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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4화 〉 174 ­ 요즘 트렌드는 자연스럽게 라며 (174/243)

〈 174화 〉 174 ­ 요즘 트렌드는 자연스럽게 라며

* * *

"...다 찍는 거예요?"

"최소한이에요. 업로드 영상에는 더 적게 나올 거고. 혜진씨도 사생활 노출에 조금 더 신경쓰셔야 해요. 원룸 구조보고 주소 특정하는 위험한 사람들도 있으니까. 여성 인플루언서 스토커 이슈, 최근 뉴스에도 많이 나오잖아요. 혜진씨는 특히 더. 캠방 시작한 이후로 너무 무방비해졌어요. 원래 철저하셨는데."

"아니, 갑자기 그런 소리를... 그럼 카메라는 왜 가져온 거예요? 이럴거면 차라리 나간 다음부터 촬영하지."

"그야... 음. 평소 방송에 노출되는 정도는 괜찮으니까요. 영상 인트로 느낌으로 촬영한다고 생각하세요.

그런데­ 옷, 갈아입으셨네요."

주연이 가져온 카메라, 아니. 캠코더는 신상 냄새를 물씬 풍겼다. 흠집 하나 없이 광택이 흐르는 표면을 보면 자연스레 연식이 얼마 되지 않았음을 눈치챌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오늘을 위해 구입한 거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그게 궁금해서 물어보면, 주연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브이로그가 얼마나 중요하다고. 기껏해야 핸드폰 카메라로 몇 분간 촬영할 거라고 생각했던 내 가벼운 생각이 벌써부터 깨져나가는 느낌이다.

잘빠진 캠코더는 겉모양부터 제 가격이 비싸다는 걸 노골적으로 뽐내는 것 같았다. 가격을 물어보면 주연이 은근한 웃음으로 받아치는지라, 나는 캠코더의 외관을 기억하느라 애써야만 했다. 촬영 장비인데 구매 비용은 최소 절반씩 부담해야 하는 게 아닌가.

주연은 헐레벌떡 뛰어온 듯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카메라의 렌즈와 주연의 눈이 동시에 내 쪽을 쳐다봤지, 아마. 그새 외출복으로 옷을 갈아입은 나를 보고 묘한 표정을 지었는데, 나는 그걸 보고 섬뜩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내 편집자는 나가면서 들었던 동업자의 말을 농담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셔츠 단추를 채우는 나를 보고 실망감 가득한 눈빛을 보내는 걸 보면 확실했다. 무서운 사람.

그야, 어그로는 끌 수 있겠으나... 난 대중들 앞에서 공개 노출쇼를 할 수 있을만큼 낯짝이 두껍지는 않았다. 그 정도는 주연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왜 저런 실망감을 표하는 걸까.

"그거 켜진 거예요?"

"네. 자연스럽게 행동하시면 되요. 찍고 있다는 거 의식하지 마시고. 어차피 영상 소스는 제가 알아서 정리할 테니까요."

그렇게 말한들, 의식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주연이 든 캠코더가 붉은빛을 발했다. 조용한 원룸 안.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작은 카메라가 나를 포착한다. 평상시처럼 행동하라는 주연의 말에도 나는 경직된 자세를 유지한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평상시에 내가 어떻게 움직였는데. 컴퓨터 앞이 아니라는 사실이 이리도 크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방송이면 적어도 모니터로 시선을 돌릴 수 있을 텐데. 끈질기게 나를 따라붙는 렌즈를 보면 모든 게 어색했다.

...공방엔 카메라가 몇 개나 있을까. 게임을 할 수 있다면 이것보단 마음이 편하겠지. 일단 그렇게 믿어야겠다.

카메라와 마주하고 있는 건 고역이었으나, 시간이 흐르자 그것도 조금은 괜찮아지는듯싶었다.

주연이 계속 관찰자의 포지션에서 나를 촬영하는 일에만 몰두했으면 그런 적응도 힘들었을 터다. 그러나 유능한 편집자는 관찰 대상의 고뇌를 빠르게 눈치챘다.

