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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화 〉 190 ­ 이건 귀하네요 (190/243)

〈 190화 〉 190 ­ 이건 귀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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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진은 이상할 정도로 자기 평가가 낮았다.

스벅의 방송에서 우연히 출연했던 걸 계기로 시작한 방송. 스트리머로서 성공한 속도가 대단히 빨랐다. 무명 시절을 겪어보지 못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방송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뒤로는 시청자가 없던 적을 찾기 힘든 수준이었다. 이례적인 성장 속도에 자신감을 넘어서 오만해질 만도 할 텐데, 혜진은 스스로의 인기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방송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금방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이 있다. 그녀는 어느샌가 만 명을 넘어선 생방송 시청자들조차 금방 사그라들 거품으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왜 자신이 성공했는지, 어떤 매력이 사람들을 자신의 방송으로 이끌었는지... 그런 것보다 운 좋게 얻어걸린 인기가 언제 사그라들지를 더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거품이 과하게 쌓인 걸 걱정하면서.

그래, 굳이 정리하면 혜진은 비관적이었다.

주연에겐 그게 굉장히 의외였다. 실패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외형은 물론이고, 방송에서 보여주는 모습에서도 그런 인상을 받지는 못했던 까닭이다. 자신의 눈에는 누구보다 별처럼 빛나는 사람인데, 왜 스스로는 그걸 모르고 있는 건지.

이미 콩깍지가 단단히 쓰인 주연의 눈에는 그 조차 매력으로 다가왔다. 자신처럼 뭔가 삐뚤어진 혜진의 시각도, 다른 시청자들은 모르는 혜진의 내면을 자신만이 깊게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러나 한편으로는 항상 불안감을 느끼고 있던 것이다. 이상할 정도로 무방비하고, 자신이 가진 영향력을 터무니없이 낮게 생각하고 있는 그녀가... 언젠가 한 번 큰 사고를 치지는 않을까 하고. 그녀의 둘도 없는 협력자가 되고 난 이후로 늘 덩치를 키웠던 걱정이다.

깨달음을 위해선 큰 충격이 필요하다고 했나. 인식을 바꿀 정도로 커다란 사건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스벅이라는 몹쓸 인간의 손에서 시작됐지만, 주연은 이번 팬미팅이 혜진의 인식을 바꾸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걱정에서 비롯된 자신의 언질을 당연하다는 듯 흘려버리는 혜진을 보면, 아무튼 어떤 조치가 필요하긴 했던 것이다. 그게 조금 강렬한 극약처방이 될지라도.

"언니­! 사랑해요!"

"실물 쩐다..."

"아, 쫌 고개 좀 숙여봐요. 안 보이잖아."

"선생님 앞으로 좀 나와주세요!"

실내는 북적거렸다. 주연이 선 바깥까지 그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환호성과 웅성거림이 혼재된 공간은 소음만으로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문을 열기 전의 잠잠함을 생각하면, 지금 상황을 누가 야기했는지는 대단히 명확했다. 문을 열고 나타난 혜진의 존재가 도화선으로 작용했을 터다.

강당으로 한 발짝 내디딘 혜진으로부터 몇 걸음 떨어진 뒤쪽이었다. 주연은 캠코더를 거머쥐고는 현장을 가볍게 훑어봤다.

넓은 강당에 사람이 가득했다. 행사에 사용되는 공간일까. 강당은 거대한 대형 스크린이 설치된 전면의 무대와 그걸 마주 보는 좌석이 죽 나열된 형태의 구조였다. 수십 개는 가뿐히 넘어설 것 같은 좌석은 지금 단 하나의 빈자리도 없이 가득 차 있었다.

자리가 부족할 지경이다. 미처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들이 늘어선 좌석 옆 빈 공간을 차지하고 섰다. 대회를 위해 가져왔는지 노르드를 응원하는 문구가 가득 적힌 응원 피켓이 여기저기서 존재감을 내비쳤다.

한 걸음 물러나서 지켜보던 주연조차 몸을 움찔거릴 만큼 사람이 많았다. 잔뜩 불타오르던 커뮤니티를 볼 때부터 뭔가 심상치 않았건만, 스벅이 대체 뭐라고 어그로를 끌었는지. 우려는 그대로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이건 혜진이 별생각 없이 말했던 것처럼, 결코 가벼운 팬미팅 따위가 아니었다. 사람이 이 정도로 모였으면 사인만 하고 가는 것도 부담스러운 일일 텐데.

혜진은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지.

군중을 훑던 캠코더가 다시금 혜진에게로 정착했다. 그녀의 뒤에 있는 탓에 얼굴 표정을 볼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문을 열고 들어간 그 자리에서 가만히 멈춰 서있는 혜진을 보면 그녀가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대회 결승전을 치르는 과정까지 단 한 번도 긴장한 모습을 보여준 적 없던 그녀도, 자신의 팬이라는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선 모습을 보면 당황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어질 혜진의 반응이 더욱 궁금했다.

