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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화 〉 159 ­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159/243)

〈 159화 〉 159 ­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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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드와 스벅. 두 사람의 합방은 갑작스러웠다.

해가 기울기엔 이른 시간이다. 스벅의 정규 방송 시간을 생각하면 이례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노르드의 방송이 스트리머 본인의 무분별한 멘트로 개판이 되어가고 있을 무렵, 스벅은 돌연 채팅창에 나타났다.

닉네임을 분별하기 힘들 정도로 빠른 채팅창 속에서도 스트리머를 상징하는 뱃지는 눈에 띄게 도드라져서, 시청자들이 스벅의 존재를 눈치채는 건 금방이었다.

화제, 혹은 화재의 주인이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꼴이다. 시청자들의 관심은 곧장 스벅에게로 넘어갔다. 채팅창이라는 작은 공간 속에서 만 명이 넘는 시청자가 스벅을 둘러쌌다. 스벅의 짧은 채팅이 외마디 비명처럼 흘렀지만 당연히 그걸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곳저곳에서 돌이 날아들었다.

채팅으로 변명을 쏟아내는 의미없는 발버둥을 반복하다가, 조금씩 여론이라는 폭력에 휘말려 스러져갈 즈음.

스벅은 더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노르드에게 통화를 걸어왔다. 적막한 방송에 베타코드의 기본 벨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커플 대항전의 기념비적인 첫 번째 합방은 그렇게 시작됐다.

"흠."

"...어때요? 제가 요즘 비숍에서 빌빌대고 있기는 한데, 암만 봐도 억까 같거든요. 저격이 하도 많아서. 제가 솔직히 비숍에 머물 실력은 아니잖아요. 방송 컨텐츠 챙길라고 이상한 빌드를 많이해서 그렇지, 선생님이 알려주신 검방이나 쌍검 쓰면 진짜 슉슉 올라갑니다. 제가 누구 제잔데요."

"삐숍...... 원상 복귀하셨네."

"...선생님? 아직 시즌 초반이라 그래요. 저 아직 판 수도 엄청 적어요. 아, 진짜로. 최근엔 성지에서 메이지로 살아남는 컨텐츠를 하느라­"

스벅의 말이 점차로 길어진다.

노르드의 말이 줄어들수록 그랬다. 둘다 입을 열지 않고 있으면 생기는 정적을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오디오가 비는 걸 견딜 수 없는 참된 방송인의 태도일지. 스벅의 입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스벅은 입을 놀리면서도 언제 상황이 이렇게 흘러갔는지를 생각했다. 갑작스레 성사된 합방에서, 또 갑작스럽게 나이트폴을 플레이하고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지금은 커스텀 매칭에서 노르드의 캐릭터를 마주하고 있었다. 노르드가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미끼를 던진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빠른 속도의 흐름이다. 커플 발언에 대한 화제는 이미 끝난지 오래였다.

그 와중에 방송각을 잡는다고 급하게 실행한 방송은 오늘따라 유난히 소란스러웠다. 노르드의 방송에서 넘어온 어그로들이 채팅창을 점거한 탓이다. 평소와는 다른 방송 시간에 어리둥절하며 찾아온 일반 시청자들이 금새 어그로와 시비가 붙었다. 신경써야 할 게 너무 많았다.

커플 대항전, 남녀 혼합팀, 듀오... 이렇게 차려진 밥상이면 조금은 두근거리는 시추에이션이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이게 무슨 꼴인지. 스벅이 기대한 그림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참가자 명단은 확인하셨나요?"

"예? 확인했죠. 선생님이랑 팀인 거 확인하고 신나서 달려오다가... 이 참사가 난 거 아닙니까."

"참사요? 무슨 말씀인지."

"아니... 아닙니다. 됐어요. 근데 명단은 왜요?"

"다른 팀 조합이나 실력을 알아야 연습이 될 것 같아서요. 누가 상대인지 알면 더 좋을 텐데."

지당한 말이긴 한데, 그걸 왜 벌써부터 따지나.

