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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5화 〉 155 ­ 늘 다음날이 문제지 (155/243)

〈 155화 〉 155 ­ 늘 다음날이 문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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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날이 있다.

의식이 돌아오고 나서부터다. 잠들기 전, 전날의 기억을 자연스레 되짚는 뇌의 부팅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평소 같으면 1분 내외로 마무리되어야 할 과정이 차례차례 오류를 맞이했다. 기억이 흐릿하다던가, 차마 맨정신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기억들이 떠오르는 것이다.

조각난 기억의 파편을 수복하는 동안 뇌는 과부하를 시작해 열이 오른다. 발작 증상이 일어나는 경우도 허다하다. 맥락없이 발로 이불을 차올린다던가. 몸을 뉘인 곳에서 사정없이 뒹군다던가.

그건 꽤나 괴로운 과정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다. 떠오르지 않는 기억이 많다면 가슴이 더 크게 내려앉고, 수용하기 어려운 기억이 많다면 열이 더 뜨겁게 오르는 정도. 어느 쪽이든 뭐가 더 낫다고 말하기 힘든 상황이다. 뒷수습을 해야 하는 건 둘다 매한가지였으니까.

민아의 경우를 말하자면, 그녀는 후자였다.

"으우우우우­!"

베개에 얼굴을 묻고 소리를 지른다.

매질을 잃은 아우성이 베갯잇에 묻혀 사그라들었다. 마음 같아선 더 크게 비명을 지르고 싶었으나 민아는 공간의 제약을 잊지 않았다. 반쯤 패닉 상태에 가까운데도 혜진의 존재가 의식되는 것이다. 지금은 몇 시지. 혜진은 아직도 자고 있나. 아니면 잠깐 밖을 나갔다던가­ 하는 생각들.

잠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린지 몇 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 비몽사몽한 정신을 추스리고, 전날의 기억을 되살리는 동안 커다란 충격이 그녀의 정신을 강타했다. 그것도 여러 차례.

기억을 감당하는 그녀의 뇌 기관은 한낱 알코올에 흔들릴 정도로 약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잔뜩 술에 취한 와중에도 어떻게 생각하고, 움직였는지가 또렷하게 기억났다. 인상적인 기억은 너무 선명해서 색채를 가지고 움직인다. 혜진의 얼굴을 부여잡고 만지작 거렸던 일, 손을 꼬옥 잡고 문지르던 일, 부드러운 허벅지를 살살...... 그만두자.

살다보면 종종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게 되는 때가 있는 법이었으나, 이건 도가 지나쳤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움직였는지도 생생히 떠오르는 것이다. 본래 질투만큼 추악한 감정은 없다고 하던데. 보드랍고 예쁘다고 웅얼거리며 연신 어루만졌었지. 민아는 자신에게 그런 술버릇이 있는지 이제서야 깨달았다. 평소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것 하나 알기 위해 치른 대가가 너무 뼈아픈 거 아닌가.

차라리 죄다 잊어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망각의 행복을 상실한 그녀는 괴로움에 발버둥쳤다.

"일어났어?"

속삭이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몸을 웅크리고 만다.

이미 한바탕 발작을 일으킨 직후였다. 더 부끄러울 일이 남아있다니. 민아는 베개에 파묻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정리되지 않은 머리가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어떤 얼굴로 집주인을 마주해야 할지 판단하기 힘들었다. 자기자신을 다스리기 바쁠 때다. 혜진의 시선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어제의 행동을 꾸짖을까? 아니면...

민아는 수면의 여파가 남아있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려, 흐릿한 빛 속에서 혜진을 바라봤다.

이른 아침. 커튼을 걷어낸 창가에서 빛무리가 들어온다. 원룸 안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건 어젯밤 기억 속의 희뿌연 형광등 빛이 아니라 창가에서 쏟아지는햇살이었다. 창의 크기를 생각하면, 그렇게 많지도 않은 희미한 불빛. 방 안을 가득 채우기엔 턱없이 모자란 양이다.

혜진은 그 빛을 받으며 서있었다. 금방 샤워를 하고 나왔는지 전신에 생기가 가득하다. 침대를 향해 몸을 살짝 기울이고는, 누워있는 민아를 내려다보는 자세였다.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당황스러움을 느끼기도 전에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예기치 못한 기습을 받은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한다. 더는 숨을 곳도, 물러날 곳도 없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자신도 모르게 팔꿈치 언저리로 힘이 잔뜩 들어갔다.

