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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4화 〉 154 ­ 저지를 때는 잘 몰라 (154/243)

〈 154화 〉 154 ­ 저지를 때는 잘 몰라

* * *

의식되는 게 당연하다.

민아는 어느샌가 화면 하나를 가득 채운 자신과 혜진을 보고는 한숨을 토해냈다.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온 숨결에도 취기가 묻어있는 것 같아, 멍한 와중에도 일말의 경각심이 솟아났다. 이 상태로 방송을 이어가면 뭔가 사고를 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

보라색 액체가 반쯤 남아 찰랑거리는 유리잔을 흠끔 내려다보고. 민아의 머리는 금새 걱정거리 하나를 지워냈다. 정돈된 생각은 희뿌연 안개 속에서 길을 잃기 마련이다.

지금 그녀의 정신에 아른거리는 건, 역시 얼빵하게 비춰지는 자신의 얼굴 뿐이었다. 분명 몇 번이나 화장실을 왕복하며 화장을 고쳤는데. 본판이 부족한 탓인지 카메라에 포착된 자신의 얼굴이 계속 걸리적거렸다. 멍청하게 풀린 눈꼬리는 올라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게 계속 그녀의 마음에 걸렸다.

고칠 수도 없는 얼굴 생각을 이렇게나 반복하는 까닭은, 옆자리에 앉은 동갑내기 친구 때문일 것이다.

자신과 비슷한 페이스로, 혹은 그보다 더 빠르게. 연거푸 잔을 비우고 있음에도 별다른 흐트러짐이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민아가 찾아낼 수 있었던 건 힘 풀린 듯 내려앉은 눈꺼풀 뿐이었는데, 그마저도 혜진의 미모를 깎아내리지는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나른한 분위기가 강조되서 더... 있어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흐릿한 조명 때문에 얼굴에 드리운 음영도 일종의 특수 효과처럼 느껴졌다. 옅은 화장기조차 흠이 아닌 인간이다.

분명 같은 환경에서 똑같은 렌즈에 담기고 있을 텐데 어떻게 이리도 차이가 나는 건지.

자신과 달리 멀쩡한 낯빛도 계속 눈에 걸렸다.

"잠깐 이리 줘봐!"

"뭘."

민아는 손을 뻗어 혜진의 남색 머그컵을 뺏어들었다. 자신과는 다른 잔. 혜진이 쓰고 있다고 생각하니 와인과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들어올린 컵은 생각보다 묵직하다. 조심성 없게 가져온 탓인지, 컵 안에 담긴 액체는 이리저리 출렁거렸다.

반 정도가 남았을까. 짙은 남색의 머그컵은 그 진한 색깔로 속에 담긴 내용물을 몽땅 뒤덮은듯했다. 안에 든 내용물이 시커멓게 나타났다. 육안으로는 도통 무슨 색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흐릿한 형광등을 비추기 위해 이리저리 잔을 돌리고 나서야 언뜻 보라빛 액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와인색이 맞기는 한 것 같은데.

민아로서는 이게 자신과 같은 와인이 맞는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같은 술을 마시고 있는 게 맞다면, 왜 자신만 이리 얼굴을 붉히고 있다는 말인가. 자신은 잔뜩 취하게 만들고는 혹시 포도 주스나 마시고 있는 게 아닐지. 나사빠진 조잡한 논리는 반쯤 정신줄을 놓은 민아의 앞에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 대령했다.

그녀는 뺏어든 컵을 쥐고 호쾌하게 들이켰다.

꿀꺽­

"...와인이야!"

"...와인이지."

무심하게 이쪽을 쳐다보는 혜진의 눈초리가 매서웠다.

표정을 지운 그녀의 얼굴은 너무 차가워서, 그저 내려보는 것만으로 한 사람을 상처 입히기에 충분한 수준이다. 혜진의 눈빛 속에서 한심하다는 감정을 멋대로 찾아낸 민아가 이번엔 자신의 유리잔에 담긴 액체를 목구멍에 들이부었다.

달짝지근한 첫 맛 뒤에 씁쓸한 텁텁함이 따라붙는다. 머그컵의 내용물과 같은 맛이다.

애주가가 아닌데도 출렁이는 액체가 묘하게 매력적이었다. 이젠 매번 따라붙던 안주도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았다. 민아의 시선이 유리잔과 머그컵을 여러 차례 오고 갔다. 다른 잔, 같은 와인. 같은 술. 같은 알코올. 혜진과 나.

"왜에... 너는 안 취하는 거야? 나는 지금 어지러운데."

"나도 어지러워."

"전혀 그런 거 같지 않은 걸. 얼굴엔 티도 안나고, 나만, 나만 빨개져선..."

"난 원래 티가 잘 안 나. 예전부터."

"그런 게 어딨어!"

정말, 불공평한 사람이다.

