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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6화 〉 206 ­ 좋아하는 건 원래 오래 못 가잖아 (206/243)

〈 206화 〉 206 ­ 좋아하는 건 원래 오래 못 가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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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을 마주하는 기분을 경험해 본 적 있는가.

좋아하는 정도를 단계별로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복잡하기 짝이 없는 사람의 감정을 어떻게 수치화해서 나타낼 수 있을까. 변화무쌍한 감정은 또 규칙적이지도 않아서, 어떤 단계를 밟고 서서히 변해가는 것도 아니었다. 아주 사소한 계기 하나로 변화할 수 있는 감정. 스스로도 자신의 감정을 헤아리기 힘들었다.

내가 언제부터 저 사람을 좋아했었는지. 계기를 찾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관계의 일대기를 쭉 나열해놓고, 추리를 하는 것처럼 단서를 찾아 헤매봤자 뚜렷한 증거가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도 모르는 어떤 계기 때문에 한순간에 애정을 품게 된 경우가 있다. 아니면 서서히 기어를 올리는 자전거처럼, 사소한 계기로 마주해서 천천히 스며들듯 빠져들었을 수도 있고. 형상이 없는 투명한 퍼즐을 허공에서 짜 맞추는 꼴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있었다. 어떤 대상을 좋아하는 감정은 파면 팔수록 심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무슨 계기로 빠져들게 되었든, 누군가를 좋아하면 눈에 벗기기 힘든 콩깍지가 씌이기 마련이다. 그럼 알면 알수록 대상의 장점만 눈에 들어온다. 누군가에겐 보이지 않을 사소한 장점들이 왜 이리 도드라져 보이는지. 발견한 장점은 또 감정의 연료로 기능하고, 이내 선순환인지 악순환인지 평가하기 어려운 순환이 반복된다.

소위 덕질이라 말하는 과몰입은 이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언제부터 노르드를 좋아하게 됐는지 선우로서는 대답할 도리가 없었다.

굳이 따지고 들면, 언제부터 일상생활의 대부분을 노르드를 찾아 떠돌아다니는데 허비했는지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몇 달은 지난 것 같은데. 분명 노르드와의 결전에서 패배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복수를 꿈꾸며 방송을 열심히 시청하기 시작했을 즈음. 게시판에 상주한 시점도 분명 그때부터였다.

그게 왜 여기까지 발전했을까. 선우도 잘 몰랐다. 나갤에서 육수들을 욕하며 나이트폴에 전념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 순간 자신이 그들과 비슷한 꼴이 됐는지.

사실 그런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얼마 전에 그만뒀다. 아무튼 그런 것보다 중요한 건, 아침에 일어나 노르드의 저컴 게시판 인기글을 훑는 일이었다. 최근 브이로그라는 보배로운 은총을 제공한 선생은 무슨 일인지 야방이라는 새로운 시도까지 감행한 것이다. 잠에 든 시간에도 어떤 새로운 사건이 일어날지 예측하기 힘들었다. 노르드의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건 이미 일상이나 마찬가지였다. 기습적인 아침 방송이라도 놓치는 날에는 엄청난 타격이 있을 테니까.

"아... 그래요?"

제 감정을 못 이기고 내뱉은 커밍아웃. 노르드의 반응은 덤덤했다. 무슨 극적인 반응을 기대하고 뱉은 말도 아니건만, 저렇게 잠잠한 반응이 돌아오는 것도 가슴이 철렁이긴 마찬가지였다. 캠을 켜지 않았으니 얼굴 표정을 살필 수도 없었다. 들을 수 있는 건 헤드셋을 타고 흐르는 노르드의 목소리뿐.

녹음 파일과 녹화 파일을 동시에 확인한다. 혹여나 일시정지된 상태로 멈춰있지는 않은지. 다행히 두 파일은 제대로 저장되고 있었다. 노르드와 직접 통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도 실감이 가지 않았다. 헤드셋을 타고 흐르는 노르드의 목소리가 훨씬 생동감 있게 느껴졌다. 숨이 점점 가빠지는 것 같았다.

