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화 〉 157 폭탄은 뒤에서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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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메일로 참가 명단 보내드렸으니까 그쪽 확인하시면 돼요. 아직 여성 참가자 분들은 확정이 되지 않아서, 확정된 남성 참가자 여덟 분만 보내드렸어요. 유출에 주의해주세요."
"아, 그럼 팀 밸런스는 주최측에서 임의로 정해주시는 건가요? 이거 좀 중요하거든요. 큼, 제가 이런 거 밸런스에 굉장히 민감해서..."
"네. 걱정하지마세요. 저희가 제일 신경쓰고 있는 부분이니까요. 완성된 팀 명단 보시면 납득하실 수 있을 거예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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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납득할 수 있다며.
스벅은 치밀어오르는 짜증을 억누르지 못하고 책상을 두어 번 정도 내리쳤다. 쿵쿵 거리는 소리와 함께, 밑동이 넓은 유리컵이 덜그럭거리며 흔들렸다. 방송용 리액션에 익숙해진 키보드는 세찬 진동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여주지 않는다. 괜히 힘만 빼고 있다는 자괴감이 들었으나 짜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람은 불합리를 겪고 억울해 하는 생물인 것이다. 그는 지금 매우 억울했다.
다시 한 번, 모니터를 확인한다.
잘못 확인했을 리가 없다. 모니터 속 메일은 이전과 같은 명단을 그대로 출력하고 있었다. 이번 대회에 참가하는 남성 참가자들의 명단이다.
여덟 명이 주욱 나열된 본문에는 친절하게도 이전 시즌 랭크 따위의 보충 설명도 첨가되어 있었다. 스벅은 참담한 심정으로 닉네임 옆에 표기된 참가자들의 랭크만 따로 읽어내렸다. 대부분이 이미 알고 있는 정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이건 사실상 확인사살이나 다름 없었다.
자기자신에 대한 확인사살. 그건 자실이라 봐도 무방한 게 아닌지.
킹, 킹, 퀸, 퀸, 퀸, 룩... 이게 말이 되냐고.
참가자들의 면면이 심상치 않았다. 대부분이 실력파로 유명한 방송인이다. 플랫폼의 차이가 있기는 했으나, 나이트폴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닉네임을 들어봤을 법한 인간들이다.
퀸 랭크 이상이면 단순한 경쟁전이 컨텐츠로 돌변하기 마련이다. 게임 실력이 방송의 재미와 직결되는 단계. 비숍과 룩을 오가며 매일 예능성 빌드를 고민하는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인간들이라는 말이다. 스벅은 대회 주최측을 향해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커플대항전이라는 이름에 완전히 낚여버렸다. 이렇게 실력적으로 뛰어난 유저들만 모았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남녀 혼합에 듀오팀이면, 아무리 생각해도 재미를 추구하는 느낌의 대회가 아닌가. 어색한 남녀 둘을 엮어 넣는 게 흥행을 보증한다는 건 상식과도 같은 일이다. 대충 커플팀을 구성하고, 연습 과정에서 티격태격하며 방송적인 재미를 만드는... 그런 다소 뻔하지만 재밌는 그림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참가자들의 랭크를 봐라. 이건 구성만 특이하지 사실상 나이트폴 인터넷 방송계의 올스타전이나 다를 바 없었다. 거기 자신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는 게 어이가 없는 수준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절대 참가하지 않았을 거다. 스트리머로서 참가하는 이벤트전은 언제나 양날의 검이었다. 대회를 보는 시청자 다수의 유입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었으나, 반대로 있는 시청자의 정을 뚝 떨어지게 만들 수도 있었다. 아무튼 대회인 이상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 힐난의 대상으로 점 찍히기 마련이다.
스벅은 그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미 수 차례 욕을 먹어본 경험이 있었으니까.
이 멤버로 대회에 참가하면 결과는 뻔했다. 팀이라고 해봐야 고작 두 명인 대회다. 자신의 파트너로 누가 오든 이미 몇 단계는 차이나는 실력 차를 극복하기는 힘드리라.
머릿속으로 대회에 참가할만한 여성 참가자를 생각하던 스벅은 금방 포기하고 체념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실력파 여성 게이머가 거의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저번 시즌을 퀸으로 마감한 우나밍 정도가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여성 게이머의 최대치였다.
스벅과 우나밍 조합으로, 현역 킹을... 무리수도 적당히 해야지.
