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화 〉 181 뒷감당은 미루는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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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꼭 우승해! 응원할게!"
...어떻게 말을 놓는 게 저렇게 자연스러울 수 있을까.
자신을 미나라 불러달라고 거듭 강조한 그녀는, 첫인상처럼 아주 주도적이고 쾌활한 사람이었다.
대화를 주고받는 사소한 순간에도 신체 여기저기가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상대가 내뱉는 말을 누구보다 잘 듣고 있다는 걸 몸짓으로 보여주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몸을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는 밝은 갈색의 머리까지, 말 한마디에 대한 리액션으로 전신이 반응하는 것 같았다. 인싸라는 단어가 아주 잘 어울렸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별다른 속셈이 있지는 않았다. 승자의 입장을 가지고 패자에게 다가선다는 건, 의도와 상관없이 조롱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법이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는데... 이유는 잘 모르겠다. 승부가 결정 난 이후 반대편 부스에서 비쳤던 얼굴이 떠오르기라도 한 건지. 얼굴을 마주한 순간 스벅이 저지른 도발 행위가 오버랩된 것도 이유라면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분명 박제되겠지, 그거.
한동안 일방적으로 말을 쏟아내던 미나는 반짝거리는 눈을 환하게 빛내며 돌아갔다. 뒤를 돌아보고는 팔을 크게 흔드는 모습이 아무리 봐도 패배자의 뒷모습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졌다고 어둡게 있는 것보다야 빠르게 털어내고 잊어버리는 쪽이 훨씬 낫겠지만... 저건 빨라도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저쯤 되면 장점이라고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가기 어려운 수준이다.
나를 대하는 태도가 지나치게 밝은 것이, 연기인지 진심인지 모르겠다. 여자의 가면은 좀처럼 꿰뚫어보기 힘드니까.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본 채로 칭찬을 쏟아내는 탓에, 뭐라 대꾸할 말을 찾기 힘들었던 나는 연신 고개만 끄덕였다.
거리감을 좁히는 속도가 대단했다. 바닥에 내리깔린 눈이 갑작스레 생기를 머금고 반짝거리는 모습은 참 극적이었다. 그 극적인 변화를 보면 대화의 주도권을 내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복도 끝으로 가는 순간까지 손을 흔들고 있어서, 분위기에 휩쓸린 나는 결국 손을 마주 흔들었다. 그림자 하나 없이 환한 얼굴을 보고 있으면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미나를 밀어내기 힘들었다.
패배를 했음에도 어떤 앙금이나 뒤끝이 없다니. 내가 졌다면 지금도 게임이 넘어간 결정적 순간을 계속 복기하며 자책의 굴레에 빠져있었을 게 뻔하지 않나. 그런 점에서 우나밍이라는 스트리머는 존경받아 마땅했다.
얼떨결에 번호를 주고받은 핸드폰이, 평소보다 묵직하게 느껴졌다.
"저 정도면 그냥 열성팬인데요? 아까는 안 저랬던 거 같은데. 패배의 충격으로 선생님의 위대함을 깨달았나?"
"쓰벅님은 오래 사실 거예요."
"예? 갑자기 왜요."
"미나 씨가 쓰벅님은 쳐다도 안 보더라고요."
"...아니, 그건 본능적으로 나간 거라 어쩔 수가 없다고요. 애초에 선생님이 시간 좀 끌어달라고 한 거잖아. 난 진짜 오더를 충실히 수행했을 뿐인데."
"우나밍 시청자들도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겠네요."
"...어떻게든 되겠죠, 뭐."
노골적인 현실도피. 뒷감당을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사람은 대개 최후가 끔찍한 법인데.
...아니, 내 얘기는 아니고.
쉬는 시간은 짧았다.
실제로 흘러가는 시간이 어떻든, 다음 경기를 앞둔 입장에선 마음 편하게 있을 수가 없는 노릇이다. 광고 소리가 거슬려서 TV까지 음소거로 설정한 터라, 대기실은 비교적 조용했다.
옆에서 부산스럽게 판을 벌이던 스벅도 편집자와 함께 자리를 비웠다. 바깥에서 시청자들을 만나고 오겠다나. 준비된 이벤트성 컨텐츠가 있다고 주절거리는 걸 들었지만, 자세한 내용은 전부 흘려버렸다. 대회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방송각을 생각하는 모습에는 감탄만이 나올 뿐이다.
나는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관중이 가득 들어섰던 경기장이 잔상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승리의 여운이라도 남아있는지 평소보다 들뜬 가슴이 침착함으로부터 나를 멀리 떨어뜨려두는 기분이다. 이제 슬슬 다음 경기를 의식해야 하는 시간인데.
