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화 〉 177 상징은 붉은빛
* * *
이보다 훌륭한 자리는 없을 거라고, 주연은 생각했다.
이전에 촬영한 영상을 훑어보는 중이었다. 혜진의 집에서부터, 경기장에 이르기까지. 값비싼 캠코더는 자신의 분야에서 철저히 능력을 발휘했다. 촬영된 영상 속에서 혜진이 선명한 화질로 손을 흔드는 장면이 흘러나왔다. 주연은 등줄기로 흐르는 짜릿함을 숨기지 못하고 살짝 몸을 떨었다. 이 영상을 영구히 소장할 수 있다니. 장비에 투자한 수백만 원이 아깝지 않았다.
타임라인에 따라 저장된 영상을 차례차례 넘기면, 오래 지나지 않아 주연이 찾고 있던 영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줄곧 몇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혜진을 촬영하던 각도와는 다른 느낌의 영상이다. 좁은 공간으로 보이는 장소에서 초점이 맞지 않는 화면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몇 바퀴 회전하듯 어지럽게 돌아가던 영상은, 이내 회전을 멈추고 초점을 또렷하게 맞추기 시작했다. 곧이어 맑아진 화면 속에서 사람의 얼굴이 나타났다. 렌즈를 코앞까지 가져다 대고 찍었는지, 저장된 영상 화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크고 가깝게 담긴 모습이다.
렌즈가 그토록 가까워졌음에도 하얀 피부는 잡티 하나 없이 깨끗했다. 화면 중간지점에서 오뚝히 솟은 코부터, 선명한 이목구비가 제 존재감을 강렬히 내비친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마치 눈을 마주친 것처럼 정확히 렌즈를 쳐다보는 눈동자가 옅은 갈색으로 빛났다. 주연은 저장된 화면에서 눈을 돌리지 못하고 영상 속 여성과 눈을 마주했다. 간질거리는 느낌이 점점 강도를 더해갔다.
당연히 그건 혜진이었다. 주연이 차를 운전하는 사이, 캠코더를 장난감처럼 만지고 있던 혜진이 촬영한 본인의 근접 샷. 운전을 하면서도 옆으로 향하는 눈길을 다스리기 힘들었던 주연이 기대하고 기대했던 장면이다. 제발 전원이 켜져 있기를 바라며 가슴을 떨었던 그 장면.
아마, 당분간 주연의 바탕화면으로 낙점된 사진일 터다.
<"아! 방돌="" 선수의="" 과감한="" 대시가="" 상황을="" 반전시킵니다!="" 민코="" 선수가="" 바로="" 따라붙고="" 있거든요!="" 받아칠="" 수="" 있을까요!"=""/>
대기실의 중계 화면에선 여전히 높은 텐션을 유지하는 중계진들의 긴박한 목소리가 현장을 달구고 있었다. 한창 경기가 하이라이트로 향하고 있는 걸까. 전투 구도가 극적으로 치달음에 따라 관중들의 환호성도 갈수록 소리를 키워갔다. 캠코더 속 혜진의 얼굴에 집중한 상태로 중계를 흘려들으면, 중계진의 목소리에 따라 관중들의 반응이 뒤바뀌는 것도 같았다.
사실, 주연이 신경 쓰는 문제는 아니었다. 주연의 주된 관심사는 오로지 혜진, 노르드에게 향하고 있었으므로.
가장 중요한 혜진의 경기는 바로 다음 차례였다. 대진표의 마지막 순서. 스벅과 그녀를 둘이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아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붙잡고 나왔던 참이다. 순서를 기다리면서 그녀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주연은 자신이 지켜보는 스트리머가 경기를 앞둔 긴장감에 몸을 떠는 것을 상상하기 힘들었다. 오늘만 해도, 대회와는 상관없다는 것처럼 냉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지 않았나. 그 초탈한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고 있자면 자연스레 알 수 없는 뿌듯함이 전신에 차오르곤 하는 것이다.
첫 공방이라고는 하나 과연 그녀가 긴장한 상태로 게임을 할지. 주연은 기대감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잠재우기 힘들었다. 그녀가 '팬심'이라 이름 붙인 이 감정은 시간이 가도 사그라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네, 네! 그렇죠. 저희 열심히 준비했거든요! 제가 여성 참가자 중 제일 못한다고 놀림을 많이 받아서... 헤헤. 쟁쟁한 분들 사이에서 밀리지 않게 열심히">
[ㅋㅋㅋㅋㅋㅋ 마이크 잡은 손 떨리는데? 긴장겁나한듯]
[겜속도존나빠르긴해]
[오늘 넘 잘했는뎅ㅠ]
[아니 듀오겜인데 저티어들 왜케 잘하냐? 생각보다 잘버팀;;]
[죄다 국밥빌드만 하니까 버티는거지ㅋㅋㅋㅋ 공방 비숍 아무나 한명 가져다놔도 저정도는함 ㅅㄱ]
[민코 공방 얼굴 개빻았노... 민초빨때부터 알아봤다]
[ㅅ,,,ㅂ 노르드는 언제나오는데]
[다음 뷩신아]
[큰거오냐?]
