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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7화 〉 207 ­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207/243)

〈 207화 〉 207 ­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 * *

"뭐야. 핸드폰 바탕화면이 캘린더에요? 그렇게 일정이 많나."

"배경이 아니라 홈 화면이야. 일정 많아 보이는 건 당연하지. 거의 방송 일정인데."

"한 달 단위 일정을 다 짜놓고 한다고?"

"아니, 보통은 주 단위로... 됐다. 방금 반응만 봐도 평소에 어떻게 방송하고 있는지 다 알 거 같아. 말을 말자."

"칼고 씨, 사람 취급이 점점 나빠지는 거 같지 않아요?"

"니가 평소에 하는 짓을 생각해."

대충 이런 대화를 나눴던 걸로 기억한다.

대회 당일, 성현과 만났을 때의 이야기다. 뭐가 그리 바쁜지 계속 핸드폰을 뒤적거리는 성현의 옆에서, 우연찮게 발견한 핸드폰 캘린더. 메인 화면을 당당히 장식한 달력은 얼핏 봐도 빼곡히 글씨가 가득 찬 상태였다. 그게 전부 방송과 관련된 일정이라나.

양해를 구하고 자세히 살펴보면, 간략한 방송 일정은 물론이고 채널에 업로드할 영상까지 체계적으로 적혀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뭐가 그리 세세한지. 항상 깔끔을 떠는 태도에서도 느낄 수 있는 점이지만, 성현은 꽤나 완벽주의자에 가까운 면모를 보일 때가 있었다. 아무튼 내겐 꽤나 생소하게 느껴졌던 달력이다.

그야... 나는 그런 계획을 짜고 방송을 한 적이 없었으니까.

조금은 뜨끔하는 마음도 있었다. 왜, 학창 시절에도 옆자리 앉은 모범생 친구가 성실히 공부하는 태도를 보여주면 왠지 모르게 움찔하게 되는 경우가 있지 않나. 쟤는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나는 지금 왜 멍을 때리고 있는 건지, 하면서.

비슷한 맥락이다. 모범적인 방송인의 자세를 보고 괜히 나 자신을 반성하게 됐다고 해야 할까. 그때가 하필 대회 날이라 더 그랬을 수도 있다. 대회를 앞두고 며칠간은, 방송도 등한시하고 거의 연습에만 올인하고 있던 때였다. 간간이 방송을 켜놓긴 했지만 제대로 집중하지도 못했고. 반면 성현은 대회와 상관없다는 듯 정상적인 방송 패턴을 이어나가고 있었는데, 캘린더를 보고 나니 그게 가능했던 원동력을 발견한 것 같았다. 방송 짬에서 나오는 차이가 여기서 드러나나 싶기도 했고.

체계적으로 일정을 만들어 놨다면 나도 연습을 하는 시간에 틈틈이 방송에도 신경을 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별로 생산성 없는 후회가 이어졌다.

뭐, 반성이라는 게 다 이미 잘못을 저질러버린 다음에야 가능한 법이다. 결국 중요한 건 반성을 밑거름 삼아 피드백하는 일이지 않나.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됐다면, 그걸로 반성은 충분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겠지.

그래서 대회가 끝나고 생긴 일주일이라는 휴가 기간 동안, 나도 방송 계획이란 걸 만들기 위해 제법 머리를 굴렸다. 처음부터 한 달 치 계획을 짜는 건 누가 봐도 무리가 있으니까... 그래, 대충 일주일 치 방송 계획만 세워보자는 마음으로. 그렇게 캘린더를 열심히 채워갔던 것이다. 이걸 시청자들에게 보여줬을 때, 어떤 반응이 튀어나올지를 내심 기대하면서.

그래서 지금이다.

[와 일정표;;]

[저게 뭔데 시1발]

[ㄹㅇ 뭔지도 모르겠는 게임 왜케많음]

[나이트폴은 대체 어딨는거죠...? 내가 뭘 잘못봤나]

[저거 ㅈ고전게임인데 대체 어디서 가져온거냐]

[겜많은건 상관없는데 다 뭔지도 모르겠음;; 옛날부터 느낀건데 노르드 씹홍머병 아니냐?]

[그냥 무식이 다시 불러서 계속 정신교육이나 하죠... 선생님]

[와 시청자들의 니즈를 개박살내는 훌륭한 일정표네요;;]

[찐 육수새기 언급 ㄴ]

[아니 공백란은 다 휴방이라는 거임? 나죽어 진짜. 진짜 뒤1진다고]

[아니 캠방이 일정표에 적혀있는데 그럼 안적힌 날은 캠 안킨다는거야??? 진짜야?? 노르드 미쳤어??]

