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94화 〉 194 ­ 비밀은 빨리 퍼진다 (194/243)

〈 194화 〉 194 ­ 비밀은 빨리 퍼진다

* * *

*****

[커플 대항전 Vlog2]

영상은 시작과 동시에 환호성이 울려 퍼지는 경기장 관중석을 담아낸다. 천천히 관중석을 훑은 카메라가 스포트라이트가 향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게임이 끝난 직후. 인터뷰를 위해 경기장 중앙에 나온 혜진이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그녀가 마이크에 입을 가져다 댐과 동시에 다시 한번 함성이 들려왔다. 전보다 소리가 컸다. 경기장이 울릴 듯 커다란 함성 소리를 듣고는 잠깐 주저한 혜진이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대기실로 들어온 혜진의 얼굴을 카메라가 클로즈업한다. 첫 경기에서 승리를 하고 돌아온 직후임에도 혜진의 얼굴에는 별로 기쁜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소 창백한 인상의 얼굴이 카메라와 마주한다. 웅성거리는 주변 소리가 점차 사그라들면서 자막 한 줄이 올라왔다.

'첫 경기 승리에 대한 소감 한마디.'

고개를 갸웃하던 혜진이 대답했다.

"아... 경기장이 크더라고요. 관중들도 많고..."

멍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혜진. 말소리가 늘어졌다. 생각을 정리하는지 좀처럼 말이 이어지지 않는 와중에, 배후에서 스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승리 소감을 물어보는데 누가 대답을 그렇게 해요? 경기장 크기는 무슨. 아까부터 선생님 인터뷰 진짜...

그거 엘튜브 채널에 올리려고 찍는 거잖아요. 그럼 솔직하고 패기 넘치는 대답을 해줘야죠. 뭐, 상대도 잘했는데 내가 미친 플레이를 해서 이길 수 있었다. 니들도 이렇게 플레이하고 싶으면 노르드 채널 구독과 좋아요 박고 열심히 공부해라... 이 정도 멘트는 쳐줘야지."

혜진의 얼굴에 고정된 화면. 다소 큰 목소리로 말했음에도 카메라는 스벅을 포착하지 않았다. 스벅 쪽을 바라보는지 고개를 측면으로 돌린 혜진은, 스벅이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다시 정면을 바라보고는 말했다. 이전보다 훨씬 명료하고 선명한 목소리였다.

"스벅님이 생각했던 것보다 쓸모없어서 힘든 경기였네요. 다음엔 파피루스님이나 우나밍님처럼 괜찮은 팀원을 만나서 쾌적한 대회를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화면 바깥에서 뭐라 소리치는 스벅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페이드아웃. 점차 어두워진 화면이 검게 사라졌다.

**

1, 2, 3. 커플 대항전 결승전에서 펼쳐진 게임들이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페이지 넘기듯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경기 스코어를 알리는 카운트가 점차 선명해졌다. 이윽고, 부스 안에 있는 스벅이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린다. 그 옆자리에 위치한 혜진은 힘이 빠진 듯 의자에 등을 기댔다. 승리가 확정된 순간의 모습이다. 관중들이 내지르는 함성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

트로피를 든 혜진에게 여러 사람들이 축하의 말을 건넨다. 과장된 제스처로 대화를 주고받는 스벅과 침착하게 고개를 숙이는 혜진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꼰닢, 칼고, 대회 중계진 등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

침묵에 잠긴 대기실. 트로피가 테이블 위에서 존재감을 내비쳤다. 테이블 뒤에 위치한 소파, 혜진이 반쯤 눕는 것처럼 소파에 전신을 기대고 있었다. 카메라가 높은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동자를 클로즈업한다. 갸름한 눈매에 내려앉은 음영이 이전보다 짙어 보였다.

'많이 피곤해 보인다. 우승을 했는데 기쁘지 않은지.'

