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70화 〉 170 ­ 보릿자루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170/243)

〈 170화 〉 170 ­ 보릿자루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 * *

"치킨, 피자... 뭐 더 시켜드려요? 떡볶이 좋아하시나? 얼마든지 말씀하십쇼. 제가 손님 대접 하나는 원래 기가 막히게 하는 사람이니까."

"어차피 다 먹지도 못해요. 입이 짧은 편이라."

"그럼 하나씩만 시킬게요. 남으면 제가 나중에 먹죠, 뭐."

하나씩... 도 과했나.

책상 앞, 빠르게 차려진 한상이 거창하다. 이런 합방을 위해 준비한 건지 책상의 구조가 독특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반적인 책상과 다른 게 없어 보였는데, 배달 음식을 받아 돌아온 스벅이 밑단을 잡아당기자 보조 테이블이 마치 수납장처럼 튀어나왔다. 체감상으로는 갑자기 두 배 이상 넓어진 기분이다.

포장을 뜯기 전부터 기름지고 고소한 냄새가 부스 안을 가득 채웠다. 먹기 전부터 침샘을 자극하는 익숙한 냄새. 기름진 음식을 조금밖에 수용하지 못하는 위를 가진 탓에, 최근에는 입에도 대지 않았던 것들이다. 그런데도 많이 먹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 것보다 지금 나는 술 생각이 더 간절하다. 두 시간 넘게 인터뷰에 시달리느라 지친 정신을 회복시켜줄, 피로 회복제. 어쩐지 스벅은 전혀 피곤한 눈치가 아니었다. 왜 나만 극심한 피로감에 시달리는 걸까.

금방 생각을 털어버렸다. 아무튼, 오늘 이곳에 술이나 처먹자고 들른 건 아니었으니까.

"아니, 진짜 다 먹은 거라고요? 뭐 얼마나 먹었다고... 평소에 뭐 안 드시고 사는 거 아니에요?"

"하루 두 끼 잘 챙겨 먹는데요."

[입 짧은거 실화냐]

[아 선생님은 이슬만 드시고 산다고 ㅋㅋ 도수 높은걸로다가]

[생각해보니까 이 사람 먹방하는 거 본적이 없네...]

[노르드가 씹은 닭이 되고 싶다]

[흠... 저는 조금 더 살이 붙은 여자가 좋습니다만ㅎ]

[왜ㅋㅋ 술 자주마시는데]

[평소에 요리 자주하시나요??????????]

[스벅이 상대적 돼지같다]

[노르드님은 요리 잘하시나용? 질문좀 받아주세요ㅠ]

[이 사람 성격이면 뒤지기 직전에 한끼 챙겨먹지않을까]

[몸이 저런데 뭐가 들어가겄냐ㅋㅋ]

커다란 채팅창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내 방송과는 다른 설정 때문일까. 다른 스트리머의 방송에 출현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의식 속에서 자꾸 내 신경을 분산시키는 탓일지도 모르겠다.

스벅의 채팅창은 내 방송 채팅창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걸 단순히 같은 플랫폼이라는 이유 하나로 정리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쪼망의 방송이나, 저번에 염탐을 위해 훔쳐본 우나밍의 방송 채팅창은 이런 느낌과는 전혀 달랐다. 칼고의 방송은... 비슷한 편인가. 원래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스트리머가 방송을 하는 스타일이 채팅창 분위기 형성에 크게 일조하는 모양이다. 그렇게 따지면 내 방송은 스벅의 방송과 더 흡사하다는 것일까. 괜스레 절망감이 찾아온다.

아니, 이건 내가 게스트로 출현한 방송이다. 스벅의 홍보를 듣고 내 방송 시청자들이 유입된 터라 이렇게 익숙한 느낌이 나타났다고 생각하자. 평소 스벅의 채팅창은 이것보다 훨씬 더 거칠고 불탔다고. 암.

올라가는 채팅 곳곳에 나에 대한 질문이 스쳐 지나갔다. 인터뷰 시간에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뭐가 그리 궁금한 게 많은지.

