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72화 〉 172 ­ 벌레가 아니야 (172/243)

〈 172화 〉 172 ­ 벌레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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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이라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됨을 논하기 이전이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 그렇게 배워도, 그걸 실천하는 건 또 달랐다. 내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어떻게 알겠는가. 누군가는 겉으로 드러나는 감정선에 동조하는 것도 훌륭한 공감이라 말하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진정 타인과 공감했다고 말하기 위해선 적어도 대상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거창한 삶의 배경 따위를 쭉 읊을 줄 알아야 그 사람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냐고.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기에 공감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소통을 위해선 타인과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누군가 말하지 않았나. 마주한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어야 원활한 소통이 가능하다는 건 확실히 맞는 말 같다. 낯선 사람과의 대화가 지독히도 어색한 까닭은 서로 아는 게 없으니까 그런 거라고. 결국 소통을 위해선 공감까지는 아니어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누군가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생각을 굳이 고뇌하고 궁구하는 게 또 나의 슬픈 천성이었다.

아무튼 그렇다. 내가 굳이 공감에 대한 논지를 이렇게 길게 늘어놓는 까닭은, 그래. 타인을 이해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람의 관점은 존재하는 사람의 수만큼 있을 수 있는 법이라더니,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건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이냐고.

나는 지금, 난제를 눈앞에 두고 있는 거다.

"...선생님? 그렇게 쳐다만 보지 마시고... 말씀을 좀."

어려운, 어려운 문제다.

새빨갛게 불이 들어온 화면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코앞에 있는 칼고의 모습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게, 완전한 빈사 상태였다. 출혈이 누적된 결과다. 당장 몇 초만 가만히 있어도 목숨이 다할 것 같은 상황. 아니나 다를까, 잠깐 바라본 사이 온 시야가 흑백으로 물들었다. 붉은빛이 화면 전체로 퍼져 어지러울 지경이었던 이전에 비하면야 컴컴한 흑백 시야가 훨씬 낫다 싶었다.

5데스 째. 상태창에 표시된 숫자가 비참하게 다가왔다. 시행 횟수가 많다는 사실보다, 그동안 발전한 게 없다는 사실이 더 그랬다. 저 숫자가 두 배로 늘어난들 더 나아질 수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어찌 보면 가장 비참한 결과였다.

"어지럽네."

"그, 크흠. 이게, 제가 버클러는 좀 사용감이 불편해서... 솔직히 버클러로 창 패링 하는 건 조금... 피격 면적 넓은 무기는 자신 있거든요?"

상정 외의 상황이다.

그간의 연습에서 패링에 집중했던 이유는, 스벅의 장기가 반응속도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건 빈말로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특출나다고 표현하기는 힘들어도, 준수하다고는 말할 수 있을 정도의 반응속도. 몇 번이나 스벅과 스파링을 반복하면서 직접 체감했던 사실이다. 경험으로 알아낸... 사실이라고.

그러니 이 정도는 수행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무기만 주시하고도 패링을 칠 수 있는 반응이 되는데, 다른 요령을 알려주면 커다란 변수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공격을 하기 직전 어깨를 주의 깊게 살피라는 말은 그냥 하는 헛소리가 아니었다. 어깨를 중심으로 집었을 뿐이지, 사실 대시나 회피 동작에도 모두 전조가 되는 움직임이 존재한다. 의식만 할 수 있으면 그걸 확인할 수 있을 건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센세 표정좀 푸세요~~~ 우리 아이가 배우면 잘하는데~~ 아직 공부를 덜해서]

[근데 솔직히 저걸 패링치라는 건 에바아니냐?? 보는 나도 잘 안보이는데 ㅋ]

[칼고님 너무 이악물고 하는 거 같은데요... 창이 안보여]

[못하는 것도 한두번이지 ㅋㅋ 노르드가 시범도 보여줬는데 이걸 왜못함]

[어깨보긴봄? 시야 돌아가는거보면 창만 보고 있는거같은데?]

[노르드 사랑해]

스벅은 난처하다는 표정을 하고는 눈을 힐끔거렸다. 내 쪽과 채팅창을 번갈아가면서 훑어보는데,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칼고가 창을 찌르는 족족 피를 흘리던 이전 상황을 떠올렸다. 직접 옆에서 바라보면, 방송으로 봤을 때에 비교해서 확실히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공격을 받아낼 때 스벅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손가락은 키보드의 어느 곳에 머물러있는지. 그리고, 긴장감 때문인지 경직된 몸과 얼굴 표정까지도.

타인을 이해하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적의 어깨에 집중하라는 내 조언은,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전투가 진행될수록 스벅의 시선은 줄곧 빠른 속도로 찔러들어오는 창에 머물러 있었다. 뒤늦게 창 끝을 따라가는 스벅의 에임이 그걸 증명했다.