카메라를 돌아보는 눈. 드러누운 자세를 바꾸지 않은 탓에 여전히 고개를 치켜든 상태였다. 억지로 카메라를 보느라 내리깔린 눈이 마치 누군가를 깔아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제가 이런 걸 실감하는 게 조금 늦어서. 지금은 피곤한 게 먼저네요."

'평소 생방송 시청자 반응을 봐도 감정 표현이 적다는 말이 많다. 감정이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건 타고난 성격인지?'

불쑥. 누워있다가 벌떡 상체를 일으킨 혜진이 똑바로 카메라를 쳐다봤다. 미간을 찌푸리고 카메라를 바라보는 상태로 묘한 정적이 흐른다. 잠깐 기묘한 신경전을 이어가던 혜진이 갑자기 양손 검지로 입꼬리를 밀어올렸다. 억지로 틀어올린 입꼬리가 일그러진 웃음을 연출했다.

"저는 감정 표현이 풍부한 사람이에요."

카메라가 고개를 젓는 것처럼 좌우로 흔들렸다. 혜진이 입꼬리를 고정하던 검지를 내렸다. 금방 차가운 인상의 무표정한 얼굴이 돌아왔다. 힘 풀린 눈꺼풀에서 나른함이 묻어 나온다. 한쪽 손으로 얼굴을 어루만지던 그녀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원래는 이렇지 않았는데. 영혼 탈부착 과정에서 오류가 생겼나 봐요."

'무슨 소린지.'

혜진은 대답하지 않고 다시 소파에 털썩 쓰러졌다. 정적. 눈을 감은 혜진은 카메라가 조금씩 다가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바깥에서 미세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

와아아아­!

빛이 번지듯 밝아지는 화면. 가까이에 위치한 혜진의 뒷모습 너머로 강당을 가득 채운 군중들이 드러났다. 노르드의 이름이 적힌 형형색색의 피켓이 여기저기에서 흔들렸다. 환호성 사이로 노르드의 이름을 연호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얼어붙은 것처럼 정지한 혜진의 뒷모습이 인상적이다.

*

연단 중심에 선 혜진. 자리한 군중들의 이목이 그녀에게 집중된다. 무대에 내리쬐는 조명 빛을 받은 혜진은 파리할 정도로 창백해 보였다. 멀찍이 떨어진 탓에 그녀의 가녀린 신체가 온전히 드러났다. 마이크를 쥐고 서있는 자세가 곧았다.

"악수... 다들 왜 그렇게 악수를 원하시는지... 으음. 이렇게 하면 답도 없겠네요. 악수하실 분들은 무대 앞쪽으로 나와주실래요? 시간 때문에 사인은 못해드려도 악수 정도야 가능할 것 같은데­"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이 속출해 강당 안이 한순간에 어수선해졌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강당을 울린다.

잠깐 마이크를 쥔 손을 내린 혜진이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카메라도 올라간다. 여전히 조명이 밝았다.

*

"뭐,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연단 아래로 길게 줄이 늘어섰다. 혜진의 앞에 멈춰 선 남성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화면에 필터를 넣었는지 남성의 모습은 흐릿했다.

"네. 말씀하세요."

"그, 방송 너무 잘 보고 있는데요. 방송에서 말했던 게 너, 너무 맘에 걸려서요. 선생님 남자친구 있다고 하셨잖아요."

"네? 아, 남자친구."

"어, 장... 장난삼아 말씀하신 거잖아요, 그거. 그, 진짜 있는지가 궁금해서... 이상한 의미가 아니라요."

강당은 여전히 어수선한 가운데 혜진이 있는 연단 위로 묘한 기류가 흘렀다. 어영부영 말을 마친 남성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움찔거렸다.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혜진이 한쪽 손으로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저 여자 좋아해요."

정적.

순간 화면이 크게 휘청였다. 어수선하게 움직이던 남자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조용히 내리깔린 침묵이 숨 막혔다.

"아... 농담이었는데, 반응이 좀 그렇네요. 남자친구 없으니까 손 주세요. 뒷 분이 기다리느라 화나신 거 같은데."

