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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화 〉 187 ­ 밀당에 끌려가는 쪽은 언제나 (187/243)

〈 187화 〉 187 ­ 밀당에 끌려가는 쪽은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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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고에게 다소 충격적인 결말을 선사한 두 번째 세트는, 첫 세트 패배에도 불구하고 줄곧 품고 있던 그의 확고한 믿음을 깨기에 충분했다.

결승전에서 노르드를 만난다면 분명 치열한 근접전을 치르리라는 믿음. 그건 일종의 존중이었다. 알게 모르게 혜진의 방송을 매번 챙겨 보던 성현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격언은 게임에서 보다 확실히 통용되는 법이었다. 그녀가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어지간한 시청자보다는 그가 훨씬 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빌드로 상대한다고 한들, 승리를 장담하기 힘든 상대였다. 대회 연습 과정에서 노르드를 의식해 쌍검 하나만을 계속 갈고닦은 것도 전부 노르드와 정면으로 맞붙는 구도에서 조금이라도 높은 승산을 가져가기 위함이었다. 대회를 준비하면서, 찰나의 순간 승부가 결정날 치열한 전투 구도를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했던가. 그걸 가장 중점적으로 연습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막상 까놓고 보면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노르드의 전략은 일관적이고, 또한 악질적이었다. 츠바이나 쌍검의 간격 따위를 생각하며 머리를 쥐어짜던 시간들은 전부 쓸데없이 허비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피 튀기는 밀리전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고려해야 될 건 그런 게 아니라 평지에서 화살을 피하는 방법이나, 보다 빠르게 방어에 몰두하는 상대를 뚫어내는 방법이었다. 성현은 앞선 경기에서 근접 빌드만 사용하던 노르드의 모습조차 결승을 위한 포석이었다고 결론지었다. 그의 안에서, 혜진은 이미 능구렁이나 마찬가지인 존재였다. 혹은 악독한 마녀의 형상을 하고 있거나.

활을 든 노르드는 취약한 사냥감을 발견한 사냥꾼처럼 약점만 파고들었다. 그게 어찌나 집요한지 두 번째 세트가 끝난 다음에도 화살이 허공을 가르는 섬뜩한 소리가 귓가에 위잉하고 울리는 것 같았다.

궁병 대책으로 세워놨던 전략은 이상할 정도로 높은 궁병 숙련도를 보여주는 노르드의 플레이에 쉽사리 파훼 당한지 오래. 칼고와 꼰닢은 순식간에 두 개의 스코어를 내주고 말았다.

세 번째 세트를 앞두고 정적에 잠긴 부스 안에서, 성현은 결국 자신 안에 있던 고집이며 믿음 따위를 전부 부숴버릴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다른 전략을 모두 고려하는 식의 안일한 대처가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심리전이고 자시고... 결승 무대에서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한 지금 세 번 연속 화살에 몸이 꿰뚫린 채로 죽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을 비웃는듯한 혜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상상 속 악의 어린 표정을 짓고 그를 내려다보는 혜진을 보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쉽게 짐작할 수가 없었다. 아니, 저 악질이라면 아마 그에게 있어 가장 끔찍한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울분으로 손이 덜덜 떨리는 자신을 저 위에서부터 깔아보는 모양새로.

성현은 이를 악물었다.

우선은... 그 빌어먹을 궁병을 방패 저편에서 끌어내려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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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쒸,,,벌 역배]

[정배충들 정신이들어??? ㅋㅋㅋㅋㅋ]

[그치 세번은 당하면 사람이아니지]

[이렇게 보니까 활진짜 ㅈ구리구나... 방패드니까 걍 존재감없어지네]

[저격으로 방패뚫리게 버프해줘야됨 ㄹㅇ]

[그와중에 스벅빌드 진짜 웃음벨ㅋㅋㅋㅋㅋㅋ 밀리니까 그냥 아무것도못해]

[개소리하네 ㅁ1친 활쟁이련이]

[칼고 고슴도치되더니 이악물었노ㅋㅋㅋ 쉬지않고 때리냐]

[쿨하게 포기하는게 더열받는데?]

뒤집어 보면, 3세트는 생각보다 일방적으로 끝이 났다.

2세트와 동일한 조합으로 준비를 마친 노스 팀은, 경기가 시작한 직후 거대한 방패를 앞세워 전진하는 칼고와 꼰닢을 마주한 순간 승리를 체념한 것처럼 보였다.

