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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화 〉 197 ­ 가족이라는 게 그렇지, 뭐 (197/243)

〈 197화 〉 197 ­ 가족이라는 게 그렇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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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양보할 수 없는 영역 하나 둘쯤은 다들 가지고 있는 법이다.

그게 정치적 스탠스일 수도, 종교적 신념일 수도 있다. 아니면 나는 민트 초코가 싫다느니, 파인애플 피자가 싫다느니 하는 지극히 사소한 취향일 수도 있고. 요는 타협의 여지가 없는 확고한 생각이라는 게 있다는 점이다. 누군가 논리를 들이대며 이러쿵저러쿵 설득을 해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쉽게 바뀔 수 없는, 단단히 고정된 생각들. 이런 건 대체로 싸움의 원인이 되기 마련이다. 자신의 생각이 확고하니 무슨 논리를 들이밀어도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독실한 종교인에게 신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해 봐야 그건 시비를 거는 일에 불과하다. 변할 수 없는 생각을 억지로 바꾸려 드는 꼴이니, 싸움이 안 나고 배길 수가 있을까.

결국 서로의 생각이 상충되기라도 하면 그냥 뒤를 돌아보고 제 갈 길 가는 게 상책이다. 너도 나처럼 생각하라고 상대방을 강요하는 것도, 한 발짝 떨어져서 지켜보면 굉장히 우스운 일이다. 고집을 고집으로 꺾으려는 게 얼마나 무식한 일인지.

그런데 때로는 그게 말처럼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쿨하게 뒤돌아 갈 수 없는 경우. 상충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쉽게 끊어버릴 수 없는 관계일 때가 그렇다. 생판 모르는 남이면 다시는 만나지 말자며 뒤돌면 되는 일인데, 결코 그렇게 외면할 수 없는 관계일 때. 예컨대... 그 상대가 피로 이어진 혈육이라던가 하는 경우 말이다.

어느 한쪽이 물러서서 양보라도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아니면 하다못해 못 본 척 외면이라도 하던가. 아무리 혈육이라고 한들 자신이 원하는 점만 갖고 있을 리는 없다. 걸리적거리는 단점이라도 모두 포용해 주는 게 이상적인 인간관계일 텐데, 그게 왜 그렇게 힘든 일인지.

꼴 보기 싫은 점이 보이면 꼭 참지 못하고 나서서 바꾸려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조각가처럼 단단한 돌을 억지로 깎아서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 그럼, 깎이는 돌덩이의 입장에서 뾰족한 정을 들이미는 조각가가 예쁘게 보일 리가 없겠지.

내가 파악하기에, 혜진과 부친의 관계가 이런 모습이었다.

흔해빠진 이야기였다. 방구석에 박혀 만화만 보고 그리던 딸과, 그런 딸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아버지. 어느 날 딸의 아버지는 참지 못하고 딸을 방 안에서 끌고 나온다. 거기서 딸의 부모가 그녀에게 뭐라고 말했을지는 추측하기 어렵지 않았다. 이제 그만 현실을 직시하고 뭐라도 시작해 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조언이 이어졌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서로의 언성이 높아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겠지.

혜진의 현실을 생각하는 것도 다 무미건조하게 느껴질 뿐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혜진이 왜 대학 진학을 하지 않았는지, 왜 그녀가 방구석에 처박히게 되었는지, 왜 하는 일도 없이 몇 년간을 의미 없게 낭비했는지. 그 원인을 죽 나열해 읊어봤자 진심으로 공감할 수는 없는 내용이다. 나는 혜진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방구석에서 끌려 나와 아버지에게 정곡을 찔린 그녀가 얼마나 처참한 감정을 느꼈을지도 나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독립해 생활감 없는 원룸에서 새 삶을 시작한 것도, 그때까지 가족에게 아무런 연락을 하지 않았던 것도... 모두. 나는 영영 이해할 수 없으리라.

나는 혜진이냐 태진이냐, 존재의 연속성 따위를 고민하는 것도 진작 그만둔지 오래다. 사라진 혜진의 자아가 어떻게 됐는지도, 그로 인한 책임의 소지가 어디에 있는지도 해답이 나오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뭣도 아니고 그냥 나였다. 웹툰 그리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게임을 좋아하는. 생물학적으로는 혜민이와 주호의 언니가 되고, 친구는 한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만 가지고 있는... 그냥 그런 사람. 거기에 혜진이 살아가면서 느꼈을 고뇌와 고통은 자리할 곳이 없었다. 억지로 내어줄 공간조차 마땅치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혜진과 그녀의 부친 사이에서 벌어졌던 갈등도 정면에서 넘어가리라 결정했다. 이전의 관계에 매몰되어 끙끙거리는 것보다야, 뻔뻔스럽게 새로운 관계를 밀고 나가는 게 더 편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고.