내가 자연체를 찾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캠코더를 쥔 주연이 먼저 입을 열고는 대화를 주도했다. 예능 프로에 빗대서 표현하면 진행자 역할을 수행했다고 봐도 되겠지. 방송에 대한 가벼운 질문에서 시작해, 대회를 앞둔 소감 따위로 이어지는 대화의 흐름은 경직된 내가 보기에도 꽤나 자연스러웠다.

렌즈에 쏠린 의식을 분산시킬 무언가가 필요했던 때였다. 몇 개의 질문에 대답한 뒤에는 나도 비교적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평상시와 같은, 일상적인 행동. 아무렴. 생방송도 아닌데 뭔 짓을 하든 주연이 알아서 잘 편집해 주겠지. 나는 자기 세뇌를 하듯 마음을 다잡았다.

어쨌든, 이런 거에 신경쓰기에는 오늘 남아있는 일정이 너무 많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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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같이 가자고 하라니까. 무슨 지가 연예인이야? 스캔들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나 하고. 좋은 차 사서 어따 써요? 예쁜 여자한테 자랑할 때나 의미가 있지, 굴러가는 건 스포츠카나 똥차나 똑같은데. 아오, 진작 약속 잡아놨으면 지금 나 앉은 자리에 노르드님이 앉아있는 거 아니야. 노르드님 컷 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몇 시간이나 앞당길 수 있었는데, 방송감 좋다고 지 입으로 말하고 다니는 사람이 이런 각을 놓쳐­"

"그만. 그만! 씨발, 적당히 좀 해라. 야, 오늘 대회야, 대회. 편집자라는 새끼가 옆에서 응원은 못해줄 망정 존나 긁어대기만 하는 게 맞냐? 미쳐버리겠네, 진짜."

"뭐요. 솔직히 조회수 생각하면 광탈도 나쁘지 않은데요? 충격, 노르드를 데리고 대회 광탈하는 쓰레기가 있다! 뭐 이런 식으로 제목 써서 영상 뽑으면 구독자들 좋아하는 소리 들리는데요? 물론 좋싫비는 아주 열창이 나긴 하겠지만. 그건 원래 쓰벅 채널 종특 같은 거니까 넘어가고."

이딴 새끼를 내 편집자라고.

성호는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을 간신히 집어삼켰다. 그게 해선 안되는 말이라기보다, 그런 말을 해봤자 말싸움에서 승리할 수는 없을 거라는 판단 때문이다.

...사실, 아까부터 자신을 갈구는 저 망할 놈의 직언이 명치에 꽂히고 있는 탓도 컸다. 노르드와 함께... 빌어먹을. 창피함에 제대로 설명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저렇게 정곡을 찌르고 있는 걸까.

자신의 편집자는 편집보다 방송에 더 적성이 맞을 것 같은 인간이었다. 열심히 혀를 놀려봤자 정신적으로 몰리는 건 자신이 될 확률이 높았다. 그럴 바에야, 미리 한 수 접어주는 게 나을 터다. 성호는 입을 다물고 운전대에 집중하기로 마음 먹었다.

때마침 초록불을 밝히는 신호등이 제 선택을 칭찬하는 것 같았다.

성호는 전날 혜진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대회를 앞둔 전날이다. 길다면 긴 대회 준비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전략을 가다듬는 시간. 둘 모두가 작정하고 휴방까지 했던 터라, 음성 채널의 분위기는 사뭇 진지했던 걸로 기억한다. 아무튼, 방송의 재미를 생각해서 억지로 오디오를 채울 필요는 없었으니까.

몇 시간에 걸친 전략 회의에서 특별한 논의가 오가지는 않았다. 사실 전략적인 구상도 대개는 빌드 조합을 정리하는 게 구할 이상이었다. 이 팀과 맞붙을 때는 이 조합을 사용하고, 저 팀과 맞붙을 때는 또 다른 조합을 사용하는.

커플 대항전이 듀오 간의 대결인 이상, 전략적인 수보다는 그간 어떻게 연습해서 팀 합을 맞췄는지가 더 중요했다. 다만 빌드 상성이라는 건 존재해서, 특정 조합을 구성한 팀을 상대로 어떤 빌드를 들고나갈지는 매우 중요한 안건 중 하나였다. 인게임 밖에서 고민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요소이기도 했고.