선우는 흡, 하는 소리와 함께 호흡을 참으며 방송 화면에 시선을 집중했다. 자신의 심장처럼 출렁대는 채팅창은 별로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지금은 그보다 훨씬 신경 쓰이는 사람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으므로.

"사칭, 사칭하는 사람 많았어요. 이번 달에도 하나 잡았구, 저번 달에도... 선생님 얼, 얼굴 공개하기 전에는 또 얼마나 많았는데요. 이... 상한 합성 사진 올리는 새끼도 있었고요. 그 개새, 아. 이런 말 쓰면 안 되겠죠. 그런 연놈들 다 신고했어요. 제가 찐 육수긴 해도 선생님한테 도움이 되고 싶어서 진짜, 절대 이상한 마음먹은 게 아니라요..."

"알았어요. 알겠으니까 잠깐 심호흡 좀 해봐."

중간에 비집고 들어온 목소리. 말소리에 묻혀 소리를 줄였던 심장이 다시 콩닥거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믿기 힘든 상황이다.

평소처럼 일상적인 루틴을 반복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저컴 게시판에서 새롭게 갱신되는 글을 훑어보다가, 도통 재밌는 글이 올라오지 않아 제 트라이앵글 계정에 새로운 영상 하나를 업로드하는.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게시판에서 댓글로 싸우다가 차단당한 계정을 대신해서 새로운 부계정을 하나 생성했다는 점 정도였다.

그러다 'Nord' 닉네임을 사용하는 신규 계정을 발견한 것도, 그렇게 예외적인 일은 아니었건만. 기묘한 구도의 사진을 보고 잔뜩 화가 나서 메시지를 보낼 때만 하더라도, 선우는 그게 진짜 노르드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고려하지도 않았다. 그저 괘씸한 사칭범 하나를 죽이겠다는 일념만 가득한 상태였으니까.

느닷없이 울린 방송 알람을 보고, 어떤 감정을 느꼈던지. 심장이 보이지 않는 저 밑까지 뚝하고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머릿속에서 자신이 써서 보낸 채팅 내역이, 마치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기분. 이윽고 다가올 공개 처형을 기다리면서 또 얼마나 초조하게 다리를 떨었던가.

그때 선우가 떠올렸던 미래에 비교했을 때, 지금 상황은 정말 기적과도 마찬가지였다. 걱정하던 친구 삭제는 없었다. 노르드가 건넨 건 오히려 포상에 가까웠다. 손수 자신의 트라이앵글 계정을 살펴주지 않나, 이제는 노르드와 직접 통화를 하고 있다니. 씹덕 망상도 이 정도면 선을 넘었다고 욕을 먹고 있을 터다.

선우는 헤드셋에 붙은 마이크를 고쳐 잡았다.

본의 아니게 변명처럼 쏘아낸 두서없는 말들. 생각을 정리하는 것보다 입이 더 빠르게 반응했다. 멍청하게 써갈긴 지난 채팅 때문에 생긴 부정적인 이미지를 몽땅 지워내고 싶었다. 선우는 오랜만에 자신의 과한 인터넷 사용량을 자책했다. 커뮤니티를 조금만 줄였어도, 노르드에게 그딴 메시지를 보내지는 않았을 텐데.

"저, 저 진짜 선생님 음해하려던 거 아니에요."

"으음."

"선생님이 이런 거 시작할지 진짜 몰랐어요. 당연히 또 사칭 하나 늘어난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거예요. 사진도 너무 합성 같아서, 그래서­"

"...아니, 알았다니까."

"저 선생님 방송 맨날 챙겨 봐요. 생방송도 그렇구, 다시보기로 몇 번이나 복습하고... 채널 영상도 매번 확인한다고요. 브이로그는 벌써 열 번도 넘게 돌려봤어요. 저는 그거 편집 안 하고 올려도 다 볼 거예요. 나이트폴 플레이 영상도 몇 번이나 반복 시청했는데. 저 이번 시즌엔 선생님이 사용한 빌드도 랭크 게임에서­"

"무식 씨!"