[그와중에 피셔맨 꼽사리 껴있는거 존나 열받네ㅋㅋㅋㅋㅋㅋㅋ]

[이거 누가 가르쳐줌? 말해봐 방송에 불지르러가게]

[그냥 전부 나이트폴로만 채워도 찬양받을텐데... 대체 왜]

엉겨 붙는 무식을 어르고 달래서 보낸 다음이다. 무식 때문에 예정보다 조금 일찍 시작한 방송에서, 나는 계획했던 대로 만들어둔 이번 주 방송 일정표를 깜짝 공개했다. 사전에 알려주지도, 언질을 주지도 않은 깜짝 이벤트. 이른 시간임에도 꽤나 많은 시청자가 모여든 상태였다. 캘린더를 공개하기에 딱 적합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는데.

몇 시간을 투자하며 꽤나 정성스럽게 만든 일정표다. 최대한 다양한 게임, 내 취향에 맞는 게임들을 찾기 위해 얼마나 인터넷을 뒤적거렸던가. 일주일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을 채우는 것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게임을 고를 때도 플레이 타임을 고려해야 하고, 방송에 적합한지 아닌지도 생각해 봐야 하고... 그렇게 어렵게 캘린더를 완성해서는, 뿌듯한 심정으로 파일을 저장했더랬다. 공개했을 때 시청자들의 반응을 기대하면서.

뭔가 커다란 반응이 터져 나오기는 했다. 굉장히 혼란스러운 느낌으로.

"정성스럽게 준비한 건데."

[생각해보니까 괜찮은 거 같음.]

[이거 다 연기임 이분 채팅창 이러는거 보고 희열느껴서 괜히 이러는 거임 다 휘둘리고있네ㅋㅋ]

[캠만 켜주세요 그럼 다 용서해드릴게요]

[우리 노르드 하고 싶은거 다해@@@@]

[선생님 욕하는 새기들 다 죽고싶나?]

[시청자 정성스럽게 엿먹이기]

[방송만 키면 됐지 뭘더바래 쓰레기들아]

[육수들좀쳐내 어우 무식이가 대체 몇몇이여]

[아니ㅋㅋ 빡겜하는 종겜스도 이렇게 다양한 게임 한주에 몰아서하지는 않는다고요 선생님]

트라이앵글 계정을 만들었다고 말했을 때와는 천지차이인 반응이다. 그땐 분명히 긍정적인 채팅만 올라왔던 것 같은데, 지금은 뭔가 부정적인 의견이 더 많은 것 같았다.

일정표가 마음에 든다는 채팅이 툭툭 치고 오르다, 개소리 말라는 반박에 치여 실시간으로 싸움이 일어났다. 무식 때문에 잠깐 통일됐던 채팅창이 특유의 난잡함을 되찾았다. 익숙한 모습에 마음이 가라앉는다.

나열된 게임들이 죄다 생소하다는 채팅이 눈에 들어왔다. 그야 그렇겠지. 일부러 낯설만한 게임만 잔뜩 들고 왔으니까.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주야장천 나이트폴만 연습했던 게 지겨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또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 사람들은 하루 종일 나이트폴만 해도 괜찮은 걸까. 준비된 게임의 가짓수에 불만을 토하는 시청자가 늘어날수록 내 청개구리 심보는 더욱 커져만 갔다. 그럼, 다음 주는 종류를 더 늘려볼까 하는 충동적인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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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자에 적혀있는 게임은 대체 뭔가요 선생님... 들어본 적도 없는데요

"아, 그럼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다들 모르는 게임이라고 너무 반감 갖지 마세요. 알고 보면 다 재밌는 거라니까. 제가 어떻게 고른 건데."

지랄, 옘병 따위의 채팅을 쳐올리는 시청자를 십 분간 차단했다. 잠깐 입 다물고 설명을 들어보면 다 이해가 갈 터. 지금은 여론을 바꾸기 위한 설득에 힘을 쓸 타이밍이다.

"이거, 이건 star bomb라는 게임인데요. 클래식한 탄막 슈팅 게임 느낌이에요. 플레이어 비행선이 UFO 같이 생긴 게 마음에 들더라고. 1탄 보스가 지구에요. 지구 부시는 게임. 신박하지 않아요?"

"수요일에 적어둔 건 my lovely horse. 아, 말박이 게임은 아니에요. 이것도 재밌어 보여서 가져왔어요. 나이트폴 느낌의 중세 시뮬레이션 게임인데, 기병 전술이 위주인 게임 같아. 메인 시나리오가 있는 느낌은 아니라 플레이 타임은 많이 짧을 것 같아요. 말 타고 다니는 조작감이 궁금해서 고른 느낌."

"dig hole. 이것도 이름이 직관적이네. 땅 파고 내려가는 게임이에요. 로그라이크 느낌이 나는데 플레이해본 건 아니라서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땅에서 얻은 재화로 뭐 업그레이드하면서 더 깊이 내려가는 게 목적인 게임...이라고 메모 해놨네요. 깊게 내려가서 뭐 하냐고? 그냥 내려가는 거지. 뭐가 나올지 궁금하잖아."