대기실에 앉아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썼다. 방송이야 옆자리에서 카메라를 들고 나를 주시하는 주연이 대신 챙겨주는 것이다.
공개 방송으로 송출되는 대회에 참여하면서 엘튜브 각까지 고려해야 한다니. 내가 그걸 전부 챙기려고 하다간 과부하가 걸려서 어딘가 구멍이 날 게 뻔하다. 자기 주제를 아는 것도 중요한 덕목이니까.
"조심하셔야 돼요."
"네?"
긴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생각을 정리하고 있으면, 불현듯 여성치고는 낮은 주연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새까만 눈동자가 캠코더의 렌즈와 함께 나를 주시했다.
"스벅님처럼 가볍게 생각하시면 안 돼요. 혜진 씨는 경우가 다르니까. 제가 옆에서 지켜보기는 할 거지만, 혜진 씨부터 철저하게 끊을 줄 알아야 해요. 정도를 모르는 사람도 있고."
"아. 걱정 마세요. 어차피 대회 끝난 다음이라는데, 그쯤 되면 사람들도 많이 가겠죠. 굳이 그때까지 남아서 기다릴 사람들이 그렇게 많겠어요?"
"...그런 게 문제라는 거예요. 혜진 씨는 늘 자기평가가 이상해서."
뭐라는 건가. 나만큼 자기 객관화가 잘 되는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연신 당부의 말을 뱉어대던 주연은 조심하겠다는 내 확답을 듣고 난 다음에야 물러났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나 싶었는데, 잘 들어보면 대회가 끝난 뒤의 이야기였다. 방금 대기실에 찾아온 스태프가 남긴 말을 의식하고 있던 모양이다. 대회가 마무리되면 따로 팬미팅이 가능한 공간을 제공하겠다는 말이었나. 당장 다음 경기를 의식하느라 정신이 없던 나는 대충 흘려 넘긴 내용인데, 주연은 그걸 계속 신경 쓰고 있던 것 같다.
팬미팅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건 역시 혜민이와 함께 했던 개막적 날의 기억이다. 강당처럼 넓은 공간을 가득 채운... 콩나물 같은 사람들. 그 사이에 부대껴서 서 있는 건 고역이었지.
그러나 그렇게나 사람이 몰렸던 건 어디까지나 프로팀의 기준이었다. 그것도, 인기로 줄 세우면 리그에서도 선두를 달린다는 팀의 팬미팅. 경우가 다른 것이다. 아무리 과장해서 생각해도 일개 스트리머의 대회 뒤풀이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릴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모여든 인원이 너무 적어서, 별다른 이벤트도 없이 돌아갈 일이 생길 가능성이 훨씬 높아 보였는데... 이런 내 예상을 주연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그럼 또 한동안 주연의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감당해야 할 게 뻔했으니까.
나는 주연의 걱정에 수긍하는 척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블 위에 펼쳐둔 노트에 낙서를 끄적거렸다. 다음 경기를 준비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묘하게 들뜬 마음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뇌 한쪽 구석에서는 이미 어떻게든 될 거라는, 체념과 낙관이 뒤섞인 안일한 전망이 자기세력을 키워나가는 중이었다. 큰일을 앞둔 내 정신머리는 도통 문제에 집중할 줄을 모르고 딴 방향으로 도망치고는 하는 것이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딸깍하고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가 크게 들려오는 듯했다.
아... 모르겠다. 될 대로 되겠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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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벅! 스벅! 스벅!"
"쓰벅 경기 잘봤어요!"
"스벅은 물러가서 노르드를 데려와라!"
"우나밍 도발 해명해!""해명! 해명! 해명!"
"우우우우"
환호와 야유가 뒤섞인 기묘한 소음이 강당을 가득 채웠다.
인파가 모여든 곳의 중심이다. 경기장으로 이어지는 커다란 홀의 복도, 무대처럼 따로 구분된 단상의 위. 그곳에 가만히 서있으면 모여든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소음이 건물 외벽을 타고 웅웅거리며 울려 퍼지는 것을 피부로 실감할 수 있었다.
성호는 목덜미로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애써 무시했다. 일일이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눈동자가 그를 쏘아보는 중이었다. 중간중간 하늘로 뻗은 팔이 엄지를 아래로 꺾어내리는 야유의 제스처를 보내고 있었는데, 그 괘씸한 인간들의 얼굴을 확인할 여유도 없었다. 다년간의 공방 경험으로 이런 일에 당황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건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었다.
