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화 〉 189 편견은 반전줄 때 효과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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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 축하드려요! 솔직히 이런 식으로 질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당분간은 화살 소리만 들어도 경기 일으킬 것 같아, 진짜. 앞 경기 보면서 계속 언니, 언니 했는데 직접 붙어보니까 말이 아니네요. 다음에 대회 다시 열리면 꼭 같이 팀 해요, 우리. 응? 같은 성별이라고 커플 못할 게 뭐람.
아! 혹시 패션 쪽 관심 있어요? 제가 새로 컨텐츠를 하는데, 거기 저만큼 예쁜 사람 한 명 필요하거든요. 관심 있으면 이 번호로 연락 아, 얘기하고 있잖아요! 잠깐 나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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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선생님. 오늘 고생 많았어요. 덕분에 버스 받고 우승했습니다. 진짜 프로 도전 안 하세요? 까놓고 여자 프로가 아니라 현 프로들이랑 다이다이 쳐도... 아, 예. 제가 다 아쉬워서. 큼, 마지막 인터뷰 웃참하느라 혼났습니다. 칼고님 표정 살벌한 거 봤어요? 뭐 두 분 친한 거 다 아니까 알아서 풀겠죠.
그... 저희 끝나고 팬미팅 있는 거 알고 계시죠? ...네? 그... 그렇죠. 맞죠. 별거 아니죠. 팬미팅 뭐 별거 있습니까? 다 아는 시청자들 와서 깔끔하게 인사하고 사인받고 그러는 거지.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팬미팅 잘 하시고요! 뒤풀이는... 그쵸! 오늘 피곤하시죠! 빡겜을 몇 판씩 했는데 당연히 피곤하실만하죠. 음음, 그럼 뒤풀이는 날 잡아서 다른 날 하는 게 좋겠네요. 제가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 저도 팬... 미팅 하러 가보겠습니다. 정말 고생하셨어요! 예, 더 고생하세요! 네? 아뇨, 그냥 고생했다고 한 거예요. 들어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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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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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자주 보면서 뭔 생각을 하나 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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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됐다. 업보는 다 돌아가는 거잖아.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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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어, 여기서 긴 말 하는 것도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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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보자고. 다음에. 기대해, 큰 거 들어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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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에 몸을 기대면, 털썩 하는 효과음이 들리는 것도 같았다.
이대로 몸을 파묻고 잠들어도 괜찮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기실의 소파는 그만큼 푹신했다. 마침, 몸도 정신도 노곤하게 피로를 호소하고 있지 않은가. 뭔가에 기대 정신줄을 놓기에는 가장 최적인 상태였다. 오늘만큼은 불면증을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막상 이럴 때는 잠에 들기 힘든 상황이라는 게 현실의 각박함이요 삭막함이었다.
의자에 몸을 반쯤 파묻은 상태로 고개를 돌렸다.
"혜진 씨. 괜찮아요?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피곤해 보여도 촬영은 잊지 않는 거구나. 내 편집자는 참으로 프로다웠다.
적막한 대기실. 대회가 진행될 당시의 어수선함이 사라진 대기실은 조용하고 차분한 맛이 있었다. 지금은 나와 주연 둘뿐인 공간이다. 소파에 앉은 내 바로 옆을 차지하고 선 주연은, 자리에 앉지도 않은 채로 서서는 캠코더를 들어 올렸다.
이쯤 되면 어떤 영상이 튀어나올까 호기심이 차오른다. 경기를 치를 때야 잠깐 쉬었다지만, 지금까지 촬영분을 모두 합하면 몇 시간 분량은 나올 것 같은데. 소스가 점차 늘어나니 결과물도 예상하기 힘들었다. 영상을 다 보는 것도 일이지 않을까.
"조금... 피곤하네요. 너무 외부 활동을 많이 했어. 그래도 이제 가벼운 일만 남았으니까... 버틸 수 있어요."
그래, 오늘 하루를 무겁게 만들었던 외부 일정은 이제 거의 다 끝난 셈이다.
인터뷰가 끝난 뒤에도, 우승을 했다는 실감은 별로 없었다. 기쁨으로 가슴이 벅차거나 들떠 오르는 그런 느낌은 받지 못했다. 사실 기쁨이라는 건 여유가 전제된 다음에야 찾아오는 법이었다. 주변에 널린 다른 것들이 시선을 분산시킬 때는, 기쁨을 느낄 겨를조차 없다. 결승전이 끝난 직후 내 상황이 그랬다.