스벅은 잠깐 참가자들의 이름을 다시 훑었다. 직접 칼을 맞대본 인간이 버젓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방송에서 재미삼아 스승, 스승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번엔 갑작스레 적으로 만나게 생겼다. 어지러운 쌍검의 궤적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현실이 존재했느니, 스벅에겐 이번 대회가 바로 그것이었다. 감정을 억누르며 모니터만 쳐다보기를 수 분. 체념을 마친 스벅은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
이미 대회의 들러리, 잔챙이 역할이 확정된 상황에서 그의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누가 될지 모르지만 자신과 팀이 될 사람과 친해지며 방송 컨텐츠에 집중할 수밖에. 경기 결과를 떠나 팀 분위기가 좋아지면 시청자들의 비난도 줄어들 것이 분명했다. 아무튼, 대회는 망해도 방송은 망할 수 없는 것이다. 쥐구멍이라도 살 길을 마련하는 게 맞았다.
문제는 누가 자신과 팀이 되냐는 건데.
스벅은 곧장 베타코드를 실행했다. 백날 천날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 대충 가능성 있어 보이는 사람들한테 직접 물어보는 게 훨씬 빠르겠지.
그의 마우스가 플랫폼 대전이라 적힌 채널로 향했다.
스벅:님들 혹시 이번에 커플대항전 제안 받은 사람 있나요~? 아직 여성 참가자는 명단 발표가 안들어와서 ㅎㅎ;;
dallon:??? 그게 머에요
dallon:나는 제안도 안왔는데...
돌돌주주:너한테 그런게 왜감ㅋ
dallon:지는
돌돌주주:난 받았는뎅ㅋ?
스벅:ㄹㅇ?
스벅:지랄하지말고 진짜로?
돌돌주주:구라임
스벅님이 메세지를 입력하고 있어요...
돌쇠야:저는 안 받았습니다.
스벅:알어 남자 명단은 이미 발표났어
dallon:먼 대회인데 남자 여자 명단이 따로 나와요?
스벅:커플대항전
dallon:??
돌돌주주:머야 넘 재밌어보이는뎅?? 왜 나는 초대안왔찌
스벅:쌉고수들만 초청됨 님 자리없음
돌돌주주:스벅오빠가 되는데 왜 내가 안되
돌쇠야:돼
스벅:나도 그냥 발판이야.. 칼고님도 나옴
dallon:ㅋㅋㅋㅋㅋ 칼고님이 있는데 스벅이
스벅:개새기가
dallon:그럼 여기선 그나마 쪼망님밖에 없을걸요? 여자도 비숍 상위는 돼야 비빌텐데
스벅:@쪼망e 쪼망씨 커플대항전 나가나요?
dallon:아니 쪼망님 방송중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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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벅:그럼 아는 여자 스트리머 없음?
돌돌주주:오빠가 그런말하니까 변태같애ㅋㅋ
스벅:샹년
dallon:저 우나밍님 알긴하는데 그런거 물어보기는 좀 그래서 ㅋㅋ
스벅:그분은 무조건 나올거같은데. 고랭크 여스가 너무 적어.. 남자들 저렇게 채워넣고 여자만 나딱으로 깔진 않을거라
돌돌주주:고랭크 여스면 여기도 있는뎅?
dallon:노르드님이 나가겠냐? 공방이라잖아 ㅡㅡ;
스벅:@쪼망e 쪼망님 나와요?
dallon:아니 방송중인 사람 왜케 불러요
스벅:난 한명이라도 알아내야돼 지금
dallon:왜요 뭐가 달라진다고
스벅:내 정신적 위안
돌돌주주:추하다ㅋㅋ
영양가가 없다.
한동안 진행된 대화는 다 저런 식이었다. 아직 방송 시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빈둥거리는 것들만 쓸모없는 말을 툭툭 던져댄다. 당연히 스벅의 의문에 대한 제대로 된 해답은 찾을 수 없었다. 하다못해 엘튜브 쪽 인맥이 넓은 해빙기라도 있었으면 다른 정보라도 얻어볼 텐데. 채널의 연장자는 좀처럼 대화에 참가하지 않았다.
스벅은 똘주를 향해 치려던 욕설을 지워버렸다. 계속 채팅을 지속해봤자 투닥거림만 길어질 게 뻔하다. 그럼 방송 준비도 늦어지겠지. 아무 소득도 없는 대화였으나 마음이 편해지는 효과는 있었다. 지금은 대회 걱정을 미뤄두고, 방송이나 준비하는 쪽이 좋으리라.
