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화 〉 162 극과 극이 매번 통하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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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성현은 혜진의 방송을 좋아했다.
인터넷 방송을 하는 사람이 다른 스트리머의 방송을 좋아한다는 게 무엇이 부끄러울까. 분명 부끄럽다거나 밝히기 꺼려 할 만한 일이 아닌데도, 그걸 입 밖으로 꺼내기는 싫었다. 성현은 자신이 혜진의 방송을 챙겨본다는 사실을 굳이 밝히지 않았다. 자신의 방송을 시청하는 시청자들에게도, 메세지를 주고 받는 혜진에게도. 왠지 그 사실을 밝히면 패배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무엇에 패배하는 건지는 성현도 잘 알지 못했다. 감정에서 합리성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런 생각은 성현을 굉장히 귀찮게 만들었는데, 방송을 자유롭게 시청하지 못하게 됐다는 게 그 첫 번째였다. 노르드의 방송이 켜졌다는 알람이 울릴 때마다 곧장 그녀의 방송에 들어가는 건 이제 불가능했다. 저스틴 채팅창은 선팅을 짙게 바른 자동차처럼 익명성이 보장되는 공간이 아니다. 방송을 시청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채팅창에 들어선 유저의 닉네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칼고라는 스트리머의 아이디가 매번 노르드의 방송에 상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시청자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어떤 떡밥이 굴러갈지는 안 봐도 뻔했다. 괜히 구설수를 만드는 일은 없어야 했다. 노르드를 위해서든, 자신을 위해서든.
심지어 노르드는 그의 아이디에 관리자 권한까지 부여했다. 그건 사실상 낙인이나 다를 바 없었다. 칼고가 노르드의 방송에 채팅이라도 치는 순간, 방송을 지켜보던 시청자 모두가 그 사실을 눈치채고 호들갑을 떨어대는 것이다. 그건 성현에게 꽤나 끔찍한 일이었다.
결국 성현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노르드의 방송을 로그아웃을 한 채로 시청했다. 철저한 익명성을 위해 브라우저의 시크릿 모드를 사용하는 건 그 덤이었다. 항상 로그인이 되어있는 그의 저스틴 계정에서 노르드의 방송이 켜졌다는 알람이 울리면, 곧장 시크릿 모드로 새 창을 열어 손에 익은 주소를 입력한다.
이젠 저스틴을 거쳐서 방송에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 노르드의 방송 채널 주소를 외워버렸기 때문이다. 키보드를 확인하지 않고도 손가락은 자연스레 움직였다. 하는 행동은 이미 애청자나 다름없었으나, 역시 성현은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혜진이 먼저 자신의 방송을 즐겨본다고 말하는 게 아닌 이상에야.
아무튼 성현의 비밀스러운 방송 시청은 노르드가 방송 시간을 늘린 최근 더욱 힘차게 박차를 가하고 있었으니, 본인의 방송을 시작하기 전 노르드의 방송을 훔쳐보는 것도 이젠 그렇게 어색하게 느껴지는 일이 아니었다.
방송을 위해 옷을 갈아입은 성현이 다시 모니터를 바라봤다.
혜진의 방송. 대회를 방불케하는 진지한 게임이 한창 이어지는 중이다.
스태미나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스벅의 외침이 다급하게 흘러나오고, 노르드는 대답도 없이 측면으로 뛰쳐나갔다. 일인칭 시야가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적과의 간격이 지나치게 짧다. 전신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방패가 시야의 절반 정도를 틀어막은 것 같았다. 노르드는 방패 뒤에서 튀어나오는 적의 철퇴가 두렵지도 않은지, 두 자루의 검을 가볍게 휘두르며 방패를 두드렸다. 힘이 실리지 않은 공격은 방패에 흠집을 내지도 못하고 무기력하게 튕겨져 나왔다.