"요리, 요리해서 먹죠. 원래 자주 시켜 먹었는데, 그렇게 하면 남는 음식 처리가 힘들어서."

"움, 노르드님 요리 잘하세요? 상상이 안 가네. 나중에 요리 방송 같은 거 하셔도 시청자들 엄청 몰릴 듯. 제일 잘하는 게 뭔데요?"

채팅창의 질문에 답해주고 있으면, 옆자리에서 피자 한 판을 먹어치우던 스벅이 우물거리며 끼어들었다. 쩝쩝거리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얼른 입을 열었다.

"먹기 편한 음식을 많이 하죠. 한 그릇으로 해결되는 거. 덮밥이라든가."

"오, 덮밥. 집에서 하기 좀 번거롭지 않나? 먹을 때나 편하지 들어가는 재료가 많잖아요."

"네? 계란만 있으면 되는데. 후라이 얹어서 간장 치면 끝이잖아요."

"...그게 덮밥이야?"

그럼 뭔데.

[가끔보면 진짜 대충사는거같기도하고...]

[간장계란밥은 ㅇㅈ이지; 그 정도면 영양식아님?]

[노르드가 해주면 매끼 그것만 쳐먹고 살수있음]

[누가 안챙겨주면 굶어죽을듯ㅇㅇ 그러니 저를 데려가세요]

[진짜 살기위해 먹나]

채팅창의 반응을 보니 말실수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방문할 때마다 살이 또 빠진 것 같다며 추궁하는 혜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뭘 좀 챙겨 먹으라는 소리만 몇 번을 들었던지... 동생의 알 수 없는 집요함을 떠올리면 분명히 이 방송도 보고 있을 게 뻔했다.

오래 끌고 가서 좋을 주제는 아니겠는데.

채팅창을 주시하며 주제를 바꿨다. 내가 보고 있는 걸 아는 건지, 온갖 질문들이 올라오는 터라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관리자가 일을 하고 있는 건지 이상한 내용의 채팅이 칼처럼 차단되는 모습이 조금 재밌었다. 익숙한 닉네임을 찾아내는 것도 그렇고. 내 방송 편집자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고개를 돌리면 어느샌가 피자 한 판을 모두 처리한 스벅이 컵에 콜라를 따르고 있었다. 내가 한 조각을 처리했다는 걸 생각하면, 남은 피자를 먹어치운 속도가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스벅은 굉장한 대식가인 모양이다. 잔반 처리를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

포만감이 차오르면 사람은 게을러지기 마련이다. 당장 일을 처리하고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송이 시작하고 몇 시간이 지났더라. 스벅의 대본에 휘둘리느라 정작 오늘 내가 이곳에 방문한 목적은 전혀 수행하지 못하고 있지 않나.

나는 자리에서 고쳐앉았다. 왠지 모르게 입안이 텁텁했다.

###

"먼저 선생님이 보여주시면 안 될까요? 제 플레이는 많이 봤잖아요. 옆에서 시범을 먼저 보고 하는 게 아무래도 훨씬 도움이 되지 않을지."

지그시 자신을 쳐다보는 눈초리가 매서웠다.

기름진 음식으로 가득 찬 배가 더부룩하게 느껴지는 게, 지금 이 상황이 긴장되는 것도 같았다. 아무렴, 누구를 꼬드기고 있는 건데. 긴장이 될 만도 했다.

식사를 마친 직후, 너무 미뤘다며 얼굴을 굳힌 혜진은 계속 저 눈빛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다. 미인의 표정 변화는 그 자체로 분위기에 영향을 주는 법이다. 방송 분량을 뽑기 위해 인터뷰를 늘리고 늘렸던 성호는 내심 켕기는 마음이 겉으로 드러날까 염려하며 표정 관리에 힘써야만 했다. 이게 어떤 기회인데. 어쨌든 소위 뽕은 뽑아야 하지 않겠는가.