"네, 네?"

어떻게 사람이 언성을 높여도 목소리가 듣기 좋을 수 있을까.

"무슨 말인지 다 알겠으니까 일단 조용히 하고 있어봐요."

그제서야 선우는 헤드셋 마이크에서 손을 떼어냈다. 험하게 굴려 마이크 연결부가 너덜거리는 헤드셋. 말할 때 마이크 부분을 잡고 있지 않으면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끊어지고는 했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이 소중한 기회를 마이크 불량으로 날려버릴 수는 없었다. 선우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자신의 순수한 팬심이 노르드에게 전달되기를 믿어야 했다. 불알 두 짝을 운운한 경솔했던 발언이나, 그간 나이트폴 편집 영상을 올린 계정을 공개하는 건 사실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보다 무서운 건 노르드의 친삭과 차단이었다. 자신의 태도에 마음이 상한 노르드가, 친구창에서 가차 없이 제 나이트폴 닉네임을 지워버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 선우에겐 그게 더 큰 문제였다.

[우욱씹]

[와... 얘는 진짜네 ㅅㅂㅋㅋㅋㅋㅋ]

[나도 저러는데...]

[어질어질하네요]

[이게 육수 평균이냐?]

[무식쿤...]

[이 정도면 같이 겜이라도 한판 해줍시다 선생님]

[오늘 캠방 안하냐?]

[노르드는 혼모노한테 약하다.... 메...모...]

쓸데없는 말로 가득 찬 채팅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에게 관리자 권한이라도 있었으면 당장 차단했을 채팅도 눈에 보였다. 방송을 쥐고 흔들려는 종자들. 유입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채팅창의 수질은 오염되는 것 같았다. 어지간하면 밴을 하지 않는 노르드의 자비를 방패 삼아서는, 아무 채팅이나 뱉어대는 쓰레기가 늘어났다. 노르드의 말을 기다리며 채팅창을 훑던 선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게시판에서 몇 번이나 차단을 당한 것도 참지 못하고 저치들에게 욕설을 뱉어댔기 때문이다. 노르드가 얼굴을 오픈한 뒤로 유입된 어그로들. 개중에는 교묘하게 노르드를 비꼬거나, 성희롱을 일삼는 놈들도 존재했다. 선우가 생각하기에도 꽤나 유능한 관리자가 선을 넘는 무리를 바로 차단하기는 했으나, 차단하기 애매한 태도로 게시판에서 분탕질을 반복하는 경우도 있었다.

선우는 그런 놈들을 발견하면 참지 못하고 싸움을 시작했다. 그렇게 차단 당한 아이디가 몇 개는 있었으나, 그게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노르드를 아끼고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만큼은 진짜였으므로.

"애정이 조금 과한 감이 있어."

그게 무슨 말인가.

"듣고 있어요?"

"네, 네. 말씀하세요."

채팅창에서 유의 깊게 살펴야 할 시청자의 닉네임을 메모장에 옮겨 적고 있던 선우가 멈칫했다. 애정이 과하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다시 마이크를 부여잡고 귀를 쫑긋 세우고 있으면, 잠깐 뜸을 들이던 노르드가 말을 이었다. 이전보다 차분하게 느껴지는, 한층 더 가라앉은 말투였다.

"이렇게 관심 가져주는 건 너무 고마운데... 검색창에 매번 노르드 치고 있는 건 누가 봐도 좀 이상하잖아요. 본인 시간 어떻게 쓸지는 자기 마음이지만, 그냥 걱정돼서 하는 말이에요. 무식 씨, 졸업했다고 하셨죠?"

"아... 네."

"대학 졸업했으면 한창 중요할 때잖아요. 꼰대 같아서 미안해요. 그래도 그건 사실이니까. 지금 조금만 들어봐도 무식 씨 인생에 노르드가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높은 거 같아요. 이건 사실 저한테도 그렇게 좋은 일이 아니에요. 왜 그런지 알아요?"