일대일로 맞붙는 정당한 결투가 아니다. 가벼운 움직임으로 만들어진 작은 빈틈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노르드가 의미 없이 방패를 두드리는 찰나, 굳건히 버티던 방패 뒤쪽에서 날카로운 창 끝이 튀어나왔다. 방패 뒤에서 기회를 엿보던 파피루스의 공격이다. 정면에서 방패를 들어 올린 우나밍이 일종의 가림막 역할을 수행해서, 노르드의 시야에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튀어나온 것이나 다름없는 일격이었다. 급소를 노린 일격. 스벅의 보호에서 벗어난 이상 도망칠 구석도 없다. 빠르게 다가오는 쇠붙이에서 섬뜩한 한기가 일었다.
순간, 노르드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창의 첨단을 확인한 것과 거의 동시였다. 연이어 방패를 내리치던 두 검이 몸 안쪽으로 당겨져 엑스 자를 만들었다. 교차된 검이 쇄도하는 창 끝과 정교하게 마주하고, 쇳덩이가 부딪히면서 작은 불똥이 튀었다. 교차된 검이 충격으로 흔들린다. 검과 마주한 창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하늘을 향해 튕겨 올랐다. 커다란 반력에 의해 비틀거리는 모습. 완벽한 타이밍으로 패링에 성공하면 나타나는 현상이다.
<"지금. 차징하세요."=""/>
급박한 상황과는 전혀 다른, 기이할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다.
스벅은 대답할 시간조차 아껴서 오더를 수행했다. 노르드가 적극적으로 움직일 때에도 제자리를 고수하던 거북이가 이내 커다란 등딱지를 앞으로 밀어 넣었다.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발을 움직이기 시작한 노르드의 시야에서는 두 방패의 충돌이 보이지 않았다. 방패와 방패가 부딪히며 일으키는 둔탁한 충격음이 스벅의 움직임을 대신 증명했다. 노르드는 망설이지 않고 대시했다.
플레이어 넷이 맞부딪히기에는 지나치게 좁은 구역이다. 바로 다음 순간 노르드의 눈앞에 파피루스의 신형이 드러났다. 패링의 반동으로 비틀거렸던 자세를 다시 회복하고, 노르드의 접근을 경계하며 창을 앞으로 내미는 모습이다. 이번 게임이 시작하고 나서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했다. 든든한 방패병을 상실한 창병은 잔뜩 긴장한 상태로 바늘을 곧추세웠다.
그러나, 이렇게 마주한 이상 승패는 결정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스벅이 방패를 맞대고 적을 붙잡아두는 상황이다. 노르드는 머뭇거리지 않고 돌진했다. 자신을 향해 찔러오는 창 끝을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내고, 양손에 든 검을 순차적으로 휘두른다. 첫 찌르기로 승부를 보려던 창병은 좁혀진 거리를 다시 벌리지 못하고 이어지는 참격을 모두 허용했다. 양팔과 다리에 칼자국이 새겨진다. 상처에서 피가 비산하는 것보다 검이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내는 게 더 빨랐다. 번뜩이는 검이 교차되며 순식간에 사람을 난자한다. 회색빛으로 단조롭던 시야에 선명한 붉은색이 추가됐다.
킬 로그가 뒤늦게 파피루스의 죽음을 알렸다.
성현은 그제서야 방송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있었다. 일인칭 화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다. 플레이를 따라가는 것만으로 숨이 벅찰 지경이다.
나이트폴에서 도저히 따라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플레이어는 매우 드물다. 성현은 감탄을 자아내는 어지간한 슈퍼 플레이도, 몇 번인가 시도하면 비슷한 장면을 연출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있었다. 엘튜브 하이라이트 따위로 묶어둔 영상들은 대개 우연이 겹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유명한 프로 선수가 아니고서야.
노르드의 방송은 그렇지 않았다. 탄성이 나오는 장면이 하루에도 몇 번씩 빈번히 튀어나온다. 방금 파피루스의 기습에 반응해서 패링을 쳐올렸던 것처럼.
그 순간은 가감 없는 일인칭 화면이 오히려 극적으로 다가왔다. 전체적인 전투 구도를 확인할 수 있는 관전자 시점이 아니다. 노르드의 시야로 봤을 때, 방패 뒤에서 돌출된 창의 첨단을 확인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아마 대부분의 시청자는 패링이 성공한 다음에야 상황을 인식했으리라. 그건 미리 예측한 게 아니라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반응속도였다.
