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화 〉 178 배후를 맡기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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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벼락같이 쇄도한 대검이 방패를 후려쳤다.
붉은 안광이 번뜩인 다음이다. 날카롭기보다는 둔탁한 일격이 거대한 직사각형 방패와 거세게 부딪혔다. 대검을 받아낸 방패병이 공성추에 가격 당한 성문처럼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뒤로 물러서지는 않았다. 땅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무릎을 굽히고 움츠러든 다리가 휘청거리는 신체를 붙잡았다. 여전히 굳건한 방패를 앞으로 내세운 채였다.
뒤이어 반격이 이어진다.
방패병의 뒤에서 기다란 창 끝이 뻗어 나왔다. 몸을 웅크린 방패병의 등을 타고 날카로운 창 끝이 화살처럼 날아든다. 방패병의 커다란 타워 실드를 마주한 상태에서 바라보면, 창이 방패 우측에서 갑작스레 튀어나오는 모양새였다. 살짝 열린 성문 틈으로 감행하는 기습이다. 열에 아홉은, 반응하지 못하고 빈틈을 내어줄 터.
광전사는 거기에 속하지 않았다.
뭘 보고 반응했는지, 광전사가 순간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방패 너머에서 기습적으로 뻗어 나온 창이 광전사의 허리춤을 스치고 지나간다. 쇠붙이가 훑고 간 성긴 사슬 갑옷이 사납게 덜그럭거렸다. 창은 피부를 뚫지 못했다. 기껏해야 타박상에 그칠 얕은 상처를 냈을까. 공격 후의 빈틈을 노린 찌르기가 무위로 돌아갔다.
방패병의 앞에서 몇 걸음 떨어진 지근거리. 크게 내리친 대검을 제대로 회수하지도 않고 몸을 굴린 광전사가 태연하게 몸을 일으켰다. 광전사의 등을 타고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거칠어진 호흡을 내쉰 다음 순간. 또다시 광전사가 땅을 거칠게 짓밟으며 달려들었다.
방패를 향해서가 아니었다. 굳건히 정면을 막아선 방패를 대각선 방향으로 비스듬히 지나친 광전사는, 이내 먹잇감의 틈을 찾는 맹수처럼 둥글게 주변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뿌리박은 것처럼 자리를 지키고 선 방패병은 침착하게 광전사를 따라 움직였다. 갑옷에 감싸인 몸을 반쯤 가리울 정도로 커다란 방패가 광전사의 앞을 막아 세웠다. 든든한 방패를 앞에 두고, 창을 든 파피루스도 거기에 따라 움직였다. 절대 틈을 내어주지 않을 생각이다.
세 쌍의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했다. 바짝 긴장한 눈동자가 적수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병장기를 거머쥔 손, 교차하는 발을 주의 깊게 살펴본다. 두어 번의 호흡이면 충분히 공격이 가능한 지근거리였다.
스벅이 전장에 합류한 건 그때였다.
빠르지 않은 걸음걸이로 조용히 접근하던 스벅이 뒤늦게 질주를 시작했다. 왼손에는 작은 버클러, 오른손에는 아밍 소드를 든 경장비다. 버클러를 착용한 왼손을 앞세우고 달려드는 속도가 매우 빨랐다.
급격히 좁혀지는 거리를 보고, 대응에 나선 건 창을 들고 있는 파피루스였다. 광전사의 상대를 방패병에게 맞긴 창병이 우측으로 몸을 틀었다. 몸 바깥으로 빗겨 세운 창이 스벅이 달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순간에 든든한 방패벽을 상실한 창병이 무릎을 굽혔다. 자세를 낮추고, 창을 올려세운 자세. 접근하는 상대를 견제하는 수비적인 태도였다.
어깨를 마주하듯 달라붙은 방패병과 창병이 서로 다른 방향을 견제하며 몸을 굳혔다.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구도였다. 누군가가 한쪽으로 치고 나가면, 측면이나 후방을 무방비하게 내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고 둘이 함께 정면을 돌파할 수도 없다. 거대한 방패를 사용하는 빌드의 특성상 우나밍의 기동성이 현저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상대가 대응을 피하고 도망치는 순간, 역시 배후가 위험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파피루스와 우나밍은 그제서야 공격의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했음을 깨달았다.