"네? 잘, 잘 모르겠어요."

"생각해 봐요. 누군가를 좋아하고 열광하는 게 길게 가봤자 얼마나 가겠어요. 아니, 그런 걸 폄하하는 게 아니라요. 정말 열광적으로 좋아하던 것도 시간이 좀 지나면 시들게 되잖아요. 이건 자연스러운 거지. 그렇죠?"

"...그런 거 같아요."

"그럼 지금 노르드를 너무... 좋아하는 감정도 아무튼 언제가 되면 사그라들 거잖아요.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겠죠. 뭔가 다른 취미가 생기거나, 관심거리가 생기거나... 아무튼 그런 시기가 무조건 찾아올 텐데. 그럼 지금 이렇게 과도하게 투자한 시간이 공허하게 느껴질 때가 올 거예요. 그냥, 제 경험에 따르면 그래요.

너무 좋아해서 그래. 과하게 애정을 쏟아서. 적당히 좋아하고 적당히 시간을 투자했으면, 감정이 사그라들어도 그게 다 추억이 되거든요. 좋은 기억으로 남아. 근데 무식 씨는 지금 너무 과한 거 같아.

자기 인생에 지금 노르드라는 이름이 너무 큰 거 같지 않아요? 감정은 원래 열정적일수록 빨리 식잖아요. 조금만 거리를 두세요. 그럼 내 방송이든 뭐든 훨씬 오랫동안 재밌게 볼 수 있을 텐데, 그럼 저한테도 무식 씨한테도 좋은 일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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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드에 시간 쏟는 건 생방송 볼 때만 해도 충분하니까, 조금 덜어내고 다른 걸 해보세요. 영상만 봐도 재능은 넘치는 것 같은데. 이것도 너무 아깝네."

긴 문장을 끝마치고 목을 축이면, 왠지 모를 정적이 느껴졌다.

우려했던 것처럼, 길게 늘어진 충고의 말이 너무 꼰대같이 느껴진 탓일까.

어쩌면 자신과 나이도 비슷한 20대 초반의 젊은 꼰대가 되지도 않는 소리를 늘어놓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인생의 경험이 꼭 외형에서만 나타나는 건 아니지만, 외관에서 느껴지는 노련함도 결코 무시할 수는 없었으니. 산전수전 다 겪은 중년 아저씨의 충고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젊은이의 충고가 동일한 무게감을 갖는 것도 이상했다. 나는 좀처럼 불이 들어오지 않는 무식의 닉네임을 보고 한숨을 삼켰다.

채팅창은 느닷없이 풀어놓은 진지한 충고에 다소 당황한 듯싶었다. 하기야, 내가 방송에서 이런 말을 내뱉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게임 방송을 하는데 인생에 대한 충고를 늘어놓을 일도 없으니 그것도 당연하지.

아마 오늘처럼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나도 이런 이야기를 꺼내놓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정말 남의 인생인데, 왜 뭐라도 되는 것처럼 오지랖을 부려서는. 조금 머쓱한 심정으로 마우스를 돌렸다.

"선, 선생님."

기다림은 체감상 꽤 길었던 것도 같았다.

대답 없이 통화를 끊고 나가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았던 무식은, 늦게나마 마이크를 켜고 대답했다. 어색한 침묵에 목만 축이고 있던 내게는 꽤나 반가운 목소리였다. 이전보다 목소리가 조금 갈라지는 것이, 그동안 크게 사레라도 들렸나 싶었다.

"네. 말씀하세요. 뭐, 이제 플레이 피드백 좀 봐드릴까요? 제가 좀 잔소리를 해서­"

"저, 선생님 말 듣고 결심했습니다. 앞으로는 제 현생 살면서, 더, 더 오랫동안 좋아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저, 전 진짜 육수니까. 더 길게 덕질할 수 있게끔­"

아.

그래, 생각해 보면 충고 한마디로 사람이 바뀌는 것도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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