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화 〉 167 아무래도 걸리적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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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칡즙 좋은데.
현관 앞, 종이 백을 받아들고는 멍청한 표정을 짓는 스벅의 얼굴이 의아했다.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건지. 의례적인 선물을 받고 뛸 듯이 기뻐하는 걸 바라지는 않았다만, 그래도 저런 얼빠진 표정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저것 때문에 일부러 시간을 당겨서 나왔는데.
칡즙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금방 후들거리기 시작한 팔이 조금 뻐근한 것도 같았다. 여러모로 시작이 좋지 못했다.
문을 열고 마주한 스벅은 뒤풀이 때와 비슷한 인상착의를 하고 있었다. 포마드라도 발랐는지 윤기가 흐르는 머리는 올백으로 넘겨서 이마를 훤히 드러냈다. 스벅이 방송을 할 때면 종종 볼 수 있는 헤어스타일인데, 이 머리를 할 때마다 채팅창의 민심이 흔들리는 걸 본인이 알고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안 그래도 선이 굵은 편인 얼굴이다. 이마까지 훤히 드러내면, 과하게 멋을 낸 사람처럼 느끼함이 넘쳐흘렀다. 별다른 무늬 없이 캐주얼한 옷차림을 보면 그걸 아는 것도 같았는데... 이 정도면 방송을 위한 컨셉으로 받아들이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아무렴. 본인 스타일은 본인이 잘 알고 있겠지.
스벅은 어영부영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더니 나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묘한 향기가 풍겨왔다. 고개를 조금씩 돌리면, 그게 스벅이 지나간 자리에서 묻어 나오는 냄새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무슨 꽃 이름이 어울릴 것 같은 향수 냄새. 나는 향수 냄새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기초화장품이 풍기는 향기도 싫어하는 통에 무슨.
굳이 그걸 언급하고 넘어가지는 않았다. 인간관계에서는 사양해야 하는 말들이 많은 것이다. 타인이 항상 내가 선호하는 행동만 하리라고 기대하는 건 너무 유아적인 발상이겠지.
인위적인 꽃향기를 무시하고 걸었다. 신발장 안이 이런저런 신발들로 가득 차 있었다. 혼자 살고 있다고 들었는데, 신발을 사 모으는 취미가 있나 싶었다.
건물에 들어서기 전부터 지은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신축 건물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더니, 집 내부는 그런 기대를 조금도 배신하지 않았다. 대리석처럼 매끄러운 바닥부터 밝은 베이지색의 벽지까지. 현관을 나와 마주한 거실 인테리어는 더할 나위 없이 깔끔했다.
한쪽 벽면을 차지한 가죽 소파를 제외하면 별다른 가구가 보이지 않는다. 기껏해야 작은 탁자와, 반대쪽 벽면을 차지한 널따란 수납장이 거실 인테리어의 전부였다. 저 위에 TV라도 올라가 있어야 어울릴 것 같은데. 안 그래도 넓은 거실이다. 공간을 차지하는 가구도 적었으니 빈 공간이 보다 크게 느껴졌다. 깔끔해 보일 수밖에 없다고 해야 할까. 조금만 보정을 더하면 모델 하우스라고 말해도 믿어질 지경이다. 생활감이 없는걸 보면 평소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공간 같기도 하고.
넓은 거실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면, 화장실 하나와 방 두 개를 확인할 수 있다. 저 방 중 하나가 방송을 위해 사용되는 공간이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아마 침실일까. 어딘가 손님을 위한 방이라거나, 혹은 서재로 쓰는 방이 있다고 해도 어색함이 없을 것 같은 구성의 집이었다. 청소를 하기도 힘들 것 같은데. 설마하니 가정부를 고용해서 쓰는 걸까. 이런저런 짐작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혼자 이런 곳에서 산다고. 부자를 보고 주눅이 드는 건 전형적인 소시민의 특징이다. 나는 주눅이 들지 않았다. 그냥, 그냥 조금 신경 쓰일 뿐이지.
...더 비싼 칡즙을 고를 걸 그랬나.
"밥은 먹었어요? 어... 혜진 씨."