상황을 타개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어깨를 맞댄 우나밍과 파피루스가 억눌린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사이, 노르드와 스벅이 땅을 박찼다.
합이라도 맞춘 듯 동시에 달려드는 모습이다. 찰나의 순간 코앞까지 접근한 노르드가 첫 조우 때처럼 맹렬한 기세로 대검을 휘둘렀다. 모니터 밖에서 목소리를 높이던 우나밍이 황급히 방패를 들어올렸다. 웅크린 시야 너머로 보이는 든든한 방패벽이 강한 충격으로 사정 없이 흔들렸다.
충격이 가시기도 전. 무거운 쇳덩이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이어폰을 타고 소름 끼치게 흘러들어왔다. 우나밍은 휘두르기 위해 내리깔았던 메이스를 무르고 다시 방패에 신경을 집중했다. 곧이어 이전과 비슷한 정도의 충격에 몸이 비틀거렸다. 흔들리는 시야가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상정한 것보다 공격의 연계가 무섭도록 빨랐다.
지원은 없다. 광전사의 빈틈을 포착해 창을 찔러 넣었어야 할 동료는, 지금 바로 옆에서 가벼운 발 놀림으로 달려드는 또 다른 적을 상대하느라 바쁜 상태였다. 빠르게 처리할 테니 조금만 버텨보라는 다급한 목소리가 공허하게 들려왔다. 연이은 공격으로 줄어든 스태미나의 공백이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노르드는 그녀의 움직임을 허용하지 않았다. 하늘을 향해 높이 치켜든 대검이 위험하게 날을 번뜩인다. 강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방패를 들어 올리면, 기다렸던 충격은 온데간데없다. 전투 중에 생긴 기묘한 정적. 페이크에 당했음을 깨달은 그녀가 황급히 방패를 내리면 횡으로 휘두른 대검이 방패의 측면을 후려쳤다. 정확한 가드 포인트를 잡지 못한 대가로 또 스태미나가 뭉텅 날아갔다. 조급함이 점점 덩치를 키워간다.
말려 죽이려는 적의 의도가 명확했다. 공격의 분배가 어지러웠다. 페이크를 섞는 건 물론이고, 공격을 캔슬하고는 차징으로 접근해 지속적으로 스태미나를 갉아먹을 때도 있었다. 신경을 곤두 세우고 카운터를 노리면 흐름을 끊고 약공격이 방패를 두드렸다. 섣불리 메이스를 휘둘렀다간, 역으로 카운터를 맞는 그림이 선명히 그려진다. 연습 경기에서는 단 한 번도 대검을 꺼내들지 않았으면서. 광전사의 붉은 눈동자가 끈덕지게 따라붙었다.
부족한 스태미나, 짧은 순간 강요된 심리전이 정신을 피폐하게 몰아붙였다. 우나밍은 결국 카운터를 포기하고 방어 자세를 굳혔다. 노르드와의 심리전을 포기하고 파피루스가 스벅을 처리하는 순간을 기다리려는 판단이었다. 광전사의 첫 대시를 받아쳤을 때와 동일한 자세. 무릎을 굽히고 자세를 낮춘 채로 정면으로 방패를 내세운다. 그 모습이 등딱지에 몸을 숨긴 거북이와 흡사했다.
대검이 연신 등딱지를 두들겼다. 초조한 눈동자는 흔들리는 화면 속에서도 점점 줄어드는 스태미나를 주시했다. 생명줄이 점차 짧아지는 모습을 지켜보는듯했다. 빨리 승전보를 가지고 와야 할 팀원은, 과하게 집중을 했는지 아까부터 말이 없었다.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보이지 않는 카운트가 서서히 줄어드는 것이 느껴진다. 그녀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 무렵이다.
챙, 하는 경쾌한 효과음이 울려 퍼졌다.
파피루스의 침음성이 들려온 것은 거의 동시였다. 상황 판단이 느렸다. 자신의 캐릭터처럼 잔뜩 웅크린 채 화면을 주시하고 있던 우나밍이 다급히 방어 자세를 풀고 고개를 돌렸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서.