전투의 순간 숨을 참고 시청한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승패가 결정난 순간, 채팅창은 그동안 참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자기 주장을 하고 나섰다. 플레이에 대한 욕설 섞인 감탄사가 내용물의 주를 이뤘다. 저스틴에서 보기 힘든, 최상급의 극찬이다. 보기 드문 플레이를 목격했다는 짜릿함이 있을 것이다. 성현도 비슷한 감상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문득, 혜진의 캠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의 찬사면 그녀도 무표정을 고수하지 못하지 않을까. 뿌듯해하는 얼굴을 보고 싶은데. 왜 오늘은 노캠 방송을 하고 있는 건지... 시청자를 위한 배려가 부족하다.
띠링
한창 승리의 여운이 맴도는 채팅창을 훑어보고 있을 때였다. 스피커를 타고 전화 벨소리와 흡사한 알람이 시끄럽게 울려댔다. 곧이어 작은 팝업 창이 화면 가장자리를 차지한다. 베타코드의 통화 기능이었다. 그 위에 표기된 닉네임이 눈에 익다. 근래 가장 많이 통화한, 이번 대회 칼고의 파트너였다.
이름을 확인한 순간 성현이 대번에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자리비움으로 설정해놨는데, 왜 통화를 걸어오나.
그래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통화를 무시하거나 끊어버리면 받을 때까지 걸어올 게 분명하다. 집요한 여자.
내키지 않았지만 마우스를 붙잡은 오른손을 움직인다. 세상엔 간혹 인간적으로 맞지 않는 인간과 어울려야 할 때가 있었다.
"아, 역시! 있을 줄 알았어요. 지금 방송 준비하고 있는 거 맞죠, 그쵸? 저도 일찍 와서 준비하고 있었어요. 히히."
"...예. 통화는 갑자기 왜 걸었어요?"
"아이, 또 그렇게 차갑게 말하시구. 그렇게 츤츤거리지 마세요. 저희 그래도 커플이에요, 커플. 이따 저녁에 저희 첫 스크림 하잖아요? 그니까 가만 있을 수 있어야죠. 아무리 연습이라지만 청자들 승패에 엄청 민감해서."
"그게 대체 통화랑 무슨 상관"
"그래서! 미리 공부 좀 하기로 했어요. 그 노르드님도 약점이 없지는 않을 테니까! 샅샅이 분석하다 보면 뭐라도 하나 나오지 않겠어요? 상대팀도 떠블 퀸인데, 마냥 밀리지는 않겠죠. 근데 또 저만 보고 있자니 약점이랄 게 안 보여서. 역시 칼고님이 있어야 뭔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거 있죠? 같은 킹 랭크잖아요. 지금 스크림 보면서 연구하면요, 그쵸?"
"...그래서, 두 팀 연습 같이 염탐하자고요?"
"어허, 염탐이라니. 연구죠, 연구!"
목소리나 낮추라고.
찌푸린 미간이 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성현의 시선은 연결된 통화에 표기된 닉네임에 고정된 채였다. '꼰닢_'이라는 닉네임. 통화가 시작하고 지금까지, 저 닉네임에 불이 꺼진 순간이 과연 몇 초나 될까. 그의 파트너는 시끄럽기 짝이 없었다. 꽃잎보다는 매미나 닭과 잘 어울리지 않을까. 머릿속에서 시끄러운 생명체를 몇 나열한 성현이 꼰닢의 마이크 소리를 조절했다.
절반 정도. 그녀에게는 이 정도 수치가 적당했다.
