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화 〉 163 홀로 있을 때 더 빛이 나는
* * *
"아! 이번에는 저희가 할게요! 저 진짜 깨달음을 얻었어요. 아까랑은 다를 거예요. 대시할 때 G키 연타하는 식으로 연결하라는 거잖아요. 완전 이해했어, 이제 스벅님 정도는 제칠 수 있다고요."
"아니, 거기서 제 이름을 왜... 제가 만만합니까?"
"솔직히 여기서 저랑 같이 최약체를 다투시잖아요!"
"그건... 아이씨, 결전 조져요? 제가 꼰닢님... 아니, 발음하기 겁나 어렵네 진짜. 제가 꼰님 정도는 뭘 해도 이길 수 있어요. 최약체도 최약체 나름이지, 참나."
"그런 말은 이기고 말씀하실래요? 아까 우리한테 졌으면서. 솔직히 노르드님 데리고 그렇게 못하는 것도 쉽지 않아. 앞에서 방패만 제대로 들어도 알아서 다 해줄 텐데, 그걸 못해서. 스벅님은 경쟁전 비숍들부터 제끼고 와야 돼!"
"뭐요? 뭐 이런 경우 없는 인간이 다 있어."
"저... 그래서 다들 어쩌실 건데요? 저희 다 기다리고"
"저희요! 저희랑 붙어요. 스벅님은 거기 앉아서 제 플레이 구경이나 하세요. 제가 슉슉해서 방패 뚫어버릴라니까."
"아니. 꼬챙이 들고 뚫긴 뭘 뚫어. 이번엔 파피루스님이랑 나밍님이 한 턴 쉬시죠, 그냥. 못 들어주겠어. 우리랑 리매치 하시죠? 이번엔 대가리 깨져도 버틸라니까."
"네? 네. 그럼 저희가 쉴게요. 관전자 자리 좀 열어주세요."
"아오, 방장 누구야? 누군데 이렇게 일처리가 늦어."
[ㅈㄴ시끄럽네 진짜ㅋㅋㅋㅋㅋㅋ]
[스벅하고 꼰닢 볼륨좀낮춰주세요 ㅠ]
[둘이 친분있음? 왜 저렇게 친함]
[방장 정색한 얼굴 보고싶다]
[스벅 폼 미쳤노ㅋㅋㅋㅋㅋ 오디오 분량 혼자 거의 다채우네]
[선생님 말좀하세요...]
[이분 왜 묵언수행 중임?]
[어허 다른 사람이 시끄러우니까 균형을 지키는 겁니다 음해ㄴ]
[제일 못하는 것들이 입만 살았네]
[비숍따리들이 주둥이는 킹 ㄷㄷ]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을까.
모든 일에는 인과가 있기 마련이다. 눈덩이가 이렇게 크게 굴러간 데에도 분명 무언가 원인이 있을 터였다. 역시, 하루에 두 팀과 스크림을 잡아두었던 게 패인이었을까. 연습량을 늘리겠다고 일정을 빡빡하게 만든 건 건방진 판단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적당히라는 걸 알아야지, 과욕을 부리면 탈이 나는 법일진대.
음성 채널 속 꽉 들어선 여섯 개의 닉네임이 눈에 들어왔다. 유독 자주 빛나는 닉네임이 몇 개 보인다. 마이크 소리나 사용량에 따라 크기를 조절한다면, 닉네임 두 개 정도가 화면을 가득 채울 것이다. 소리를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압도적이었다. 부분 차단 기능 같은 게 있었다면 진작에 차단을 박아놨을 텐데. 개별 볼륨을 조정했음에도 이 소란은 그칠 줄을 몰랐다. 과연, 방송인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저만치 떠들 줄 알아야 재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거겠지. 나는 아직 턱없이 부족한 능력이다.
그래도 이어폰을 빼니까 그나마 들을만했다.
"4번 채널로 갈까요. 경기 끝나고 다시 모이고."
"네, 네. 저희가 갑니다. 꼰님은 목 닦고 기다리쇼!"
"악! 꼰님이 아니라 꼰닢이라고"
괴성이 들리기 전에 채널을 나간다.
정적. 여섯 명이 머물고 있던 음성 채널에서 나간 순간 시끄럽게 울리던 스피커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방 안에 갑자기 내려앉은 정적이 어색하면서도 기꺼웠다. 사람은 역시 가진 것에 고마워할 줄 모르는 생물이다. 고요하다는 건 이렇게 값지다.