노르드를 초청하면서 준비한 작업은 홍보나 방 청소 따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단순히 예쁜 여성 게스트에 그쳤다면 성호도 그 정도 준비에서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랬으면 애초에 노르드가 이렇게까지 유명세를 얻을 수는 없었으리라. 지금 모니터 앞에 앉은 차가운 인상의 여성 스트리머는 얼굴을 공개하기 전부터 큰 화제를 불러 모았던 사람이다. 경이로운 수준의 게임 실력이 바로 그 핵심 요인이었고.

성호가 오늘 방송을 위해 손캠 세팅까지 준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혜진을 키보드 앞에 앉혀두는 데 성공한 순간이다. 그녀가 나이트폴 계정에 로그인한 직후, 잠시 설정을 만진다며 마우스를 받아낸 성호는 미리 준비한 방송 설정을 건드렸다. 딸깍거리는 소리가 들리기를 몇 차례, 캠 화면으로 가득 찼던 방송 화면이 순식간에 모습을 바꿨다.

모니터 상단에 배치한 카메라에서 붉은빛이 깜박거린다.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카메라. 두 사람의 얼굴이 비치는 캠 화면을 화면 우측 상단에 배치하고, 그 옆에 키보드와 마우스를 조작하는 손이 따로 나타났다. 게임을 하는 사람의 얼굴과 손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는 세팅이다. 몇 번인가 자신의 방송에서 시험해 봤다가, 지가 무슨 프로인 줄 아냐는 타박을 들으며 때려치웠던 그 세팅.

그의 목에는 진주 목걸이였으나, 노르드에겐 아닐 것이다.

"그, 마우스랑 키보드 설정 마음대로 바꾸셔도 됩니다. 마우스 DPI 설정은 바탕화면에 있어요. 세팅에는 좀 민감한 편이세요?"

"됐어요. 인게임 감도 정도만 만지면 될 거예요."

[쓰벅 준비 철저히했네 손캠뭐냐ㅋㅋㅋㅋㅋ]

[노르드...손캠...? 윽... 머리가...]

[눈나 손 너무 예뻐요]

[노르드 손캠은 레전드지ㅋㅋ 자기 방송에선 절대 다시 안해주는데]

[엘튜브에 돌아다니는 영상보면 손가락 ㅈㄴ 부드럽게 움직임]

[노르드님 고감도 아님?]

[아니 좀 떨어지세요; 거리가 너무 가깝잖아]

[이런 귀한 걸 다]

고생해서 준비한 보람이 있다.

화면 설정을 바꾸자마자 불만을 토로하던 채팅창이 금새 진정되더니 오히려 기대감을 표출했다. 노르드를 게스트로 초청할 수 있다면, 시청자들이 어떤 방송을 기대할지. 그걸 떠올리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엘튜브에서 돌아다니는 노르드 관련 영상의 조회수가 사람들의 관심도를 그대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과거 그녀가 손캠을 공개했던 영상 역시 상위권에 포함된 영상 중 하나였다. 조회수 몇십 만을 훌쩍 넘은 그 영상의 댓글을 확인하면, 제발 다시 손캠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댓글이 지금도 갱신되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그건 성호도 공감하는 바였다. 급박한 전투의 순간, 무서운 속도로 돌아가는 노르드의 개인 화면을 보고 있으면 대체 손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호기심이 솟구치는 것이다.

그걸 포착할 수 있는 기회를, 어떻게 놓치겠는가.

성호는 모니터에서 혜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이트폴에 접속한 그녀는 분주히 인게임 설정을 건드리는 중이었다. 조작 탭에 들어가 마우스 감도나 키보드 설정을 바꾸는 모습에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책상에 한쪽 팔을 올려두고 턱을 괴고 있었는데, 마우스를 쥔 오른손만 움직이고 있는 탓에 귀찮아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금방 바꾼 설정을 적용하고 창을 닫은 혜진이 손을 풀듯 가볍게 왼손을 흔들었다.

"그럼, 저번에 알려드린 것부터 보여드릴게요. 어깨 보고 패링 치는 거."

"아, 네. 편한 대로 하십쇼. 상대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냥 공방에서?"

"으응. 상대가 있으면 편하긴 한데. 일반겜으로 하면 몇 번 보여주지도 못할 거 같고."