사람이 많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성호는 선거 유세에 나온 정치인처럼 팔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환호성을 쏟아내는 군중은 여간해서는 쉽게 진정하지 않았다. 눈치를 보며 슬쩍 뒤를 돌아보면, 어느샌가 저만치 멀어진 제 편집자가 이쪽과는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모른척하고 핸드폰을 바라보는 모습이 엿보였다.
저 새끼가 진짜. 고용주이자 동업자인 사람이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외면하는 꼴에 분노가 치솟는다. 촬영은 제대로 하고 있는 게 맞는지.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그 앞으로 뛰어가 욕설을 쏟아내고 싶었지만, 성호는 자신이 지금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잘 알았다. 그러기엔 판이 너무 컸으니까.
"노르드는 어딨어! 너 보러온 거 아니라고!"
...조금 과하게 어그로를 끌었나.
애초부터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려는 의도가 있었던 건 사실이다. 편집자의 컨텐츠 제안에서 시작된 발상. 시청자들을 잔뜩 모아놓고 뭐라도 된 것마냥 유세를 떠는 모습을 촬영하는 게 이번 어그로의 목적이었다.
인파를 앞에 두고 사이비 교주 흉내를 내는 모습이 얼마나 임팩트가 대단할 거라며 설득하던... 빌어먹을 편집자 꼬드김에 넘어간 탓이다. 그걸 위해 팬카페나 SNS에서 얼마나 추하게 홍보를 해댔던가.
과거에 제작하고 남은 사인이 담긴 굿즈를 상품으로 내걸고, 장소와 시간까지 여러 번 반복해서 공지했다. 훌륭한 소통이라는 호의적인 반응과 거기에 따라붙는 좋아요 개수를 보고 한술 더 떴던 지난 과거가 부메랑처럼 되돌아왔다.
분명... 지키지 못할 공약을 몇 개 더 내세우기는 했더랬다. 아무튼 사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했으니까. 원하는 그림을 연출하기 위해선 많은 설계가 필요한 법이 아니던가.
확실히, 노르드의 이름을 더하는 어그로는 조금 과했을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그 방송 시청자들도 어지간한 극성이었을 텐데.
"자, 자. 여러분들 진정하세요!"
주최 측에서 빌려온 마이크가 제 기능을 제대로 발휘했다. 홀을 가득 채운 소음이 조금씩 줄어들어갔다. 빽빽한 인파 사이로 걱정스레 이쪽을 쳐다보는 스태프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미리 말해서 협조를 받기는 했으나, 과연 저쪽도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모일 줄은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럴 만도 했다. 사람을 불러 모은 성호 본인도 이런 상황은 예측하지 못했으니까. 뒷수습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과열된 머리 속으로 점차 정신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쉬고 싶다는 혜진의 말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건만. 간곡히 부탁해서 같이 이 자리에 나오는 게 맞았을지도...
"큼, 큼! 자자, 진정들 하시고. 우선 이 자리에 진짜 찾아와주신 스청자분들께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누가 스청자냐! 난 노르드 보러 왔다!"
군중 사이에서 불쑥 튀어나온 외침에 웃음이 퍼져나갔다. 당장은 분위기가 괜찮아 보였으나... 원래 민심이라는 건 한순간에 뒤바뀔 수 있는 법이다. 화재에 예민한 성호의 직감이 지금 입을 잘못 놀리면 즉시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경고를 보내왔다. 아무리 익숙하다고 한들 현실에서 야유를 받는 건 경우가 달랐다. 멘탈이 작살날 게 뻔하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경기 전에 빡집중이 필요하다고 해가지고. 그, 역시 소통도 좋지만 대회에 집중하는 것도 중요하잖아요? 노르드님은 그런 거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최대한 뻔뻔하게. 어차피 낯짝은 두꺼웠다.
성호는 잠깐 말을 멈추고 여론을 살폈다. 이쪽으로 쏠리는 노골적인 시선을 보면 관종인 그로서도 잠시 주춤거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장은 노르드의 이미지 때문인지 대개 수긍하는 분위기였으나, 여기서 그치면 결국 금방 여론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변할 것은 분명했다. 아무튼 노르드가 이 자리에 없다는 게 가장 중요한 팩트였으니까.
뭔가 여론을 안정시키기 위한 당근이 필요했다. 이 자리에 모인 노르드의 시청자들이 만족할 수 있는... 혹할만한 당근이.
"그... 말씀드린 건 선생님이 대회 끝나고 팬미팅 때 하실 겁니다! 다들 많이 참가해 주세요!"
...팬이 많이 찾아오면 좋아하겠지. 아마.
혜진의 벌레 씹은 표정을 떠올리면서, 성호는 자기합리화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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