이번 대회, 그와 커플로 맺어진 꼰닢은 저스틴에서 활동하는 엘튜버였다. 나이트폴은 물론이요, 종합 컨텐츠 영상을 만들어 업로드하는 크리에이터. 생방송 스트리밍을 주력 컨텐츠로 삼지 않는 사람이다. 하물며 나이트폴로 유명한 방송인도 아니어서, 처음엔 그 이름을 보고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인지도가 부족한 사람은 아니었다. 구독자가 60만 명이 넘는 사람을 어떻게 인지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다만 나이트폴이 주력인 방송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조금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참가자들의 면면을 살폈을 때 이번 대회가 상당히 수준 높은 대회임은 분명했는데, 과연 어떤 생각으로 대회에 참여했나 하는 걱정. 우승을 바라보는 성현의 입장에선 당연한 의문이었다. 당장 꼰닢의 채널에 들어가면 나오는 메인 영상도 나이트폴 관련 영상이 아니었다. 아니, 나이트폴은 커녕 게임 영상도 아니었다. 무슨... 일본어로 된 노래의 커버 영상이는데. 자세한 내용은 잘 알지 못했다. 한 소절 듣는 순간 곧바로 브라우저를 닫아버렸으니까.
그의 걱정과는 무관하게, 대회는 그대로 진행됐다. 우려했던 팀은 그대로 유지됐고. 다행인 건 꼰닢의 나이트폴 실력이 성현의 생각보다는 훨씬 준수했다는 점이다. 랭크는 비숍 상위권과 룩 하위권을 오가는 수준이었으나, 종종 보여주는 센스 플레이나 피지컬이 상당히 괜찮았다. 하기야 형편없는 실력이었다면 주최측에서 섭외할 리가 없었겠지. 성현은 금방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어색했던 첫 만남을 지나, 연습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새로운 문제가 덩치를 불리기 시작했다. 게임 내적인 부분과는 전혀 다른 측면에서.
그러니까, 성현은 꼰닢과 같은 인간상을 싫어했다.
"혹시 방금 보셨나요? 역시! 말로는 츤츤거리지만 저랑 똑같이 생각한 거잖아요. 우리 마음이 통했네, 통했어. 노르드님 패링 치는 거 진짜 지리지 않았어요? 틈 만들려고 방패 벽 나와서 어그로 끄는 플레이가 진짜, 어떤 기습이 들어와도 다 받아칠 수 있다는 마인드잖아요. 저도 노르드님 같은 마인드로 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요즘은 맨날 칼고님이 커버 쳐줄 거라고 생각해서, 아무래도 몸이 조금 둔해지는 거 같아."
"저 빌드 어디서 봤다고 생각했는데, 저거 칼고님이 쓰는 빌드 맞죠? 정답! 두 분 친하다고 들었는데 진짜 친분이 깊으신가 봐요. 헉, 혹시 제가 생각하는... 아, 조금 호들갑이었나요? 제가 또 드라마나 애니를 좋아해서. 킹 둘이 사귄다고 생각하면 막 두근거리는 거 있지 않아요? 에, 공감을 안 해주시네. 암튼 칼고님이 알려준 빌드면 파훼법도 있는 거 아녜요? 어... 쌍검 안 쓸 거 같다고요? 그래도 저렇게 연습했는데 어떻게 안 써요. 어... 진짜 잘 아시네. 이거 그거 맞죠? 저 입 무거워요. 진짜 숨겨 드릴게."
"아, 시작했다. 이번에는 조합도 바꿨네요. 노르드님 무기도 바꾸고. 근데 이 시점 너무 어지럽지 않나요? 시야가 너무 휙휙 돌아가. 감도가 얼마길래 이래. 저는 저 상태로 게임 못해요, 너무 신기해. 저렇게 돌리는데 다 볼 수 있는 거 맞아요? 대충 하는 건가.
아! 근데 상대팀도 엄청 단단해 보이네. 우나밍님 거품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아, 이건 칼고님이 말한 게 아니었나. 방패 잘 쓰네. 저 팀하고도 붙어보면 좋겠어요. 다른 팀들도 방패 많이들 쓰던데, 연습하기 젤 좋을 거 같아. 응. 어! 저희 지금 참전할까요? 꼭 두 팀만 스크림 하라는 법은 없지 않아요? 삼파전으로 하면 시청자들도 좋아할 거 같은데. 지금 들어가죠?"
성현은 그저 알겠다는 대답만 반복했다.
더 듣기에는 귀가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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