혜진은 잠깐 동안 그렇게 문 앞에 가만히 서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쏟아졌던 환호도 혜진의 무반응이 이어짐에 따라 조금씩 잦아들었다. 시끄러운 함성 소리가 사라지고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강당에 모인 군중들 전부가 혜진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 대상이 자신이 아니었음에도 주연은 부담을 느꼈다.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는 혜진이 걱정스러워질 즈음이다.

그녀가 천천히 무대 중앙으로 움직였다. 지나가는 도중 스태프가 건넨 마이크를 받아 드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성큼성큼 발을 옮기는데, 중심부로 가까워질수록 웅성거리던 소리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혜진을 따라 강당에 들어선 주연이 황급히 촬영에 적합한 장소를 물색했다.

주연이 무대 측면에 자리를 잡고 캠코더를 조정할 무렵. 때마침 무대 중앙에 도착한 혜진이 마이크를 들어 올렸다.

"아­... 안녕하세요."

인사 한마디에 또다시 환호성이 일었다.

내용을 헤아리기 힘든 환호 사이로, 채팅창에서나 볼 법한 말소리를 잡아챈 주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에게 모든 관심이 쏟아지고 있는 지금도 혜진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조명 때문인지 아까보다 더 창백하게 느껴지는 얼굴색 정도가 다른 차이일까.

카메라 렌즈가 혜진을 클로즈업했다. 이번엔 아까보다 환호성이 더 빨리 잦아들었다.

"많이도 오셨네요."

내뱉는 한마디가 짧았다. 멘트를 주고받을 사람도 없이, 무대에는 혜진 한 명뿐이었다. 자리한 모두가 그녀의 입이 열리기만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다. 캠코더 화면 속 확대되어 나타나는 혜진의 눈동자가 왠지 초점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아, 아. 잠시만 조용히 해주세요. 제가... 정리가 잘 안돼서. 음. 다들 제... 노르드 팬미팅이라고 알고 오신 거 맞나요?"

잠깐의 정적. 곧이어 웅성거림이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동의를 표하는 목소리들 사이사이에 웃음소리가 섞여들었다. 혜진의 말을 농담이라고 생각했겠지. 저게 진심이라는 걸 알고 있는 주연으로서는 헛웃음이 흘러나오는 광경이었다.

연신 셔츠의 밑단을 잡고 문지르는 혜진의 손가락에서 초조함이 묻어 나오는 것도 같았다.

주저하던 그녀가 마이크를 다시 들어 올렸다.

"이렇게 많이 오실 줄은 몰라서... 원래는 사인이라도 해드리려고 했는데.

...뭘 해야 할까요?"

"악수! 악수해 준다고 들었어요!""스벅이 말했­""노래!""우승 기념으로­""예쁘다!""그럼 사인 못 받는 거야?"

진행자가 없는 무대, 정리가 될 리 없는 현장이다. 지천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리는 목소리들 사이에서 제대로 된 정보를 끄집어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말 한마디로 혼란을 야기한 혜진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이런 곳에서 무슨 생각에라도 잠겼는지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이었다.

그걸 캠코더로 담아내던 주연은, 이 그림이 노르드의 방송과 흡사하다고 생각했다. 아무 말이나 주렁주렁 뱉어대는 모습이 평소 방송에서 채팅창을 밀어올리는 시청자들의 도배와 크게 다를 바 없다고 느낀 탓이다. 채팅창의 혼란을 만들어놓고는,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것처럼 멀뚱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조차 방송과 비슷했다. 여기에 모니터만 있었다면 완벽했을 텐데.

잠깐 소란스러운 현장을 방치하던 혜진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진정하세요. 그, 너무 정신이 없어서 한 분씩 지목하는 게 좋겠네요. 혹시 원하는 거 있으시면... 제가 최선을 다해 들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의견 있으신 분 손 들어주세요."

소통이라니. 이건 확실히 방송과는 다르다.

죽 늘어선 좌석 곳곳에서 번쩍하고 팔이 올라왔다. 혜진이 한 명을 지목하겠다 선언한 이후로 강당 안의 소음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하늘로 솟은 팔을 가만히 지켜보던 혜진이 손을 들어 강당 한쪽을 지목했다.

"베이지색 니트 입으신 분... 네. 맞습니다. 말씀해 주세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당첨 여부를 확인하던 남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게 아무렇지도 않은지, 남성은 큰 목소리로 우렁차게 소리쳤다.

"노르드님한테 악수 받을 수 있다고 듣고 왔습니다! 선생님 가까이서 영접하고 악수하게 해주세요!"

군중들 사이로 웃음과 함께 야유가 흘러나왔다. 캠코더의 배터리 잔량을 확인하던 주연이 속으로 함께 야유를 퍼부었다. 어딜, 그런 말도 안 되는 포상을 누리려고.

정작 혜진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남성의 제안을 들은 그녀는, 별다른 반응 없이 그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는 태연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거면 되나요? 그럼 이쪽으로 나오세요."