채팅창을 확인한 주연은 다시 태블릿의 화면을 조절했다. 실시간으로 시청자들의 반응을 확인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대기실의 커다란 스크린은 게임에 집중하기는 좋았으나, 채팅을 확인할 수는 없었던 탓이다. 그녀의 터치에 따라 축소된 태블릿은 채팅을 크게 강조해서 보여줬다.
진작 포화 상태로 들어선 채팅창이다. 미어터지듯 빠르게 올라가는 채팅들 사이로 노르드를 언급하는 채팅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연의 주관에서 벗어나서 살펴도, 첫 번째 대진에서 가장 접전이 예상되는 매치는 혜진의 경기임이 틀림없었다.
순위 매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런 이벤트 매치에서도 누구의 전력이 가장 뛰어난지 나열하고는 했었으니. 거기서 상위권에 언급되는 두 팀의 경기는 이목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매번 커뮤니티를 확인하는 주연은 그 관심사를 잘 알았다.
시청자들의 차오른 기대감과 함께, 곧 노르드의 엘튜브 채널에 올릴 커플 대항전 첫 번째 경기가 시작된다. 이미 주연의 머릿속에는 이번 대회를 정리할 편집 영상의 개요가 천천히 골자를 만들어 올리고 있었다. 시작점이 될 최초의 영상에서, 당당하게 부스 밖으로 걸어 나오는 혜진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주연의 시선이 스크린으로 향했다. 이 다음부터는, 전부 놓칠 수 없는 장면이다.
###
[선남선녀]
[나밍쟝 체고다!!!!]
[나밍이 화장에 힘 빡줬네 ㄷㄷㄷ 반짝반짝]
[파피루스 키 줬나크네]
[자 드가자~]
[파밍팀 홧팅..]
[배팅안여냐?]
[제발 5꽉]
[포즈없는거 개ㄵ.. 칼고가 선녀다]
[빅매치다 빅매치]
원형의 경기장, 블루 사이드의 선수 부스가 푸른빛으로 빛났다. 선수 입장이 완료됐음을 알리는 사인이다. 키가 큰 남자가 자리에 앉아 헤드셋을 쓰는 순간까지, 경기장을 가득 채운 커다란 음악 소리는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날카로운 기타 소리 사이로 선수를 소개하는 중계진의 마이크가 조금씩 소리를 키웠다.
좌측 부스를 밝힌 서늘한 푸른빛이 점차 밝기를 줄여갈 무렵, 반대편에서 붉은빛이 불길이 번져나가듯 덩치를 키우기 시작했다. 한순간 강렬히 피어오른 강렬한 붉은빛이 조금씩 사그라들고, 두 인형이 빛 사이를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어두운 경기장에서 두 그림자를 향해 스포트라이트가 향한다. 경기장 중앙의 거대한 스크린이 그 모습을 포착한 순간,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를 뚫고 환호성이 치솟았다.
때마침 중계진이 스벅과 노르드의 등장을 알렸다.
<"이어서 레드="" 사이드에서="" 등장한="" 노스="" 팀입니다!="" 이쪽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번="" 대회에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팀들을="" 꼽자면="" 역시="" 빠질="" 수="" 없는="" 팀이죠.="" 특히="" 노르드="" 선수는="" 여성="" 참가자들="" 중에서도="" 압도적인=""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전="" 시즌을="" 킹으로="" 마친="" 것은="" 물론이고,="" 최근="" 프로="" 리그에서="" 활동="" 중인="" 무상="" 선수가="" 인터뷰를="" 통해"=""/>
중계 카메라가 밝은 조명 아래 서있는 혜진을 온전히 담아냈다. 하얀 피부는 조명을 반사하는지 투명하게 빛났다. 그녀는 자신을 내리쬐는 밝은 조명이 불편한지, 눈살을 찌푸리며 앞으로 걸었다.
몸이 흔들릴 때마다 따라 움직이는 검은 생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넘긴다. 짙은 남색의 블레이저 재킷과 더불어, 살짝 찡그린 인상이 차가운 인상을 만들어냈다. 가까운 부스로부터 흘러나오는 희미한 붉은빛이 그녀의 주변에 엉켜들었다.
혜진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무심한 얼굴로 부스 안으로 들어섰다.
[노르드! 노르드! 노르드! 노르드! 노르드! 노르드!]
[노르드사랑해노르드사랑해노르드사랑해]
[와 공방 굴욕이없노ㅋㅋㅋㅋㅋㅋㅋㅋ]
[표정왜케띠껍냐]
[와꾸 1티어 실력 1티어ㄷㄷㄷㄷ 노르드가 미래다]
[어허 선생님이 니 친구냐?]
