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화 〉 183 안전거리를 지키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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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떨어질 무렵이다.
대낮부터 시작한 커플 대항전은 순탄하게 진행되어, 어느샌가 종점으로 향해가는 중이었다. 땅을 달구는 해는 이미 종적을 감췄는데도 경기장의 열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뜨거워져 갔다.
시기가 절묘했다. 나이트폴 프로 리그의 전반전이 끝나고, 후반전이 시작되기 전 잠깐 주어지는 휴식기. 커플 대항전은 리그가 차지하던 자리의 공백을 교묘히 비집고 들어왔다. 잠시 보는 즐거움을 상실한 리그 시청자들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 대회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시청자의 수는 늘어만 갔다.
당초의 예상을 훨씬 상회하는 관심이 모여들었다. 언제나 그렇듯, 관심은 더 큰 관심을 불러 모으는 법이다. 시청자가 일정 수를 넘어선 다음부터는 눈덩이가 구르는 것처럼 빠르게 시청자가 불어났다. 그럴수록 커뮤니티 활동도 활발해져서, 경기마다 나타나는 중요 장면들은 빠지지 않고 캡처되어 각종 커뮤니티에 올라갔다. 커플 대항전의 존재를 모르거나 관심이 없던 이들도 시끄러워진 커뮤니티를 보고 하나 둘 중계방송에 찾아오기 시작했다.
결국 4강전이 시작하고, 대회가 종장으로 향할 때쯤. 대회의 공식 중계방 시청자는 십만 명을 넘어섰다.
뜨거워진 관심사를 시청자의 숫자가 증명하는 지금... 남은 경기는 단 한 경기. 결승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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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념무상.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건 너무나 힘든 일이다. 어린 시절, 다들 한 번쯤은 '생각하지 않기' 따위를 계속 되뇌며 머리를 비우기 위해 노력했던 경험이 있지 않나. 막상 생각을 멈추려고 마음먹으면 오히려 더 많은 생각들이 물밀듯이 밀려 들어온다. 머리를 비우고 생각을 멈추라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말이었다.
내게 명상은 마음을 비우는 일이 아니라 마음에 짐을 더하는 일이었다. 잡념은 언제나 빈 공간을 파고 들어오는 습성을 가졌다. 마음을 비운다는 건 결국, 머리를 자질구레한 잡념으로 가득 채운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그럴 때마다 생각하는 것이다. 역시, 불자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고.
그럼에도 머리를 비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건,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 수단이었다. 직면하기 힘든 상황을 마주하면 쓸데없는 생각으로 머리를 가득 채우는 게 차라리 더 편했다. 그런다고 뭐가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마음은 한결 편해지고는 했으니까.
"어우, 떨려 죽겠네. 선생님은 어떻게 그렇게 침착해요? 이제 거의 존경스러울 지경이야. 몰래 청심환이라도 드셨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현실 도피 중인 내 멍청한 모습이 하나뿐인 팀원에게는 여유 넘치는 태도로 느껴진 모양이다. 스벅은 연신 팔뚝을 문지르면서 이쪽을 바라봤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턱 밑이 수염 자국을 따라 거뭇하게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무슨 개소리를 쏘아대더니, 막상 부스 안에 들어오니 긴장이 되나 보다. 선이 굵은 얼굴을 비장하게 굳히고 있는 게 굉장히 어색했다.
그래, 이런 무대에서 긴장을 하고 있는 게 나만은 아니겠지.
사실 저렇게 넉살 좋게 말을 내뱉는 것만 봐도 이쪽보다는 훨씬 여유로워 보였다. 짬밥이라는 게 확실히 존재하는 건지, 아니면 스벅이라는 인간 자체가 무대에 강한 체질인 건지. 어느 쪽이나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게 스벅이란 인간의 개성이겠지. 경기장 안에만 들어오면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 나와는 수준 자체가 다르다.
심호흡을 하면서 너스레를 떠는 스벅을 바라보면 괜히 심술이 솟아났다.
"스벅님이 캐리 하셔야 돼요."
"지금까지 빡캐리해서 올려놓고 무슨 말을... 그거 몰라요? 올려놨으면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거. 선생님이 지금 그런 입장인 겁니다. 저는 방해되지 않게 조력만 드릴게요."
"어차피 저 활쟁이하면 스벅님이 해야 되는데."
"뭔, 그것도 저 그냥 미끼잖아요. 연습할 때마다 킬 포인트 다 먹었으면서."
부담 좀 덜어달라는데 말이 많다.
"그냥 해줘."
"......예?"