무슨 일인지 관중들은 대다수가 그대로 남아있지, 옆에서는 성현이 계속 매서운 눈초리를 보내온다.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인터뷰를 끝마치고 난 뒤에도 다가오는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가벼운 축하의 말도 건네는 사람이 많으면 감당하기 버거웠다. 아직 남아있던 대회 참가자들, 중계를 맡은 해설진, 뒤에서 경기를 지켜봤다는 대회 스태프들까지.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다가와 한마디씩 건네는 통에 나는 거의 치여 다니는 꼴이었다.
덕분에 최대한 간단히 인사를 주고받았음에도, 대기실에 도착할 무렵 나는 거의 녹초가 된 상태였다.
이 상태로 다시 팬미팅을 위해 나서야 한다는 게 고역이었으나... 그래도 그건 결승전에 이르는 과정에 비하면 턱없이 가벼운 일이었으니. 마지막이라 생각하면 감당할 수 없는 일도 아니었다.
사실은, 피로한 와중에도 이 늦은 시간까지 경기장에 남아 나라는 인간을 기다리고 있을 시청자들이 조금은 궁금했다. 아무튼 나는 지금껏 내 팬이라는 시청자와 얼굴을 맞대고 인사해 본 경험이 없었으니까. 몇 사람이나 모여있을지는 몰라도, 팬과 얼굴을 마주한다는 걸 의식하면 마음이 꽤나 싱숭생숭했다. 어떻게 대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지금쯤이면, 이미 지정된 장소에서 모여있지 않을까 싶었다.
직접 경험해 본 게 개막전 날 GB 게이밍의 팬미팅뿐이라 내 팬미팅이 어떨지를 추측하기는 쉽지 않았다. 거긴 징그러울 정도로 사람이 많은 탓에 줄을 서는 것도 고역이었으니. 일개 스트리머의 팬미팅이라면, 그것보다는 훨씬 정돈된 느낌으로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여유가 있으면 남는 의자 같은 걸 가져다 놔도 좋을 텐데. 공간이야 어차피 차고 넘칠 테니까.
피로 때문인지 뻐근한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주최 측에서 공지한 시간에 따르면, 팬미팅까지는 약 십 분 정도가 남은 상태였다. 사실 팬미팅의 경우 사전에 협의된 사항도 아니었는데, 마지막까지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함인지 아바타 측에서 흔쾌히 장소 제공에 동의했다고 스벅이 그렇게 말했었다.
어찌 됐든 나도 팬미팅을 하게 된 입장에서 모든 세팅을 누군가 도와준다는 점은 굉장히 편리했다. 하기야, 내 손으로 팬미팅 따위를 기획할 일은 어지간하면 존재하지 않을 터다. 장소 섭외부터 시작되는 그 귀찮은 준비 과정을 내가 주도적으로 할 리는 없었으니.
"혜진 씨."
"네?"
시계를 보며 남은 시간을 헤아리고 있으면 돌연 주연이 입을 열었다. 고개를 돌려 주연과 눈을 마주한다. 아직까지 캠코더를 쥐고 있는 주연은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입술을 열었다 닫으며 망설였다. 주저하는 모습이 굉장히 어색했다. 조용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참지 않는 사람일 텐데.
"왜 그래요? 말씀해보세요. 뭐라 안 그럴 테니까."
"아까 전에, 가벼운 일이라고 하신 것 같아서."
주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잠깐 멍청하게 그녀를 쳐다봤다. 가벼운 일... 분명 그랬던 건 같은데. 그게 무슨 문제라고 저런 말을 하는 걸까.
"팬미팅이 혜진 씨가 생각하는 것만큼 작은 일이 아닐 수도 있어요. 알고 계실 줄 알았는데... 미리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캠코더 렌즈와 함께 세 눈동자로 나를 주시하는 주연이 천천히 말했다.
나는, 조금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저런 걸 저렇게 진지하게 말하다니. 가볍다고 말은 했지만 시청자와 만나는 자리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을 좋아한다고 찾아온 팬을 만나는 자리인데, 당연히 중요하겠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로 대하는 정도는 아니어도, 성의 없고 대충대충인 태도로 팬을 대해선 안 된다는... 뭐 그런 당연한 사실이야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었다.
