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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9화 〉 209 ­ 쓸모없는 게 도움이 될 때도 있어 (209/243)

〈 209화 〉 209 ­ 쓸모없는 게 도움이 될 때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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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잘 보고 있어. 그런데 혹시 이번주 목요일은 휴방하는 거야? 방송 일정표보니까­'

아니. 지금 일정표 같은 걸 언급하면 매번 생방송을 챙겨본다고 실토하는 꼴인데.

겨우 한 줄 채워 넣은 문자를 지워버린다. 써넣을 때와 비교했을 때, 비운다는 행위는 얼마나 손쉽고 간편한지. 손가락을 백스페이스 바에 가볍게 가져다 대고 있으면, 몇 초 안 되는 짧은 순간에 한 줄 문장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미나는 핸드폰 앞에 바짝 붙인 얼굴을 떼어내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무슨 썸 타는 남자한테 문자를 보내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고민이 지나쳤다. 사실 떠올려 보면, 미나는 연인에게 문자를 보낼 때도 이렇게 고민을 한 적은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상대가 고민하게끔 의미심장한 문자를 보내는 게 자신의 장기가 아니던가. 그랬던 자신이, 지금은 바로 문자를 보내기는커녕 몇십 분 동안 단어 하나 적지 못해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니.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노르드, 혜진과 가까워지고 싶다는 제 마음은 정말 진심이라고.

"소파에서 뭐해? 미친년처럼 발 버둥대고 있어, 복 떨어지게."

"너는 애가 말이 점점 거칠어진다. 입 조심해. 너 땜에 나도 방송에서 욕부터 나갈 거 같어."

"니가 출근충을 해봐. 내일도 새벽에 일어날 생각하면 욕이 아주 그냥 척수부터 우러나오지. 뒤집어, 이년아."

입을 삐죽 내밀고 투덜거리며 몸을 뒤집으면, 방금 씻고 나온듯 진한 샴푸 냄새를 풍기는 여성이 소파로 가까이 접근했다. 미나와 같이 자취를 하고 있는 친구 다희였다.

거침없이 제 허리춤을 파고드는 엉덩이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입 밖으로는 짐짓 험한 말을 내뱉던 미나는, 제 몸 쪽으로 등을 기대는 친구를 얌전히 수용했다. 아무튼, 손이 매운 걸로는 다희와 자신을 비교할 수 없었으므로. 오늘도 퇴근한 이후 한층 성질이 사나워진 제 친구를 건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뭔데? 왜 핸드폰 잡고 끙끙 대. 방송 일?"

"응... 방송 일이라 해야 되나. 만나자고 문자 보내야 되는데 어떻게 쓸지 모르겠어."

"문자? 미친... 진짜 중고딩도 아니고 뭔 지랄이래. 신미나랑 존나 안 어울려."

"나도 이상하니까 좀 닥쳐."

진심으로 어처구니없다는 눈빛으로 아래를 꼬나보는 친구의 눈빛에 고개를 가로젓는다. 저게 도움이 될 리가 없었는데. 답답한 마음에 고민하고 있던 사실을 그대로 토해낸 건 잘못된 일이었다. 미나와 다희의 사이는, 신중한 조언보다는 신랄한 조롱이 훨씬 어울리는 사이였다.

공격 준비를 마친 친구 옆에서 태연히 문자 내용을 생각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미나는 곧 문자를 포기하고 핸드폰의 저스틴 앱을 실행했다. 써놓은 내용이 하나도 없어 임시 저장이 제대로 됐는지를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점을, 다행이라고 말해야 할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는 다희를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최상단에 위치한 노르드의 생방송. 작은 미리 보기 화면 속에는 형형색색의 도트 그래픽이 나름대로 화려한 연출을 표현하고 있었다. 방송 아래 설정된 'Retro' 카테고리가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적어도 미나로서는 사용해 본 경험이 없는 카테고리였다. '갓겜'이라는 심플하고 명료한 방송 제목이 인상적이었다.

결국 클리어했구나. 정말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아. 여긴="" 폭탄="" 써서="" 넘어가는="" 맵인="" 거="" 같은데요.="" 그냥="" 무빙으로는="" 탄막="" 피하기가="" 좀="" 힘드네."=""/>

누운 자세로 올려든 핸드폰으로부터 혜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그 사람이야? 노... 노 뭐였는데."