투구에 가려져 좁은 시야로, 비틀거리는 창병의 등에 대검을 찔러 넣는 광전사의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드러났다. 솟구치는 피와 파피루스의 비명소리가 기묘하게 맞아떨어진다. 깊숙이 대검을 박은 광전사가, 느릿느릿 한 움직임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나밍이 있는 방향이었다. 섬뜩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는 여전히 선명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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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겼다, 이겼다고! 내가 패링 쳤다고! 선생님! 제가 했다고요!"
흥분한 목소리가 부스 안을 흔들었다.
옆에서 어깨를 흔드는 스벅과 달리, 내 정신은 다소 멍한 상태였다. 긴장감 때문에 경직된 몸과 게임에 집중한 정신이 기묘한 화학반응을 일으킨 것 같았다. 승리를 알리는 메시지가 모니터 중앙에 떠오르는 와중에도, 키보드와 마우스를 붙잡은 내 손은 굳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목을 억죄는 듯한 답답함에 셔츠 단추를 두어 개 정도 풀어헤쳤다. 스벅의 흥분 상태가 전염되어 왔는지, 내 몸도 조금씩 뜨거워지는 느낌이다. 겉에 입은 블레이저까지 벗어던지니 그제서야 답답함이 가시는 것 같았다. 이 상태로는 다시 집중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마음 같아선 바로 다음 게임을 시작하고 싶은 기분이다.
멍한 머릿속으로 이전 게임의 경기 내용이 천천히 재생되는 중이었다. 게임의 흐름 자체는 훌륭했으나 내용은 줄타기나 다를 바 없었다. 한 번의 실수가 패배와 직결되는, 선을 타는 플레이. 아무리 생각해도 방패가 커다란 장애물이었다. 가드를 내리고 정정당당히 붙자는 헛소리가 계속 머리를 맴돌았다. 우나밍이 저 빌드를 선호하는 이상, 어지간하면 다음 세트도 비슷한 조합이 나타날 터였다. 준비한 전략들이 이리저리 부딪히며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생각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는다.
함성과 박수가 뒤섞인 소리가 부스 너머에서 울려 퍼졌다. 세련된 양식의 게임 부스는, 아무리 그래도 모든 소리를 차단하지는 못하는 듯했다. 게임의 끝을 알리는 환호성이 희미하게 들려온다. 어지러운 정신머리와 더불어, 적당히 차단된 상태로 들려오는 굉음 때문에 나는 마치 물속에 있는 것 같았다. 그 속에서 스벅이 내지르는 소리만 시끄럽고 선명했다. 스벅의 손에 흔들거리는 몸을 가만히 내버려 뒀다. 먹먹했던 정신이 조금은 맑아졌다.
그래, 이제야 한 경기일 뿐이다.
"진짜, 씹. 갑자기 칼로 찌르라고 할 때는 뭔 개소린가 싶었다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연습 때 썼던 전략도 아닌데 무슨, 미친 짓에도 정도가 있지."
"그만, 그만 흔드세요. 저 어지러워요."
"저 패링 한 거 봤죠? 아니, 봤으니까 바로 호응했겠지! 씨, 끝나고 제 상태 확인했어요? 거의 넝마나 다름없었다니까. 막판에 도박처럼 패링 시도한 거 실패했으면 제가 뒤졌다고요. 그때 생각하면 아직도 손 떨리네, 씁."
아무래도 내 팀원은 첫 게임의 흥분이 쉽게 가시지 않는 것 같았다.
진정시키길 포기하고 의자에 몸을 맡겼다. 말은 차분히 하려고 노력했지만, 나도 정신이 반쯤 붕 뜬 건 마찬가지였다. 입장할 때부터 따라붙은 카메라가 부스 밖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대회의 메인 스크린에는, 나를 포착한 저 카메라의 시점이 송출되고 있는 걸까. 집중이 풀린 상태로 멍하니 앉아있으면 온갖 소리로 소란스러운 바깥과 내가 앉아있는 경기장 부스가 뭔가 동떨어진 세상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면 반대편 부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앉은 자리와 마주한 곳에 앉은 두 사람은 모니터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패배를 복기하고 있을지, 아니면 다음 세트를 준비하고 있을지. 이전 경기로 조금이라도 멘탈이 무너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앞으로를 생각하면 최대한 패를 아끼는 게 좋을 터였다. 최대한 짧게... 일방적으로 끝내는 그림이 이상적인데.
눈앞의 모니터에 애써 집중하면서, 나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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