여전히 조용한 가운데, 혜진만 태연히 입을 열었다. 클로즈업된 혜진의 얼굴은 여전히 웃는 기색이 없었다.

한동안 집요하게 혜진을 쫓던 카메라가 다시금 정상적인 구도로 돌아왔다. 길게 나열된 줄. 이내 영상이 빨리 감기를 한 듯 속도를 높였다.

**

한결 어두워진 화면. 조명이 없는 바깥이다. 뒷배경으로 자리한 e스포츠센터에서 흘러나온 빛이 조명을 대신했다. 옅은 빛을 받고 선 혜진의 곁으로 바람이 불어왔다. 어둠에 녹아든 흑발이 바람결에 따라 흩날렸다.

'예정에 없던 팬미팅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네. 문 열고 들어갈 때...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더라고요. 머리가 하얘져서. 어떻게 말하고 행동했는지도 가물가물해."

'팬들이 많이 와줬는데도 기뻐하지는 않는 것 같다.'

입을 다문 혜진이 카메라가 있는 쪽을 바라본다. 엇나가듯 사선을 그은 눈썹이 그녀의 감정을 대신 표현했다.

"너무... 놀리지 마세요. 그런 거 못하는 거 다 알잖아요."

화면이 잘게 흔들린다. 혜진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됐고, 이제 끝 아니에요? 오늘 하루 종일 찍었는데. 뭘 더 보여주겠다고... 이쯤 되면 사람들도 물려서 다 뱉었을걸요. 싱거워서 나간 사람이 반이고, 물려서 뱉은 사람이 나머지 반이겠네. 괜히 찍은 거 아닌가."

화면 가운데 크게 나타난 물음표가 대답을 대신했다.

여전히 잘게 흔들리는 화면. 완전히 카메라에 다가선 혜진이 렌즈 쪽으로 얼굴을 가져다 댔다. 흐릿한 빛 때문에 윤곽만 드러난 얼굴은 그녀가 가까워질수록 흐릿해졌다.

"자, 이제 방송 끝. 방종입니다."

어두운 화면과는 달리 혜진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훨씬 선명했다.

*****

.

.

.

"...하."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종료된 영상이 검은 화면으로 모니터를 가득 채운 상태였다.

성현은 그제서야 마우스를 움직였다.

새로고침 한번. 드르륵, 거리는 소리와 함께 스크롤이 내려간다. 업로드되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벌써 댓글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 영상이 십만 조회수를 넘기는 데에는 과연 몇 시간이나 필요할까. 잠깐 이 영상이 올라오기 전, 며칠 전에 올라온 첫 번째 작품을 떠올린 성현이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의 파급력을 생각하면,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목표치가 달성될지도 몰랐다. 그 이상의 예측은 의미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아무튼... 커다란 파급력을 가진 영상인 건 확실하다. 그럴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도.

성현의 눈이 댓글을 읽어내렸다.

[이걸로 끝??? 제발 하루에 한편씩 찍어내!!! 이대로 못잃어 나 죽어 진짜]

.

[23:14 여기 순간 사람들 다 멈칫한거 진짜ㅋㅋㅋㅋㅋㅋ 아니 농담을 누가 그렇게해... 언니 저 사실이라 믿고 입덕해도될까요...?]

.

[외모랑 성격 반전매력 ㄷ 팬미팅때 잘보면 얼어서 긴장한거보임ㅋㅋ 아 너무좋다]

.

[마지막에 방종선언하는거 한시간재생 만들어주세요]

.

[입꼬리 올리는거 미쳤어 움짤 ㅈㄴ 돌아다니겠다..]

.

[정보)이 사람은 캠방을 할 때 웃은 적이 없다. 핫클립 엘튜브짜투리 아무리찾아도 웃는얼굴이 안나옴. 언제 웃참챌린지같은거 안하나]

.

[편집자존나부럽네ㅅㅂ나도 노르드편집자하고싶어]

.