"그리고 다음은­"

[어지럽네; ㅅㅂ 겜덕질 10년짼데 아는게임이 없노]

[말박...뭐요? 그런 채팅은 그냥 읽지좀마 제발;]

[어우 임진왜란때 생각나네]

[첫번째 겜 방금 찾아봤는데 20년전 게임인데? 이거 맞냐?]

[이사람 왜케 신났음?]

[이런 똥겜은 대체 어디서 찾아오는거야]

[생각해보니까 임진왜란 엔딩 왜 아직도 안올리냐? 채팅보고 잊고 있던거 떠올랐네 씹]

[이 정도면 홍머병을 넘어선 그 무언가인데]

[게임 가져온 라인업 실화냐 진짜 가슴이 답답해진다...]

[아니 은근 재밌어보이는데 왜 그래]

반응은 쉽사리 나아지지 않았다.

확실히 유명한 게임들이 아니기는 했다. 나이트폴은 물론이고, 새비지처럼 어느 정도 인지도가 쌓인 게임을 할 때면 이런 까탈스러운 반응도 없었는데. 익숙지 않은 새로운 이름을 나열하고 있으니 괜히 낯설어 하고 있는 걸까. 부정적으로 비꼬는 채팅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아직 하지도 않았는데, 대체 왜.

괜한 심술이 솟아났다. 어차피 내 방송인데 내가 하고 싶은 게임을 하면 그만인 일이 아닌가. 방송에서 임진왜란을 플레이할 때도, 처음엔 이게 대체 뭐냐는 식의 반응이 많았던 것이다. 나중에는 본인들도 게임에 집중하게 됐으면서. 괜한 투정을 부리는 셈이다.

그래도 채팅창의 여론을 마냥 무시할 수도 없었다. 나야 채팅을 안 읽고 있으면 그만이지만, 당장 채팅창에서 키보드를 치고 있을 수많은 시청자들은 게임에 몰입하기 전까지 불평불만을 쏟아내고 있을 게 아닌가. 아무튼 불타는 채팅을 진화해야 하는 건 언제나 스트리머 본인이었다. 스벅처럼 불명예스러운 칭호를 받고 기뻐하는 변태가 아니라면, 조금 더 방송 분위기 조성에 신경 쓰는 쪽이 맞았다.

시청자 관리 좀 하라는 성현의 잔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있기도 했고.

<선생님제발살려주세요 님이="" 20,000원="" 후원!=""/>

­선생님 제발; 그런 똥겜할거면 차라리 저스틴에서 유행하는 겜을 해주세요ㅠ 업더슼 같은거 하면 다 재밌게 볼텐데..

툭, 하고 치고 들어오는 후원 소리에 이어폰을 뺐다가 다시 꼽는다. 얼마간 열심히 떠들어댔더니 목이 타는 것도 같아서, 재빨리 물을 마셨다. 한 컵 가득히 따라온 물이 어느새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아니, 남들 다 하는 거 하면 조금 그렇잖아요. 여러분도 새로운 게임 보는 게 좋지 않아요?"

[홍머병 말기]

[제발 그냥 나이트폴해!!]

[업더슼좋다 그걸로하자]

[아예 모르는겜보단 재미보장된 게임이 낫지 않을까요?]

[피셔맨할때부터 알아봤다]

[뭘해도 좋습니다 노르드님 원하는 게임 하세요^^]

[업더슼 갓겜인데 업더슼해]

이때다 싶어 게임을 권유하는 모습이 필사적이었다.

마냥 즐겁다고 하고 싶은 게임을 그러모아 가져온 게 실수였을까. 생각해 보면, 과거에도 내 게임 취향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는 했다. 게임을 좋아하는 그룹 사이에 같이 할만한 게임을 골라 가져올 때마다, 뭐 이딴 게임을 가져왔냐면서 핀잔을 들었던 것도 같은데.

사실 그때 가져간 게임 중에는 나이트폴도 포함되어 있었다. 친구들이 아무도 같이 해주지 않아서, 낯선 길드에 들어갔던 것도... 추억이긴 추억이다. 게임 취향 맞는 사람이라는 게 이렇게 드물다는 사실은 제법 쓸쓸한 일이었다. 공감을 구걸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럼 여러분이 추천한 게임도 할 테니까, 그거 클리어하고 나면 제가 골라온 게임도 얌전히 봐주세요. 공평하잖아요."

[굿]

[극적인 타협]

[응 어차피 오늘안에 못깨ㅋㅋㅋㅋㅋ]

[노르드사랑해노르드사랑해노르드사랑해]

[뭘해도 좋으니까 캠만 켜주지 않을래요?]

[노르드의 업더스카이? 이건 귀하네요]

[당분간 업더슼 강점기찾아올 예정]

그제서야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 동의하는 채팅창을 보면, 뭔가 약이 올랐다. 그건 또 뭐 하는 게임이길래 내가 골라온 게임들을 제치고 이렇게 후한 평가를 받는 건지.

"바로 깨고 슈팅 게임하러 갈 거예요."

참 힘차게도 비웃는 채팅창을 보면서, 천천히 손목을 풀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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