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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1화 〉 161 ­ 다섯이 모이면 하나쯤은 정상인이야 (161/243)

〈 161화 〉 161 ­ 다섯이 모이면 하나쯤은 정상인이야

* * *

"어? 뭐야. 선생님, 파피루스님도 같이 하자고 하는데요? 내일... 내일? 뭐가 이리 급해. 일단 다음에 하자고 할게요. 저희 선약도 있고."

"아뇨. 그쪽도 잡아두죠. 대회가 얼마 안 남았잖아요. 여유 있게 준비할 때가 아니니까."

"...얼마 안 남아요? 지금 몇 주가 남았는데­"

"스벅님 실력으론 일 년은 있어야 돼요."

"..."

그래서, 지금이다.

오후 다섯 시. 방송 전에 미리 끼니를 해결한다고 억지로 밀어 넣은 음식이 위를 가득 채웠다. 명치 부근에서 묵직한 무게감이 감도는 게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돌이라도 얹힌 기분이다.

육식보다 채식과 가까워 보이는 내 몸뚱아리는 보이는 대로 소화 능력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다. 아니면 그냥 위의 용량이 작은 건지, 많이 먹지도 않았는데 이 꼴이다. 배가 가득 차 있는 느낌은 만족감보다는 불쾌감을 선사했는데, 그럼에도 억지로 음식을 밀어 넣은 까닭은 지금 괴로운 편이 방송 도중에 공복에 시달리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기 때문이다. 방송을 하다 배가 고픈 게 지속되면 머리가 핑 돌 때도 있는데. 그런 걸 보면 방송도 체력을 상당히 소모하는 일이다. 컴퓨터 의자를 벗어나면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도 일상다반사였다.

스벅과의 연습을 시작한 요 며칠, 내 방송 시간은 길어졌다.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짧은 사이 비숍으로 회귀한 스벅은 랭크에 딱 어울리는 안정적인 실력을 보여줬다. 삐숍. 아무리 대회를 낙관적으로 보더라도 그건 꽤나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최근 본인의 방송에 억까가 많다는 스벅의 발언은 사실 잘못된 것이다. 그건 아마 억지가 아니라 합당한 지적이었을 테니까. 그는 그만큼 못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오래, 많이 한다고 게임을 잘하는 건 아니다. 한계선이라는 건 확실히 존재하는 모양이다. 게임 좀 못하는 게 큰 문제로 돌아오는 일은 없지만, 대회에 참가한다면 당연히 문제가 생긴다. 그런 의미에서 스벅은 문제 덩어리였다. 그래도 같이 게임을 하면서 어느 정도 나아졌다고 생각했건만. 유지보다는 초기화가 조금 더 빨랐다. 일대일로 두드려패는 과정에서 스벅이 보여준 모습은 내가 스벅을 처음 만났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플랫폼 대전에 기울였던 노력은 다 어디로 갔나. 이걸 스벅에게 물으면 '그건 팀 게임이니까...'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이 학생은 응용력도 부족했다.

내가 봐도 나는 승부욕이 강한 편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PVP가 주력이 되는 경쟁 게임을 즐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일반 경쟁 게임에도 나타나는 승부욕은 당연히 대회에서는 배가 되었으니. 커플 대항전이든 뭐든 일단 대회에 참가한 이상 우승을 바라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최근 내 방송이 길어진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연습이 길어졌으니까. 스벅도 연습을 피하지는 않았다. 피할 수 없다고 보는 게 맞으리라. 그 방송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스벅이 연습을 피하는 순간 그를 향해 수많은 돌이 날아올 테니, 아무리 경력직이라고 한들 그걸 온전히 감당하기는 힘들겠지. 결국 이 팀에서 고삐를 쥔 것은 내 쪽인 셈이다. 사실 그게 썩 기쁘지는 않았다. 방송이 길어지면 피곤하잖아.