.

알만한 반응들이다.

무대의 뒤쪽을 훔쳐보는 느낌이 드는 영상이다. 지금껏 노르드의 방송에서 드러난 혜진의 아주 국소적인 요소들을 넘어서, 드러나지 않았던 혜진의 본모습을 보여주는 영상.

신비주의로 가득한 베일을 벗기고 그 내용물을 훔쳐보는 순간은 얼마나 짜릿한가. 거기다 혜진이 숨겨둔 내용물은 그 속도 범상치 않았다. 겉만 번드르르한 개살구가 아니라, 알맹이까지 꽉 들어찬 무언가. 빠져들지 않고는 못 배기리라.

지금 노르드의 채널에 올라온 영상은, 남들보다 혜진을 훨씬 더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성현으로서도 넋을 놓고 보게 되는 영상이었다.

영상에서 드러났던 것처럼, 혜진은 겉으로 감정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정상과 비정상의 선을 왔다 갔다 하는 사고방식도 그랬다. 그녀는 몇 번 만나고 교류한 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성현이 그녀와 꽤나 친해진 지금도, 만날 때마다 새로운 측면들을 발견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결국, 그도 혜진이 매력적이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가끔 터무니없는 짓거리를 저지르더라도 말이다.

띠링­

때마침 날아온 메시지에 성현이 혀를 찼다.

Nord:아 이게 안되네

앞서 나눈 대화를 생각하면, 맥락상 이해하지 못할 내용의 문자는 아니었다. 갑자기 면허를 딴다고 하더니. 개소리는 정도껏 하라고 대답한 자신의 답변에 면허시험장으로 추정된 곳의 사진을 보내온 혜진이었다. 면허를 일주일 컷 내겠다는,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함께였다. 지금 보내온 메시지도 아마 그 헛소리의 연장선이리라.

Nord:도로주행 빈자리가 없어서 시험을 못 본데요 :(

도로주행.

잠깐 뇌리에 면허 취득과정을 떠올린 성현의 머리가 작동을 멈췄다. 분명, 그제인가 필기시험에 대해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성현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칼고:님 음주운전으로 면허 정지됐었죠

Nord:??? 뭔 음해야 이건

〈 194화 〉 194 ­ 비밀은 빨리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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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플 대항전 Vlog2]

영상은 시작과 동시에 환호성이 울려 퍼지는 경기장 관중석을 담아낸다. 천천히 관중석을 훑은 카메라가 스포트라이트가 향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게임이 끝난 직후. 인터뷰를 위해 경기장 중앙에 나온 혜진이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그녀가 마이크에 입을 가져다 댐과 동시에 다시 한번 함성이 들려왔다. 전보다 소리가 컸다. 경기장이 울릴 듯 커다란 함성 소리를 듣고는 잠깐 주저한 혜진이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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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실로 들어온 혜진의 얼굴을 카메라가 클로즈업한다. 첫 경기에서 승리를 하고 돌아온 직후임에도 혜진의 얼굴에는 별로 기쁜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소 창백한 인상의 얼굴이 카메라와 마주한다. 웅성거리는 주변 소리가 점차 사그라들면서 자막 한 줄이 올라왔다.

'첫 경기 승리에 대한 소감 한마디.'

고개를 갸웃하던 혜진이 대답했다.

"아... 경기장이 크더라고요. 관중들도 많고..."

멍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혜진. 말소리가 늘어졌다. 생각을 정리하는지 좀처럼 말이 이어지지 않는 와중에, 배후에서 스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승리 소감을 물어보는데 누가 대답을 그렇게 해요? 경기장 크기는 무슨. 아까부터 선생님 인터뷰 진짜...

그거 엘튜브 채널에 올리려고 찍는 거잖아요. 그럼 솔직하고 패기 넘치는 대답을 해줘야죠. 뭐, 상대도 잘했는데 내가 미친 플레이를 해서 이길 수 있었다. 니들도 이렇게 플레이하고 싶으면 노르드 채널 구독과 좋아요 박고 열심히 공부해라... 이 정도 멘트는 쳐줘야지."