스벅의 불만과는 무관하게 노르드는 다시 침묵에 잠겼다. 검을 든 자세에서 가만히 서있는 모습을 보면 정말 참가자 명단을 확인하는 중인 것 같았다. 졸지에 팀 선정 첫날부터 진지한 연습을 시작하게 생겼다. 그것도 정규 방송 이외의 시간에.

스벅은 마른 세수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콧등과 눈두덩 주변을 문지른 손가락이 묘하게 번들거린다. 세안도 하지 않고 방송을 시작한 탓에, 얼굴에 기름이 가득한 모양이다. 오늘 캠을 켤 일은 없겠군. 스벅은 속으로 생각했다.

"고랭크 너무 많지 않아요? 저 남자 명단만 나왔을 때 욕할 뻔 했다니까요. 이런 밸런스 붕괴가 어딨나 해서. 솔직히 노르드님이랑 팀 안 됐으면 저 때려치고 나갔을지도 몰라요."

"티어 차이가 크긴 하네요. 남자나 여자나."

"그쵸. 여자는 그래도 노르드님 제외하면 비슷한 거 같기는 한데... 그, 노르드님은 듀오 게임 좀 해보셨어요? 솔직히 아직 감이 잘 안 잡혀. 이게 일대일이면 전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잖아요."

"그러게요."

...그러게요? 예상 문답을 저만치 빗겨가는 것도 대단한 능력이다.

스벅은 딱히 되받아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입을 다물었다. 나이트폴이 실행된 모니터를 확인하면 맞은편 자리한 노르드의 캐릭터가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둘이 마주하고 있는 곳은 연습용으로 설정된, 무기가 가득한 대련실이다. 사방을 둘러보면 온갖 병장기들이 잔뜩 늘어서 있었다. 노르드의 캐릭터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무기를 살펴봤다.

순간 아찔함을 느낀 스벅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니아니, 선생님? 왜 그렇게 훑어보십니까요. 오늘은 그냥 전략을 짜는 시간이 아닌지요... 상대에 맞춰 빌드를 골라본다던가 하는 그런 거."

"대진표도 안 나왔는데 뭘 어떻게 맞춰요. 그리고 오프라인 대회라 개별 대책 세우는 건 별로 의미 없을 거예요. 다음 상대로 누구 만날 줄 알고. 그러니까 기본 틀을 다듬는 게 맞죠. 전술적으로."

"...그게 지금 무기 고르는 거랑 상관이 있다고요?"

"네. 한계치를 봐야 하니까."

한계치.

스벅은 노르드의 방식을 잘 안다. 무려 첫 만남부터 가르침을 사사한 사이가 아닌가. 저 사람 같지 않은 선생은, 의외로 이론을 중시하는 성향이 강했다. 기본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면 발전이 불가능하다는 식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진짜 교육은 이론을 쑤셔 박은 이후에 시작됐는데, 머리로 학습한 이론을 몸으로 체화시키는 그 과정이야말로 노르드식 교육의 알파이자 오메가였다.

그러니까... 대련이 시작되면 아주 지옥 같다는 소리다.

"뭐, 뭔 한계치요?"

"빌드를 몇 개로 좁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게 연습하기도 편하고."

"그건 그런데..."

엉거주춤 대화를 나누면서도 스벅의 시선은 노르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창, 글레이브. 장병기가 모여있는 곳 근처로 걸어가 무기를 훑어보던 노르드가 발걸음을 돌렸다. 여전히 양손이 비어있는 채로. 무슨 생각인지 대쉬도 사용하지 않고 시장 돌아다니듯 천천히 걸어다닌다. 명백히 무기를 고르고 있는 모습이다. 스벅의 눈에는 사형 집행인이 도구를 고르는 장면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이윽고 발을 멈춘 노르드가 고른 것은 비교적 길이가 짧은 두 자루의 검이었다.

...쌍검. 안 좋은 기억이 또 하나 부상한다.

"꼭... 그걸로 하시게요? 다른 걸로 하면 안 되나요. 제가 PTSD가 있어서."

"아... 칼고한테 많이 맞으셨나."

아니, 너한테도 맞았었잖아.

말은 하지 않았다. 신경 건드리는 말을 해봤자 연습이 가혹해질 뿐일 테니까.

"칼고님 때문이에요? 확실히 제일 경계되는 팀이기는 하죠."

