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화 〉 184 성공하면 도박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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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할 때는 해야 된다. 그게 다소 억지에 가까운 일이더라도.
"칼고 쪽만 보세요. 스태 없을 거예요. 붙들어두기만 해."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옆자리를 돌아볼 만큼 여유가 있지는 않았다. 경기가 시작한 직후부터, 숨이 가쁠 정도로 눈을 움직였다. 지근거리에서 칼고와 대치 중인 스벅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멀찍이 달려오는 꼰닢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걸 보면 자의든 타의든 칼고에게 온 신경을 다 쏟아붓고 있는 게 확실했다.
그럼 됐다. 아직 승산은 남아있었다.
말이 없는 스벅을 대신해 챙, 하는 둔탁한 효과음이 뒤늦게 들려온다. 불안정한 자세에서 대시를 감행한 칼고가 다시금 스벅에게로 쇄도한 것이다.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았는지, 검이 맞붙으며 발생하는 충돌음이 이전보다 무디게 느껴졌다.
어설픈 공격,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비틀거리는 몸. 그럼에도 숨통을 끊기 위한 화살을 발사할 수 없었다. 칼고가 스벅을 방패 삼아 사선을 가로막은 탓이다.
다음 사격을 준비하던 나를 의식한 대응이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에서의 앞 대시. 본래라면 자충수에 가까웠겠으나... 스벅이 상대라면 버틸 자신이 있었을까.
아까까지 무리한 회피 동작을 반복하던 걸 고려하면, 스태미나도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스벅이 곧장 공격에 나설 경우 받아치기 위한 회피 한두 번 정도가 한계일까. 이후에는 반드시 숨 고를 시간을 확보해야겠지. 적어도, 스벅이 바로 쓰러질 일은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지금이 몰아붙일 타이밍이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은 없었다. 곧장 화살을 꼰닢 쪽으로 쏘아냈다. 이미 어깻죽지에 화살 한 대를 허용한 꼰닢은 이전보다 이동속도가 현저히 느려진 상태였다. 궁병의 시선이 계속 향하고 있다는 걸 의식시키면, 움직임은 더욱 굼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쪽에 도달하기 까지는 수십 초. 그 시간 내에, 반드시 칼고를 빈사 상태로 몰아넣어야 한다.
시위를 당긴 후에야 뒤늦게 정렬되는 조준선을 무시하고 다리를 움직인다.
사선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시야에 칼고를 넣은 상태로 움직였다. 칼고가 팔을 휘두를 때마다 철이 부딪히는 소리와 침음성이 섞여서 들려왔다. 짧은 호흡으로 진행되는 공방에서 지속적으로 손해를 보고 있는 쪽은 스벅이었다. 미처 쳐내지 못한 검격이 몸 곳곳에 상처를 남기고 지나갔다.
다리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눈에 들어왔다. 뒤로 물러나기 힘든 상태. 질주 과정에서 자원을 다 털어냈음에도, 쌍검을 거머쥔 칼고는 쉽게 주도권을 넘겨주지 않은 모양이다. 상대방이 먼저 공격에 나서지 않으면 심호흡할 시간이야 충분히 확보할 수 있을 터였다. 스태미나가 부족하다는 메리트는, 진작 소모되어 버렸겠지.
그러나 덕분에 이동할 시간을 벌었다.
"달려들면 계속 백무빙치세요. 틈 보이면 들어가고."
말을 했을 때, 이미 화살은 내 손을 떠난 뒤였다.
화살이 다시 허공을 갈랐다. 전투 중에도 줄곧 이쪽을 주시하던 칼고는 화살이 날아오는 방향을 알아차리고는 바로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목적은 이뤘으니, 실망할 단계는 아니었다. 회피 과정에서 스벅과의 거리가 벌어지는 걸 노린 한 발이니까.
다음 수가 중요하다.
연속 사격의 보조를 받은 손이 빠르게 다음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그즈음,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는 칼고의 사전 동작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반쯤 본능적인 감각으로 활의 방향을 고쳐 잡았다. 빠득, 하고 시위가 당겨지는 감각을 느낀 순간. 투박한 전사의 손이 다시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쉬시익
연달아 쏘아낸 세 발의 화살이 순차적으로 날아들었다. 앞으로 튀어나가듯 달려나간 칼고의 측면으로 첫 번째 화살이 떨어졌다. 움찔한 칼고가 뛰던 방향의 반대편으로 무빙을 캔슬했다. 그보다 조금 늦게 쏘아낸 두 번째 화살이 칼고가 휘두른 칼에 맞고 튕겨져 나간다. 화살을 쳐낸 반동으로 비틀거리는 칼고의 팔뚝에 최후의 한 발이 파고들었다. 살을 꿰뚫는 타격감이 저 멀리서도 선명했다.