혜진의 얼굴에 고정된 화면. 다소 큰 목소리로 말했음에도 카메라는 스벅을 포착하지 않았다. 스벅 쪽을 바라보는지 고개를 측면으로 돌린 혜진은, 스벅이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다시 정면을 바라보고는 말했다. 이전보다 훨씬 명료하고 선명한 목소리였다.

"스벅님이 생각했던 것보다 쓸모없어서 힘든 경기였네요. 다음엔 파피루스님이나 우나밍님처럼 괜찮은 팀원을 만나서 쾌적한 대회를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화면 바깥에서 뭐라 소리치는 스벅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페이드아웃. 점차 어두워진 화면이 검게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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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3. 커플 대항전 결승전에서 펼쳐진 게임들이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페이지 넘기듯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경기 스코어를 알리는 카운트가 점차 선명해졌다. 이윽고, 부스 안에 있는 스벅이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린다. 그 옆자리에 위치한 혜진은 힘이 빠진 듯 의자에 등을 기댔다. 승리가 확정된 순간의 모습이다. 관중들이 내지르는 함성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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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피를 든 혜진에게 여러 사람들이 축하의 말을 건넨다. 과장된 제스처로 대화를 주고받는 스벅과 침착하게 고개를 숙이는 혜진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꼰닢, 칼고, 대회 중계진 등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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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에 잠긴 대기실. 트로피가 테이블 위에서 존재감을 내비쳤다. 테이블 뒤에 위치한 소파, 혜진이 반쯤 눕는 것처럼 소파에 전신을 기대고 있었다. 카메라가 높은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동자를 클로즈업한다. 갸름한 눈매에 내려앉은 음영이 이전보다 짙어 보였다.

'많이 피곤해 보인다. 우승을 했는데 기쁘지 않은지.'

카메라를 돌아보는 눈. 드러누운 자세를 바꾸지 않은 탓에 여전히 고개를 치켜든 상태였다. 억지로 카메라를 보느라 내리깔린 눈이 마치 누군가를 깔아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제가 이런 걸 실감하는 게 조금 늦어서. 지금은 피곤한 게 먼저네요."

'평소 생방송 시청자 반응을 봐도 감정 표현이 적다는 말이 많다. 감정이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건 타고난 성격인지?'

불쑥. 누워있다가 벌떡 상체를 일으킨 혜진이 똑바로 카메라를 쳐다봤다. 미간을 찌푸리고 카메라를 바라보는 상태로 묘한 정적이 흐른다. 잠깐 기묘한 신경전을 이어가던 혜진이 갑자기 양손 검지로 입꼬리를 밀어올렸다. 억지로 틀어올린 입꼬리가 일그러진 웃음을 연출했다.

"저는 감정 표현이 풍부한 사람이에요."

카메라가 고개를 젓는 것처럼 좌우로 흔들렸다. 혜진이 입꼬리를 고정하던 검지를 내렸다. 금방 차가운 인상의 무표정한 얼굴이 돌아왔다. 힘 풀린 눈꺼풀에서 나른함이 묻어 나온다. 한쪽 손으로 얼굴을 어루만지던 그녀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원래는 이렇지 않았는데. 영혼 탈부착 과정에서 오류가 생겼나 봐요."

'무슨 소린지.'

혜진은 대답하지 않고 다시 소파에 털썩 쓰러졌다. 정적. 눈을 감은 혜진은 카메라가 조금씩 다가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바깥에서 미세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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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아아­!

