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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화 〉 196 ­ 그건 옆집 애의 문제에요 (196/243)

〈 196화 〉 196 ­ 그건 옆집 애의 문제에요

* * *

"어...? 꼭 오늘 가야 되는 거야? 이렇게 여유도 없이."

"언니는 지금이 제일 여유 있을 때잖아. 언니가 올린 휴방 공지 다 봤어. 그리고 아빠 바쁜 거 다 알면서 왜 그래. 주말에 온전히 집에 있는 일도 드물단 말이야. 오늘 아니면 기회 없어."

아니, 내 말은 그 기회가 영영 오지 않아도 된다는 건데.

지금까지 빈둥거리고 있었던 건, 전부 저 본론을 꺼내기 위한 빌드업이었을까. 가족사에 대해 털어놓은 혜민이는 곧장 이불 속에 파묻힌 나를 일으키기 위해 온갖 수를 다 쓰기 시작했다. 침대 두드리기. 귓가에 대고 속삭이기.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오는 손길.

잠깐 현실을 외면한 채 전기장판의 아늑함을 누리고 있던 나는 얼마 못가 안전한 침대 위를 벗어나 세상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사실 처음부터 지는 쪽이 누군지는 이미 정해진 게임이었지만... 그래도 꾸물거리는 몸뚱이를 억지로 움직이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루고 싶은 일일수록 빨리 처리해야 한다는 걸 누가 모르겠는가. 그게 어려우니까 다들 포기하고 마는 거지.

가슴속에 눌러 담은 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일은 없고, 결국 나는 혜민이의 손에 이끌려 집... 이었던 곳으로 끌려가게 됐다.

비극이라는 건 이렇게 전조도 없이 찾아오는 것이다.

아침 운동을 하지 않아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서면, 제법 쌀쌀한 공기가 우리를 반겼다. 몸 관리를 하겠다고 새벽녘에 일찍 일어나 아침 구보를 하러 나설 때나 느낄 수 있는 추위. 지금이 해가 중천에 뜬 대낮인 걸 고려하면 오늘은 유난히 추운 날일지도 모르겠다.

"언니, 후드 쓰는 거 잊지 말고."

"아니... 너무 유난 떠는 거야, 혜민아. 그렇게 대놓고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니까."

"언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영상 올린 다음에 사람 많은데 다녀봤어?"

"내가 요즘 얼마나 열심히 운동 다니고 그러는데..."

"운동은 어디로 다니는데? 사람이 많으면 얼마나 많다고."

"저기, 뒷산 약수터. 아침에 가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제 언니를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 쓰나.

동생의 싸늘한 눈초리가 따가워서 말을 그만두고 후드를 덮어썼다. 통이 큰 후드임에도 넘쳐흐르는 머리카락 일부가 튀어나와 가슴께를 뒤덮었다.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정리하다 보면, 나를 철저히 감시하듯 쳐다보는 동생의 눈빛이 느껴졌다. 여전히 언니 보호에 지극정성인 동생이다.

유명세. 그건 겪어보기 전까지는 실감하기 힘든 종류의 무언가였다. 당장 떠오르는 건 역시 대회장과 팬미팅 때의 커다란 함성 소리인데, 내 안에서 그건 굉장히 특수한 상황에 해당되는 경우였다. 나이트폴 대회가 열리는 경기장. 나를 알아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모여든 곳이지 않나. 그냥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특수 상황이다.

그러니까 내가 길거리를 돌아다닌다고 그때만큼의 인파가 몰려들 거라고는 여전히 상상하기 힘들었다. 브이로그 영상이 이상할 정도로 흥행한 지금도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는데... 혜민이는 늘 당사자인 나보다 내 걱정을 많이 하는 경향이 있었다. 대체 제 언니를 얼마나 못 미덥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조만간 선글라스를 들고 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대단한 연예인이라도 된 기분이겠는데.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한다. 사람이 많은 버스에 자리를 잡고 앉은 다음부터는, 혜민이도 나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상냥한 동생은 아마 잡념이 가득한 언니를 배려하기 위해 입을 다물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 알 수 없는 유명세를 의식하고 있다거나.

한 시간이 조금 넘게 걸리는 거리. 그렇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애매한 거리였다. 혜진은 처음으로 자취를 시작할 때, 한 시간이 걸리는 이 거리를 어떤 마음으로 지나갔을지. 혜진의 부모님은 또 어떤 마음으로 이렇게 애매한 거리에 위치한 원룸을 잡아줬는지.

괜히 의미를 부여할수록 내가 모르는 부모 자식 관계가 왜곡될 것 같았다. 리셋 버튼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철없는 바람이 둥실 떠오른다. 괜히 엉키고 꼬인 실타래를 푸는 것보다야, 아무것도 없는 처음부터 새로이 시작하는 게 마음이라도 편할 텐데.