무심코 투정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애새끼도 아니고. 창피함 때문에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이쪽을 쳐다보는 스벅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마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지 않을까. 그냥 농담으로 받고 넘어가면 좋을 텐데. 집요한 스벅의 시선을 생각하면 그는 쉽게 넘어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따지고 보면 그냥 농담으로 내뱉은 소리는 아니었다. 스벅이 해줘야 된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다. 상대와의 실력 차이가 분명할 때야 나도 마음껏 선을 넘을 수 있었으나, 칼고 앞에서까지 그런 운영을 반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애초부터 리스크 없는 안전한 플레이를 지향하는 유저였다. 분명한 이유가 없다면, 위험 가득한 플레이는 피하고 싶은 건 사실이다. 그러기 위해선 스벅이 힘내야 하는 게 당연한 일 아닌가.
아니, 이렇게 하소연을 해봤자... 긴장감은 사람을 멍청하고 둔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스벅의 노골적인 눈초리를 애써 무시했다. 무안한 마우스가 뭐라도 하는 척 빌드창을 기웃거리며 돌아다녔다.
빌드 조합이나 전략이야, 더는 고민할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어쨌든 칼고의 팀은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준비했던 상대다. 이제 와서 심리전 따위를 고뇌하며 가진 패를 뒤적거려봤자 바뀌는 건 없었다. 수 싸움에 머리를 쥐어짜야 하는 건 첫 세트의 승패가 결정 난 다음이다.
지금은... 그냥 최선의 플레이를 하는 수밖에 없다. 아마 경기에 임하는 네 명의 플레이어가 똑같이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뭐라 떠들어대는 스벅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면서, 나는 부스 밖에서 웅성거리듯 희미하게 들리는 소음에 귀를 기울였다. 직접 마주하면 압도적인 관중들도 부스 안에서 눈을 감고 있으면 아득히 멀리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었다. 지금 들려오는 소리도, 게임을 시작하고 나서는 완전한 백색 소음으로 돌변하고는 했다. 거기까지 가면 긴장감도 한층 누그러진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쓰면서 모니터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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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맞습니다. 사실 다른 것보다 여기에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어요. 노르드 선수가 선택한 빌드가 굉장히 파격적입니다. 일단 보이는 것부터가 그렇죠. 아 때마침 옵저버가 노르드 선수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다들 보이시죠? 저거 활입니다, 활!">
[킷따ㅏㅏㅏㅏㅏ]
[ㅋㅋㅋㅋㅋㅋㅋ기대를 배신하지 않는 노르드]
[저걸 결승에서 쓰네]
[??? 22에서 궁병을 왜씀 접근하는순간 터지는데]
[정보)칼고는 스크림에서 저 조합에 개털린 경험이 있다]
[당했던 건데 대책 세우고 나왔겠지]
노르드의 빌드가 나올 때부터 퍼졌던 웅성거림이, 게임이 시작한 직후 옵저버가 노르드를 포착한 순간 커다란 환호성으로 변화했다.
결승까지 올라오는 과정에서 두 가지 빌드만 바꿔가며 사용했던 노르드다. 그랬던 그녀가 결승전 첫 세트에 꺼내든 새로운 빌드를 꺼내들었다. 그것도 일방적인 게임 양상에서는 보기 힘든 파격적인 빌드를. 자극적인 전략을 보고 열광적인 반응이 돌아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간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었던 선택은 아니었다. 노르드와 스벅이 칼고의 팀과 맞붙은 첫 번째 스크림에서, 노르드가 기습적으로 선택했던 빌드였다. 그 뒤의 연습 과정에서는 다시 보여주지 않았지만, 최초의 등장이 워낙 임팩트가 강했던 탓에 노르드가 활을 사용하는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적지 않았다.
거기에 희생양이 되었던 사람이 바로 칼고였으니. 시청자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노르드와 칼고에게 향할 수밖에 없었다. 노르드가 쏘아낸 화살이 이전처럼 칼고를 관통하고 지나갈지. 아니면 한 번 당했던 경험을 발판 삼아 칼고가 노르드의 전략을 훌륭히 받아칠지. 제각기 다른 생각을 품고 스크린을 바라보는 가운데, 붉은 평야 사이를 거친 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이윽고 두 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달리기 시작한 쪽은 칼고와 꼰닢이었다. 올라오는 과정에서도 여러 차례 보여준 적이 있는, 쌍검과 창의 조합.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몸이 훨씬 가벼워 보인다는 점일까. 신체 곳곳을 감싸던 중갑을 최대한 덜어낸 세팅이다. 노을 진 평야를 달리는 두 인형의 다리가 점점 가속했다. 거리가 좁혀지는 속도가 무섭도록 빨랐다.
반면, 노르드와 스벅이 있는 자리는 고요했다.