"음, 그것도 그런데. 제가 볼 때 대치 상태에서 제일 위협적인 사람인 것 같아서요. 칼고...님이 쓰는 쌍검 빌드가 제일 대처하기 힘들 거예요. 아무 대책도 안 하고 보면."

그건 그렇다.

플랫폼 대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스벅은 칼고의 도움을 받아 쌍검을 연습했었다. 그 과정에서 칼고와의 일대일도 여러번 경험했다. 같은 빌드를 가지고, 같은 조건 하에서. 연습이라 가볍게 플레이했을 텐데도 스벅은 칼고의 털 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쌍검을 들면 킹 랭크에서도 매드무비를 찍을 수 있는 인간. 적이라고 생각하면 확실히 기가 질린다.

"검방 들어요. 아니면 제일 자신 있는 걸로 아무거나."

"아... 그냥 검방 하겠습니다. 방패 없이 버티는 건 조금."

"네. 잠시만요. 빌드 좀 만지고."

노르드가 빌드를 수정하는 사이, 스벅도 준비를 마쳤다. 왜 이런 상황이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대충 넘기기는 힘들어 보였다. 그래, 기왕 대회에 나가는데 우승을 목표로 하는 게 맞기는 하지. 대회 컨셉에 커플이 들어간다고 해서 억지로 알콩달콩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도 식상하지 않은가. 이왕 연습할 거 죽도록 열심히 해서, 최근 개판 난 민심을 되돌릴 기회로 삼으면 되는 것이다.

스벅은 자기 합리화를 거듭 되뇌었다.

그 사이 노르드가 빌드 점검을 끝냈는지 제자리에서 검을 휘둘렀다. 자연스레 저 흉악한 캐릭터의 쌍검에 난자되었던 지난 기억이 떠오른다. 생각해보면 그건 칼고와는 결이 많이 다른 운영이었다. 공격권을 쥐고 죽기 직전까지 몰아치던, 극도로 공격적인 쌍검 운영. 몇 번인가 흉내내려고 시도하다가 쌍검 승률이 처참히 떨어졌었지.

...그걸 어떻게 막지? 닥치고 보니 이제야 걱정이 차오른다.

"칼고님이랑 비슷하게 할 테니까 최대한 막아보세요."

그런 것도 가능한가.

새삼스레 노르드의 실력에 대해 감탄을 하려던 찰나.

간격을 유지하고 서있던 노르드가 빠른 속도로 쇄도했다.

스벅은 방패를 들어올렸다.

"큽, 잠깐, 잠깐만요! 타임!"

사냥이 멈추지 않는다.

좌, 우. 느려터진 머리가 상황 판단을 마치기를 기다리는 건 하책이다. 달려든 순간 무서운 속도로 이어지는 연계기를 막기 위해선 이성보다는 번뜩이는 직감이 필요했다. 그간의 경험을 살릴 순간이다.

스벅은 연거푸 양손을 움직였다. 둔탁한 느낌과 함께 왼손의 방패가 날카롭게 파고든 검날을 막아낸다. 그와 동시에 시야 오른쪽에 붉은빛이 번지듯 퍼져나간다. 가드에 성공한 왼손과는 달리 오른손은 임무를 실패한 모양이다. 몇 개째인지 모를 상처가 스벅의 몸뚱이에 누적됐다. 스벅은 조작을 하면서도 스스로가 어떤 키를 누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탁­

그리고 또, 일련의 연계 동작을 마친 사냥꾼이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얄밉게도 상대는 발소리마저 여유로웠다. 마우스를 움직여 고개를 들어올리면, 그제야 스벅의 시야로 노르드의 전신이 드러났다. 좌우에 든 검을 양쪽으로 넓게 펼치고 있는 모습이, 마치 활짝 편 새의 날개처럼 느껴졌다. 커다랗고 위협적인 맹금류. 양 날개에서 핏방울이 떨어진다.

아찔했다.

"너무 빈틈이 많은데... 실전이었으면 한 호흡 더 써서 죽이고 빠졌어요. 그렇게 빨리 뚫이면 듀오고 뭐고 도와줄 시간도 없습니다. 연계 같은 건 고려하지 말고 버틸 생각만 하세요."

