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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3화 〉 173 ­ 뱀 앞에서 재주넘기 (173/243)

〈 173화 〉 173 ­ 뱀 앞에서 재주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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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 눈을 떴다.

날이 다가올수록 덩치를 키운 걱정 때문에 층층이 쌓아둔 알람이 울리기도 전이었다. 눈꺼풀이 무거운 평소와는 달리, 눈을 뜨고 천장을 마주한 순간 의식이 각성했다. 침대에서 뒹굴며 정신의 기상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이것도 산뜻한 아침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평화로운 아침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의식적인 긴장감이 의식을 압박해서 협박이라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대회 당일이라는 게 그렇다.

침대 모퉁이에 앉아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대회 스케줄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어제부터 몇 번이나 확인하기는 했으나, 잔걱정 많은 내 정신머리는 중요한 일을 재차 확인하지 않으면 발작을 일으키는 것이다. 주최 측에서 보내온 대회 관련 파일을 열어 일정을 다시 훑은 다음에야 마음에 안정이 찾아왔다.

일찍 일어난 덕에 시간은 차고 넘쳤다. 일단 샤워를 하고, 가볍게 시리얼을 먹고, 천천히 외출 준비를... 머리가 빠르게 계획을 수립한다.

샤워를 하는 내내 머릿속에서 생각을 정리했다. 먼지 구름처럼 난잡하게 떠오른 잡념들은 대개가 공개 방송에 대한 우려였다. 대회 당일이 된 지금도 나는 공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경험이 있다던 스벅에게 물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시원찮아서, 나는 그냥 알아보기를 포기했다. 내가 뭔가 하지 않아도 알아서 진행되겠거니 하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걱정은 정말 어디서나 솟아오르는 법이다. 공개 방송 시작 전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과 대면할지. 최근 잠잠한 불안 증세가 갑자기 심화되지는 않을지. 대회는 준비한 대로 흘러갈지.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주접을 떠는 건 고쳐지지 않는 습관이다.

젖은 머리에 대충 수건으로 문지르고 나왔다. 김이 차오른 화장실 문을 열자마자 피부에 와닿는 공기가 차가웠다. 뜨거운 물로 데운 전신이 빨리도 식었다. 기다란 머리를 온전히 말리기 전에는 옷을 입는 것도 불편해서, 머리를 말리기 전에는 반바지만 걸치고 다니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매번 느끼는 일이지만, 민감한 피부는 온도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모양이다. 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벌써부터 차갑다.

혜민이 이런 모습을 보면 잔소리를 쏟아내겠지. 배를 차갑게 하면 안 된다느니, 머리를 제때 말리지 않으면 머릿결이 상한다느니 하는 내용이 자동으로 재생됐다. 아무렴,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인간이 이로운 일만 하고 살겠는가. 건강을 해치는 행동들은 대개 묘한 배덕감을 가져오고는 했다. 몸에 안 좋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이끌림에 실수를 반복하는... 상반신 탈의 상태로 뭔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덜 마른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문대면서 하는 생각이 참 덧없었다.

띵동­

아니... 이 시간에?

느닷없는 초인종 소리에 내가 한 행동은, 티셔츠를 찾는 것도 현관문으로 달려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보다 먼저 시선이 벽에 걸린 시계로 향했다. 최근 구매해서 먼지 하나 쌓이지 않은 둥근 시계의 시침은 현재 시각이 아침 8시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당황하기 이전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시간에 벨을 누를 사람이... 있다. 짐작가는 사람이 있다는 게 더 우스운 상황이다. 계획에도 없는 갑작스런 방문도 아니었다. 분명 어제 찾아온다는 쪽으로 대화를 마치긴 했었지. 구체적인 시간은 정하지 않았더랬다. '일찍'이라고 했던 거 같기는 한데, 아무리 그래도 아침 8시는 아니지 않은가.