의뭉스럽게 아래를 보는 눈빛은 무슨 감정을 품었는지 도통 파악하기 힘들었다. 경멸도, 비웃음도 아닌 것 같은데... 의중을 가늠하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 어느샌가 다가온 혜진의 손이 민아의 목을 쓸어내리듯 어루만졌다. 부드러운 손바닥이 조금 서늘해서 기분이 좋았다.

"열이 조금 있는 것 같은데. 괜찮아? 속은 좀 어때."

이 무슨 따뜻한 걱정이란 말인가.

"아, 괜찮아..."

민아는 말을 뱉은 이후에야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했다. 열이 난다고? 그러고 보니 조금 어지러운 것도 같았다. 속은 더부룩한 것 같기도 하고. 아무리 봐도 좋은 컨디션이라 말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아니, 그보다... 너무 가까워서 생각에 집중하기가 힘들다. 혜진의 기다란 머리카락 일부가 차양막처럼 쏟아져내렸다. 그게 주변을 틀어막는 효과를 발휘해, 민아의 시선은 온전히 혜진의 얼굴로 향하는 중이었다. 깨끗한 맨얼굴에서 눈을 돌릴 수가 없다. 각도 때문일까.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동자는 새까만 검은색이었다. 눈을 마주하고 있으면 거기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드는, 깊은 느낌의 검은색.

저기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고 있다. 기억을 감당하지 못하고 바둥거리던 모습도, 당혹감에 옴짝달싹 못하는 멍청한 모습도, 방금 깨어나 눈곱도 떼어내지 못한 못난 얼굴도­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한 순간, 민아가 발작을 하듯 몸을 비틀며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앙­! 나, 나 일단 씻고 올게!"

새빨갛게 달아오른 귓볼을 숨기고, 민아는 화장실로 뛰쳐나갔다.

.

.

.

"아침 먹을래? 죽 끓였는데."

"응... 고마워."

양손으로 마른 세수를 반복하면서 대답했다.

여덟 시. 생각보다 이른 시간이다. 화장실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보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대던 민아는 상쾌하지 못한 아침을 맞이했다. 당장 확인해야 할 것들이 셀 수 없이 많았지만, 일단 포기하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간밤의 술상은 이미 혜진이 처리한 것 같았다. 깔끔하게 정리된 원룸은 민아가 처음으로 방에 들어섰을 때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그 속에 고소한 냄새가 퍼지고 있다는 걸 제외하면 정말 이전과 똑같은 모습이다. 몇 개째인지 모를 민폐에 가슴이 무거워졌다.

혜진은 현관 근처에 위치한 싱크대에서 분주히 손을 움직였다. 품이 커다란 검은색 박스 티가 그녀의 골반까지 길게 내려왔다. 하의는 무릎 위에 걸치는 길이의 반바지. 다소 커보이는 옷을 자연스레 입고 있는 걸 보면, 저게 그녀의 평소 복장인 것 같았다.

자신이 혜진에게 가졌던 상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떠올려보면 원룸에 처음 들어왔을 때도 비슷한 충격을 받았었지. 생각보다 훨씬, 자유롭고 분방한 모습. 그런데도 그게 너무나 잘 어울렸다.

"먹자."

멍하니 혜진을 구경하고 있으니 그녀가 금새 냄비를 들고 다가왔다. 방 안에 고소한 냄새가 가득 퍼진다. 속이 살짝 불편한 와중에도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였다. 양은 냄비에 가득 담긴 내용물은, 계란죽이다. 혜진이 건내준 밥그릇을 받아든 민아가 국자를 퍼올렸다.

들어간 게 별로 없는 것 같은데도 죽은 맛있었다.

"어때? 맛은 좀 괜찮나."

"응. 맛있어."

"먹을 만큼만 먹어. 남겨도 상관 없으니까."

"으응..."

"..."

"..."

"어, 어디서 잤어? 미안하네, 내가 침대를 다 차지해버려서."

"이불 피고 바닥에서 잤지. 푹 잤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다음엔 차라리 같이 자는게 좋겠다! 나 혼자 쓰기엔 조금 크더라고. 헤헤. 헤..."

"그래."

"..."

"그... 죽이 진짜 맛있다! 간이 참 잘 맞네. 참기름 넣은 거야?"

"응. 조금 넣었지."

"..."

"..."

"나, 어떡하지?"

달그락하는 소리와 함께 혜진이 민아를 바라봤다.

민아의 커다란 눈망울과 뚜렷한 이목구비는 가지각색의 감정을 선명하게 투영했다. 웃으면 주변이 밝아질 정도로 행복한 인상으로 변하고, 시무룩하다는 듯 눈꼬리를 내리고 있으면 주변 사람 누가 보더라도 우중충하다 여길 만큼 우울하게 느껴졌다. 본인이 알고 있을지 모르겠으나, 민아는 감정이 여과없이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혜진과는 상반된 특징이다.

