다. 그녀와의 관계를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예, 맞아요. 동갑. 스물둘."
아니.
"...그냥 말해도 되는 거였어? 방송에서 나이 말한 적 없는 거 아냐?"
"이미 대충 알 텐데, 뭐. 굳이 말할 이유가 없어서 안 했던 것 뿐이고."
"그럼 이름은"
"그건 안돼. 쉽게 알려주면 재미가 없잖아."
잔을 들어올리는 모습에서 여유가 넘쳐흘렀다. 방송 진행에 차질이 생긴다고, 최소 상한을 올려둔 후원 소리가 배경음이라도 된 것처럼 연달아 울려퍼졌다. 아마 자신의 방송이었으면 리액션을 하느라 아무것도 못하고 있지 않았을지.
민아는 천천히 후원을 읽어가는 혜진을 바라봤다. 그녀도 슬슬 취기가 올라오는지, 왼쪽 손으로 턱을 괴고는 마우스를 움직이는 중이었다.
몽롱한 와중에도 혜진의 얼굴은 선명하게 들어왔다. 속눈썹이 예쁜 곡선을 그리며 눈을 뒤덮는다. 혜진은 그렇게 술을 마셨는데도 얼굴이 붉어지지 않았다. 안 그래도 하얀 피부가 더 창백하게 질린 것 같아서, 민아는 눈을 떼지 못하고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다.
[22... 젊다 젊어]
[선생님 머리에 피도 안마르셨네요]
[이뇬 말하는 거 보면 아재나 다를바없는데]
[아니 스물둘한테서 왜 나틀딱냄새가 이렇게 진하게 풍겼지??? 이해할수가없는데]
[민증까봐]
[얼굴은 20대초반 맞긴해]
[게임취향은 대체 왜이럼]
[센세 고졸인가요?]
<노칼영원해 님이="" 10,000원="" 후원!=""/>
쪼망님이랑은 어떻게 친해지셨나요? 그리고 쪼망님이랑 친해졌다고 칼고 버리지 말아주세요...
한 번 질문에 대답했기 때문인지, 채팅과 후원을 가리지 않고 질문이 쏟아졌다. 숨이 턱 막히는 상황이다. 굳은 머리로는 필터가 제대로 작동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민아는 대답하기 힘든 채팅창을 막연히 쳐다보고 있기보다 혜진의 얼굴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알코올로 둔해진 머리가 내린 현명한 판단이다.
질문에 대한 취사선택은 오롯이 혜진의 몫이었으니.
"쪼망씨랑은... 그냥 친해졌죠. 게임 취향도 맞고."
"아, 제가 적극 어필했어요! 뒤풀이 때부터 친해지고 싶어서, 헤헤."
"...그런 거야?"
"그때 다들 비슷한 생각했을 거야. 첫인상부터 장난아니었잖아. 등장할 때도, 으응. 나도 얼마나 놀랬는데. 근데 접근하기가 쉽지 않아서... 칼고님이랑은 편하게 얘기하길래 엄청! 부러웠지. 오렌지 까줬을 때 얼마나 기뻤는데, 헤. 움."
인상 깊었던 기억이 떠올라 신나서 이야기하던 민아의 입에 혜진의 손이 침투해 들어왔다. 자연스레 입이 막힌 민아는 입 속에 들어온 이물질을 오독오독 씹느라 정신이 없었다. 씹을 때마다 고소한 향기가 입 안으로 퍼져나간다.
안주로 가져온 아몬드였다.
[뒤풀이 썰 제발 자세히 풀어줘]
[등장? 무슨 레이드몹이냐?]
[칼고랑은 편하게? 칼고랑은 편하게? 칼고랑은 편하게? 칼고랑은 편하게? 칼고랑은 편하게?]
[눈나 나도 오렌지까서 먹여줘]
[도배하지마 10련아 채팅창 혼자쓰냐]
[노르드센세의 손맛이 담긴 아몬드...]
[쪼망님 커엽네요]
[꺼졌던 우결의 불씨가 불타오른다]
<쪼망님화이팅 님이="" 30,000원="" 후원!=""/>
쪼망님 노르드 첫인상 얘기좀 더해주세요
"움움... 거의 영화 같았어요. 저희가 그때 방에서 있었거든요. 다들 말하는 중이라 시끄러웠는데, 들어오는 순간에 확! 뭔가 시선이 집중되는 그런 기분 있잖아요. 그러면서 방이 완전 조용해지는 거예요. 움."
연달아 아몬드가 입으로 들어온다.