대진표 맞은편에 위치한 팀들의 전력이 비슷해서 누가 올라올지 예측하기 힘들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았다. 서로 의식이라도 했는지 준비한 조합도 상이한 지라, 성호와 혜진은 한동안 머리를 쥐어짜야만 했다.

아무튼 그간의 연습 과정에서 우승을 목표로 달려왔던 터다. 혜진과의 합방 이후 한층 더 이를 악문 성호는 대회 전날의 마지막 준비를 성의없게 끝내고 싶지 않았다. 회의에 임하는 태도를 보면 그건 혜진도 마찬가지였다.

뭐든 감각적으로 해결하는 천재 같은 인상이 있었는데, 막상 혜진과 팀을 이루면 그런 생각은 금방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매 연습마다 느끼지만, 혜진은 이상하리만큼 나이트폴에 해박한 사람이었다. 나이트폴 플레이 경력이 십 년 됐다는 우스갯소리가 정말인가 싶을 정도로. 혜진의 주도 하에 진행된 예상 빌드 매칭은 그만큼 철저했다.

대화가 착착하고 진행되면, 아무리 준비 시간이 길어도 끝나서는 만족감을 가지게 된다. 어제가 그랬다.

마지막 준비를 끝마치고 뿌듯한 심정이 충만하게 차오르던 시점이다. 그간의 연습 과정에서 쌓인 나름의 정도 그때쯤 치솟아 올랐다. 우리가 지금껏 함께 고생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서 비롯된, 모호한 연결고리. 유대감, 케미, 동료애. 뭐라고 이름을 붙여도 무방할 것 같았다.

최초의 목적이 어떻든 간에 결국 실제로 만나면서까지 연습을 이어간 사이다. 성호는 슬슬, 동료 스트리머로서 자신과 혜진이 어느 정도 친밀해졌다고 느끼고 있었다. 실제로 최근에는 그도 자연스레 반말을 섞어가며 대화를 나누고는 했던 것이다. 혜진도 그걸 불편하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여전히 대화가 툭툭 끊기곤 하는 건 혜진 특유의 성격이라고 이해했다. 아무튼 여러모로 독특한 사람인 건 확실했으니까.

회의가 끝난 시점이다. 수고했고 내일 잘 해보자는 의례적인 인사가 오가고 있을 무렵. 혜진과 있을 때는 좀처럼 느끼기 힘든, 훈훈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성호는 지금이 한 발짝 더 내디딜 때라고 생각했다. 대회가 끝나고도 노르드, 혜진이라는 인간과 친분을 유지할 수 있냐 없냐를 결정짓는 기로. 대회의 팀이라는 관계를 넘어서 개인 대 개인의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과감히 나아가야 할 때였다.

"아, 혜진씨. 내일 대회장 어떻게 가요? 혹시­"

"저 차타고 가요. 태워주기로 한 사람이 있어서."

단번에 차였다.

여지가 없는 한 수였다. 운을 뗀 성호가 곧장 무안해질 정도로.

태워주기로 한 사람이라니. 같은 팀인 자신을 내버려 두고, 대체 누구와 함께 간다는 말인가. 그의 안에서 수치와 분노가 뒤섞인 묘한 감정이 치솟아 올랐다. 그럼에도 차마 자신의 의문을 입 밖으로 쏟아낼 수는 없었다. 이미 제안을 차인 마당에 그런 것까지 묻는 건 누가 봐도 집착 가득한 추한 행동이지 않은가.

성호는 그저 '그래요?'라는, 어중간한 대답으로 대화를 끝마칠 수밖에 없었다. 뿌듯하게 전략 회의를 마친 직후인데도 왠지 마음이 찌뿌둥했다.

아니, 정말 누가 태워주는 거냐고. 설마 남자친구? 아니면... 설마 칼고인가.

"그래도 금방 왔네요. 괜히 일찍 나왔네, 이거. 미리 들어가서 대회장 컷이나 따둘까요? 본방 영상 빌려서 써도 되긴 하는데, 직접 찍는 것도 맛이 있으니까."

과연, 편집자의 말마따나 제법 이른 시간에 경기장에 도착했다. 주최 측이 정한 시간으로 따져도 한 시간도 넘게 여유가 남아있었다. 천천히 점심 식사를 해결해도 될 정도의 여유였다.