희뿌연 감정은 몽롱한 정신에 힘입어 이런저런 모양으로 변하기 일수였다. 오늘 낮까지만 해도 동경심이었던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열등감 내지는 질투의 형태로 변화했다. 사실 단어만 다르지 뿌리는 다 같은 것들이 아닌가. 의식해서 주물럭거리지 않아도 감정의 모양은 참 쉽게 변한다.

민아는 혜진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했다. 카메라를 통해 여과되지 않은, 노르드의 맨얼굴. 필터가 없는 현실인데 왜 불순물이 보이지 않는 걸까. 보고 있으면 오히려 캠으로 투영되는 사이버 혜진이 뭔가 더 부족해 보이는 것이다. 현실 속 혜진은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더 성숙해지는 것 같았다. 이상했다. 보통 캠이 더 예뻐야 하는데. 분명 설정을 만지면서 기본적인 보정을 넣어두었음에도... 역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의뭉스레 내뻗은 손이, 이번에는 혜진의 얼굴로 향했다.

"부드러워!"

"...많이 취하셨어요, 쪼망씨."

"너무 부드러워!"

"......"

손에 와닿는 부드러운 감촉이 일품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피부였는데, 직접 만지니 손가락을 타고 따듯한 온기가 올라온다. 손이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뭉쳤다가 풀어지는 와중에도 혜진의 얼굴은 일그러지지 않았다. 되려 알 수 없는 불만감에 민아의 미간만 찌그러졌다.

얼굴이 갸름해서 만질만한 볼살도 별로 없잖아. 이것도 자신과 달랐다. 얼굴을 실컷 만지고 있는데도 별다른 변화가 없는 저 표정도 그랬다. 볼살이 없으면, 얼굴이 작고 피부가 창백하면 감정을 표현하기가 힘들어지는 걸까.

민아의 양손 엄지 손가락이 혜진의 입술 끝자락에 맞닿았다. 살며시, 부드러운 입술에 손가락이 닿을락 말락 할 정도로. 이내 두 엄지가 혜진의 입술을 밀어올렸다.

"웃어줘."

"......"

"웃어줘!"

이쯤되면 영락없는 취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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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녹화하고 있는거맞죠?? 나 파일하나만 보내줘]

[이걸 생방으로 봤네...]

[쪼망이가 술을 마시면 채팅창을 안보는구나 ㅎㅎ; 첨알았다]

[대체 얼마나 마신거임 이분들]

[쪼망님 술버릇 진짜ㅋㅋㅋㅋㅋ너무 귀욥다]

[센세 얼굴좀 펴세요;]

[눈나 귀찮아하는 표정 너무 좋아요 퓨ㅠㅠ]

[육수새기들 존재감 드러내기 시작하노ㅋㅋㅋ]

[캠 설정부터가 불순한데?]

[방금 나 노르드랑 눈마주쳤어.. 죽어도 여한이 없어...]

[ㅈㄹ하네 ㅂ,,ㅅ]

[만취한 두 사람이 원룸 안에서]

[걍 병째 드링킹하고 꼴아버리죠 ㄱㄱ]

[오늘 방송으로 육수를 얼마나 끓인거야]

[이거 다시보기 무조건 삭제된다]

.

.

.

다들 뭐라 지껄이고 있는 걸까.

나는 그보다, 말갛게 웃으며 내 얼굴을 만져대는 민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바빴다.

이 무구한 초식동물은 전신에 알코올이 퍼져나간 뒤에야 진가를 발휘했다. 카메라가 포착하는 곳, 간혹 카메라가 포착하지 못하는 곳까지... 내 몸 이곳저곳을 더듬어오는 손길에는 한 줌의 주저도 담겨있지 않았다.

손길을 쳐내도 아랑곳하지 않고 팔을 뻗어온다. 그걸 강하게 후려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적당히 올라온 취기를 누르고 취객을 다스리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 덕분인지 주량을 한참 넘어선 것 같은데도 정신이 제법 멀쩡했다. 나까지 의식을 놓아버리면, 분명 큰 사고가 터지리라는 불안감 때문일까.

술자리에서는 본래 먼저 취하는 사람이 승리하는 법이다. 자기 행동에 대한 자괴감이야 정신을 차린 이후에나 찾아오는 일이고.

냉혹한 현실에선 아무런 도움의 손길을 기대할 수 없었다. 직면한 상황은 대체로 직접 해결하는 것이 옳다. 저 구경꾼들을 보라. 제 삼자란 근본적으로 남이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고 좋아라하는 성질을 지녔다. 괜히 도움을 기대해봤자 실망만 가지고 돌아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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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좋다

...칼고에몽, 너마저.

나는 애써 민아를 마주보기 위해 노력했다. 초점 없는 눈동자가 나를 보고는 이상하게 번뜩거렸다. 분명 취했다. 반쯤 취한 내가 보기에도 취했어. 지켜보는 몇만 명이 동일한 판단을 내리게 하기도 쉽지가 않은 법인데, 지금은 아마 전부가 동일한 판단을 내리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눈앞에 있는 젊은 여성의 상태를 진단하고는 최대한 부드럽게 손을 떼어냈다.