혜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채팅창에서 난리가 일어났다. 연습 상대를 자처하듯, 자신의 닉네임을 올리는 채팅이 정신없이 밀려들었다. 성호가 그걸 보고 헛웃음을 내뱉는 사이, 혜진은 곧장 나이트폴 친구 목록을 펼쳤다. 채팅창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친창은 왜, 어. 친구창 엄청 깨끗하네요? 왜케 친구가 적어."

"아. 메세지랑 친추 때문에 차단을 박아놔서."

성호의 말대로 깔끔하게 정리된 노르드의 친구창은 스크롤을 내릴 필요도 없이 내용물이 다 드러났다. 혜진의 마우스가 밝게 빛나는 닉네임으로 움직였다.

'칼고'. 성호에게도 익숙한 닉네임이다.

"이 사람 오늘 휴방이었나."

"...아니, 칼고님한테 부탁한다고요? 저분 그래도 같은 대회 나가는 경쟁자잖아."

"연습인데 별로 상관없잖아요. 무기 다 쓸 줄 아는 사람 구하기도 힘든데."

망설임 없이 닉네임을 클릭한 혜진이,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이전에 주고받은 대화를 표시하는 메시지 창이 작게 나타났다. 평소에도 자주 사용하는지, 스크롤의 길이가 생각보다 길었다. 사적인 친분이 꽤나 깊을지도 모른다고, 성호는 생각했다.

Nord11:겜중? 저 연습좀 도와주셈

...참 성의 있는 부탁이다.

[휴방중인 칼고 어리둥절행ㅋㅋㅋㅋㅋ]

[아니 연습 부탁을 저렇게 한다고? 둘이 생각보다 더 친한가본데??? ㅁㅇㅁㅇ]

[? 칼고 방송보는 사람들은 노르드 맨날 이러는거 알텐데ㅋ]

[아ㅠ 저도 올웨폰으로 도와드릴수있는데ㅠㅠ 저를 때려주세요...]

[스벅 어이없어하는거 개웃기노ㅋㅋㅋㅋㅋㅋ]

저런 부탁에 잘도 도와주겠다고 생각하기를 잠깐, 칼고의 대답은 빨리 돌아왔다. 거의 즉각적인 반응이라 봐도 무방한 속도다. 방금까지 게임을 하고 있던 걸까.

칼고:베코 ㄱ

맥락 같은 건 죄다 무시하는, 무섭도록 빠른 답장이었다.

"무기 뭐 들어야 되는데? 쌍검?"

"응... 창? 창 쓰는 사람이 많더라고."

"어. 준비되면 말해."

이어지는 대화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연습을 도와달라는 노르드의 제안에 동문서답으로 대답한 칼고는, 방송을 보고 있었다는 말과 함께 놀랄 만큼 빠른 진행 속도로 또 다른 합방을 성사시켰다.

베타코드 음성 채널에 표시된 자신의 닉네임에서 위화감이 느껴진다. 분명 자신이 혜진의 옆에서 그녀의 플레이를 지켜보는 합방이었을 텐데, 갑자기 제 삼자가 나타나 끼어튼 판이다. 하물며 지금 대화를 나누며 게임을 진행하는 건 노르드와 칼고였다. 순식간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되어버린 꼴이 아닌가. 성호는 이유 모를 소외감에 몸을 떨었다.

혜진은 온전히 나이트폴에 집중한 상태였다. 손을 푸는 듯 키보드 위에서 움직이는 손이 분주했다. 종종 입을 열었는데, 나오는 말은 대체로 칼고에게 향하는 말이었다. 오늘은 휴방이냐는 물음에, 그렇다는 칼고의 대답이 돌아왔다. 지극히 일상적인 문답이다. 성호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스벅님? 잘 보세요. 진짜 별 거 없는 건데, 이거. 제가 어느 쪽보고 움직이는지 말씀드릴, 듣고 있어요?"

"아, 네. 듣고 있죠. 아주 잘~ 듣고 있죠."

의뭉스럽다는 듯 자신을 쳐다보는 눈이 얄미웠다.

성호는, 혜진에게 플레이를 맡긴 자신의 선택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 *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