황급히 티셔츠 하나를 몸에 걸치고 문으로 향한다. 덜 마른 머리카락을 정리해서 옷 밖으로 들어올리면, 얇은 옷감이 등에 찰싹 달라 붙는 것이 느껴졌다. 이래서 머리를 말리고 옷을 입는 건데. 괜한 찝찝함에 마음이 불편했다.

철컥.

"혜진씨, 안녕­"

역시나. 이른 아침의 방문자는 주연이었다.

주연의 방문은 예정된 일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오늘의 일정을 함께한다는 게 그랬다. 대회 일정이 확정된 다음부터 나왔던 이야기다. 공개 방송에 출현하는 김에 따로 엘튜브 영상을 위한 소스를 촬영하겠다나.

채널 관리에 열심히인 내 편집자는, 대회 공방과 관련된 백 스테이지 영상을 브이로그 형식으로 편집해서 올린다는 자신의 계획을 참 길게도 설명했다. 조회수가 확정된 컨텐츠임이 분명하다며 열을 올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평소 내 방송에 별다른 간섭도 하지 않는 편집자의 부탁이다. 나는 별로 망설이지도 않고 주연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래서, 오늘. 어떻게 촬영을 하겠냐는 물음에 주연이 내놓은 답변은 아무 걱정도 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자신이 따라다니며 알아서 촬영할 테니, 없는 것처럼 행동하라고. 내겐 꽤나 고마운 말이었다. 난 간단한 사진을 찍을 때도 얼굴이 굳어버리는 사람이었으니까. 촬영에 협조해달라고 해봤자 어색함 가득한 동작으로 그림을 망칠 게 뻔하겠지. 내 편집자의 혜안에는 놀랄 뿐이다.

반쯤 열린 현관문 사이로 주연이 나타났다. 사람이 많은 곳에 간다는 걸 의식한 건지, 옷을 제대로 차려입은 모습이다. 검은색의 캐주얼한 정장. 발목을 살짝 드러내는 슬림한 검정 바지가 기다랗게 쭉 뻗은 주연의 다리를 맵시 있게 드러냈다. 풀어 헤친 재킷 사이로 드러난 하얀 셔츠는 타이트하게 몸에 달라붙는 느낌이었는데, 그게 또 주연의 날렵한 인상과 잘 어울렸다. 원체 키가 큰데 비율까지 좋다 보니 모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과연. 여자란 꾸미면 이렇게나 달라지는 것이다.

오늘은 렌즈를 꼈는지 사람을 둔해 보이게 만들던 둥근 안경도 없었다. 갸름한 얼굴에서 날카로운 눈매가 돋보였다. 뭔가에 집중하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내 쪽을 바라보는데, 안 그래도 사나운 눈매가 몹시 날카롭게 변했다. 약간, 뭐라고 해야 할까. 뱀을 연상케 하는 눈초리인데. 당장 뭐라도 잡아먹을 것 같은... 저런 얼굴을 하고 있으면 아는 사람도 모른척하고 지나갈 것 같다. 저혈압인가.

"일찍이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네요. 어서 와요, 주연씨."

"...네. 혜진씨... 그, 머리가."

"아. 방금 샤워하고 나오는 참이라. 일단 들어올래요? 죄송한데 저는 머리 좀 말릴게요. 대충 닦았더니 물이 떨어지네."

주연은 아무래도 물기 가득한 머리가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급하게 티셔츠를 입느라 둘렀던 수건도 탁자 위에 던져두고 나온 참이다. 가까이서 나를 바라보는 주연의 눈에, 덜 마른 머리카락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보였을 수도 있겠다. 사람에 따라 신경이 쓰일 만도 하겠지. 나는 천천히 구두를 벗는 주연을 뒤로하고 드라이기부터 찾았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콘센트를 연결하고 있으면, 어느샌가 내 뒤로 다가온 주연이 드라이기를 받아들고는 말했다.

