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화 〉 186 세 번은 조심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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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너무 부담되는데요? 결승전에서 주인공 하고 싶지는 않은데. 거기까지 올라가면 그냥 묻어가고 싶다고요. 사람들도 바라는 그림이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런 걸 뭐 하러 챙겨요. 대회에 나가는데 우승을 어떻게 할지만 고려해야죠. 저는 그냥 제일 가능성 높아 보이는 그림만 생각한 거예요. 스벅님 말대로 하면 잘해야 반반일걸요. 컨디션 차이로 갈리는."
대회를 앞둔 전날, 전략 회의에서 오갔던 대화였다.
철저하기보다는 뭔가 엉성한 느낌으로 진행된 회의는 두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끝을 보이는듯싶었다. 그마저도 첫 상대에 대한 분석에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한 뒤였다. 노르드가 진행하는 전략 분석은 그녀의 주관이 잔뜩 들어가 있었는데, 자신만의 확고한 기준이라도 있는 건지 팀마다 분석에 투자하는 시간의 비중이 확연한 달랐다.
깊이 파고드는 팀의 경우, 예상 빌드나 상대 법을 뛰어넘어 대략적인 전투 구도까지 그려냈다. 생각하지도 못한 디테일한 회의에 빌드 조합만 떠올리고 있던 스벅이 깜짝 놀랐을 정도였다. 첫 상대인 우나밍과 파피루스 팀에 대한 분석이 한 시간을 넘어설 즈음, 스벅은 혹여나 새벽까지 회의가 이어지지 않을지 걱정하기 시작했더랬다. 그게 기우에 불과했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겠지.
신경 쓰는 팀이 분명하게 갈렸다. 팀에 따라선 대충 예상 빌드 한두 개를 언급하고는 '하던 대로 하면 이길 상대'라 말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었으니. 대진표의 맞은편, 칼고팀에 대한 분석이 자세하게 이어질 무렵. 스벅도 노르드가 어떤 팀이 결승에 올라올 거라 예측하고 있는지는 금방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쪽이 똑같은 걸 계속 당하겠어요? 연습 때도 한 번 지고 나서 바로 방패 들고 나오지 않았나. 첫 게임 가져갔다고 쳐도 다음 경기에서 도로 내주는 꼴 아니에요?"
"그럼 일대일에서 다시 시작하면 되죠. 스코어는 가정할 필요가 없어요."
칼고팀에 대한 대책으로 노르드가 내놓은 전략은 다소 의외였다. 성호 자신이 앞장서고, 활을 든 노르드가 후열을 맡는... 너무 불안정한 조합이다. 연습 경기, 기습적인 궁병 빌드 활용으로 승리했던 기억 그렇게나 인상적이었을까. 모니터 한쪽에 메모장을 띄워놓고 타자를 치던 성호는, 밀려오는 꺼림칙함에 키보드에서 손을 떼어냈다.
스벅으로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제 앞에서 노르드가 앞장서서 달려갈 때와 그렇지 않을 때. 연습 게임에서 그게 얼마나 많은 차이를 만들어냈던가. 순간적인 2 대 1 구도를 버티지 못하고 한 번에 죽었을 때는 채팅창에서 무수히 많은 비난들이 쏟아져내리고는 했다.
노르드가 활을 선택한다면 그 부담은 오롯이 자신에게 돌아올 게 뻔했다. 영웅이 되냐 범인이 되냐가 종이 한 장 차이로 결정 나는 구도. 방송이라면 스벅도 무조건 예스를 외쳤을 테지만, 수만 명이 지켜볼 대회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거기서 실수라도 하면 곧장 나락행 티켓이 날아오는 꼴이 아닌가.
"부담스럽게 생각할 필요 없는데. 어차피 예상한 구도 나오면 제가 잘해야 되는 게임이에요. 접근하기 전에 한 명 정도는 불구로 만들어놔야 되니까."
"불구는... 단어 선택이 좀. 애초에 선생님이 칼고 상대하면 이길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아무리 그래도 6할 정도는 가져갈 거 같은데요."
그간 옆에서 지켜본 결과 노르드의 실력에 대해 광신에 가까운 믿음을 가지게 된 성호였다. 정말 프로 레벨의 실력자가 아닌 이상, 노르드와 정면에서 대치하면 이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 생각은 상대편에 칼고를 가져다 놔도 변하지 않았다. 성호의 입장에선, 노르드가 왜 굳이 리스크가 큰 쪽을 선택하려고 하는지가 의문이었다. 정면에서 맞붙어도 유리한 쪽은 이쪽인 것 같은데. 설마하니, 자신을 그 정도로 못 믿고 있나 싶기도 하고.