터널 시야. 한 번 창을 쫓기 시작한 시점은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공격의 전조를 확인하라는 거였는데... 누군가에겐 그게 어려울 수도 있다고.

"한 번 찔린 다음부터는 계속 창만 따라다니던데요. 몸을 안 보고."

"그...래요? 솔직히 말하면 처음 페이크 몇 번 당하니까 머리가 하얘져서... 정신 못 차리겠네, 진짜."

저런 표정을 짓고 고개를 내젓는데, 추궁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할 수 없는걸 하라고 그러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닌가. 누군가에겐 자연스러운 일이, 다른 누군가에겐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고. 간과할 걸 간과해라. 스벅이 방송 컨텐츠를 위해 고의적으로 랭크를 내렸다는 내 추측은 정답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룩에서 비숍으로의 강등이... 실력을 따라간,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괴담. 실감 나는 무서운 이야기는 간혹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소름이 끼치게도.

아니... 터널 시야는 반복 연습으로 극복할 수 있는 증상인가? 더 이상 확신할 수가 없었다.

"잠깐 칼고님이랑 말 좀, 그냥 채널 들어가도 되나요?"

"아... 예. 음소거만 해제하면 되요."

나이트폴 화면이 잠깐 내려간다. 리스폰 제한을 없애다시피 설정한 탓에, 이미 부활한 캐릭터의 시야가 더없이 깨끗했다.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칼고가 흉흉하게 허공을 찔러댄다.

지난 연습에서 스벅에게 죽었던 기억이 뒤끝처럼 남아있는 걸까. 스벅과 자리를 바꾼 직후부터, 집요하게 달려드는 모습에서 악의가 묻어 나온다. 공격하면서 무빙을 얼마나 많이 섞는지 엉망으로 흔들리는 창 끝도 그렇고.

실전에서 저렇게 과하게 스탭을 밟는 경우는 거의 없다. 상대의 당황을 유도할 수는 있겠으나, 정작 자신이 의도한 타점을 빗 맞추게 될 테니까. 스벅이 패링을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데에는 칼고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었다. 저렇게 뒤끝이 강하면 추하다고.

"아, 아. 들려요?"

"들려."

"너무 공격이 지저분하지 않아요? 악의가 느껴지던데."

"너한테 하던 것처럼 했는데?"

"무빙을 너무 섞잖아. 누가 창을 그렇게 써요. 실전처럼 해달라니까."

"나는 원래 그렇게 하는데, 뭐."

"뭔, 애도 아니고. 그냥 약공격에 페이크만 섞는 식으로 해주세요. 감부터 잡을 수 있게."

"까탈스럽네. 해달라는 대로 해줬더니."

이 인간 왜 이리 퉁명스러워.

짧게 대화를 주고받는데 입을 삐죽거리고 있는 모습이 연상된다. 어이가 없어서 말을 이어가려고 보면, 옆에서 이상한 얼굴을 하고 나를 쳐다보는 스벅이 보였다. 미간을 좁히고 입을 뻐끔거리는 게, 달리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뭔데. 내가 이상한 말이라도 했나.

채팅창을 확인하면 NTR 운운하는 개소리가 드문드문 올라갔다. 커플 대항전이라는 대회 이름 때문인지, 대회 연습을 하는데도 커플 컨셉을 밀어붙이는 시청자가 종종 보였다. 스벅을 옆에 두고 칼고와 떠들고 있는 내 모습에 재밌다고 떡밥을 굴리는 모양이다.

스벅도 저 채팅을 확인하고는 얼굴이 썩은 걸까. 언뜻 살펴보면, 확실히 화가 난 것처럼도 보였다. 얼굴을 일그러지게 할만한 채팅이긴 했지. 상황에도 안 맞는 과한 컨셉충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법이니.

"연습, 계속 하죠. 제가 좀 더 열심히 할 테니까."

"아... 그래요."

뭔지 모를 압박감에 고개를 끄덕인다. 올백으로 넘긴 머리를 다시금 쓸어올리는데, 굳게 다문 입술을 보면 진지한 기색이 엿보였다. 알 수 없는 감정 변화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갑작스러운 동기부여인가. 무엇이 동기가 된 건지는 내가 알아차릴 여지가 없는데... 아무튼 연습에 집중한다니까 긍정적인 일이겠지.

한 걸음씩이다. 내 기준이 아니라, 스벅의 보폭에 맞춰서. 연습 결과에 따라 생각해둔 빌드 조합을 죄다 수정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진심으로 스벅의 발전을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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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악물고 집중한다는 건 이런 거겠지.

둔탁한 소리와 함께 창이 빗겨나갔다. 간발의 차로 튕겨냈다. 그간 몸에 새겨진 경험 때문인지, 성호는 몸이 흔들리는 반동으로 자신이 가까스로 패링에 성공했음을 알아차렸다. 완벽한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창을 회수하는 속도도, 무섭도록 빠를 게 뻔했다. 습관적으로 뒷무빙을 치려던 손가락을 억지로 붙들고는 제자리에서 자세를 회복하기를 기다린다. 곧바로 다음 패링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다.