내가 들고 있던 걸 너무 자연스레 가져갔다. 뭐라 대답을 내뱉기도 전, 따듯한 바람이 머릿결을 쓸어내리는 게 느껴진다. 뒤이어 주연의 손가락이 내 뒷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갑작스러운 상황에 몸이 굳었다.

"머릿결, 부드럽네요."

"아... 그래요?"

민망하기 짝이 없다.

타인이 제 머리를 만지작거리는 건 굉장히 어색한 일이었다. 혜민이가 가끔 도움을 준 터라, 처음 경험하는 일은 아니었으나... 그것과는 경우가 조금 다르지 않나. 능숙한 솜씨로 머리를 쓸어내리는 느낌도, 종종 내 뒷덜미를 건드리는 감촉도 대단히 미묘했다.

상대에게 뒤를 내준다는 건 목숨을 맡길 정도로 신용한다는 뜻 이랬나. 아니, 따지고 보면 주연은 내가 진작에 무방비한 상태를 보여줬던 상대였다. 눈앞에서 술에 취해 잠들었으면 말 다 했지. 그럼 이 정도는 별로 긴장할 일도 아닌 셈이다. 머리를 말리는 귀찮은 과정을 생략할 수 있다니, 오히려 다행인... 다행...

"그, 주연씨? 목이 조금 간지러운데."

"부드럽네요."

"네?"

뭐야, 이거.

내가 말을 꺼낸 다음에도, 내 머리를 만지는 주연의 손가락은 제법 집요하게 움직였다. 머릿결 사이를 깊숙이 파고든 손가락이 뒤통수부터 머리끝단까지를 길게도 쓸어내렸다. 뜨거운 바람이 피부를 전혀 자극하지 않는 걸 보면, 분명 솜씨는 훌륭한 것 같은데... 아무 말 없이 동작을 이어가는 주연의 모습이 위화감을 자아냈다. 뭐가 이렇게 어색해.

빌어먹게 긴 머리카락을 모두 말리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체감상 몇십 분은 주연에게 뒤를 내놓고 있었던 것 같았다. 뒤늦게 시계를 확인하면 분명 그 정도로 긴 시간은 아니었는데, 어색한 분위기는 시간을 늘리는 마력을 지닌 것이다. 뭔지 모를 탈력감에 고개를 저으면,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주섬주섬 챙기는 주연의 모습이 보였다.

"아니, 그런 건 제가 치울 건데. 정리 안 해도 돼요."

"아뇨. 제가 좋아서 하는 거예요."

저렇게 말하면 내가 뭐라 할 수가 없지 않나. 주연과의 대화는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일방적으로 호의를 표하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도, 마냥 편한 일은 아니다. 어쩌면 내 약점을 알고 저러는 건지도 몰라.

대회는 준비 시간을 포함해도 정오가 지나서야 시작할 텐데,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일찍 왔을까. 주연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면 화장으로 가려둔 다크서클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오늘에 대한 걱정 때문에 잠이라도 설쳤나 싶었다. 그게 맞다면 나보다 더 신경이 예민한 사람이다. 내가 이런 쪽으로 뒤처지는 것도 흔한 일이 아닌데, 내 편집자는 나와 비슷한 측면이 있었다.

내 권유에 따라 침대에 걸터앉은 주연은, 잠깐 고개를 돌리며 내 원룸을 훑더니 이내 내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평범한 원룸의 모습에는 금방 흥미를 상실한 모양이다. 그렇다고 나를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볼 것도 없지 않나. 볼 게 없는 건 집이나 나나 똑같은데. 영문모를 집요한 시선이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다 큰 성인 둘이 입을 다물고 방 안에 멀뚱히 앉아있는 그림이 뭔가 이상해서, 나는 어떤 주제로 대화를 시작할지 고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가만히 있으면 몸에 달라붙은 티셔츠가 조금 불편하게 느껴졌다. 옷도 갈아입어야 하는데. 주연의 방문으로 대충 만들어둔 내 시간 계획은 모두 붕괴된 지 오래였다. 왜 이리 일찍 와서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 거야. 그럴만한 이유가... 아.