편집자와 함께 차에서 내린 성호는, 먼저 핸드폰부터 확인했다. 혜진과 합류할 시간을 정확히 정해두지 않은 상태였다. 어떤 개뼉다귀의 차를 타고 온다는 혜진은, 몇 시쯤 도착할까. 누구와 함께 오든 빨리 합류할수록 대회와 관련된 상의를 더 오래 진행할 수 있을 터였다. 설마 대회 시간에 정확히 맞춰 도착하는 건 아니겠지. 팀원과 얼굴도 마주하지 못하고 대회장에 들어가는 건 사양이었다.

"여보세요, 선생님? 지금 어디쯤 오셨나요? 좀 일찍 만나서 얘기하면 좋을 것 같은데. 저는 지금 경기장 도착했거든요?"

<"아. 잠시만요."=""/>

핸드폰 너머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딘가, 사람이 많은 곳일까. 혜진은 함께 온다는 놈팡이와 무슨 대화를 주고받는 것 같았다. 성호는 괜히 아스팔트 바닥을 발로 두드렸다. 제때 오면 좀 좋나. 알 수 없는 심술이 가슴께로 차오른다.

<"혹시 동상="" 앞에="" 있어요?="" 이상한...="" 닭="" 동상."=""/>

닭 동상?

성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편집자와 함께 대회가 진행될 e스포츠센터 앞까지 이동한 상태였다. 주변에는 상징과도 같은 게임 캐릭터 조각상들이 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도, 닭 동상이라 말할 수 있는 동상은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닭이 말이나 되나. 누가 그런 걸 동상으로 세운다고.

성호의 시선이 껄렁거리며 옆에 서있는 자신의 편집자에게로 향했다.

"야. 여기 동상 중에 닭... 닭 동상이 있었냐?"

"뭔... 개소리를 진지하게 해요? 닭이 어딨어."

"아니, 나보고 닭 동상 앞에 있냐고 그러잖아."

"네? 뭔­ 아. 설마 이거 보고 닭이라고..."

성호의 눈이 편집자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자신이 서있는 자리 바로 옆이었다. 좌우로 날개를 활짝 펼친 멋들어진 새의 형상이 눈에 들어온다. 날개 주변으로 불꽃이 이글거리는 모습을 함께 표현한 것이 인상적인 조각상이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캐릭터다. 고전 명작으로 이름난 RPG 게임에서, 동료 캐릭터로 등장하는 피닉스. 성호도 그 게임을 직접 플레이하지는 않았으나 알고 있는 캐릭터였다.

아무리봐도 닭으로 착각할 모습은 아니었다. 아니, 진짜로.

<"스벅님? 닭="" 동상="" 옆에="" 맞죠."=""/>

"닭이 아니라 피닉스 동상 옆이요."

돌아오는 대답은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오지 않았다.

"일찍 오셨네."

이젠 익숙함마저 느껴지는, 혜진의 육성이다.

조각상을 바라보던 성호가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혜진은, 원래부터 거기 있었다는 듯 태연하게 서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뚜렷한 이목구비가 환하게 제 존재감을 발하고 있는 중이었다. 햇빛을 받은 검은 생머리가 윤기있게 빛났다.

그 옆으로, 장신의 여성이 함께했다.

혜진의 키가 작은 편이 아니었음에도 그녀보다 머리 하나만큼 더 큰, 커다란 여성이었다. 기다랗게 뻗은 팔과 다리와 작은 머리 때문에, 안 그래도 큰 키가 더 커 보였다. 설마 나와 키가 비슷할까. 성호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얼굴로 시선을 올리면, 좌우로 길게 찢어진 듯 사나운 눈초리가 돋보였다. 두 사람의 눈이 맞닿았다. 눈을 마주친 즉시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데, 그게 마치 째려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첫인상이다. 여러모로 위압감이 넘쳐흘렀다.

그제서야 성호는 혜진이 말한 '태워주기로 한 사람'이 이 여성임을 깨달았다.

자신과 신경전이라도 하는 걸까.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네 사람 사이에,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닭, 아니구나."

혜진이 내뱉은 헛소리만 적막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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