저게 몇 번이나 몸을 관통했는지, 이젠 세는 것도 힘들었다.

어깨. 수차례 강조하던 혜진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언제 다음 공격이 이어질지 두려워 창으로 쏠리던 시선을 의식적으로 뒤바꾼다. 그제서야 창을 움켜잡은 칼고의 전신이 시야에 오롯이 드러났다. 어깨, 어깨. 피가 묻은 갑옷에 한눈이 팔리는 것도 정도가 있다. 무언가에 홀리듯 집중한 성호의 시선은 창병의 어깨를 끈덕지게 포착하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윽고 어깨가 흔들리는 순간이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기준 따위는 모른다. 살짝 뒤틀린 우측 어깨가 조금 기울었을 때, 성호는 그게 진짜 공격의 전조임을 파악했다. 몰입에 몰입을 더해 긴장한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미리 공격을 읽는데 성공한 시선은 흔들리는 창 끝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눈이 보내는 신호에 따라, 마우스가 움직인다.

챙­!

경쾌한 소리와 함께 전율이 흘렀다.

패링을 할 때 울려 퍼진 경쾌한 효과음. 창을 쳐내는 타격감. 강한 충격과 함께 크게 튕겨나가는 창. 비틀거리는 칼고. 그 모든 현상이, 방금 전 자신의 패링이 완벽히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자신도 모르게 내뻗은 검이 칼고의 목을 정확히 찌르고 들어갔다. 익숙하게 느껴져야 할 처형 모션이 다른 감흥을 가져왔다.

참지 못하고, 소리가 튀어나온다.

"우아아악! 했다! 씨발!"

[스벅! 스벅! 스벅! 스벅!]

[와 이걸 치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8데스 째... 원숭이도 학습 능력이 있다!]

[이건 ㄹㅇ 빡집중했다 지렸는데?]

[아니 왜 죽여ㅋㅋㅋㅋㅋㅋㅋㅋ]

[칼고 스벅한테 또 죽었네...]

[선생님 우리 쓰벅 칭찬좀해주세요ㅠㅠ]

[인간승리ㄷㄷ 하면 되긴하네]

이때다 싶어 확인한 채팅창에서 반응이 쏟아졌다.

이게 몇 번째 목숨이었나. 집중을 하겠다고 상시 표시되는 상태창까지 모조리 꺼버린 뒤였다. 자신을 자극하는 후원 TTS도, 채팅창도. 방해가 될만한 것들은 모두 치워버렸다. 열 번이 넘는 죽음이 반복되는 와중에 그의 주의에 들어오는 건 나이트폴 플레이 화면과 종종 들려오는 혜진의 조언뿐이었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목덜미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도 방금 알아챘다. 모니터에 빠져들듯 몰입한 탓에 체감상 한 시간은 넘게 지나간 것 같았다. 천천히 시간을 확인한 후에야 뒤늦은 성취감이 찾아왔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던 걸 성공했다. 그것도, 자신의 의도와 플레이가 맞아떨어진 완벽한 모습으로.

"잘했어요."

잔잔한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가까운 자리였다. 시야가 불편했는지 의자를 가까이 붙인 혜진은 선명히 미소 짓고 있었다. 얼굴을 대면한 시간이 얼마 되지 않음에도, 혜진의 표정 변화가 많지 않다는 걸 알게 된 성호였다. 지금 혜진의 얼굴이 보기 힘든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별다른 칭찬의 말이 없었음에도 가슴이 조용히 벅차올랐다. 혜진이 자신의 플레이를 지켜보는 내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신경을 쓰고 있던 참이다. 자신을 굼벵이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가. 부드럽게 풀린 혜진의 얼굴이 그런 불안을 싹 가라앉혔다. 긴장으로 굳어있던 성호의 전신이 축 처졌다. 한 건 해냈다는, 기분 좋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세 번만 더 해볼까요? 한 번 성공했으면 그다음부터는 훨씬 쉽겠지, 그쵸?"

장난을 치듯 내뻗은 혜진의 손가락이 성호의 팔뚝을 건드렸다. 검지와 중지를 교차하며 두드리는 것이, 당장 일어나 마우스를 잡으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 혜진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뻗어있던 성호가 뒤늦게 정신을 다잡았다. 뭔가,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아서.

"네? 뭐라고요?"

"세 번만. 세 번만 더요."

활짝 웃는 모습이 섬뜩하게 다가왔다.

화면 저편에서, 어느샌가 부활한 칼고가 코앞까지 접근해 창을 거칠게 휘둘렀다.

성호의 입에서 욕설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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