지금, 당장?

가볍게 내뱉은 말이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곳곳에서 가지각색의 반응이 튀어나오는 가운데, 자리에서 일어선 남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는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그만큼 혜진의 허가가 뜻밖이었던 탓이다. 아니, 그런 부탁을 하기는 했지만... 무대 가운데로 튀어나와 악수를 받을 거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 아닌가.

어안이 벙벙한 듯 뒷덜미 긁적이던 그는 혜진이 재차 말을 하고 나서야 헐레벌떡 앞으로 뛰쳐나갔다.

남자는 말 그대로 후다닥 뛰어나왔다. 무대 위, 혜진의 바로 앞이었다. 급하게 뛰어나온 남자가 그대로 혜진과 얼굴을 마주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남자의 표정이 눈에 띄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당혹감, 부끄러움, 기쁨, 설렘... 편집자의 소명의식으로 꿋꿋이 카메라를 움직이던 주연이 낮은 목소리로 욕설을 읊조렸다. 저런 멍청한 얼굴을 화면에 담고 싶지 않았다.

악수를 하기 직전. 무슨 일인지 강당에는 정적이 깔렸다. 모처럼 조용한 실내에서 누군가는 설렘에, 누군가는 분노와 역겨움으로 몸을 떨었다. 천천히 내미는 혜진의 손을 떨림 가득한 남자의 손이 붙잡았다.

...손을 잡고 있는 시간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부... 부드럽네요."

저 개새끼가, 근데.

더는 울분을 참지 못한 주연이 무대 위로 크게 손짓했다. 제발 혜진이 알아보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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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 감사합니다, 선생님. 진짜... 진짜 손 안 씻을게요. 구독 종신 연장하겠습니다. 우, 우승 축하드리고요!"

"아... 고마워요. 횐님도 건승하세요."

"예, 예?"

됐으니까 내려가라고.

흘기듯 고개를 돌리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청자 A는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고는 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악수를 요청한 시청자. 느닷없이 판이 깔린 상황에서, 졸지에 인연에도 없는 노래나 춤을 강요당할까 겁먹었던 내게는 굉장히 편안한 요청이었다. 그깟 악수라면 아무에게나 해줄 수 있었으니까.

자기 자리로 향하는 그의 뒤로 왠지 모를 야유가 쏟아져내렸다. 나야 좋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별 대수롭지 않은 일에 시간을 소비했으니 마땅한 업보일지도 모르겠다. 이 근본 없는 팬미팅에도 시간제한은 있을 테니까.

그 끝이 언제일지 모르겠다는 게 지금 내 인생의 가장 큰 문제였다. 준비도 없이 수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건 정말 나 같은 인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나를 모니터 안으로 보내줘.

슬쩍, 사람이 가득한 강당 안을 바라본다. 대충 훑어봐도 모여있는 사람들 전부가 내게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나를 향한 눈동자의 개수만큼 내 몸뚱이도 무거워지는 기분이다. 뭐라 해석하기 힘든 웅성거림보다는 결승전이 끝나고 들었던 커다란 박수와 함성이 훨씬 편안하게 느껴지지 않을지. 아무튼 그건 효과음 따위로 치부할 수 있었는데.

다시 멍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있으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다시 곳곳에서 팔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날 쏘아보는 눈동자가 모두 과하게 번쩍이고 있는 느낌이다. 대체 뭘 원하는 걸까. 여전히 온갖 부담스러운 것들이 머릿속을 붕붕 떠다녔다. 이걸 원하면, 저걸 원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들. 강당 안이 가득 찼다는 걸 실감한 순간 기쁨이 아니라 걱정부터 느껴버린 게 내 슬픈 천성이었다. 사실 지금도 당장 도망치고 싶은 것이다.

무대 우측. 진작 입구와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은 주연은 지금도 열심히 캠코더에 나를 담고 있었다. 방금까지 열심히 손을 흔들어대더구만. 다른 곳으로 시야를 넓힐 겨를이 없던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도 잘 몰랐다. 아마 촬영 각도가 안 나와서 그랬던 것 같은데... 악수를 하던 도중에 방향을 틀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건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더는 시간을 끌 수도 없어서, 나는 천천히 손을 들고는 팔을 높이 들어 올린 사람 하나를 집어냈다. 아이디어가 점점 늘어나는지, 이전보다 손을 든 사람이 더 많아진 기분이다.

이대로 가면 정말 끝이 없지 않나. 나는 이 팬미팅을 언제쯤 끝낼 수 있을까. 그때까지 대체 또 얼마나 많은 요구 사항을 마주해야 할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더없이 무거웠다. 사인... 차라리 사인회가 만만할 거 같은데.

자리에서 번쩍 일어난 시청자를 보고, 천천히 귀를 기울였다.

"저도 악수해 주세요!"

......

악수 매드 무비 촬영인가?

나는 새어 나오는 의아함을 숨기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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