삼자대면은 정신이 없었다. 무슨 연유로 여덟 시에 예정되었던 연습 팀이 이 시각에 참전해왔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칼고의 팀은 그렇게 맥락없이 채널에 처들어왔다.
연습에 대회 공식 채널을 이용하고 있었으니 사실상 막을 방도가 없던 날카로운 침투였다. 이번 대회 칼고의 파트너인 꼰닢이 난입의 이유에 대해 뭐라 설명하기는 했는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서 잘 모르겠다. 소리 조절 이전의 꼰닢은 살아있는 소음 공해나 다를 바 없었다.
유명 엘튜버라고 했던가. 최근 칼고의 방송을 보고 있으면 종종 만날 수 있는 사람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타인의 관심을 유도하는 게 이 분야에 속한 사람들의 능력이라면, 그녀는 그걸 타고난 사람이었다. 엘튜브 채널을 직접 확인한 기억이 없음에도 인상이 이렇게 선명하게 남아있는 걸 보면 확실히 그랬다.
특유의 높은 목소리와, 뭔가 쏘아대는 것 같은 독특한 말투는 쉽게 잊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이번만 해도 그렇다. 등장만으로 채널에 있던 네 명, 방송을 보던 시청자 수만 명의 이목을 집중시키지 않았나.
나는 급하게 소리를 조절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게임에 집중한다고 올려두었던 볼륨이 고막을 찢을 것처럼 날 괴롭혔다. 기이할 정도로 선명한 음질의 마이크와 하이톤의 목소리가 결합해서 만들어내는 하모니는... 꽤나 끔찍하더라.
칼고는 이걸 매일같이 듣고 있겠지. 사실 그게 요즘 칼고 방송의 재미 포인트다. 꼰닢이 뭐라 말을 할 때마다, 알게 모르게 굳어지는 성현의 얼굴을 바라보는 건 웃음이 나오는 일이었으니까. 누군가에게 행복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저 둘의 만남은 천생연분이 아닐런지. 물론 이런 말을 했다간 성현에게 쌍욕을 먹는다. 내가 직접 경험해 본 일이라 장담할 수 있다.
원래 극과 극은 통한다던데. 사실 내심 좋으면서 진저리치는 시늉을 하는 게 아닐까. 호감 가는 상대에게 틱틱거리는 건 사춘기 소년만의 특성이 아니지 않은가. 다음에 만나면 조금씩 찔러볼까 싶었다. 아무튼, 남의 연애사를 지켜보는 건 꽤나 즐거운 일이었으니.
띠링
"선생님. 저 이번에 플랜 B로 가겠습니다. 진짜 믿어주십쇼."
이건 또 무슨 개소린가.
게임을 앞두고 다른 채널로 자리를 옮기면, 먼저 들어와 기다리던 스벅이 헛소리를 시작했다. 앞선 두 번의 연습에서 연달아 패배한 게 그렇게 충격적이었을까. 나한테는 백 번도 넘게 죽었으면서. 승부욕은 상대마다 다르게 적용되는 모양이다.
당연히 플랜 B 같은 건 이 세상에 없었다. B는커녕 A도 위태위태했는데 무슨. 그러니 저건 방송용 멘트라고 생각하는 게 옳았다.
"맘대로 하세요."
"...예? 저 포기하신 거 아니죠? 좀 더 잘해볼게요."
"뭘 포기해요. 그런 거 아니니까 빌드나 확인하시고."
준비를 풀고 빌드를 건드리는 움직임에도 조심스러움이 엿보인다. 평소 주저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스벅이,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걸 보면 조금 안쓰러워질 지경이었다. 이전 게임에서 패배한 이후 시청자들이 얼마나 폭격을 가했으면 사람이 저렇게 변했을까. 연습에 불과한데도, 패배에 쏟아지는 야유는 상당한 규모였다. 지켜보는 주최 측은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과몰입하는 시청자가 늘어났다는 사실은 곧 대회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커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
하기야, 뭐가 어떻든 꼰닢한테 뚫렸으면 변명의 여지가 없기는 하다. 랭크 차이를 논하기도 우스운 상대가 아닌가.
방송 경력과 상관없이 사람은 비난이 쏟아지면 위축되기 마련이다. 저래서야 다음 게임도 결과가 뻔히 보인다.