"공식 대회 서버로 가죠. 연습하라고 방까지 만들어놨네요. 이거 염탐도 가능한 거 아녀? 대놓고 들어가기 편하게 해놨구만."

변함없이 주절거리는 말이 많은 사람이다. 약속 시간이 되기도 전 미리 음성 채널에 들어온 스벅은 쉬지 않고 오디오를 채워 넣었다. 평소 방송 시간을 생각하면 아마 나와 비슷한 시간에 방송을 시작했을 텐데, 시동을 걸 필요도 없는지 벌써부터 컨디션이 살아난 모양이다. 말을 내뱉는 사이의 휴지가 거의 없었다.

이러니 스벅과 합방을 할 때는 입을 다물고 있어도 무방하다. 사운드가 빌 때면 귀신같이 파고 들어와 정적을 채우니까. 듣고 있으면 이게 방송용 멘트인지, 나한테 하는 말인지 구분하기 힘들어질 정도다. 내 협소한 인맥 중에서 가장 스트리머에 적합한 사람을 꼽자면 이 인간이겠지. 이건 비꼬는 게 아니라 칭찬이다. 나는 절대 저런 식으로 방송을 할 수 없을 테니까.

대회 채널을 언급하는 스벅의 말에 따라 나도 음성 채널을 옮겼다. 채널 우측에 표시된 대회 참가자들 옆에 전부 녹색불이 들어와 있었다. 닉네임 하단에 나이트폴을 플레이 중이라는 문구가 더해졌다. 그러고 보면 최근 저스틴 방송 목록을 쭉 나열할 때 대회 연습이라는 방송 제목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연습 강도만 보면 이미 예능성 대회라고 말하기 힘들었다.

칼고를 포함해 익숙한 이름들도 보였는데... 사실 이건 나와는 별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이름만 들어봤을 뿐이지 친분은 쥐뿔도 없었으니. 전력 파악을 해본답시고 저스틴에서 방송을 하는 스트리머를 몰래 염탐한 게 내가 가진 지식의 전부였다. 심지어 그 짓도 얼마 안가 그만뒀다.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의 방송을 보면서 대책을 세우기 보다는 우리 팀의 실력을 끌어올리는 쪽이 훨씬 수월하다는 결론을 내린 까닭이다. 포기는 빠를수록 좋았다. 되지도 않는 시간 낭비를 막을 수 있으니까.

그래도 방송을 훔쳐본 수확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게임 내적인 이득이 아니라 의사소통 측면에서. 생각해 보라. 이번 대회는 공방으로 진행되는데, 그 말인즉슨 현장에서 여러 참가자들과 대면하게 될 상황이 빈번히 발생한다는 것이다. 우연히라도 얼굴을 마주해서 인사를 나눌 기회가 생기겠지. 거기서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말을 더듬으면 그건 대참사나 마찬가지다. 적당히 고개를 숙이고 굽실거리는 것도 상대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참가자 몇몇의 얼굴을 익혔다는 건 꽤나 플러스되는 요인이다. 나는 인사를 나눌 수 있게 됐다. 정말 다행인걸.

인간관계란 이토록 어렵다. 사실 나는 인게임에 대한 걱정보다 공방 현장에 대한 걱정이 훨씬 컸다. 나이트폴 킹 랭크의 패자인 노르드와는 달리, 인간 혜진은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폰에 가까운 허접스레기였다. 막상 현장에 가면 얼굴을 아는 성현의 뒤에 숨어서 구멍을 파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말, 나도 날 잘 모르겠다.

아무튼 오늘 연습을 하기로 예정된 두 팀은 모두 내가 이름을 아는 사람들이었는데... 기본적으로 시청자가 많은 스트리머였기 때문이다. 방송을 시작하기 전 아무 생각 없이 저스틴을 실행하면 종종 방송 목록 상단에서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그런 스트리머들. 요번의 방송 탐방으로 '이름'만 알던 걸 넘어서 이제는 얼굴도 대충 알고 있었다.