"네. 먹었죠."
"그럼 방송 좀 진행하다가 저녁은 시켜 먹든가 하죠. 혹시 먹방 같은 거 불편하시면 말씀하세요. 밥 먹는 동안 캠 꺼드릴 수 있어요."
"아. 별로 상관없을 거 같아요."
친절하게도 물어온다.
이런 말은 조금 미안하지만,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니 느끼함이 배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배려도 많이 받아봐야 받을 줄 아는 법이다.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표정이나 몸짓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건 쉽게 경험하기 힘든 일이다. 이건 특히 남자를 대면할 때 더 심해졌는데... 이렇게 둘이 가까이서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그걸 외면하고 싶어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성현과 이야기를 나눌 때면 이런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쩌면 스벅의 태도가 더 노골적이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실내화를 신으라고 발 가까이 직접 내밀어 주는 일이나, 여기 앉으라고 의자를 가져오는 행동. 온기 가득한 방 안에 들어와 춥지 않냐고 물어오는 말투까지.
내가 어디서 이런 대접을 받아봤겠는가. 사소한 몸짓이나 말투에서 느껴지는 무언가가 고맙다기 보다 어색했다. 그래서인지 가까이하기가 조금 불편했다.
분명 마이크로 교류를 할 때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차라리 빨리 게임을 시작하면 이런 분위기도 조금은 누그러지지 않을까 싶었다. 어색한 공기가 무겁게 다가왔다.
스벅이 방송을 진행한다는 방은, 방 전면을 커버하는 방음부스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렇게 부스를 직접 확인하는 건 처음이다. 스벅이 방송에서 그렇게 크게 떠들어대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방송을 하는 사람이면 거의 필수라고들 하던데, 원룸에 살고 있는 나는 고려도 하지 못했다. 그저 조곤조곤 말할 수밖에.
다행히 지금껏 민원이 들어온 적은 없었는데, 이렇게 완벽히 세팅된 공간을 보고 있자니 욕심이 생기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저 크고 둥그런 마이크도 그렇고. 내 짧은 지식으로는 알아볼 수 없는 묘한 형태의 장치들도 컴퓨터에 연결된 상태였다. 볼륨 따위가 적혀 있는 걸 보면, 오디오 세팅과 관련된 장비일까. 깔끔하게 정리된 전자 제품은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잡아 끄는 맛이 있다. 뭔지도 모르면서 나도 하나 갖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만들어.
부스 안도 전반적으로 깔끔한 건 거실과 다를 바 없었다. 사람을 불러서 정리했는지 복잡한 선들도 책상 아래쪽에 가지런히 정리된 상태였다. 그래도 여기는 방송을 하느라 매번 사용하는 공간일 텐데. 이토록 깨끗하게 정돈된 걸 보면 조금 신기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당연히 더러운 것보다는 낫지만...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면 실례겠지.
호기심에 차서 고개를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문득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그 짓을 그만뒀다. 애새끼도 아니고 남이 사는 공간에 초대받아서 이게 무슨 짓인가 싶더라. 노골적으로 구경을 하는데도 아무 말이 없는 스벅이 차라리 어른스럽게 느껴질 지경이다.
나는 조용히 모니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사용하는 모니터보다 조금 크게 느껴지는 것이 두 개. 이게 내 방송 세팅과 유일하게 비슷한 점이라는 게 조금 우스웠다. 그래, 모니터 개수는 중요한 법이지. 아. 따지고 보면 키보드랑 마우스가 있다는 것도 비슷하다. 이제 보니 별 차이가 없을 지도.
곧 방송을 시작한다던 스벅은 밖으로 나가더니 내게 음료 하나를 건네줬다. 붉은빛이 감도는 액체에서는 은은한 자두 향이 맴돌았다. 미네랄워터. 자두 향 극소량 첨가, 같은 느낌이다. 점차 갈증이 심해지고 있던 순간이다. 받아든 페트병의 액체가 빨리도 줄어들었다. 목이 타고,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르고. 시선은 어디 한곳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정서불안과 비슷한 이 상황이 무엇에서 기인했는지는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았다. 곧이어 진행될 방송에 대한 불안감이다.