대체 나를 어떻게 보고 저런 말을 하는 건지. 아무래도 내 편집자의 눈에는 내가 그 정도로 어리게 보이는 모양이다. 외관이라는 게 이렇게 사람의 인상을 좌지우지하는 것이다.
"그 정도는 알아요. 팬분들인데 당연히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죠. 저 그렇게 경우 없는 사람 아니에요."
"...네?"
"사람 꺼리는 티 안 내고 잘 할 수 있으니까요. 걱정 안 해도 돼요, 그런 건."
단언하는 내 말에도, 주연은 이해할 수 없는 오묘한 표정을 짓고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아니, 내가 그토록 신용이 없는 걸까. 길지는 않지만 그간 함께 일하면서 괜찮은 신뢰 관계를 쌓았다고 생각했는데.
서운한 티를 애써 지웠다. 아무튼, 믿지 못하면 직접 증명하면 되는 일이었다. 이미 공방 결승전이라는 큰 거사를 치른 다음인데, 걱정할 게 뭐가 있을까. 팬미팅 정도야 웃는 낯짝으로 넘길 수 있는 것이다.
그걸 보면 나에 대한 주연의 믿음도 조금은 커질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렴. 직접 보여주는 것만큼 확실한 일은 없을 테니까.
마음을 다잡으며, 천천히 대기실을 나섰다.
대기실에서 나와 층을 하나 올라간다. 어느덧 해가 떨어진 완연한 저녁이다. 대회를 앞두고 사람이 북적거렸던 낮과는 달리, 늦은 저녁의 e스포츠센터는 꽤나 조용했다.
차분히 가라앉은 복도를 거닐면 잠깐 들떴었던 마음도 금방 진정되는 것 같았다. 문득, 다른 곳에서 팬미팅을 진행하고 있을 참가자들이 궁금해졌다. 스벅은 팬들과 함꼐 또 무슨 컨텐츠를 한다고 했었고... 성현은 아마 정상적인 팬미팅을 시작했겠지. 개인적인 친분이 없는 꼰닢은 어떤 식으로 진행하고 있을지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정상적인 범주는 아닐 것 같은데.
작정하고 생각하면, 일반적인 팬미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아리송했다. 사인을 하고, 악수를 나누고, 대충 인사를 주고받는... 그런 의례적인 모습 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직관 때 조금 더 자세히 주변을 살펴봤을 텐데. 당장 인파 속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아무것도 살펴보지 못한 게 아쉬웠다. 아무튼, 무슨 초청 MC가 있는 것도 아니니 팬미팅의 진행은 온전히 내 몫이 될 게 뻔했다.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멍청히 서있는 꼴은 최악의 경우였다.
생각을 정리하며 걷다 보면 지정된 장소까지는 금방이었다. 경기장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방이다. 이전의 경험을 떠올리면, 내가 GB 게이밍의 사인을 받기 위해 들어갔던 장소와 비슷한 공간일 가능성이 높았다. 구겨 넣으면 백 명도 넘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일종의 강당이라 해야 할까.
주최 측 스태프의 안내에 따라 문 앞까지 도달하면, 문 너머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려왔다. 방음 벽에 막혔는지 먹먹하게 울리는 소리. 소리만으로 규모를 짐작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 볼륨이면 모여든 사람이 적을 것 같지는 않았다. 역시 우승자라는 타이틀은 제법 대단한 영향력을 가진 모양이다. 사람 수십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면... 그건 확실히 팬미팅이라고 부를만하겠지.
기묘한 심정과 함께 기분이 들뜬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없는 것보다야 있는 게 훨씬 낫다는 생각과,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는 불안감이 동시에 피어올랐다. 결승전 이후 사그라들었던 긴장감이 다시금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게 느껴지는데, 가만히 있기가 더 불편했다.
나는 결국 안내해 준 스태프에게 고개를 숙인 다음 곧장 문을 열어젖혔다. 열린 문틈 사이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우와아아!
...
노르드! 노르드! 노르드!
와, 시발 존나
노르드님이 이쪽을 보셨어!
스벅새끼 없으니까 보기좋
누나! 사랑해!
어떤 시커먼새끼가
대박
활짝 열린 문으로, 환호성과 함께 쏟아지는 군중의 웅성거림에 휩쓸리면서.
나는... 반쯤 정신줄을 놓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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