멍청한 대화에 보기 드문 참가자가 끼어든 건 그쯤이었다.
Nord:저 그거 나갑니다.
Nord:남자 명단 나왔나요?
전혀 상정치 않았던 등장이다.
공개 방송이라는 전제 때문에 아예 고려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애초에 '커플대항전'이라는 컨셉과 노르드를 이어붙일 수 없던 탓도 컸다. 심지어 이번 대회는 공방이지 않나. 깊은 교제는 아니었으나, 그간의 교류를 통해 이런 곳에 참가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얼굴 공개를 했다고는 하나...
스벅은 고개를 저었다. 대전제를 깨고 보면 노르드만큼 대회 흥행에 어울리는 스트리머가 어디있을까. 화제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다. 나이트폴에서 보기 드문 고랭크 여성 유저라는 점까지, 이런 대회에 이렇게 적합한 사람도 드물겠지. 주최측 입장에서 생각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고 싶은 참가자기는 했다.
순간 스벅의 머리로 주최측 관계자의 당당한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납득, 납득인가. 과연.
스벅은 들러리로 정했던 커플대항전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목표는, 당연히 우승으로.
아직 팀이 확정되기도 이전의... 당당한 설레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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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먹고 킵니다. 10분에서 15분 정도 걸릴 예정.
본 스트리머는 성실 방송을 지향합니다. 감사합니다.
[섹1111스]
[방송시간 너무좋고]
[노하~]
[성실방송...? 지럴좀 마십쇼]
[왜 엘튜브 영상 안올림? 왜 엘튜브 영상 안올림? 왜 엘튜브 영상 안올림? 왜 엘튜브 영상 안올림?]
[여기서 ㅈㄹ이야;; 투정은 엘튜브 댓글에다 남겨라]
[엘튜브에 캠영상 거의 안올라오는데 겁나 꼴받긴해요... 걍 무편집본 채널 하나 파면 안되나]
[쪼망이랑 술마신것도 좀 올려줘]
[그건 쪼망 신변보호때문에 안됨]
[몇명이봤는데 신변보호 ㅇㅈㄹ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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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켜진 방송은 조용했다. 방송을 시작한 직후 시청자들이 충분히 들어오기까지 뜸을 들이는 일이다. 소리 하나 흘러나오지 않는 검은 화면. 방송에는 적막이 흐르고, 시청자가 급격히 들어서는 채팅창만 점차 소란스러움을 더해간다. 노르드가 방송을 시작하면 으레 나타나는 패턴이다.
오늘 방송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변덕이 심한 그녀는 종종 이상한 방식으로 방송을 시작하고는 했는데, 오늘은 그렇지 않은 듯했다. 고요한 환경에서 시청자들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채팅을 이어나갔다. 이런 상황에 익숙한 것 같았다.
몇 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방송 화면이 뒤바뀌기 시작한다. 대기 화면으로 보이는 레이아웃, 컴퓨터 바탕화면, 인터넷 브라우저 등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뭔가 방송 설정을 건드린 걸까. 원하는 화면으로 전환하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이다.
휙휙 넘어가는 화면에서 눈을 깜빡거리는 잠깐의 사이. 드디어 화면이 전환을 멈췄다. 그 순간 느닷없는 풀캠이 방송 화면을 가득 채웠다. 곧장 방송 화면 중앙으로 혜진이 나타났다.
채팅창에 잠깐 정적이 일었다. 다음 순간 쏟아지는 정보량을 처리하기 위한 잠깐의 휴지였다.
표정 변화 없는 얼굴을 보면 의도치 않은 실수는 아닌 것 같았다. 혜진은 마치 사람의 눈을 바라보는 것처럼 카메라를 똑바로 마주했다. 선명한 화질이 옅은 갈색빛이 감도는 눈동자와 길게 내리뻗은 속눈썹을 모두 포착했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면서도 정면에서 렌즈를 마주보는 시선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간혹 입술을 열었다 닫는 것이, 내뱉을 말을 고민하는 모양새였다. 입력이 과하게 넘친 탓일까. 채팅창이 눈에 띄게 버벅였다.
이윽고 혜진이 입을 열었다.
"저, 스벅님이랑 커플이에요."
채팅창이 완전히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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