견과류가 담긴 접시와 자신의 입을 꾸준히 오가는 혜진의 손을 보면서, 민아는 다시 고개를 돌려 혜진을 마주했다.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것 같은데... 반개한 눈동자가 당장 입을 닥치라고 말해오는 것 같았다.
첫만남의 선명한 기억을 되새기며 들떴던 민아는 금새 입을 다물고 혜진이 건내는 아몬드를 받아먹었다. 고소한 향이 가득한 입 속이 너무나 텁텁했다. 사람 입을 막으려면, 아몬드를 공급하면 되는 구나.
견과류를 잔뜩 욱여넣은 볼이 크게 부풀었다. 혜진은 말없이 부풀어오른 민아의 볼을 연달아 찔러넣었다. 민아는 입 안 가득 품은 아몬드를 묵묵히 씹어삼키느라 바빴다. 작은 원룸이 잠깐 정적에 잠겼다.
[식고문ㄷㄷ]
[아 왜 더 듣고싶다고]
[입을 틀어막아버리네]
[선생님 입 다물고계시면 무서워요]
[쪼망님 다람쥐임?]
[그게 질문임?]
[너무 커엽다ㅋㅋ]
[나도 볼 찌르고 싶어]
"으움, 다 먹었다. 목 막혀서 죽는 줄 알았어."
"마실 거 좀 더 갖다 줘?"
"에, 아니야. 더 마시면 안 될 거 같아. 술냄새 풍기면서 집에 가는 것도 그렇구..."
"자고 가던가."
"어? 그래도 돼?"
"응. 이불도 있어. 동생이 자주 들러서."
"그, 그래?"
민아가 들뜬 심정으로 원룸을 두리번거렸다. 자고 가라니. 상상도 못한 권유다. 대뜸 집으로 초대를 하는 것도 그렇고, 혜진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담했다. 한 번 마음을 트면 완전히 문을 열어버리는 사람인 걸까.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어떤 측면이든 자신을 좋게 봐줬나 싶어서.
<ㅇㅇ 님이="" 10,000원="" 후원!=""/>
씨발 둘이 연애하냐?
직설적인 후원이 묘한 정적을 깨부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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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우리 이렇게 술만 마셔도 되나? 무슨 게임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화면도 이렇고... 헙, 시청자 수가 이렇게 많은데!"
"잔이 비었네. 와인 가져올까? 저번에 하우스 와인 몇 개를 사다놨거든."
"으응, 와인... 아니, 그게 아니라! 우리 이래도 되는 거야?"
술이 들어간 민아는 제법 텐션이 높아보였다.
취했다는 듯 얼굴을 붉히고는, 눈을 크게 뜨고 모니터에 손가락질을 반복한다.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초조하게 나를 바라보는 것도 그렇고. 아마 시청자가 예상보다 훨씬 많아서 놀란 모양이다. 뭘 저렇게 놀라는지. 재미가 없으면 알아서들 나가지 않겠나. 민아의 반응이 새삼스러웠다.
조금 과하게 숫자가 크기는 했다. 최근 저녁 방송을 안 했더니... 아니, 이게 합방의 힘인가? 하기야 술에 휘둘려 웅얼거리는 쪼망이 귀엽기는 했다. 저 톡톡 튀는 반응을 보기 위해 남아있는 시청자들도 많을 것 같은데.
나는 괜스레 앉아있는 민아의 볼을 콕콕 찔러넣었다. 밀어넣은 검지에 따라 볼이 말캉거리며 흔들린다. 이것만 하게 해줘도 팬미팅에 몇백 명 정도는 몰려들지 않을까.
취했는지 헛생각이 늘어났다.
방송 화면을 바라보면, 모니터를 마주하는 내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화면 우측 하단의 작은 창이다. 실시간으로 볼을 찔리고 있는 민아는 시무룩한 건지 초조한 건지 뭔지 모를 표정으로 내 손가락을 감내하고 있고, 화면 속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민아를 찔러대는 그림이다. 내가 연출한 거지만 참 기묘하다.
문득 살을 콕콕 찌르는 불쾌한 통증과 이유모를 불안감이 전혀 찾아오지 않고 있다는 걸 자각했다. 이건 위대한 술의 영향일까, 아니면 쪼망의 존재 때문일까. 왠지 이 상태로 캠을 확대해도 별 지장이 없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유는 없다. 어찌보면, 이건 충동에 가깝겠지.
"그럼 일단 캠 좀 늘릴까?"
"응?"
어차피 대답을 필요로 한 질문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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