"노르드라니까. 이 말만 세 번은 넘게 했다."

"내가 인터넷 방송을 안 보는데 어떡해? 난 니 닉네임 외우는 것도 오래 걸렸어, 이년아. 우나밍이 뭐냐고 대체."

구시렁대는 다희를 무시하고 노르드의 방송에 시선을 집중했다.

한창 게임이 진행 중인 방송 화면이 난잡하게 다가왔다. 화면 한가득 들어찬 이상한 불꽃들. 적으로 추정되는 비행기에서 미사일을 쏴대는데, 그게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자글자글한 도트 그래픽에서 세월이 느껴졌다. 도트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면, 눈이 아플 정도로 정신없는 그래픽. 미나는 노르드가 뭘 컨트롤하고 있는지도 분간하기 힘들었다.

집중해서 쳐다보면, 화면을 가득 수놓은 불꽃을 사이로 비행 물체 하나가 부유하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노르드가 조작하고 있는 기체. 원반같이 생긴 비행체가 빨갛고 파란 원형 탄막 사이의 미묘한 틈을 뚫고 움직였다. 한 끗 차이로 사선 사이를 넘나드는 게, 계속 보고 있으면 아찔해질 지경이다. 게임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는 미나의 입에서도 감탄이 나오는 플레이였다. '역시'라고.

시청자 반응도 미나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와'라는 짧은 외마디 채팅이 한순간에 채팅창을 가득 뒤덮는다. 사실 생소하게 느껴지는 채팅창은 아니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도, 미나는 이와 비슷한 채팅창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자신도 컴퓨터 앞에 앉아 부계정으로 열심히 채팅창을 밀어올리고 있었다는 점일까.

그건 꽤나 입을 벌어지게 만드는 방송이었다.

게임에 재능이 있는 스트리머. 겜잘스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특정 게임에서 랭커까지 들어갈 정도로 특출난 모습을 보이는 플레이어는, 다른 게임을 하더라도 유난히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고는 했다. 그게 꼭 같은 장르의 게임이 아니더라도 그랬다. 미나만 하더라도 저스틴에서 유행하는 게임을 할 때면 매번 게임 실력이 대단하다는 칭찬을 듣고는 했던 것이다. 칭찬에 박하다는 저수들에게서 직접들은 칭찬이다. 나름대로 자부심을 갖고 있을 법도 했다.

그게, 특출난 정도를 넘어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준 노르드라면 어떨까.

이미 여러 게임으로 증명한 적이 있던 노르드다. 새비지만 하더라도, 몰래 저격을 들어갔던 미나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사살당한 기억이 선명했으니까. 게임을 했다 하면 매번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는 노르드는, 이미 저스틴 시청자들 대부분에게 재능충의 화신이나 다를 바 없었다. '저 사람이라면 분명 뭐든 잘하겠지'라는, 선명한 이미지. 게임에 적응하지 못하고 쩔쩔매는 모습을 상상하는 게 오히려 어색하게 다가올 지경이다.

그러나, 사실만 확인해서 따지고 보면 노르드가 그렇게 다양한 게임을 클리어한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노르드를 종합 게임 스트리머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었다. 그건 방송에서 플레이하는 게임의 종류를 논하기 이전의 문제다. 노르드는 종겜스라고 불리는 방송인들과는 방송의 성격이 많이 달랐다. 새로운 신작 게임이 발표된다는 소식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철 지난 대작 게임에 손을 대지도 않는다. 다양한 게임이라고 방송에 가져오는 것들은 대체로 지나치게 독특했다. 너무 오래된 고전 게임이나, 아무도 하지 않는 낚시 게임. 혹은 생방송에는 너무 부적합한 특별한 장르의 게임들.

결국 노르드의 메인은 언제나 나이트폴이었다. 유행하는 인디 게임에도 편승하는 일이 거의 없었으니. 나이트폴을 제외하면, 다른 게임 스트리머와 비교했을 때 얼마나 게임을 잘하는지에 대해선 비교하기 힘들었다. 노르드가, 소위 플레이어가 고통받는 게임이라 불리는 매운맛 게임을 플레이해도 아무런 고통 없이 순탄하게 클리어할 수 있을지. 그건 미나에게도 궁금한 점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노르드는 잘했다. 너무 잘했다. 지켜보던 미나가 치밀어 오르는 울분에 방송 창을 닫고는 머리를 식히러 나갈 정도로.