간절히 바라는 일이 천천히 다가오는 것과는 다르게, 정말 바라지 않는 일은 누구보다 빠르게 거리를 좁힌다. 혜진의 가족관계에 대해, 부친을 만나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따위를 열심히 고민하다 보면 집 근처 정류장까지는 금방이었다. 이제, 조금만 걸어가면 바로 집이다.

"뭐라도 사들고 갈까? 저번에도 빈손으로 왔잖아. 그, 칡즙이라든가."

"...언니, 그리고 왜 하필이면 칡즙이야. 스벅님한테도 칡즙 선물했다고 하던데."

"어? 그걸 혜민이 네가 어떻게 알아."

"스벅님이 언니랑 합방했을 때 후기 영상 올렸는데... 몰랐어? 언니 채널 영상보다 보면 관련 영상으로 뜨잖아."

스벅 채널을 안 본지 오래돼서 전혀 몰랐다.

"지금 알았네. 대회 연습 때 영상 소스는 서로 맘대로 가져다 쓰기로 해가지고... 으음, 뭐라고 했는데? 잘 먹었다고?"

"아니. 칡즙 선물로 주는 사람은 처음이라고 하더라. 언니랑 엄청 안 어울렸다고 했어."

저건 무슨 헛소리인가. 선물 주는 데에 어울리고 말고가 어딨다고... 칡즙 정도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복용할 수 있는 훌륭한 선물일 텐데.

혜민이의 말을 듣고도 빈손으로 가기가 뭐 해서, 눈에 보이는 근처 빵집에서 비싼 빵 한 봉지를 사들고 나왔다. 본인 집에 돌아가는데 무슨 선물이냐는 동생의 말을 쉽게 납득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내가 그 집을 어떻게 내 집이라고 생각하겠는가. 방문하는데 부담감이 느껴진다는 점에서 거기는 스벅의 집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낮인데도 흐리멍덩한 하늘. 슬슬 불어오는 바람에 추위를 느끼고 후드를 눌러 쓰면 주변 풍경도 잘 보이지 않았다. 앞장서서 걷는 동생을 따라 인적이 드문 한적한 길을 나아가면... 그 낯선 집까지는 정말 금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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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링­

"다녀왔습니다."

인사에 대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혜민은 뒤를 돌아봤다. 제 뒤에서 아무런 말 없이 그녀를 쫓아오던 언니는, 집에 들어왔음에도 눌러쓴 후드를 벗지 않은 채로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있었다. 신발장 한 쪽에 내려둔 비닐봉지가 부스럭거렸다.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럽게 느껴지는 건 단지 자신의 기분 탓일 뿐일까. 혜민은 언니의 조심스러운 행동거지에서 미묘한 거리감이 드러난다고 생각했다.

그게 불편해서 일어선 언니의 손을 잡아끌었다.

불이 켜져 있는 거실.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주호와 연락했을 때는 분명 아버지가 집에 계신다고 했던 것 같은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음에도 아무런 인사가 없는걸 보면 서재에서 업무를 보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제 언니와 아버지가 자연스럽게 마주치기를 원했던 혜민에게는 별로 원치 않았던 그림이다. 이렇게 되면 둘 사이에 끼어들어 대화를 주선하는 것도 쉽지 않을 터. 어그러진 그림에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빵 맛있게 먹고... 나는 이만 돌아갈게."

턱, 되지도 않는 농담을 내뱉는 혜진을 붙잡는다.

집으로 오는 길 내내 조용했던 사람이다. 평소에는 더없이 침착하게 보였던 얼굴이, 지금은 조금 위축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예전처럼 몸을 덜덜 떨고 있지는 않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가족 앞에서 긴장해서 몸을 떠는 언니를 바라보는 건 혜민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그런 모습이라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했지만.

"아빠는 서재에 계신 거 같아. 바로 올라가자. 내가 옆에서 도와줄 테니까."

"아니... 그래, 고맙다."

뭐라 말을 이어가던 혜진은 입을 다물고는 그제서야 후드를 내리고 머리를 정리했다.

혜진의 손짓에 따라 출렁이는 머릿결. 혜민은 불과 몇 개월 전 혜진의 모습을 떠올렸다. 거실 한복판. 아버지의 손에 끌려 나와서는,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소리치던 모습이 눈에 훤했다. 매번 개미 기어가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말했던 언니가, 찢어지는 것처럼 언성을 높이는 걸 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임팩트 있는 장면은 쉽사리 잊히지 않는다. 그날 이후, 혜민은 그 장면이 절대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는 했다. 집에서 나간 혜진에게 찾아가기 힘들었던 것도 그날의 기억이 그만큼 강렬했기 때문이다. 원망을 넘어 증오 섞인 눈으로 아버지를 쳐다보는 눈초리를 떠올리면, 그 눈빛이 자신에게 향할까 봐 겁이 났으니까.