"붙습니다!"
줄곧 수세에 몰렸던 스벅이 다급한 외침과 함께 앞으로 달려들었다.
뒤늦게 연속 사격의 반동이 찾아온다. 연달아 잡아당겼던 활을 잠깐 내려두고 넓은 시야로 전장을 확인했다. 달려드는 스벅을 한 팔로 감당해야 하는 칼고는 일방적으로 밀려나 뒷걸음질을 반복하는 중. 잠깐이나마 스벅이 승기를 잡은 모습이다. 남은 변수는 곧 다가올 창병뿐이다.
변수로 남아있는 꼰닢은... 정확히 나를 바라보고 달려오는 중이었다. 번뜩이는 창 끝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좌측 어깨에 화살대가 박힌 상태. 나와의 거리가 생각보다 가까웠다. 스벅을 향해 달려가 이 대 일 구도를 만들 거라는 내 예상은 빗나간 모양이다. 들어 올린 창대는 정확히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재빠른 뜀박질에 남은 거리가 빠르게 줄어든다.
활로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천천히 움직였다. 어느 쪽으로 물러나도 기세를 탄 창병의 돌진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연속 사격의 반동 때문에 견제 사격을 날릴 수도 없었다. 애초에 이 정도의 거리까지 접근을 허용한 이상 궁병은 사지에 몰린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남은 건, 요행을 바란 저스트 회피나... 아니면.
연신 화살을 잡던 오른손이 허리춤의 작은 단검을 들어 올린다.
별로 의미를 두지 않는 보조 무장이다. 타격 판정이 얼마나 처참할지는 굳이 시험해 보지 않아도 뻔할 정도였다.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이상하리만치 선명한 정신은 호흡을 내쉴 때마다 가까이 다가오는 창 끝을 뚜렷하게 포착하고 있었다. 저 날카로운 쇠붙이가 언제쯤 내게 도착할지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할 일을 잃은 활이 왼손에서 덜렁거린다. 겁이라도 먹은 것처럼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간격을 바로잡았다. 어차피 기회는 한 번이다. 다른 것들은 모두 배제하고 찰나의 타이밍에만 목숨을 걸어야 했다. 지척까지 도달한 창병이 팔을 움직여 창을 내지르는 타이밍. 그 순간만을 기다린다.
지금.
챙!
소리는 생각보다 경쾌했다.
작은 단검이 쇄도하던 창을 올려 쳐낸 순간이다. 패링이 성공했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효과음이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복부를 노리고 달려들던 창 끝은 탄력이 강한 벽에 부딪히기라도 한 것처럼 볼품없이 튕겨져 나갔다. 비틀거리는 꼰닢의 신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잘 갈린 단검을 단단히 부여잡은 궁병의 눈앞에서.
충돌한 대가로 흔들리는 모니터를 바라보면서, 나는 손등을 타고 흐르는 전율을 만끽했다.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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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전드네... 진짜 육성으로 소리지름 ㅅㅂㅋㅋㅋㅋㅋㅋㅋ]
[미친년인가싶다]
[실화냐]
[노르드대르드황르드갓르드킹르드노르드대르드황르드갓르드킹르드노르드대르드황르드갓르드킹르드]
[ㅋㅋ 연습에서 수백번 반복해도 저렇게 못칠거같은데]
[어케했노 ㅅ발련아;;;]
[활은 또 왜케 잘쓰냐고 씹ㅋㅋㅋㅋㅋ]
"와아아아아!"
"미쳤다!"
소름이 돋았다.
흥분에 차서 소리치는 중계진의 목소리도, 관중석에서 퍼져 나오는 환호성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관중들이 내지르는 소리는 귀로 듣는 게 아니고 피부로 느끼는 거라고 했던가. 처음 들었을 때 무슨 호들갑이냐 생각했던 팀 내 최고참의 목소리가 뒤늦게 떠오르는 것도 같았다. 그게 이런 걸 말하는 거였구나.
경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웅장한 나이트폴 배경음악과 함께, 관중들이 내지르는 환호성은 확실히 소름이 돋을 만큼 강렬했다. 부스 안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걸 관중석에 앉아있어야 체감하게 된다는 게, 조금 아이러니한 점이었지만.
무상은 닭살이 돋은 팔뚝을 쓸어내렸다.