자세히 기억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대면했을 때 얼굴을 보고 닉네님을 떠올릴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나는 예전부터 사람 얼굴과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라 장담할 수는 없었지만. 이게 어딘가. 이름과 얼굴을 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 내적 친밀감은 두 배 이상 올라갔다. 비록 그게 소수점에서의 두 배라고는 해도 늘어난 건 늘어난 거다.

따지고 보면 저쪽도 나를 안다고 장담하기 힘든 상황인데, 한쪽이 일방적으로 다른 쪽의 신상을 알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게 참 미묘했다. 캠방을 한다는 건 이런 무게감을 가지는 구나 싶기도 하고. 길을 가다가 모르는 사람이 나를 알아보면 어떨까. 아직 경험한 적 없지만 그건 꽤나 아찔한 일일 것 같은데.

...아는 척은 하지 말아야겠다.

스벅과 함께 음성 채널 하나를 골라 자리를 잡았다. 나는 그제서야 방송을 시작했다. 캠은 꺼둔 상태였는데, 연습 직전에 방송을 시작하면 당장 얼굴을 까라는 시청자들의 성화를 연습 내용으로 뒤덮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아무리 그래도 대회 연습을 한다는데 막무가내로 난동을 부리지는 않는 것이다. 캠방에 익숙해지는 단계라지만 역시 몇 시간 동안 얼굴을 내놓고 방송을 유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서, 최근 잘 써먹고 있는 방법이다. 이게 계속 반복되면 시청자들도 캠방에 대한 집착을 덜어낼 수 있지 않을지. 그건 내 작은 바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띠링, 하는 채널 입장 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 안녕하세요! 잘 들리시나요? 목소리 크면 말씀해주세요!"

"잘 들려요. 나밍씨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화사한 느낌이 가득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트리머 우나밍이다.

염탐 과정에서 한 시간 정도 방송을 지켜본 경험이 있다. 곱게 묶은 머리를 중간에 풀어헤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지. 꽤나 자연스러운 것이 방송용 퍼포먼스가 아닌가 싶었다. 짙은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가 세련된 느낌의 얼굴과 잘 어울렸는데, 갸름하고 화사한 얼굴에는 항상 웃음기가 가득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미인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 나이트폴 플레이를 지켜보기 위해 방송을 틀었었는데, 정작 플레이는 거의 보지 못하고 얼굴만 보다가 방송을 나갔더랬다. 같은 팀인 파피루스의 준비가 너무 길었던 것 같은데... 자세한 건 잘 모르겠다. 팀 내적인 사정이 있었겠지.

아무튼 우나밍과 파피루스로 구성된 저 팀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상당한 전력을 가진 팀으로 평가된다. 충분히 우승을 노려볼만한 팀. 남자 참가자와 여자 참가자 둘다 퀸으로 실력이 비등비등하다는 점이 밸런스가 좋다나. 물론 이건 내가 내린 평가가 아니라 스벅의 한줄평이다. 이곳저곳 발이 넓은 스벅은 굳이 방송을 찾아보지 않더라도 어지간한 팀의 전력을 유추할 수 있을 정도로 아는 게 많았다. 인게임적으로는 몰라도 게임 밖에서는 일인분을 소화하고 있는 셈이다. 이제 나이트폴에서 사람 구실만 할 수 있으면 완벽할 텐데.

친분이 있는 듯한 두 사람이 뭐라 대화를 나누는데, 나는 낄만한 화제가 아니어서 그냥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한 번 인사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는 망부석이 되어버렸다. 가만히 있기가 조금 어색해서 채팅창을 쳐다보면 내 침묵에 관해서 왈가왈부하는 시청자들이 더러 보였다. 찐따라니. 예의와 때를 기다리는 유교 정신인 것인데. 시청자들은 종종 폄하가 지나치다.