정말 막연한 부담감이다. 평소와 다른, 게스트라는 입장이 압박감으로 다가오는 건지. 아니면 지난 며칠간 지속된 스벅의 지나친 홍보로 인해 오늘 방송의 규모가 내 생각보다 훨씬 커져버렸다는 게 문제인지. 어쩌면 이 모든 게 뒤섞인 복합적인 우려 때문일지도 모른다. 집 밖으로 나올 때만 해도 별다른 미동도 없던 신체가, 이제서야 불안 증상을 보인다는 게 조금 불쾌했다. 항상, 막상 닥치고 나서야 문제를 깨닫는다. 도피를 막기 위한 극약처방이라지만 언제나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남이 주도하는 방송에 꼽사리 낀다는 건 몹시 어색한 일이다. 마이크의 위치도, 카메라의 위치도 다르다. 내가 늘 방송을 키는 공간과는 전혀 다른 장소. 마우스를 움직이려고 책상에 가까워진 스벅이 모니터 일부를 가로막았다. 누군가의 뒤에서 방송 환경을 바라보고 있다는 게, 새삼스럽게 신기했다.
"음, 이대로 방송 킬게요. 대기 화면으로 시작될 테니까, 바로 얼굴이 나오지는 않을 거예요. 시청자들 좀 모이면 그때 공개하는 게 조금 더 극적이잖아요? 송출 화면은 이쪽에서 확인하면 되니까 참고하시고. 켜도 되겠죠?"
"네. 그러세요."
이젠 다른 사람 방송에 출현까지 하는구나.
정말 내 일 같지 않은 감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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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 세 시.
스벅의 방송을 팔로우한 다수의 팔로워들에게, 방송 시작을 알리는 알람이 울려 퍼진 시간이다.
평소 스벅이 방송을 시작하는 저녁 시간에 비해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진행하는 방송 컨텐츠에 따라 방송을 시작하는 시간도 종종 바꾸곤 하는 스벅이었으니, 방송 시간이 조금 수정된 정도는 그다지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방학 시즌이 되면 어린 친구들과 게임을 같이 해보겠다고 대낮에 매칭을 돌리기도 했던 인간이다. 주말 세 시라는 시간은, 평일 점심시간과 새벽에 비하면 아주 양호했다. 일상적인 일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물론, 내용을 살폈을 때 오늘 스벅의 방송은 전혀 일상적인 컨텐츠 방송이 아니었다.
노르드에게 알겠다는 사인을 받은 바로 다음 날, 스벅은 노르드가 직접 자신의 방송 스튜디오에 출현한다는 내용을 담은 홍보를 시작했다. 자신의 방송, 팬카페, 엘튜브 커뮤니티. 직접 활용하는 소통의 창구는 전부 이용했다.
거기엔 당연히 방송 날짜와 시간이 정확히 포함되어 있었는데, 헷갈릴 소지를 막기 위해 스벅이 직접 정확한 날짜와 시간이 기재된 공지글을 작성했을 정도였다. 다른 곳에 홍보할 거면 이 글을 직접 퍼가라는 추신은 그 덤이었고.
아무튼, 흔히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아니라는 건 매우 자명한 사실인 것이다. 스벅은 홍보 과정부터 심혈을 기울였다. 며칠이 지난 뒤에는 굳이 홍보를 반복할 필요도 없었는데, 그가 퍼뜨린 말이 이미 시청자들의 손에 재생산된 채로 이리저리 흘러들어갔기 때문이다. 스벅은 자신의 편집자가 알려준 소식으로 홍보가 제대로 성공했음을 확인했다. 유명 커뮤니티의 추천글에 자신이 올린 홍보 글이 버젓이 올라간 캡처 화면. 다른 증거는 필요하지도 않았다. 당장 표시된 조회수만 몇 만이 넘어가는데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홍보는 성공했다. 이토록 열심히 방송 컨텐츠를 홍보했던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도 잘 안 났다. 아마, 자비를 털어 저랭크 대회를 열었을 때나 그렇게 했었을 터다.