여운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피부로 느껴지는 열기도 열기였지만, 역시 이 열기를 만들어낸 장면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경기장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된 순간 나왔던 아주 짧은 장면. 한 호흡, 단 한 번의 교환에 불과한 장면은 그렇기에 더 가치가 있었다.
무상은 다시금 첫 번째 세트를 복기했다.
위험한 상황이었다. 애초에, 2 대 2라는 특수한 대회 룰에 활을 들고 나온 순간부터 정해진 수순이었다고 말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그런 조합을 꺼내든 이상 노르드는 반드시 적들이 접근해오기 전 치명상에 가까운 피해를 입혀야 승리를 바라볼 수 있었다. 거리가 좁혀진 다음에는, 궁병이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이 지극히 낮아지기 때문이다.
나이트폴에서, 궁병은 민첩하고 기동성이 뛰어난 느낌의 빌드가 아니었다. 활을 들고 날렵하게 움직이며 무빙샷을 쏘아대는 궁병은 환상에 불과하다. 나이트폴 궁병의 기본은 적절한 위치를 확보하고 그 지점을 사수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사실상 FPS 게임의 저격수나 다름없는 역할군인 것이다.
빌드 특성에 따라 조금의 차이는 나타날 수도 있었으나, 결국 기본적인 맥락은 모두 동일했다. 아는 게 많으면 그만큼 보이는 것도 늘어나는 법이다. 무상의 시선에서, 활을 들고 나타난 노르드는 파격적인 만큼이나 불안하게 다가왔다. 접근만 허용해도 패배한다니. 그렇게 뒤가 없는 조합을 어떻게 결승에서 꺼낼 수 있다는 말인가. 아무리 전략적인 수라지만 정도가 과했다.
분명 그랬을 터인데.
위험에 노출된 궁병이, 자기 혼자의 힘으로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면. 그럼, 이야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않나.
경기장 메인 스크린은 첫 세트의 하이라이트를 반복해서 보여주는 중이었다. 꼰닢이라는 참가자의 접근을 허용한 노르드가, 찰나의 순간 꺼내든 단검으로 완벽히 패링에 성공하는 장면. 휘청거리는 창병의 앞으로 단검을 든 궁병이 달려드는 장면은... 그 자체만 떼고 봐도 하이라이트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장면을 또 어디서 볼 수 있겠는가. 저건, 기상천외한 하이라이트 장면만 편집해서 올린다는 엘튜브 채널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아무리 이벤트 매치라지만 대회에서 나올 거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장면이었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잦아들지 않았다. 경기장 관중석 곳곳에 흥분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무상은 관중석 좌석에 등을 기대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악질에 가까운 팀원들의 놀림을 무릅쓰고 오늘 대회에 찾아온 게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오래간만에 주어진 쉬는 시간이지 않나. 그걸 어떻게 활용하는지는 순전히 자신에게 달려있었다. 시즌 쉬는 시간에 e스포츠센터에 찾아오는 게 대체 뭐가 어떻다는 말인지. 그건 오히려 그만큼 나이트폴을 사랑한다는 증거일 터였다.
사랑하는 게 나이트폴이 아니지 않냐는 팀 베테랑의 놀림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개막전 이후, 프로 선배들의 짓궂은 놀림을 감내하다 지친 무상이 선택한 결론은 철저한 무시와 외면이었다. 조롱 하나하나에 열렬히 반응해서 달려드는 건 결국 그치들이 원하는 반응이었으니까.
연습실 컴퓨터로 노르드의 방송을 켜기만 하면 달려드는 팀원들을 일일이 상대하는 것도 매우 피곤한 일이었다. 그럴 시간에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 방송 소리를 키워두는 쪽이 훨씬 이득이다.
무상이 핸드폰을 켜고 찾아들어간 곳은 노르드의 저컴 게시판이었다. 평소에도 저스틴 커뮤니티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자랑한다는 이곳은, 대회를 맞이한 지금 서버가 포화 상태로 치달을 만큼 무수히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찬 상태였다. 새로 고침을 할 때마다 갱신되는 글의 수가 너무 많았다. 대부분이 대회 결승전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무상은 페이지에 들어오자마자 곧장 인기글 항목에 들어갔다. 이용자가 많기 때문인지, 로딩 시간이 평소보다 훨씬 길었다.
이윽고 인기글이 주욱 나열되기 시작한다. 오른손 엄지로 천천히 스크롤을 내리던 무상이 게시글 하나를 발견하고는 손가락을 멈췄다.
<노르드 팬미팅="" 관련="" 정보.txt(출처:쓰벅)=""/>
게시글의 제목은 이미 읽었다는 듯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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