큰마음을 먹고 언니의 집에 방문해, 변한 모습을 보고 충격받았던 것도 이제는 새삼스러울 지경이다. 사람은 인생을 뒤흔들 만큼 커다란 사건을 겪고 나서야 바뀔 수 있다고 말했던가. 성격이 쉽게 바뀔 리 없다고 믿고 있던 혜민의 생각은 제 언니를 보고 깨어진지 오래였다. 사람은 변할 수 있었다. 입이 떡 벌어질 만큼 극적인 방향으로.

그래서... 혜민은 조금 찢겨나간 가족 관계도 다시 이어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변한 제 언니가 변하지 않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을 거라고.

똑똑­

"아빠, 들어가도 될까요?"

두근거리는 소리가 의식될 정도의 정적. 조심스레 문고리에 손을 올리고 귀를 기울인다. 그 상태로 조금 기다리고 있으면, 곧 안쪽에서 익숙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잠깐 혜진의 손을 쥔 왼손에 힘을 더한 혜민이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서재 특유의 책 냄새가 스며들어왔다. 스륵, 하고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자매의 아버지는 기다란 목제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책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기척에도 별다른 관심이 없는 듯했다.

아마, 자신이 누구와 함께 왔는지 모르고 있으리라.

"저 언니랑 왔어요."

차분히 마음을 다스린 혜민이 입을 열고 나서야 아버지의 시선이 이쪽으로 움직였다.

더없이 익숙하지만, 쉽게 친밀감을 가질 수 없는 얼굴. 테가 얇은 안경 너머로 엄숙한 눈동자가 두 자매를 마주했다. 자신의 뒤편에 선 혜진을 발견한 순간이다. 미세하게 치켜올라가는 눈썹. 진중한 중년 남성의 얼굴에는 커다란 감정의 요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혜민은 책 페이지를 넘기던 아버지의 손이 어느샌가 멈춰 섰음을 인지했다.

주변의 공기가 한층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언니의 손을 잡은 채로 조심스레 옆으로 비켜 서면,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혜진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혜민은 언니의 몸이 떨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랜만이구나."

탁­

무거운 침묵을 먼저 깨뜨린 건 뜻밖에도 아버지였다. 커버가 두꺼운 책을 덮어두고, 책상 위로 두 손을 올렸다. 엄격한 시선이 향하는 쪽은 당연하게도 혜진이 서있는 방향이었다. 혜민에게 한 손을 붙잡힌 채 어정쩡한 자세로 인사한 혜진이 잡혀있는 오른손을 살짝 흔들었다. 흠칫하고 놀란 혜민이 언니의 손을 놓아줬다.

"예. 그간 잘 지내셨는지."

가만히 서서 혜진을 쳐다보던 혜민이 몸을 움찔거렸다. 생각보다 침착한 혜진의 태도도 그렇지만, 그것보다 언니의 입 밖으로 흘러나온 인사말이 더 의외였다. 아버지에게 저렇게 정중하게 인사하는 언니를 본 적이 있었던가.

그녀와 비슷한 감상을 했는지 인사를 건네받은 아버지도 잠깐 머뭇거렸다. 선이 굵은 손가락이 목제 책상을 몇 번 두드렸다.

"...그래. 너는­ 음. 잘 지내고 있는 거 같던데."

침중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가슴에 얹힌다. 뭔가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은 말.

"네,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과묵한 부녀는 앞장서서 말하는 법이 없었다. 대화가 길게 이어지지 않는다. 한 사람의 말이 끝날 때마다 서재에는 다시금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숨 막히는 분위기에 혜민의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 꼬인 관계를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할까.

불행인지 다행인지. 먼저 포문을 열고 나선 측은 아버지였다.

"그래­ 만화 그리는 건 그만둔 거냐?"

대화의 물꼬를 트는 한마디. 다만... 혜민이 생각하기에는 지나치게 민감한 주제였다. 제 언니가 무엇 때문에 집을 박차고 나갔던가. 왜 대번에 상처를 비집고 들어가는지.

홀로 방구석에서 고립되어 가던 언니와, 완고하고 엄격한 아버지 사이에는 아무리 해도 좁혀지지 않는 간격이라는 게 존재했다. 이해할 수 없는 간극. 눈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전면으로 부정당한 언니가 어떤 식으로 반응했는지는 아버지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일 텐데, 그녀의 아버지는 너무나도 완고했다.

속으로 탄식을 흘린 혜민이 혜진에게 한걸음 다가섰다. 어떻게든 언니를 다독여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별 내용을 품고 있지 않은 가벼운 한마디에도 극적으로 반응할 수 있었다. 트라우마란 사소한 자극에도 민감한 법이니까.

충격을 받은 듯, 가만히 멈춰 선 혜진.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 변화도 거의 없었다. 주저하며 팔을 뻗은 혜민의 손이 언니의 손을 맞잡을 무렵이다.혜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 네. 그만뒀습니다. 재능이 없는 것 같아서."

......

그 어느 때보다 긴 정적이 흘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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