사실 어느 정도 고정 시청자를 확보하고, 엘튜브 채널도 자리를 잡은 뒤에는 굳이 홍보를 하지 않아도 많은 시청자가 모였던 것이다. 굳이 일을 크게 벌일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그랬던 그가 갑작스레 판을 크게 키운 까닭은... 어느샌가 정체되어버린 자신의 방송이 이번을 계기로 크게 뒤바뀔 수 있다고 직감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을 끌어모았다는 점에서, 일단 스벅의 직감은 적중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문열어라]
[뭔ㅋㅋ 알람듣자마자 왔는데 왜이래]
[노르드! 노르드! 노르드! 노르드!]
[빨리 센세보여줘... 나 현기증 날 거 가테]
[나갤에서 왔습니다@@@@ 나갤일동은 노르드를 응원합니다@@@@@]
[도배하지마 쓰레기들아]
[쓰벅 왜 3분 지각함]
[와 채팅창 화력뭔데]
[노르드 어그로 효과 뒤지네ㅋㅋㅋㅋㅋㅋ 다들 이걸속냐? 노르드가 스벅집에 찾아올리가 ㅋㅋ]
[진짜 오늘 노르드옴?]
[여스가 남자랑 둘이ㅋ; 방송 끝나고 볼만하겠네~]
[마이크라도 좀 켜봐]
[둘이 같은 공기 마시는거임? 좀 불편한데]
[육수새끼들 쳐내고 시작하죠 ㅈㄴ역겹네]
[컨텐츠 커신 스벅ㄷㄷ 어그로 꼬인거보면 오늘도 일단 해냈다!]
모여든 시청자의 규모가 다르다.
몇천이라는 단위를 오가는 스벅의 평균 시청자는 결코 적은 편이 아니었으나, 그로써도 만 명이 넘는 시청자를 불러 모으는 건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제대로 준비한 주말 방송 컨텐츠가 대박이 나면, 그때서야 간신히 넘어볼 만한 수치다. 생방송 시청자가 만을 넘어선다는 건 그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엘튜브 영상 조회수와는 비교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달성하기 힘든 만이라는 숫자가... 오늘은 스벅이 방송을 시작하고 불과 몇 분 만에 할당량을 가득 채웠다. 어그로를 많이 불러 모을 수 있다고는 예상했으나 스벅도 이 정도로 성공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빠르게 올라가는 시청자 현황을 보며, 스벅은 한참을 뜸 들이려고 했던 자신의 방송 계획을 급히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이런 채팅창에 익숙하다지만 이건 정도를 넘어섰다. 시청자가 벌써부터 이렇게 많다면, 한 번 삐뚤어진 민심을 바로잡는 것도 여간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지금은 굽히고 들어가는 게 맞았다.
화면 전환을 시작하기 전, 스벅은 뒤를 돌아 혜진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녀는 저 채팅창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가 궁금했다. 평소 노르드의 방송을 볼 때 드러나는 구태의연한 모습은 과연 어디까지 꾸며진 것일지.
예상과 달리 혜진의 표정은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오늘 현관 앞에서 마주했을 때와 똑같은, 그 표정이다. 그때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던 눈은 지금 모니터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시선이 향하는 곳은 역시 채팅창이 있는 쪽이다. 저 난리를 바라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방송 경력이 몇 년을 넘어서는 자신도 초조함을 느끼고 있는 상황이건만, 그녀의 혈관에서는 차가운 피가 흐르는 듯했다.
돌연, 아무 미동 없이 모니터를 향하던 혜진의 시선이 스벅의 얼굴로 향했다. 모니터 앞에 설치된 조명 때문인지 안 그래도 하얀 혜진의 얼굴이 창백한 귀신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잠깐 스벅의 얼굴에 눈을 고정하더니, 앙다문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스벅님."
"아, 옙. 이제 마이크도 키고, 캠도"
"머리, 내리면 안 돼요?"
"...예?"
"안 어울려서."
...갑자기? 아니, 그걸 왜 이제야.
마우스를 잡으려던 손만 허공에서 방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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