...버틸 생각만 한 거다. 연계는 무슨, 그런 거 신경쓸 여유는 진작에 사라졌는데. 열 번째 데스를 기록한 이후부터는 온전히 노르드의 움직임에만 집중했다. 그런데도 움직임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다시 갑니다."

또. 휴식 시간도 없이 맹금류가 날개짓을 시작한다.

칼고의 플레이를 따라한다던 노르드는 시종일관 저런 스타일을 유지하곤 상대를 몰아붙였다. 천천히 사냥감의 주변을 배회하다가, 빈틈이 생긴다 싶으면 무서운 속도로 돌격해 공격해 들어오는.

한 번 공격을 시작하면 매서운 연계가 이어졌다. 그러다가도 이쪽이 반격을 해야겠다 싶으면 곧장 뒤로 물러난다. 공격의 주도권을 철저히 거머쥐고 움직이는 모양새가, 정말 사냥꾼이나 다를 바 없었다. 저게 킹 랭크에서 보여주는 칼고의 운영일까. 까다로움을 넘어서 무섭게 느껴질 지경이다.

실제로, 스벅은 이미 많이 죽었다.

챙­!

이번엔 오른손의 검으로 노르드의 좌수검을 절묘하게 받아친 참이다. 스벅은 방심하지 않고 방패 조작에 신경을 쏟았다. 한쪽을 막아내는데 성공했다고 긴장을 풀었다가 죽은 것만 벌써 다섯 번이 넘어간다. 더이상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멍청하다고 들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노르드는 정면에서 방패를 내리치지 않았다. 공격의 완급 조절은 이 승부를 숨막히게 만드는 주역이다. 공격 사이의 빈틈이 생긴 줄 알고 함부로 반격을 계시하면, 기다렸다는 듯 카운터와 함께 다시 연계가 시작되곤 했다.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한해서, 그건 하책이었다.

스벅이 공격을 망설인 그 순간이다. 노르드는 활시위처럼 힘을 머금은 채 몸 안쪽으로 당겨진 검을 강하게 찔러넣었다. 스벅은 황급히 방패를 들어 대응했으나 그건 힘이 가득 실린 강공격이었다. 온전히 막아낼 수가 없다. 방패를 후려친 일격이 스벅의 팔뚝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지나갔다. 또다시 시야 한쪽이 붉게 물들었다.

아, 이건 또 죽었구나.

무자비한 사냥꾼은 또 다시 생긴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뿌옇게 변한 시야로 선명한 붉은 파도가 솟구쳤다. 절단된 목에서 흐른 피였다. 화면 전체가 붉게 물든 걸 보고 있자니 한숨을 참을 수 없었다. 칼고가 이것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하는데, 그걸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 런지.

스벅은 머리로만 생각했던 참가자들간의 실력 차이를 직접 실감하는 중이었다. 너무나 커다란 벽이 느껴졌다.

"그렇게 참는 건 침착한 게 아니라 겁이 많은 거예요. 상대가 공격을 끌어들이는 건지 강공격 시간을 버는 건지 제대로 보고 있어야 돼요. 다시 가죠."

그래도, 그래도다. 단호한 교관의 잔인한 실습은 끝나지 않고 이어졌다. 저 흔들림 없는 태도를 보고 있으면, 어떻게든 활로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한 줌의 희망이 피어났다. 정말 가망이 안 보였으면 자비 없이 포기했을 양반이 아닌가. 그 철저한 냉혹함이 지금은 오히려 스벅에게 위안으로 다가왔다. 아직은 포기하기 이르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조금만 더 해보자.

스벅이 마음을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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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포기할까. 가망이 안 보이는데.

아니면 새로운 빌드나 하나 만들어 줄까. 방어구는 경량화하고, 큰 방패를 들려주는 것이다. 기동성 있게 뛰어다니는 인간 벽의 탄생이다. 내게 유리한 지형지물이 추가된다고 생각하면 이대일도 못할 일은 아니니까, 해볼 만한 것 같기도 하고.

빌드의 이름은... 워킹월(walking wall) 정도가 좋겠다.

난 스벅의 시체를 앞에 두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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