빛이 번지듯 밝아지는 화면. 가까이에 위치한 혜진의 뒷모습 너머로 강당을 가득 채운 군중들이 드러났다. 노르드의 이름이 적힌 형형색색의 피켓이 여기저기에서 흔들렸다. 환호성 사이로 노르드의 이름을 연호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얼어붙은 것처럼 정지한 혜진의 뒷모습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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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단 중심에 선 혜진. 자리한 군중들의 이목이 그녀에게 집중된다. 무대에 내리쬐는 조명 빛을 받은 혜진은 파리할 정도로 창백해 보였다. 멀찍이 떨어진 탓에 그녀의 가녀린 신체가 온전히 드러났다. 마이크를 쥐고 서있는 자세가 곧았다.

"악수... 다들 왜 그렇게 악수를 원하시는지... 으음. 이렇게 하면 답도 없겠네요. 악수하실 분들은 무대 앞쪽으로 나와주실래요? 시간 때문에 사인은 못해드려도 악수 정도야 가능할 것 같은데­"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이 속출해 강당 안이 한순간에 어수선해졌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강당을 울린다.

잠깐 마이크를 쥔 손을 내린 혜진이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카메라도 올라간다. 여전히 조명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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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연단 아래로 길게 줄이 늘어섰다. 혜진의 앞에 멈춰 선 남성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화면에 필터를 넣었는지 남성의 모습은 흐릿했다.

"네. 말씀하세요."

"그, 방송 너무 잘 보고 있는데요. 방송에서 말했던 게 너, 너무 맘에 걸려서요. 선생님 남자친구 있다고 하셨잖아요."

"네? 아, 남자친구."

"어, 장... 장난삼아 말씀하신 거잖아요, 그거. 그, 진짜 있는지가 궁금해서... 이상한 의미가 아니라요."

강당은 여전히 어수선한 가운데 혜진이 있는 연단 위로 묘한 기류가 흘렀다. 어영부영 말을 마친 남성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움찔거렸다.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혜진이 한쪽 손으로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저 여자 좋아해요."

정적.

순간 화면이 크게 휘청였다. 어수선하게 움직이던 남자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조용히 내리깔린 침묵이 숨 막혔다.

"아... 농담이었는데, 반응이 좀 그렇네요. 남자친구 없으니까 손 주세요. 뒷 분이 기다리느라 화나신 거 같은데."

여전히 조용한 가운데, 혜진만 태연히 입을 열었다. 클로즈업된 혜진의 얼굴은 여전히 웃는 기색이 없었다.

한동안 집요하게 혜진을 쫓던 카메라가 다시금 정상적인 구도로 돌아왔다. 길게 나열된 줄. 이내 영상이 빨리 감기를 한 듯 속도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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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결 어두워진 화면. 조명이 없는 바깥이다. 뒷배경으로 자리한 e스포츠센터에서 흘러나온 빛이 조명을 대신했다. 옅은 빛을 받고 선 혜진의 곁으로 바람이 불어왔다. 어둠에 녹아든 흑발이 바람결에 따라 흩날렸다.

'예정에 없던 팬미팅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네. 문 열고 들어갈 때...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더라고요. 머리가 하얘져서. 어떻게 말하고 행동했는지도 가물가물해."

'팬들이 많이 와줬는데도 기뻐하지는 않는 것 같다.'

입을 다문 혜진이 카메라가 있는 쪽을 바라본다. 엇나가듯 사선을 그은 눈썹이 그녀의 감정을 대신 표현했다.

"너무... 놀리지 마세요. 그런 거 못하는 거 다 알잖아요."

화면이 잘게 흔들린다. 혜진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됐고, 이제 끝 아니에요? 오늘 하루 종일 찍었는데. 뭘 더 보여주겠다고... 이쯤 되면 사람들도 물려서 다 뱉었을걸요. 싱거워서 나간 사람이 반이고, 물려서 뱉은 사람이 나머지 반이겠네. 괜히 찍은 거 아닌가."

화면 가운데 크게 나타난 물음표가 대답을 대신했다.

여전히 잘게 흔들리는 화면. 완전히 카메라에 다가선 혜진이 렌즈 쪽으로 얼굴을 가져다 댔다. 흐릿한 빛 때문에 윤곽만 드러난 얼굴은 그녀가 가까워질수록 흐릿해졌다.