"그, 노르드님도 계시죠? 처음 뵙겠습니다. 스트리머 우나밍이에요."

정말, 갑작스런 순간에 치고 들어왔다.

"아, 네. 안녕하세요."

그러고는 정적.

과연 그렇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사람의 첫 대면은 대개 이런 식으로 시작하기 마련이지. 내가 말주변이 좋았다면 여기서 뭔가 대화 화제를 끌고 갔을 텐데, 나는 혜진이 되기 전에도 술이 들어가기 전에는 말이 짧은 편에 속하는 인간이었다. 차라리 곧장 말을 이어갔으면 아무런 소재나 꺼내서 대화를 끌고 갈 수 있었을 텐데. 괜히 망설이다 말을 하기 힘든 상황이 연출되어 버렸다. 내려앉은 침묵이 무거웠다.

직전까지 우나밍과 대화를 나누던 스벅은 무슨 일인지 마이크를 끄고 있고, 먼저 인사를 건넨 우나밍은 또 우나밍대로 말이 없다. 이게 무슨 일이지. 아주 잠깐이었으나 커뮤니케이션이 떨어지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이 정도면 억지로 정적을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나를 엿 먹이기 위해? 몰래카메라가 이런 느낌인가 싶었다. 공기가 무거운 기분. 캠이라도 켜져 있었다면 볼만한 상황이 연출됐을 게 뻔하다. 어색함에 눈만 데굴데굴 굴리는... 또 움짤이 하나 늘었겠지.

내가 속으로 구멍을 파는 사이 생각을 정리했는지 우나밍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 방송 너무 잘 보고 있어요. 팬이에요. 연, 연습 같이 하게 돼서 너무 좋네요. 잘 배울게요!"

방송으로 들었을 때보다 더 높은 하이톤의 목소리다. 역시 채널을 통해 듣는 건 느낌이 다른가. 톤이 조금 과하게 높아서, 누가 들으면 들떴다고 착각할 것 같은 수준이다. 잠깐 방송을 켜서 얼굴을 구경하고 싶다는 생각이 떠올랐으나 그 생각은 금방 묻어버렸다. 친하지도 않은 사람인데 방송을 트는 것도 조금 이상하니까.

"감사합니다."

삽시간에 다시 깔린 정적이 또 분위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어. 너무 짧게 말했나? 하지만 별로 할 말도 없었는데­

"아아. 죄송. 누가 구독 선물을 주셔가지고, 인사하느라. 하하. 다 오셨나요? 파피루스님 마이크를 안 키셨는데. 리액션 중이신가?"

"아뇨아뇨. 빌드 보느라 정신이 없어서. 이제 괜찮아요. 저도 왔습니다. 안녕하세요. 노르드님은 저결 대회 이후로 진짜 오랜만에 뵙네요. 인사는 처음이죠?"

"네. 안녕하세요."

"..."

"..."

"아! 하하, 저희 선생님이 조금 과묵하셔서! 연습 룰부터 다시 확인할까요? 일단 대회 룰이랑 비슷하게 갈지, 아니면 스크림이니까 조합 맞춰보면서­"

가만히 스벅의 제안을 듣고 있으면, 새로운 메세지가 왔다는 알람이 들어왔다. 대화가 한창 진행 중인 베타코드의 개인 메세지. 다음 연습 게임이 예정된 칼고인가 싶어서 재빨리 메세지를 확인했다.

예상과 달리 메세지의 주인은 칼고 아니었다. 닉네임, 우나밍♡. 같은 채널에 있는 사람이 보내온 메세지에 잠깐 머리가 굳었다. 보내도 하필 이런 타이밍인가. 말로 하면 될 것을 갑자기 왜.

우나밍♡:노르드님 친추 좀 받아주세요♡♡♡

과연.

이 사람도 이상한 사람이구나.

역시, 이곳에서도 정상인은 나밖에 없는 듯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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