방패라는 벽이 든든히 앞을 지켜주고 있는 양상이다. 평야 반대쪽에서 날아오는 화살은 이전처럼 섬뜩함을 심어주지 않았다. 칼고 팀이 방패 뒤에 몸을 숨긴 채 천천히 접근하는 순간에도, 노르드와 스벅이 할 수 있는 대응은 없었다.

서로의 방패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질 무렵. 방패 벽 밖으로 튀어나온 칼고가 검을 휘두른 순간 궁병은 별다른 저항도 없이 목숨을 내주고 쓰러졌다. 화살을 쏘기 위해 옆으로 빠져나와 있던 노르드는 칼고의 접근에도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스벅의 뒤로 숨어들거나 도움을 청하는 일도 없었다.

대놓고 몸을 내주는 듯한 퍼포먼스에 당황한 건 오히려 칼고 쪽이었다. 이 무슨... 허무한 게임이라는 말인가. 검을 내리고 시간을 확인하면, 누가 봐도 대회에서 가장 짧을 것으로 추측되는 경기 시간이 그를 조롱하듯 깜박거리고 있었다. 그 간단한 승리에 칼고가 느낀 감정은 기쁨보다는 허탈함에 가까웠다.

앞선 두 세트에서 상대가 들고 나온 빌드는 승산을 논하기 힘든 필승 조합 같은 게 아니었다. 조합에 따라 극명히 상성이 갈리는, 아주 전략적인 빌드.

전략적 수에 두 세트를 쉽게도 내준 건 성현이 그걸 거의 배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현은 사실 혜진이 저런 선택을 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결승전 무대에서는 나이트폴스러운 정면 힘 싸움을 추구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토록 연습을 열심히 하지도 않았을 터다. 머리를 굴렸으면 굴렸지.

뒤늦게 자신의 예측이 틀렸음을 인정한 지금은, 이미 뒤통수가 얼얼한 상태였다. 이기고 나서도 찝찝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간신히 한 세트를 따냈으나 불리한 심리전을 강요받고 있는 건 여전했다. 노르드가 의도한 대로 흘러가는 판이다. 제대로 한 방을 먹이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음엔 저쪽에서 어떤 조합을 들고 나올지. 경우에 따라선 또다시 같은 빌드를 들고 나올 수도 있었다. 성현은 다음 세트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쉬지 않고 머리를 굴렸다. 꼰닢과 의견을 나눠도 명확한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칼고는 다시 한 번 꼰닢에게 방패를 맡기고는 전장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전면전에서 다소 밀리더라도, 전략적 수에 당하지 않겠다는 보험이 담긴 조합이었다. 설령 저쪽에서 뒤늦게 정석적인 조합을 가지고 나오더라도... 자신의 능력으로 비틀어보겠다는 생각을 확고히 하면서.

이어폰을 타고 웅장한 나팔소리가 들려왔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순간이다.

평야를 사이에 두고, 탁 트인 시야로 맞은편을 확인하는 시간. 올라오는 과정에서는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장면이 지금에서는 가장 결정적인 장면으로 느껴졌다.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면서 전방을 주시했다. 상대가 정상적인 범주의 병장기를 들고 있길 바라면서다.

"또 활이다! 제가 앞장 설게요."

붉은빛 감도는 풍경을 뚫고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으면, 큰 방패를 든 꼰닢이 제 앞으로 득달같이 뛰쳐나왔다.

일방적으로 두 게임을 내준 직후 멘탈이 나간 것처럼 말이 없던 그녀는 3세트 승리와 함께 다시 입이 풀린 것 같았다. 기분 전환이 범상치 않을 정도로 빠른 사람이다. 맞은편에서 활로 추측되는 장비를 확인하고 기쁘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는데, 그 안에서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아예 입을 다물고 있는 것보다야 나은 것 같지만... 침착함이 요구되는 지금은 그리 반가운 요소가 아니었다. 그 절반 정도의 텐션이 가장 좋을 텐데, 꼰닢은 좀처럼 그걸 조절하지 못하는 듯했다. 성현은 방패 벽 뒤에 몸을 숨기며 재차 적의 장비를 확인했다. 아까보다 거리가 더 가까워진 탓인지 장비의 상태가 더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잠깐, 잠깐만. 들고 있는 사람이 다르잖아."

칼고가 내뱉은 말이 방패병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꼰닢의 말마따나, 평야 저편에서 둥그런 곡선을 그리며 휘어진 무기는 분명 활이었다. 그러나 그걸 거머쥔 주인이 이전과 달랐다. 험상궂은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리고 이쪽을 주시하던 그 흉악한 궁병은 어디로 갔는지. 이번에 활을 쥔 궁병은 흰 피부에 얄팍한 몸을 곧게 세운... 스벅이었다.