"아, 촬영 때문에 일찍 온 거예요? 브이로그면, 평상시 모습도 찍는 거였나. 제가 그런 영상은 본 적이 거의 없어서."

내 쪽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주연이, 내 말을 듣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잘못 짚었나? 그게 아니면 걸리는 게 하나도 없는데. 설마 집 구경 하자고 일찍 온 것도 아닐 테고.

"아. 네. 그렇네요. 일상적인 모습이 핵심이니까요."

잠깐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은 주연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내 물음에 답했다. 뭔지 모를 위화감이 남아있기는 했으나 나는 우선 대화의 물꼬를 트는데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냥 가만히 있기에는, 주연이 보내는 집요한 시선이 자꾸 눈에 걸렸다. 옷에 뭐라도 묻었나 괜히 신경이 쓰인다.

촬영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편집자의 입장에서 생각한 영상의 컨셉이나 구성에 대해서.

이건 내가 내 편집자에게 큰 신뢰를 품고 있는 측면이었는데, 주연이 지금껏 채널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성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파르게 성장하는 구독자와 조회수는 영상에 대한 감각이 현저히 부족한 내게 가장 의미 있는 지표와 다를 바 없었다. 주연이 편집한 영상은 편집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재밌고 깔끔했다. 거기에 결과물까지 따라준다면, 사실 나로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셈이다.

나는 주연이 설명하는 내용에 대해 동의를 표하며 연신 고개만 끄덕거렸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내 일상을 담은 영상 따위가 무슨 가치를 가질지 의문이었다. 얼굴이 예쁜 사람을 찾자면 유명 가수나 배우의 브이로그를 찾아보지, 굳이 내 영상을 볼 이유가 있나 싶었다. 뭔가 자극적인 요소가 없으면 정말 아무런 가치가 없을 것 같은데.

"그럼 촬영 지금부터 하는 거 아니에요? 타임라인대로 찍으면 지금부터가 시작이잖아요. 대회 날 아침인데."

"...아, 카메라를 차에 두고 내려서. 금방 가져올게요."

카메라? 그냥 스마트폰으로 찍는 거 아니었어?

나를 바라보던 주연이 걸터앉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애초에 촬영을 하려고 일찍 왔다면서, 왜 가장 중요한 카메라를 차에 두고 내린 건지. 보이는 것과 다르게 주연은 칠칠맞지 못한 구석이 있는 모양이다. 평소 엘튜브 채널이나 저스틴 게시판을 관리하는 걸 보면 꼼꼼한 성격인 것 같았는데... 사람은 직접 마주하면 다른 구석이 있는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걸어나가는 주연의 모습이 뭔가 다급하게 느껴졌다. 구두를 만지는 손놀림에서는 긴장감마저 엿보인다. 시간도 많은데 뭐가 그리 급하다고.

"뭐가 그리 급해요? 시간 많아요. 천천히 해."

"아뇨, 영상 소스가 많을수록 편집 영상 퀄리티도 증가하니까요. 카메라 두고 내린 제가 멍청했어요. 빨리 다녀올게요."

"으음... 아. 저 옷 갈아입는 모습이라도 찍어 넣을까요? 그런 어그로라도 있어야 조회수가 잘 나오지 않나. 그냥 영상은 심심할 거 같지 않아... 요?"

정적이 흐른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리고 나를 쳐다보는 주연의 눈초리가 매섭기 그지없다. 또, 그 뱀 같은 눈매가 흉흉하게 빛났다. 내가 무슨 이상한 말이라도 한 걸까. 그냥 긴장을 풀기 위해 던진 농담이었는데. 나는 입 밖으로 흐르는 문장을 제대로 끝내지도 못하고 끝을 얼버무렸다.

주연은, 대답도 없이 현관문을 열더니 거의 달리는 것처럼 뛰쳐나갔다.

혼자 남은 원룸에 찬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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