"칼고님 방송 보셨어요?"
질문을 던지고 멍하니 메모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노르드가 갑자기 맥락과 상관없는 물음을 던져왔다.
"네? 보긴 봤죠. 연습 엄청 열심히 하던데. 쌍검이 확실히 보는 맛이 있기는 해... 아니, 근데 그건 왜요?"
"방송 보다 보면 벼르고 있는 게 느껴지거든요. 저번에 제가 도발을 좀 했는데, 화가 많이 났나 봐요."
"...도발? 선생님 도발도 하세요? 나 진짜 상상이 안 가는데?"
"근데 그게 전부 밀리 구도더라고요. 연습 상대도 매번 츠바이나 쌍검으로 잡아서."
그야... 당연한 거 아닌가. 노르드를 의식하고 연습한다면 당연히 자주 사용하는 빌드를 보고 연습하겠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조금은 이해가 간다. 우리가 그쪽을 눈여겨보고 있는 만큼 그쪽 팀도 우리를 의식하고 있다는 건가. 그럼 확실히 예측할 수 없는 조합으로 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편이 유효할지도 모른다. 내심 노르드가 내세운 전략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 성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릴 시점이다.
"그럼 의도대로 되는 것 같아서 상대해 주기 싫잖아요. 활만 쓰면 그간 연습했던 거 전부 물거품 되는 거 아니야. 그게 핵심인 거예요."
...어떻게 우승할지만 생각하자며.
상상하지도 못한 이유에 성호는 그 순간 말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이어진 결과가 이랬다.
"저한테 붙는 것만 의식하세요. 좀만 버티면 끝내고 지원할 테니까."
혜진의 침착한 목소리에는, 지금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도 여유까지 묻어 나오는 것 같았다.
성호는 조심히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쌍검이 분주하게 방패를 두드리고 있는 와중에도, 화살이 공기를 가르고 헤엄치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저 연발을 홀로 감내하고 있을 꼰닢이 얼마나 더 오래 버틸 수 있을까. 방패로 시야가 가로막혔음에도 점점 고슴도치가 되어가고 있을 꼰닢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것 같았다.
냉정하게 상활을 바라보면 자신이 맡은 일은 의외로 별게 아니었다. 감정이 격해진 듯한 칼고를 상대로, 무심하게 방패를 들어 올리고 있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카운터를 노리거나 괜한 심리전에 휘말려 스태미나를 갉아먹힐 필요도 없었다. 가드만 유지한 상태로, 노르드를 지키는 것만 의식한다. 뚫리지 않는 방패 벽을 두드리다 막막함을 느낀 칼고가 궁병에게 뛰쳐나가는 게 이 일방적인 전투 구도의 유일한 변수였다.
커다란 방패를 들고 있음에도, 기동성에 특화된 특성을 다수 채용한 기형적인 형태의 빌드. 한 손 철퇴를 채용하기는 했으나 공격 능력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칼고의 움직임에 맞춰 꾸준히 방향을 바꾸며 방패를 옮겨드는 모습은, 노르드의 말마따나 움직이는 벽이나 다를 바 없었다.
허나 어쩌겠는가. 실제로 이 기묘한 빌드가 결승전에서 유효하게 먹혀들고 있었으니. 나이트폴에서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플레이를 하고 있다는 게 조금 우습게 느껴지다가도, 그게 노르드라고 생각하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스벅은 노르드가 하라고 하면 발이라도 핥을 자신이 있었다. 적어도 나이트폴에 한해서는.
지금은 오히려... 칼고에 대한 동정심이 생겨나는 시점이다.
챙!
다시. 가벼운 일격이 육중한 방패를 무의미하게 두드렸다. 잠깐 갉아먹힌 스태미나를 보고 휴식을 갖기 위해 방패를 내리면, 곧장 내지른 발차기가 경각심을 일으켰다. 스벅은 다시 방패를 들어 올리고는 칼고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컨트롤이 필요하지 않은 구도라지만 방심을 할 수는 없었다. 아무튼 자신이 칼고를 놓치기라도 하면 한순간에 게임의 구도가 뒤바뀔 것은 예정되어 있었으니까.