앉아서 멀뚱히 스벅의 준비를 기다리기를 몇 분. 게임을 준비하는 시간이 너무 길어져서, 나는 스벅의 방송을 찾아 들어갔다. 어지간한 경우면 이러는 와중에도 입을 닫지 않았어야 하는 사람인데. 조용히 하고 있는 걸 보면 뭔가 이상하다.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은 경계하라고 하지 않았나.
저스틴에 들어가, 팔로우 목록을 확인하면 곧장 스벅의 방송을 찾을 수 있다. 미리보기로 확인한 방송 화면은 아주 정상적이었다. 평소와 다른 점을 찾기도 힘들다. 빌드를 만지고 있는 것 같은데, 장비를 고르는 단계에서 고민에 잠긴 듯했다. 방송을 켜고 마우스 포인트가 어디로 향하는지 보고 난 뒤에야 스벅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플랜 B는 쌍검이구나. 칼고를 상대로. 근본이 없어도 너무 없다. 확신을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모습도 조금 추하고.
"그냥 그거 하세요."
"갑자기 무슨..."
"쌍검 만지고 있잖아요."
하기야 방패를 들고 앞 라인을 잡는 게 지겨울 만도 했다. 지금까지 스벅과 중점적으로 연습한 건 말 그대로 벽을 세우는 방법이었으니. 공격다운 공격은 할 기회도 별로 없고, 커다란 방패를 들고 위치선정에 신경을 곤두 세워야 하는 빌드. 전문적인 팀 게임이 아니면 아무도 사용하지 않을 빌드다. 빌드의 효용성을 떠나서 플레이하는 재미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스벅이 지금껏 군말없이 내 오더를 따른 건 사실이다. 내가 스벅의 입장이었으면 조금 달랐을지도 모른다. 재미없는 게임에 무슨 의미가 있냐 말하면서 츠바이나 들어 올렸겠지. 그러니 슬슬 다른 빌드를 가져와도 별 불만은 없었다. 그게 쌍검이라는 게 조금 매운맛이었으나, 그 정도는 납득할만했다.
[센세 허가떨어졌다 ㄱㄱㄱㄱㄱ]
[쌍검의 스벅 ㄷㄷ 칼고 뒤졌다]
[응 못하기만 해봐~ 바로 저승길이야~]
[그럼 노르드는 무슨 빌드하는데 ㅋㅋ 지 생각만하네]
[ㅈ도 못하면 그냥 방패나들어 깝치지말고]
[긴 핍박과 모멸의 시간이었다... 이제 웨폰마스터 스벅으로 돌아갈 때다]
스벅의 채팅창은 스벅의 선택을 열렬히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뭐라고 해야 할까. 스벅의 선택을 존중한다라기 보다는, 다가올 처형식에 대한 불순한 기대감이 뒤섞인 환호 같다.
이 방송은 언제나 스트리머가 나락으로 떨어지길 기대하고 있었다. 평소 방송을 어떻게 하길래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졌는지... 잔잔한 방송을 지향하는 나로서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다.
스벅은 내 말을 듣자 빠르게 빌드를 완성했다. 화면 하단에 작게 자리한 캠 화면에서 입을 다물고 마우스를 움직이는 스벅의 얼굴이 도드라진다. 특성이나 무기 따위를 선택하고 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 만큼 퍽이나 진지한 표정이었다. 누가 보면 곧 대회 본 경기를 앞둔 사람인 줄 알겠는데.
듀오 게임은 참 미묘한 경계선에 있다. 결전에서 고작 한 명이 추가된 것뿐이지만, 사람 하나 차이로 전투의 변수가 철철 넘쳐흘렀다. 아군 조합은 물론이고, 상대가 어떤 구성으로 어떤 전략을 짜서 들어올지 생각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조합의 밸런스 따위를 궁구해야 한다는 건 매우 귀찮은 일이다. 나이트폴에서 가장 보편적인 6 대 6 팀 게임의 경우, 경우의 수는 훨씬 늘어나되 그만큼 보편적인 전략이 수립되어 있었다. 오래됐기도 했거니와 플레이하는 유저의 수가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반면 듀오는... 정립된 전략도 턱없이 부족하다. 경쟁전 소규모 교전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인 점일까.