노르드는 거기서 조금 떨어진 측면에서 우뚝 일어났다.

덩치 큰 전사의 전신이 붉은 노을빛을 받고 붉게 일렁거렸다. 광전사는 칼고와 꼰닢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듯, 느긋한 동작으로 등에서부터 길게 늘어진 무장을 천천히 꺼내들었다. 육중한 대검은 저 멀리서도 강렬하게 존재감을 뿜어냈다.

대검을 어깨춤에 걸친 광전사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한다.

궁병을 후열에 두고, 전열을 맡은 한 명이 궁병을 보호하기 위해 앞으로 나서는. 이전과 똑같은 전략이다. 그럼에도 광전사와 마주한 칼고와 꼰닢은 저걸 곧이곧대로 수용할 수 없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분명 공격자의 입장이 되어야 하는 자신들이, 오히려 광전사의 공격을 받아내야 하는 입장으로 돌변한 것 같았다.

성현이 모니터 밖에서 심호흡을 내쉬었다. 분명 원하던 그림이었을 텐데... 왜 이렇게 위축되고 있는 건지.

지금은 마주 소리질러야 할 때였다.

"저, 방패 들고 광전사 상대는 별로 안 해봤어요! 준비하면서 연습한 구도도 아니고­"

"됐어요! 어차피 저건 내가 상대해야 돼. 우리 지금 조합이면 이 대 일로 붙는 것도 별로야. 노르드한텐 제가 마크해서 붙을 테니까 방패 들고 궁병 쪽으로 달려요. 서로 떨어져서 일대일 붙는다고 생각해. 앞으로!"

순간적으로 구도를 그린 칼고가 오더를 내림과 동시에, 방패를 꼭 붙잡은 꼰닢이 앞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붙는다. 맞은편, 정확히 이쪽을 바라보고 달려오는 광전사의 모습이 점차 선명해졌다. 두 명을 상대로 질주하고 있음에도 전혀 망설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흥분과 긴장이 뒤섞였는지 거리가 줄어드는 속도에 비례해서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것도 같았다. 화살이 공기를 가르고 날아드는 소리가 긴박감을 더했다.

자신과 노르드가 맞붙기 시작하면, 오발을 의식한 궁병은 아군 지원을 포기하고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방패병을 견제하는 데 모든 심력을 기울일 터다. 그럼 잠깐이나마 전장 안에서 두 플레이어가 서로 갈라지는 구도가 만들어지겠지. 결국 이건 노르드의 주도 하에 만들어진 일대일 구도나 마찬가지였다.

상대해 주지 않을 것처럼 자신을 조롱하더니, 이런 판을 만들고 자신을 끌어들인다. 그걸 의식하면 휘둘리고 있다는 걸 아는데도 알 수 없는 짜릿함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앞서 일방적으로 패배하면서 쌓였던 울분이 격정으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기필코, 기필코 한 방 먹이겠다는 격한 감정이 치솟아 올랐다.

그래. 결승전에서 활만 쏘고 이기려 든다니, 어불성설이다.

호흡을 뱉을 때마다 노르드와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칼고는, 어느샌가 자신이 방패 벽 뒤에서 뛰쳐나와 광전사의 정면으로 달려들고 있음을 자각했다.

한계까지 차오른 집중력으로 날아드는 화살을 피해내고 광전사에게로 시선을 집중했다. 쿵쿵거리며 얼마 남지 않은 거리를 좁혀오는 발걸음. 금방이라도 앞선 사물을 찢어버릴 것 같은 무거운 대검. 위협적이기 짝이 없는 광경임에도, 그 모습이 왠지 반갑게 느껴졌다. 적어도 멀찍이서 화살만 찍찍 쏘아대는 빌어먹을 활쟁이보다는 훨씬 인간적인 맛이 있었다.

광전사가 대검을 번쩍 들어 올리는 순간. 충돌 지점을 가늠한 칼고가 재빨리 속도를 조절하고는 쌍검의 날을 마주 세웠다. 스릉, 하고 날이 울리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왔다. 두 전사의 그림자가 맞닿는 찰나, 대시를 캔슬하고 잰걸음으로 스텝을 밟은 칼고가 양손에 든 검을 교차해서 휘둘렀다.

세 자루의 검이 날을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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