"자, 이제 방송 끝. 방종입니다."

어두운 화면과는 달리 혜진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훨씬 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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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종료된 영상이 검은 화면으로 모니터를 가득 채운 상태였다.

성현은 그제서야 마우스를 움직였다.

새로고침 한번. 드르륵, 거리는 소리와 함께 스크롤이 내려간다. 업로드되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벌써 댓글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 영상이 십만 조회수를 넘기는 데에는 과연 몇 시간이나 필요할까. 잠깐 이 영상이 올라오기 전, 며칠 전에 올라온 첫 번째 작품을 떠올린 성현이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의 파급력을 생각하면,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목표치가 달성될지도 몰랐다. 그 이상의 예측은 의미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아무튼... 커다란 파급력을 가진 영상인 건 확실하다. 그럴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도.

성현의 눈이 댓글을 읽어내렸다.

[이걸로 끝??? 제발 하루에 한편씩 찍어내!!! 이대로 못잃어 나 죽어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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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4 여기 순간 사람들 다 멈칫한거 진짜ㅋㅋㅋㅋㅋㅋ 아니 농담을 누가 그렇게해... 언니 저 사실이라 믿고 입덕해도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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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랑 성격 반전매력 ㄷ 팬미팅때 잘보면 얼어서 긴장한거보임ㅋㅋ 아 너무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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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방종선언하는거 한시간재생 만들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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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꼬리 올리는거 미쳤어 움짤 ㅈㄴ 돌아다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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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이 사람은 캠방을 할 때 웃은 적이 없다. 핫클립 엘튜브짜투리 아무리찾아도 웃는얼굴이 안나옴. 언제 웃참챌린지같은거 안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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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존나부럽네ㅅㅂ나도 노르드편집자하고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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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만한 반응들이다.

무대의 뒤쪽을 훔쳐보는 느낌이 드는 영상이다. 지금껏 노르드의 방송에서 드러난 혜진의 아주 국소적인 요소들을 넘어서, 드러나지 않았던 혜진의 본모습을 보여주는 영상.

신비주의로 가득한 베일을 벗기고 그 내용물을 훔쳐보는 순간은 얼마나 짜릿한가. 거기다 혜진이 숨겨둔 내용물은 그 속도 범상치 않았다. 겉만 번드르르한 개살구가 아니라, 알맹이까지 꽉 들어찬 무언가. 빠져들지 않고는 못 배기리라.

지금 노르드의 채널에 올라온 영상은, 남들보다 혜진을 훨씬 더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성현으로서도 넋을 놓고 보게 되는 영상이었다.

영상에서 드러났던 것처럼, 혜진은 겉으로 감정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정상과 비정상의 선을 왔다 갔다 하는 사고방식도 그랬다. 그녀는 몇 번 만나고 교류한 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성현이 그녀와 꽤나 친해진 지금도, 만날 때마다 새로운 측면들을 발견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결국, 그도 혜진이 매력적이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가끔 터무니없는 짓거리를 저지르더라도 말이다.

띠링­

때마침 날아온 메시지에 성현이 혀를 찼다.

Nord:아 이게 안되네

앞서 나눈 대화를 생각하면, 맥락상 이해하지 못할 내용의 문자는 아니었다. 갑자기 면허를 딴다고 하더니. 개소리는 정도껏 하라고 대답한 자신의 답변에 면허시험장으로 추정된 곳의 사진을 보내온 혜진이었다. 면허를 일주일 컷 내겠다는,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함께였다. 지금 보내온 메시지도 아마 그 헛소리의 연장선이리라.

Nord:도로주행 빈자리가 없어서 시험을 못 본데요 :(

도로주행.

잠깐 뇌리에 면허 취득과정을 떠올린 성현의 머리가 작동을 멈췄다. 분명, 그제인가 필기시험에 대해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성현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칼고:님 음주운전으로 면허 정지됐었죠

Nord:??? 뭔 음해야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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