[쓰벅은 카메라도 대충잡네 사람차별 씹ㅋㅋㅋ]
[눈나나죽어나죽어나죽어나죽어나죽어나죽어나죽어나죽어나죽어]
[걍 노르드만 풀샷으로 잡아줘ㅓㅓㅓㅓ 쓰벅시1발 누가 궁금하다고]
[여유지린다]
[위 풍 당 당]
[카메라좀 봐주세요 센세ㅠㅠㅠ]
선수 입장을 알리는 음악이 꺼지고, 함성이 잦아들 즈음에도 경기장의 분위기는 들떠있었다. 두 팀의 전력을 분석하는 중계진의 멘트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간혹 경기장 메인 스크린이 부스 안을 비출 때마다, 관중석으로부터 웅성거리는 소리가 퍼져나갔다. 화면에 비친 혜진은 묵묵히 마우스를 붙잡은 오른손을 움직였다.
경기 준비가 완료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예. 굉장히 독특하지만, 노르드 선수를 생각하면 오히려 익숙하게 느껴지는 선택이기도 합니다. 노르드 선수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광전사 빌드를 가지고 나왔네요. 스벅 선수는 전형적인 형태의 소드 앤 버클러 빌드로 확인됩니다. 사실 이 조합이 의외인 점은, 이 팀이 보여준 연습 과정에서의 모습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노르드 선수가 방송을 키고 진행한 연습 게임에서 광전사 빌드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거든요. 가장 많이 연습한 빌드는 쌍검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것도 전부 대회를 위한 연막이었을까요?">
양 팀의 빌드가 메인 스크린을 채웠다가 사라졌다. 한순간 검은 화면을 내비치던 스크린은, 곧이어 화면 중앙에 커다랗게 나이트폴 로고를 띄웠다. 웅장한 나팔 소리가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것처럼 점차 소리를 키워나간다. 빌드에 대한 분석을 이어나가던 중계진이 빠르게 멘트를 끝마치고, 볼륨을 키운 나팔 소리가 경기장 전체에 크게 울려 퍼질 무렵.
마이크를 움켜잡은 캐스터가 큰 목소리로 경기 시작을 알렸다.
두 팀이 서로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장애물 따위는 없는 붉은 평원이다. 넓은 시야가 적을 포착하고, 숨 가쁘게 뜀박질한 네 명의 전사는 금새 가까워졌다. 노을빛을 받은 쇳덩이가 각자의 손에서 붉은 기를 발산했다. 앞장서 달리며 그 모습을 두 눈으로 포착한 방패병은,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광전사가 어깨춤에 걸친 커다란 대검을 살피고는 살짝 속도를 줄였다. 거리가 줄면 줄수록, 대검을 감싸는 붉은빛이 점차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뒤쪽에서 달려오던 창을 든 동료가 자신의 페이스에 맞춰 함께 속도를 줄이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은, 다가올 충돌에 대비해야 할 때였다.
이상이 느껴진 건 그때였다. 합을 맞추는 것처럼 팀원과 나란히 달리던 광전사가 점차 앞으로 돌출되기 시작했다.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아직 거리가 많이 남아있었는데, 쿵쿵거리며 땅을 지르밟는 소리가 이곳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광전사는 간을 보며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초가 지날 때마다 뒤편에서 달려오는 팀원과의 간격이 늘어났다.
방패병은 어느새 자리를 잡고 방패를 들어올린 자신을 발견했다.
컨디션을 확인한다. 달려온 사이 줄어든 스태미나가 빠르게 차오르기 시작했고, 방패를 들고 굳건히 버티는 자세에는 한치의 미동도 없었다. 어떤 일격이라고 받아낼 수 있는 상태. 슬쩍 발로 바닥을 구른다. 뒤돌아 확인하지 않아도 창을 든 자신의 팀원이 든든하게 자신의 뒤를 보조하고 있음을 자각할 수 있었다. 자신이 공격을 받아내면, 아마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날카로운 창 끝을 적을 향해 내지를 것이다.
평야지대. 발밑에는 방해가 될만한 작은 돌멩이 하나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사방을 훑어도 뭔가 변수를 만들어낼 요소는 전혀 없었다. 분명 완벽한 준비 상태다.
그런데, 왜... 불안감이 치솟는가.
쿵, 쿵. 맹렬한 기세로 뛰쳐온 광전사가 어느새 지근거리까지 들어왔다. 전혀,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는다. 스태미나를 관리할 생각이 없는 걸까. 적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빠르게 회전하는 머리는 좀처럼 수긍이 가는 해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광전사는 거리를 좁혀왔다.
겁먹지 않고 공격을 받아내기 위해, 고개를 들어 올린 방패병의 눈이 광전사의 그것과 마주했다.
흉포한 안광이 섬뜩한 붉은색으로 빛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