두 사람은 시작 지점에서 뿌리를 박은 듯 가만히 서있었다. 왼손에 버클러를 착용한 스벅이 살며시 노르드의 앞으로 걸어 나왔을 뿐, 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무심한 눈빛으로 달려오는 적을 쏘아보던 노르드가 뒤늦게 활시위에 손을 얹었다.
바로 다음 순간. 궁병의 차례가 시작됐다.
쉬익
시위를 떠난 화살이 뱀이 속삭이는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화살 한 발을 쏘아낸 노르드는, 표적의 상태도 확인하지 않은 채로 또 다른 화살을 활시위에 얹었다. 다시 시위를 당기고 목표를 조준하는 일련의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두 번째 화살이 다시 활시위를 떠날 때까지. 소요된 시간은 고작 몇 초에 불과했다.
날아드는 화살에 대한 칼고의 반응은 극적이었다. 노르드가 첫 번째 화살을 떠나보낸 순간이다. 적이 있는 방향으로 일자로 달리던 칼고와 꼰닢이 좌우 대각선 방향으로 순식간에 갈라졌다. 속도를 조절하고 있었는지, 방향을 바꾸는 움직임이 이전보다 민첩했다. 두 명이 갈라진 정면 방향으로 첫 번째 화살이 스쳐 지나갔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려왔다.
노르드는 쉬지 않고 시위를 당겼다. 최초엔 칼고가 달려오는 방향을 노리던 화살이, 바로 다음 순간 꼰닢을 노리고 날아든다. 쇄도하는 화살이 두 사람의 이동 경로를 읽기라도 한 듯 정확한 위치로 날아들었다. 그럼에도 칼고와 꼰닢은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 위협적인 화살을 쏘아내는 궁병과의 거리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장애물 하나 없는 평야는 궁병에게 넓은 시야를 제공했으나, 그건 상대에게도 마찬가지인 이점이었다. 적 궁병이 어디서 화살을 쏘고 있는지 특정할 수 있다는 것. 그건 매우 유효한 정보였다. 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진 다음부터는, 적이 언제 활시위를 당기는지 보고 판단할 시간이 주어졌다. 칼고는 능숙한 솜씨로 화살을 흘려보냈다.
화살을 피하는데 집중하느라 접근하지 못하겠다는 꼰닢의 말을 흘려듣는다. 두 명 모두가 접근에 성공할 필요는 없었다. 한 명만 다가서도, 안전거리를 상실한 궁병은 도주하느라 정신이 없을 터. 여기선 적에게 빨리 다가가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어느샌가 양손에 들린 두 자루의 검이 성난 것처럼 날을 번뜩였다. 이제 곧. 검을 휘두를 차례가 다가온다.
챙!
궁병을 향해 뛰어든 칼고를 마중 나온 건, 노르드를 보호하는 것처럼 앞장 서있던 스벅이었다.
달려든 기세를 담아 휘두른 우수의 검을 작은 버클러가 튕겨냈다. 궁병의 앞을 막아선 방패병. 이게 일반적인 랭크 게임이었거나, 복잡한 지형지물을 갖춘 고성 맵이었다면 상대하기 벅찼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곳은 도망칠 곳 없는 평야였다. 위협적인 화살 세례를 뚫고 여기까지 접근하는데 성공한 이상, 승기는 거의 가져온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칼고는 당황하지 않고 다음 공격에 전력을 기울였다.
왼쪽 검으로 스벅의 다리를 긁어내고, 회전하듯 몸을 돌리며 다시 오른손의 검을 휘두른다. 첫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스벅은 연달아 이어지는 칼고의 날카로운 공격에 빈틈을 보이고 말았다. 순식간에 이어진 연격이 스벅의 몸 곳곳에 상처를 만들었다. 다리에 상처를 입고 휘청이는 스벅의 목을 향해 칼고가 검을 휘둘렀다.
꼰닢이 비명을 지르듯 경고를 보낸 건 그 시점이다.
쉬익 하는, 귀에 익은 섬뜩한 소리가 귓가에 파고 들었다. 머리보다 손이 빠르게 반응했다. 척수 반사로 움직인 왼손이 회피 단축키를 난타했다. 칼고는 칼을 다 휘두르지도 못하고 그대로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한순간 어지럽게 회전한 시야 사이로, 활시위를 잡아당기는 노르드의 모습이 들어왔다.
지근거리에 접근하면, 궁병이 안전거리 확보를 위해 도망칠 거라고?
이 무슨 안일한 생각인가. 따지고 보면 저 년이 상식대로 행동할 리가 없지 않나.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다시 땅바닥을 뒹굴며, 칼고는 생각했다.
스벅에게 뒤를 내주는 한이 있더라도, 우선 저거부터 잡아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