조금씩 깎여나간 스태미나는 어느새 절반쯤 비어있는 상태였다. 칼고가 호흡을 허용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견제를 심어둔 탓이다. 이대로 전투가 길어지면, 결국 스벅의 스태미나를 모두 잡아먹은 칼고가 방패를 뚫어내고 가볍게 승리를 가져가겠지. 둘 사이의 실력차는 그만큼 명확했다.
그러나 지금 칼고에게는 그렇게 게임을 길게 끌고 갈만한 여유가 없었다.
"아. 급소에 들어갔네요. 즉사는 아니어도 이제 전투불능이에요. 잘 버텼네."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는 믿음직하면서도 섬뜩했다.
방패를 쥔 스벅의 뒤쪽에서, 다시 한 번 화살 날아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날렵하게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이전보다 훨씬 가까웠다.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고 생각할 정도로.
방패를 내리치던 동작이 캔슬됐다. 지근거리에서 날아든 화살을 피해 바닥으로 몸을 굴린 칼고가, 스벅의 앞에서 천천히 몸을 다시 일으켰다.
실제로는 그럴 리가 없었는데도... 스벅은 쌍검을 고쳐 잡는 일련의 행위를 반복하는 칼고가 극도로 울분에 차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모니터 안에 든 폴리곤에 지나치게 과몰입을 하고 있는 걸까. 무기력한 모습을 보면 괜히 안쓰러워지는 것이다. 이게 결승전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팀을 잘 만나기는 했구나.
대회가 시작한 이래로 몇 번 되뇌었는지 모를 생각을 반복하면서, 성호는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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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거리는 칼고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즐겁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대회가 아니었다면 앉은 자리에서 웃음이 터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붙들어매고, 나는 조용히 마지막 화살을 시위에 걸고 잡아당겼다. 아무튼 이 정도면 정말 최선을 다해 버텨낸 셈이다. 깔끔하게 끝을 보는 게 좋겠지.
PVP 게임을 하다 보면, 게임 플레이에서 감정이 드러나는 모습을 종종 확인할 수 있었다. 게임 캐릭터라곤 하지만 전부 사람이 조작하는 것이다. 게임에 익숙해지기 시작할 즈음, 상대를 농락하고 있으면 멘탈이 망가진 상대가 헛된 조작을 반복하고는 한다. 마우스를 잡은 손이 흔들리면 캐릭터가 사방으로 고개를 돌리기도 하고, 비틀거리는 무빙에서 티가 나는 경우도 있다. 크게는 눈앞에서 게임을 꺼버린다거나 아예 조작을 멈춰버리거나.
굳이 마이크로 소리 내서 표현하지 않아도 다 알 수 있는 것들이다. 거기서 짜릿함을 느끼는 게 또 숙련된 게이머의 보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 타인의 감정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매력적으로 다가오는지는 이루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나도 한창 나이트폴에 재미를 붙였을 무렵엔 게임을 승리로 굳히고 나서 숱한 농락 행위를 감행하고는 했던 것이다. 게임이 끝나고 나서 친구 추가라도 받으면, 거기서 또 저열한 행복감을 느끼고는 수락을 눌렀더랬지. 욕설 신고는 행위의 마침표나 다를 바 없었다.
무엇을 숨기랴. 남이 흔들리는 꼴을 보고 쾌락을 느끼는 게 사람의 본성인 것을. 2 대 1의 대치를 계속 반복하다가, 점점 헛손질이 늘어가는 칼고를 보면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겠지. 승리를 확신했기 때문인지 흘러넘친 감정이 여과 없이 퍼져 나갔다. 될 수 있으면 여지를 주지 않고 끝내고 싶은데.
날아간 화살이 칼고의 목에 꽂히면, 그제서야 승리를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성현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다는 욕구를 잠재우고 얌전히 손을 마주 잡았다. 긴장이 완전히 풀렸는지 살짝 느껴지던 떨림도 이제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와씨, 너무 쉽게 이긴 기분인데요? 칼고님 멘탈 나갔을 듯. 진짜로."
목구멍으로 흘러드는 물은 미지근했다. 2세트 게임을 복기하듯 말하는 스벅의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당장 다음 게임을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느낌이 좋았다. 지금이라면 단검 패링을 두세 번 정도는 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네. 다음 게임으로 끝내는 게 좋겠어요."
"어... 이번에도 같은 전략으로 가나요?"
뭔가 머뭇거리면서 물어온다. 주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게임이 이렇게 잘 풀리고 있는데.
나는, 대답도 하지 않고 그냥 고개를 주억거렸다. 통하는 전략은 계속 사용하는 게 e스포츠의 유구한 전통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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