어지간한 조합을 구성할 바에야 방패를 중심으로 조합을 구성하는 게 훨씬 낫다. 이전 게임에서 파피루스와 우나밍이 보여줬던 것처럼, 공수 밸런스를 중시한 방패와 창. 그러니까 스벅에게도 방패를 들게 만든 것이다. 어쭙잖은 빌드로 설치는 것보다, 우직하게 방패를 들어 올리는 쪽이 훨씬 유효하게 먹힐 테니까. 벽을 세운다는 개념으로 스벅을 앞세우고, 자신은 기동성이 뛰어난 빌드를 선택해 유동적으로 플레이한다. 이게 지난 며칠간 연습한 스벅과의 팀플레이다. 화려함은 없지만 실속을 챙긴.
그렇지만 너무 단순한 건 사실이다. 다른 팀들도 다들 비슷한 생각을 했을 테니, 어떻게 방패를 뚫을지 정도야 방법을 찾아냈겠지. 저 전략 하나로 우승을 할 수 있냐 묻는다면... 확실히 회의적이다. 뭔가 다른 걸 준비하기는 해야지. 대회라는 건 거저먹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스벅의 방송을 끄고 빌드창을 실행했다. 아무튼 스벅이 빌드를 바꾸는데 내가 그대로 있으면 안 되겠지. 커플이라는 말이 우습게 비춰지기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팀은 팀이 아닌가. 내 의견만 밀어붙여서는 될 것도 안 풀릴 수 있다. 여기선 스벅의 선택에 맞춰서 내가 방향을 트는 게 좋은 결정이리라. 결국 팀 게임이란 화합이 중요한 것이다, 화합이.
화합을 위한 빌드. 서포팅에 치중한...
삐걱거리는 머리가 열심히 굴러갔다.
###
[이게 뭐노]
[선생님 무기를 잘못고른거 같은데요?]
[일단 그거 내려놓고 생각하자...]
[스벅은 이거 알아???]
[이거 맞냐??? 걍 츠바이나 들면 안돼?]
[어케아냐ㅋㅋㅋㅋㅋ 스벅 신나서 특성찍고있는데]
[나는 모르겠다~ 알아서하겄지]
[아 어차피 연습인데 실험좀 할수도있지 호들갑ㄴㄴ]
[어떤 새끼가 실험실에서 폭탄을 터뜨림?]
노르드 방송의 채팅창이 떠들썩했다.
방송을 진행하는 당사자가 갑작스레 빌드창을 띄우고, 특성을 고를 때부터 나타난 반응이다. 지난 연습 과정에서 쌍검만을 고수하던 당사자다.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던 건지, 빠르게 특성 노드를 선택하는 손길이 심상치 않았다.
처음 몇 개. 기본이 되는 특성을 선택한 순간부터 소란이 일었다. 지금 그녀의 방송을 지켜보는 시청자는 만 명이 넘는다. 많은 시청자들 중에는 뿌리가 되는 특성 몇 개만 보고도 어떤 빌드를 만드는지 추측하는 나이트폴의 고인물도 적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 둘 물음표를 쳐올리면서, 채팅창의 분위기가 변했다. 그녀의 선택에 의문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빌드창의 좌측, 흉터 가득한 얼굴을 가진 노르드의 캐릭터는 흉흉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평소 사용하는 거대한 대검이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노르드의 상징이 되어버린 캐릭터. 특성을 모두 선택했는지 장비를 건드리는 노르드의 마우스에 따라 무서운 광전사의 몸 곳곳에 이런저런 장비들이 덧붙기 시작했다. 방어구라기에는 너무 가볍게 느껴지는 가죽 장비가 검푸름한 광택을 내비쳤다. 이내, 전사의 투박하고 커다란 손이 자그마한 물건 하나를 들어 올린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휘어진 그것은, 작은 활이었다. 전사의 커다란 덩치 때문인지 안 그래도 작은 편인 활이 장난감처럼 앙증맞게 느껴졌다. 터무니없는 추측이 현실로 나타났음이 제법 극적이었는지, 이 광경을 목격한 채팅창에서 작은 소요가 일어난다. 정작 노르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확인을 누르고 빌드를 완성했다. 태연히 준비 완료를 누르는 마우스에서 뻔뻔함이 묻어 나온다.
아무런 말도 상의도 없이, 게임은 시작됐다.
비장하게 두 자루의 검을 들어 올린 스벅이 파이팅을 외치고 나섰다.
마음을 굳게 먹은 스벅은 참 열심히도 뛰어나갔다. 함께 전장에 나선 팀원이 뒤쪽에 가만히 서있는 것도 모르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