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85화 〉 185 ­ 정면승부를 지향합니다 (185/243)

〈 185화 〉 185 ­ 정면승부를 지향합니다

* * *

종목을 막론하고, 다전제 룰에서 첫 세트를 패배한다는 건 어마어마한 디메리트로 작용했다. 그건 나이트폴 e스포츠에도 변하지 않는 진리였다. 개별 세트의 중요도가 올라가는 4강, 결승에서는 첫 세트에서 패배하고 매치를 뒤집은 사례를 찾는 것이 어려울 정도였다.

승자가 대체 얼마나 많은 심리적 우위를 가져가는지. 그건 굳이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패자는 경기 전 전략을 선택하는 단계에서부터 난항을 겪는다. 상대가 첫 세트와 동일한 전략을 들고 나올 경우. 패자는 그걸 타개할 해답부터 내놔야만 했다. 그럴싸한 답을 내놓지 못하면 같은 전략에 연달아 패배하는 굴욕적인 결과를 맞이하게 될 테니까.

그건 첫 단추를 잘못 꿴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애초에, 대회에 참가하는 사람들 중 누가 첫 세트의 중요도를 모르겠는가. 최초로 꺼내든 전략 자체가 몇 날 며칠을 고민한 끝에 내놓은 결론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빌드로 이러한 전투 구도를 만들면, 상대의 예상 조합을 충분히 카운터칠 수 있을 거라는 결론. 그게 어긋난 순간 많은 것들이 꼬일 수밖에 없었다.

이를 악물고 같은 전략으로 다시 도전할지. 아니면 실패를 대비해 준비한 또 다른 전략으로 우회해서 들어갈지. 여기서부터는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미로나 마찬가지다.

이 심리전에선 첫 세트의 승자가 압도적인 우위를 가져간다. 1라운드를 먼저 가져갔다는 점에서 오는 안정감. 상대가 자신들이 준비한 전략을 제대로 파훼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오는 정신적 여유. 다음 세트에서 또 다른 카드를 꺼내들지에 대한 여부도 주도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다전제는 멘탈 게임이다. 단지 첫 경기를 패배했다는 이유만으로, 승리로 이어지는 길은 이전보다 수십 배는 더 험난해진다. 하물며 그게 가장 긴장되는 무대인 결승이라면...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성현은 지금 그걸 누구보다 실감 나게 체험하는 중이었다.

의식을 하고 보면 몰려있다는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고작 한 세트. 한 세트의 패배가 가져오는 여파가 대단했다. 적이 들고 나올 전략을 예측하고, 준비해온 전략으로 맞받아쳤다. 다소 흔들림이 없지는 않았으나 게임 초반 전투 구도를 원하는 대로 구성하는 데까지 성공했다. 그쯤 되면 이쪽이 가져올만한 게임이었다.

그래서인지 패배가 더욱 뼈아프다.

"제, 제가 방패 드는 게 맞지 않을까요? 숙련도는 조금 떨어져도 화살 막는 것 정도야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고개를 돌려 꼰닢과 시선을 마주하면, 어렵지 않게 긴장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줄어든 말 수, 키보드 옆 비어있는 생수병, 어딜 봐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방황하는 눈동자... 긴장감이라는 단어와는 전혀 접점이 없어 보였던 지난 경기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첫 번째 세트가 시작하기 전만 하더라도 이 정도로 긴장한 느낌은 아니었는데. 성현은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고 넘어갔다.

사실 팀원의 멘탈을 챙길 수 있을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들고 나온 패에 의문을 갖게 되는 시점이다. 무엇이 승부를 갈라놓았는지 이유 하나를 집어 설명하기 힘들었다. 이론적인 측면만 띄워놓고 이야기한다면, 여전히 똑같은 조합으로 맞붙어도 유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도 승리를 목전까지 둔 상태에서 아쉽게 패배하지 않았던가. 단지 운이 없었다는 판단을 내리고 똑같은 빌드를 선택하는 것도 가능했다.

한 끗 차이로 승부가 갈렸다는 사실이 미련처럼 남아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불안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한 끗 차이가 계속 비슷한 장면을 연출할 것 같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게 굳이 단검 패링으로 킬 포인트를 만들어내는 극단적인 장면이 아닐지라도 그랬다. 이번에도 뭔가 한 발자국이 부족해서 간발의 차로 패배하게 될 것 같다는, 불안한 전망이다.

성현은 스스로가 위축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다시 해보죠."