지금도 그랬다. 끝이 내려간 눈과 입. 바닥 어딘가를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처리. 빛을 잃어버린 눈동자는 누가 봐도 음울하다. 실내 조명이 부족한 탓에 얼굴에 드리운 음영조차 부정적인 인상을 강화하는 것 같았다. 빈그릇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는 숟가락이 묘한 공허함을 더했다.

절로 한숨을 부르는 광경이다.

혜진은 턱 끝까지 차오른 한숨을 간신히 집어삼키고 말했다.

"뭘 어떡해."

"방송에서 그런... 그런 모습을 보여줬는데."

"그런 모습이 뭔데. 너 실수한 거 없... 별로 없어."

"봐봐! 혜진이 너도 실수했다고 생각하고 있잖아! 나, 나 다 기억하고 있다구.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막, 아무렇게나 만져... 만지고! 그런 짓 못하게 그냥 날 때리지 그랬어!"

"그렇게 호들갑 떨 일은 아니야."

"아냐, 절대 아냐! 시청자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겠어. 방송 끝날 때쯤엔 얼굴도 엉망일 거 아니야. 안 그래도 여기 캠 너무 적나라하단 말이야. 나, 난 진짜 절대로 방송 다시보기 못 할 거 같아. 무슨 정신으로­ 아! 다시보기, 다시보기 지웠지? 지웠다고 말해줘. 제발 부탁이야."

"...지웠지."

"또! 또 대답 늦었어! 바로 안 지웠구나!"

"해 뜨기 전에는 지웠어."

시시각각 변하는 얼굴이 아주 인상적이라고, 혜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말도 안 돼!"

재차 언성을 높인 민아는 폭발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 몸 이곳저곳을 비틀었다. 격한 반응과는 달리 화를 풀 곳이 없어 버둥거리는 모습이다.

정말 성질이 더럽다면 탁자라도 내려쳤을 텐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제자리에서 울먹이는 민아를 보고 있으면 되려 웃음이 나오는 것이다. 세안을 해서 깨끗한 맨얼굴이 어린 나이를 드러내는 것 같아서, 지켜보는 혜진은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막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샌드백이라도 있었으면. 혜진은 역시 속으로만 생각했다.

"너무 걱정하지마. 시청자들은 오히려 좋아했으니까."

이것도 민아의 기분을 풀어주지는 못했다.

"나 어떡해... 방송 창피해서 어떻게 해... 당장 오늘 방송이 있는데!"

"휴방을 하면 되잖아."

"우으... 살려줘."

혜진은 대답도 없이 조용히 식기를 정리했다. 아침으로 죽을 선택한 건 꽤나 적절했던 모양이다. 말을 그렇게 했지만 음식물 쓰레기가 나오는 건 역시 불편하지. 비어버린 양은 냄비가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듯했다.

혜진은 민아의 걱정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녀보다 한 시간은 더 일찍 일어나 어제했던 합방의 반응을 확인해봤기 때문이다. 그래봤자 일부분에 불과했으나, 여론은 대충 비슷한 것 같았다. 게시판 인기글은 여론을 판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가 아닌가. 혜진이 확인한 어제자 합방의 여론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파고들면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우선 표면상으로는 그랬다.

민아, 쪼망에 대한 반응도 마찬가지일 터다. 그 방송의 주인공은 누가 뭐라 해도 민아였다. 취해서 진상을 부린 것도 아니었으니, 아마 그녀를 귀엽게 생각하는 여론이 대다수이지 않을런지.

혜진은 이런 생각을 민아에게 전하지는 않았다. 이미지가 완전히 망가졌다고 저러고 있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전할까.

그리고, 굳이 따지면 말하지 않는 편이 더 재밌기도 하고.

"아. 민아야, 어머니한테 전화 한 번 드려. 어제 내가 연락을 하긴 했는데. 아침에 전화드린다고 했어."

"어, 어... 어? 통화를 어떻게 했어? 내 핸드폰 잠금이었을 텐데."

"전화가 왔거든. 네 동생한테."

"아... 걱정했나 보네."

"응.

아, 그리고 방송 잘봤다고 하더라."

"뭐­!"

짧은 비명 소리와 함께 이어지는... 3차 발작.

혜진은 방바닥을 뒹구는 민아를 뒤로 하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식사를 하자마자 식기를 정리하는 건 자취생의 참된 덕목이었다.

오늘은 음악도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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