아무튼, 방송을 하면서 늘어난 건 뻔뻔함밖에 없었으므로... 이건 노르드의 삶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언니... 진짜 괜찮은 거야?"

어색한 부친과의 첫 대면을 마치고 서재를 나오면, 말없이 뒤로 따라붙은 혜민이 그렇게 물어왔다.

2층 복도에서 뒤를 돌아 동생과 마주했다. 서재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나보다 더 초조해 보였던 동생.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게 썩 귀여웠다. 내가 혜진의 아버지와 대화를 나눌 때도 걱정하는 티가 역력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에 감기는 머리카락의 감촉이 부드럽다. 목덜미를 살짝 넘기는 단발을 가볍게 쓸어내리면, 멍청하게 서있던 혜민이 눈을 홉뜨고는 나를 마주 봤다. 쏘아보는 눈빛에 장난기가 솟아서 나는 그냥 등을 돌려버렸다.

"아니, 쓰다듬을 거면 제대로­"

"주호 집에 있나? 왔는데 인사를 해야지."

뒤에서 티를 잡아끄는 혜민이를 무시하고 주호의 방으로 향한다.

짐을 덜어낸 것 같은 느낌에,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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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혜민과 주호에게 있어서, 가족 식사라는 단어는 현실감이 느껴지는 단어가 아니었다.

앞에 '화목한'이라는 형용사가 붙기도 전의 이야기다. 처음부터 이 쌍둥이 남매의 가정에는 가족끼리 함께 식사를 하는 문화가 제대로 정착한 적이 없었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집에 있는 시간이 적었을뿐더러, 함께 있는 드문 경우에도 한 상에서 같이 식사를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적어도 두 남매의 머리가 굵어지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그랬다.

부엌 앞에 위치한 식탁은 거의 인테리어에 불과했다. 학교를 다니는 탓에 생활 패턴이 겹치는 주호와 혜민이 종종 그곳에서 끼니를 함께 해결했을 뿐이다. 그 자리에 온 가족이 함께 했던 경우는... 기억하기 위해 몇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야 할 정도였다. 쌍둥이의 집에서 식탁을 가장 많이 사용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가정부 아주머니임이 분명했다. 그마저도 식사가 아니라 휴식을 위한 장소로 많이 사용됐겠지.

쌍둥이 남매는 그걸 문제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애초에 가족 식사가 성립되기 어려운 환경이라는 사실도 자각하고 있었다. 출장으로 집을 비울 때가 더 많은 아버지, 매일 늦은 시각까지 업무로 바쁜 어머니. 누이라는 사람은 매번 방구석에서 끼니를 해결하느라 바빴고, 근래에 들어서는 아예 집 밖으로 나가버리기까지 했다. 이런 그들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사실 혜민과 주호는 가족 식사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다. 늘 없었던 것의 빈자리는 당연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쌍둥이의 사전에 '화목한 가정'은 등재되어 있지 않았던 고로, 당연히 거기에서 파생되는 화목한 가족 식사도 존재하지 않았다. 식사는 각자가 원할 때, 원하는 곳에서 해결하는 것. 가족 모두가 소식인 내력은 여기서 기원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쌍둥이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지만.

아무튼, 쌍둥이 남매에게 온 가족이 함께하는 식사란 낯선 이문화와 다를 바 없었던 까닭에.

오늘 벌어진 이 상황은... 눈에 보이는 장면만으로도 주호와 혜민을 혼란스럽게 만들기엔 충분했던 것이다.

"간은 맞니?"

"네. 딱 맞아요."

...

덜그럭, 하고 식기 움직이는 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들려왔다.

식욕이 떨어지는 걸 내색하지 않고 젓가락을 움직이던 주호는, 김치 한 조각을 밥 위에 얹어두고는 앉은 자리에서 주변을 훑어봤다.

식탁에 앉은 식구가 다섯 명. 무려 다섯 명이다. 어떤 가족에겐 지극히 일상적일 풍경이 주호에겐 더없이 낯선 광경으로 다가왔다. 이 정도면 신선함을 넘어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꿈에서 나타났으면 개꿈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제육이 맛있네요."

"그러니? 아주머니가 해놓고 간 건데."

존나 어색해.