떼어내려 했다.

"후훙, 손도 부드럽구나아."

얼굴에 달라붙었던 손가락이 내 손으로 옮겨 붙었다. 하얀 것이 얼기설기 꼼지락대며 이런저런 모양을 만들었다. 손의 감촉이 마음에 들었는지, 민아는 내 손을 잡아끌어 가져가더니 끝내 제 얼굴을 대고 부비적거렸다. 이번엔 내 손이 그녀의 얼굴을 만지작대는 형편이다. 기묘한 전세역전에 헛웃음이 흘러나온다. 이전에 실컷 볼을 만지작거린 복수를 당하고 있는 걸까.

방송에 노출되는 정도를 생각하면, 이 복수는 과해도 너무 과했다. 드러나는 얼굴 크기만 대충 4배는 될 것 같은데. 이 어지러움이 취기 때문만은 아닐 거라 확신할 수 있다. 자기 손으로 처리되지 않는 문제는 언제나 현기증을 유발하곤 했는데, 내 생각에 그게 지금이었다.

클립 따이는 소리가 여기서도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안 졸려?"

"안 졸려!"

술버릇은 하필 유아퇴행이다.

한동안 내 손을 부비적거리던 민아는 내 말에 재깍 반응했다. 이제 그만 잘 시간이 됐다는, 어린이 달래는 식의 설득은 씨알도 먹히지 않을 눈치였다. 하기야 요즘 애들 한테도 그런 설득은 통하지 않을 것 같다. 대가리가 부쩍 성장한 22세 어린이한테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

문득 가족까지 생각이 닿았다. 혜민이는 분명 방송을 보고 있을 테고. 내 동생의 친구라는 민아의 동생은 과연 이 방송을 보고 있을까. 보고 있다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제 누이에 대한 걱정일지, 아니면 놀림거리가 생긴 걸 기뻐하고 있을지. 방송을 끄면 곧장 전화를 해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해결책을 찾는 것도 고역이다. 과거 술자리의 위기 상황을 어떻게 극복했던가. 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취객을 어르고 달래기보다 술을 더 먹여 인사불성 상태로 만드는 걸 선호했다. 가망 없는 설득을 들을 때까지 반복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몸이 고생하는 게 낫다는 판단이다.

과한 음주로 토악질을 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으나, 그건 어떤 경우나 매한가지였으니. 땡깡을 부리며 고집을 피우는 사람을 데려가느니 그나마 기절한 몸을 끌고 가는 게 편했다.

오늘 하루 민아를 재운다고 가정하면, 그 방법은 훨씬 쉽고 간편해진다. 그냥 될 때까지 술을 먹이다 침대에 눕히면 그만이다. 칭얼대는 투정을 몇 번 정도 받아주면 금방이겠지.

그쯤되면 나도 정신줄을 놓고 기절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오히려 자발적으로 기절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몸도 마음도 지쳐가는 순간이다. 내게 음주는 힐링 타임이었건만, 음주 방송은 그렇지도 않았다.

채팅창은 여전히 잔뜩 들뜬 분위기였다. 무슨 축제라도 났다는 반응이다. 시청자는 시간이 갈수록 고점을 갱신할 뿐이고, 채팅은 민아의 일거수일투족에 환호하며 지들끼리 함성을 내질렀다. 난 새삼스럽게 광대가 된 기분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런데도 불안감이 찾아오지 않는 걸 보면... 정신이란 건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아무튼 기뻐하는 시청자들을 보고 있자니 의사결정이 한결 쉬워졌다. 일단은 방송을 종료하는 게 먼저겠지.

"5초 지나면 방종하겠습니다. 5, 4, 3..."

쏟아지는 갈고리 세례가 내 카운트를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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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네. 아... 보셨다고. 그럼 어머님한테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예. 아니요, 제가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술을 과하게 해서. 네. 네? 아, 혜민이가. 예. 괜찮습니다. 자고 있어요. 네, 아침에 연락 드리라고 전할게요."

민아는 아득하게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는 정신을 차렸다.

"으응..."

"아."

몽롱한 정신. 왠지 모르게 전신이 무겁다. 평소보다 한없이 둔감한 감각에 마치 물 속에 있는 먹먹함이 느껴졌다. 힘겹게 몸을 뒤척일 때마다 부드러운 무언가가 온몸에 감겨든다. 민아는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마침내 빛을 흡수하려던 눈을, 무언가가 막아선다.

"더 자."

귓가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따스하다.

눈가를 가로막은 무언가로부터 포근한 온기가 내려왔다. 귓가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자장가같은 속삼임을 이어간다. 무거운 전신이 힘을 잃고 푹신한 바닥에 몸을 맡겼다. 상황파악을 못하고 버둥거리던 전신이 평온함을 되찾아가는듯했다.

속절없이 몰려드는 졸음에 민아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아직, 흑역사를 마주하기엔 이른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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