"네? 그대로요?"

"그대로요. 아까랑 완전 같은 세팅으로. 위축되지 말고 하세요. 지면 지는 거니까."

꼰닢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표현하면서도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명뿐인 자신의 팀원은 이전과 동일한 구도가 나오는 걸 굉장히 꺼려 하는 눈치였다.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아직 첫 세트 때 들었던 꼰닢의 긴박한 콜이 생생했다. 노르드를 완벽히 잘랐다는 내용의... 확신 어린 목소리. 그런데 그 뒤에 이어진 장면이 그것이다.

자신이 꼰닢과 동일한 입장이었다면, 아마 지금쯤 멘탈이 무너졌을 것이다. 대회 하이라이트로 흘러나올 그 장면을 떠올리면서 화를 참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건 누구에게나 굴욕적일 수밖에 없는 장면일 테니까. 그런 경험을 하고 난 지금, 꼰닢은 아마 능동적인 플레이를 피하고 싶은 심정일 터다. 어쩔 수 없는 사람의 심리였다.

성현은 그걸 이해하면서도 동일한 빌드를 고집했다. 사실 다른 선택지를 고르는 것도 쉽지 않았다. 궁병을 카운터 치겠다고 당당히 방패를 들고 나왔는데, 노르드가 그걸 읽고 광전사 빌드로 나오기라도 한다면. 우나밍에 비했을 때 방패 운영 숙련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꼰닢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두들겨 맞다 죽을 가능성이 높았다. 애초에 노르드 팀과의 대전을 준비할 때도 그런 걸 고려해서 조합을 구성하지 않았던가. 이제 와서 그걸 뒤집으면 준비한 전략의 근간부터 엎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이할 정도로 활을 잘 다룬다고 한들, 결국 노르드의 상징과도 같은 빌드는 따로 있었다. 올라오는 과정에서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증명한 광전사 빌드. 대회 준비 기간 내내 연습했던 쌍검 빌드도 있었다. 성현도 혜진의 연습을 지켜보면서 노르드와의 근접전을 중점적으로 연습하고는 했던 것이다.

승부의 행방은 필연적으로 맞이할 혜진과의 일대일 매치에서 누가 승기를 잡아가느냐에 달려있었다. 그때를 대비해서, 패를 최대한 숨기며 스코어를 따라가야 했다.

결국 승산을 잡기 위해선 가장 자신 있는 조합으로 한 세트를 따낼 필요가 있었다. 불리해진 국면에서 분위기를 뒤집기 위한 방책. 묘수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정면에서 부딪혀서, 실력으로 적을 쓰러뜨리는 수밖에 없었다. 심리전에서 우위를 얻고 가기 힘든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더욱더 그랬다.

성현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

"노르드 선수의 예상하지 못한 슈퍼 플레이가 게임의 양상을 뒤집은 감이 있었죠. 재차 말하지만 아무리 노르드 선수의 실력이 뛰어나도 그런 플레이가 계속 나오기를 바라는 건 무리가 있습니다. 단검의 빈약한 패링 판정을 생각하면 정말 한 치의 오차라도 있으면 안 되는데, 공격 측이 패링을 의식해서 페이크라도 걸면 정말 답이 없어지니까요. 사실 도박에 가까운 전략적인 수였고, 두 번이나 통할 거라고 낙관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노르드 선수도 그건 잘 알고 있을 거예요."

"블루사이드에서 같은 빌드를 그대로 들고 나온 건 그래서일까요? 그런 예상하기 힘든 변수만 아니면 재차 맞붙어도 승기를 잡을 수 있다는 판단인 것 같습니다. 오히려 조금 빌드를 수정한 쪽은 스벅 선수네요.">

[ㅈ벅,,,드디어 버클러까지 버리고 진정한 10게이로 전직]

[꼬추떼자]

[나도 노르드 옆에 있으면 꼬추떼고함ㅇㅇ 고자가 뭐 대수라고]

[?? 저건ㅅ1발 게이가 아니라 미친ㅋㅋㅋ 아예 드러누웠는데?]

[인간방패... 웨폰마스터 스벅니뮤는 어디에?]

[응 무기역할은 노르드 혼자하면돼~]

[칼고야 이거 맞냐... 꼰닢 그냥 방패주고 앞라인세워야되는거아님?]

[아니 선생님 결승전 2연활은ㅠㅠㅠ 광전사의 긍지는 어디에]

[무친련이니까 광전사는 맞잖아]

두 번째 세트가 시작됐다.