숨 막히는 대화를 지켜보던 주호는 참지 못하고 밥공기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삭거리는 김치의 촉감이 입안에서 느껴지는데도, 제대로 맛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이런 어색한 분위기에서 밥을 먹으라니. 태연히 제육 맛을 운운하는 헛소리를 내뱉은 제 누님이 경이롭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상황이 만들어졌단 말인가.

심상치 않은 날인 건 확실했다. 방송을 하느라 바쁜 누님이 집까지 찾아온 것부터가 그랬다. 그것도... 집을 박차고 나간 원흉인 아버지가 있는 상황에서.

애초에 제 쌍둥이 누이에게 아버지가 누님의 방송을 눈치챈 것 같다고 말했을 때부터가 문제의 시작이었다. 최근 누님과 관련된 일이면 이상할 정도로 행동력이 넘치는 혜민이다. 그렇다고 당일치기로 누님을 데려올지 누가 알았겠는가. 혜진이 거기에 순순히 끌려온 것도 그렇고, 온통 예측하기 힘든 일 투성이였다.

집에 와서 대체 아버지와 무슨 대화를 나눴길래. 폭풍전야의 고요함을 인지하고 방 안에서 숨을 죽이던 주호였다. 혜진과 혜민이 갑작스레 자신의 방으로 밀어닥칠 때도, 뭔가 잘못되지 않았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상상하지 못한 밝은 분위기에 이상함을 느끼기는 했다. 아무리 물어봐도 속 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않아서, 차오르는 호기심에 가슴을 두드렸던 것도 불과 한 시간 전의 일이었고.

아니, 어떤 경우를 생각해도 이건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주호의 빈약한 상상력으로는 그랬다. 대체 어떤 식으로 일이 흘러가면 가족이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것도 영영 인연을 끊을 것처럼 싸웠던 부녀가 한 식탁에 앉아서.

"그래서, 방송하는 건 할만하고?"

"컥, 큽!"

들어왔다. 여기서 몸 쪽 꽉 찬 직구를 던지는 아버지!

순간 밥을 잘못 삼켜 사레가 들린 주호가 기침을 내뱉었다. '어머, 얘 좀 봐. 애가 왜 그러니.'하는, 어머니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은 그것보다 아버지의 질문이 훨씬 신경 쓰이는 지점이었다. 역시, 누님이 방송과 관련된 사실을 모두 밝혀버린 걸까.

"예. 생각보다 재밌어요."

"흠... 그래. 같이 일하는 사람이 있는 건가? 영상 촬영하거나 만져주는 사람이 있는 것 같던데."

"아, 네. 편집자 한 분이랑 같이 일하고 있습니다. 공식적으로 계약까지 했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주호로선 감당하기 힘든 대화가 이어졌다.

몇 번째인지 모를 생각이 자꾸 부상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애초에 아버지와 누님이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조차 이상한데, 대화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꽤나 구체적이라는 게 더 놀라웠다. 주호는 엄격하고 진중한 아버지의 입에서 인터넷 방송 이야기가 흘러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아버지라면 인터넷 방송 자체를 혐오할 줄 알았던 탓이다.

"그래. 그쪽은 네가 더 잘 알겠지."

또. 아버지가 저런 식으로 누님을 인정하는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주호에겐 충격인 일이었다. 그렇게 충격적인 말을 듣고도 멀쩡하게 밥을 삼키고 있는 누님의 모습까지도.

시청자의 입장에서 방송을 처음 봤을 때도 느낀 감정이지만, 제 누님은 무언가 엄청난 대격변을 맞이한듯 싶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까지 바뀔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자신이 지금까지 함께 살면서 누님에게 너무 무관심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방구석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뭔가 괜한 선입견을 키워왔던 것일까. 주호는 괜한 자책까지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는 다른 평행 세계에 휘말린 기분이었다. 누님의 옆자리에서 기분 좋다는 듯 헤실 거리는 혜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저녁 식사를 끝마치면 당장 찾아가 추궁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넘쳐흐르는 의구심을 해결할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우선, 우선 이 어색한 공기에서 벗어나고 난 다음에.

"아, 내가 보니까 덧글에 이상한 게 많이 달리던데. 그런 건 따로 관리해 주는 사람이 없는 건가?"

"이상한 거요? 어떤..."

"뭐, 헤으응이니 눈나니 하는 거 말이다. 어지간히들 올라오던데."

"큽!"

"야, 물이나 마셔."

역시, 이 식탁은 아직 주호가 감당하기엔 벅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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