시작과 동시에 첫 번째 게임과 비슷한 장면이 펼쳐졌다. 장애물 하나 없는 평야지대에서 네 명의 플레이어가 서로를 마주하고 섰다. 서로의 시작 위치가 바뀌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이전 게임과 거의 흡사한 구도였다. 양쪽 플레이어들이 사용하는 빌드나 장비도 마찬가지였다.

유일한 차이점이 있다면, 첫 세트에선 버클러를 착용하고 있던 스벅이 이번엔 커다란 방패를 들고 나온 정도일까.

그건 어지간해선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두꺼운 방패였다. 우나밍을 비롯해 대방패를 사용하던 유저들도 저렇게 커다란 방패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철덩어리로 이루어졌는지 외관만으로 육중함이 느껴지는, 성벽과도 같은 타워 실드. 스벅은 느릿한 걸음걸이로 노르드의 앞에 자리 잡았다. 두꺼운 방패와 달리 중량이 가벼운 방어구 때문인지 스벅이 유난히 얄팍하게 느껴졌다.

방패를 땅에 박은 것처럼 지탱한 그는, 이내 방패 위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는 칼고와 꼰닢이 달려오는 방향을 주시했다. 그러고는 움직이지 않는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노르드의 앞으로 작은 방책(??) 하나가 만들어진 모양새였다.

인간이 만들어낸 방어벽의 뒤편에서 궁병이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칼고는 기시감을 느끼며 평야를 질주했다. 탁 트인 평야 위, 홀로 거무튀튀한 색으로 우뚝 선 방패의 존재감이 유별났다.

스벅의 장비 세팅이 조금 변화했다는 걸 제외하면, 노르드의 팀은 이전과 거의 흡사한 구성의 조합을 들고 나온 것으로 보였다. 육중한 방패는 이전 세트 칼고에게 휘둘렸던 점을 상기한 피드백일까. 정면승부는 대체 언제 할려고 저러는 건지. 달랑 방패 하나만 바꿔서 똑같은 전략을 사용하려고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끓어올랐다.

칼고는 방패 쪽을 주시한 상태로 열심히 발을 움직였다. 경험에 따르면 이제 곧 화살이 날아올 터였다. 집중만 제대로 하고 있으면 뻔한 각도로 날아오는 화살을 피해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멀리서 날아오는 노르드의 화살이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다는 점도 칼고가 빌드에 대한 고집을 부린 이유에서 꽤나 큰 비중을 차지했다. 질주를 시작해 기동성만 확보된 상태라면 충분히 화살을 피해낼 수 있었다. 그럼, 또다시 아무런 상처 없이 노르드의 지척까지 도달할 수 있을 터. 다시금 좋은 기회가 주어진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화살이 날아오지 않았다.

"왜 여기만­ 꺅!"

화살이 허공을 긁어대는 소리를 대신해 칼고의 정신을 차리게 만든 건 꼰닢이 내지르는 비명소리였다. 황급히 시야를 돌리면, 자신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달려나가던 꼰닢의 방향으로 섬뜩한 궤적이 쇄도하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짧은 간격으로 쏘아지는 화살은 정확하고 집요해서, 한 번 흐름을 놓친 꼰닢은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화살을 피하기에 급급한 상태였다. 멈춰선 꼰닢과 달리는 칼고. 시간이 흐를 때마다 꼰닢과 칼고의 거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노르드는 칼고를 표적에서 철저하게 제외했다. 아무런 견제도, 위협도 없었다. 이 순간 칼고는 대회를 시작한 이후 최초로 아무도 시선을 주지 않는 노마크 상태로 방치되는 중이었다.

...철저히 없는 사람 취급을 하고는, 약점부터 후벼팔 생각인가.

칼고가 빠르게 상황 파악을 마쳤다. 곧장 꼰닢에게 회피에 전념하라는 오더를 남긴 칼고는 최대한 속도를 높여 노르드가 있는 방향으로 대시했다.

보이지 않는 시간제한이 걸린 느낌이었다. 자신이 노르드에게 도달해 더는 화살을 쏘지 못하게 막아내는 게 빠를지, 아니면 집요하게 꼰닢만을 바라본 노르드가 사격으로 꼰닢을 전투불능 상태로 만드는 게 빠를지. 그제서야 스벅이 들어 올린 방패벽의 의미가 되살아났다. 칼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꼰닢의 비명소리가 카운트다운을 대신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