미나가 업 더 스카이를 클리어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고생했던가. 어림잡아 열 시간, 방송으로 치면 이틀이 넘는 시간을 저 게임에 투자했다. 중요한 건 그렇게 클리어를 한 다음에도 게임을 못한다는 평가는 듣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니, 오히려 꽤나 빨리 클리어했다며 역시 겜잘스라는 평가를 들었지. 그래서 엘튜브 채널에도 게임을 잘해서 빨리 클리어 한 것처럼 편집해서 올렸건만.

누가 그랬던가, 업 더 스카이는 순수한 암기 게임이라고. 게임을 진행할수록 플레이어에게 가혹한, 피지컬의 한계치를 요구하는 게임. 판단을 내리고 행동하기까지 주어진 시간이 너무나 짧았다. 결국 플레이어는 모든 기습 패턴과 대처를 경험하면서 취득할 수밖에 없었다. 순간적인 반응만으로 그걸 흘려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여기선 뭐가 튀어나오니 회피를 해야 하고, 그다음엔 바로 엄폐를 준비해야 하는 식의 패턴 암기. 당연히 암기를 하기 위해선 적어도 한번 이상 그 패턴을 경험해 볼 수밖에 없었으니. 업 더 스카이의 플레이 타임이 길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노르드의 플레이는 근본부터가 달랐다. 시작부터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다른 스트리머는 반드시 죽고 넘어간 악명 높은 죽음의 구간들을, 순간적인 반응으로 한 번에 뛰어넘는다. 채팅창을 가득 채우는 물음표와는 상관없다는듯 태연히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노르드의 모습은 방송의 백미였다. 그 순간 혜진의 얼굴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지. 매번 캠 좀 켜달라고 떼를 쓰는 악질 육수를 혐오하는 미나로써도, 그때만큼은 같은 의견이었다.

고난도로 평가받는 구간도 한두 번 죽고 나서 가볍게 통과해낸 노르드다. 예습해왔다고 발작하는 채팅창도 사실을 파악하고 잠잠해질 무렵. 미나는 오랜만에 노르드의 방송을 중도 종료하고 밖으로 나왔다. 혜진의 방송을 보면서도 계속 자신의 플레이가 머릿속에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눈앞에 보이는 노르드의 플레이와 제 허접한 플레이가 얼마나 비교되던지. 그건 쉽게 버틸 수 없었다.

"남자도 아니고, 참나. 무슨 데이트 신청이라도 하냐? 뭔 꼴값이야. 그냥 대충 언제 시간 비냐고 보내. 그쪽도 맘 있으면 알아서 답장 보내겠지."

"그렇게 쉬운 일 아니야. 이 사람 엄청 유명해서... 에이씨, 머글한테 내가 무슨 설명을 하겠니. 가만히 있어봐."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 끙끙대고 있건만, 가볍게 말을 뱉는 제 친구년이 얄밉기 짝이 없다.

미나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혜진과 만나고 싶다는 생각. 그건 대회 날부터 꾸준히 이어진 생각이다. 다만, 어느샌가 방송과 연관된 아이디어를 떼어놓기 힘들어진 게 문제였다.

단순히 혜진과 만나는 걸 넘어서, 진행하고 싶은 야방 컨텐츠나 엘튜브 컨텐츠 따위가 새록새록 떠오르고 있던 것이다. 아마, 혜진의 브이로그를 시청한 다음부터일까. 단순히 좀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생각 속에 방송과 관련된 아이디어가 자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이런 걸 함께 진행하면 더 재밌을지 않을까 하고. 생각의 연쇄를 끊기 힘들 지경이다.

모기 짓으로 보일 것 같다는 의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 엮여서 관심을 빨아먹으려는 모기. 지금껏 대기업 스트리머와의 합방을 피해오던 이유가 무엇인가. 다 모기 짓을 그만두라고 몰려들 상대 스트리머의 팬덤을 의식했던 탓인데. 노르드에게 접근한다고 그런 식의 시선이 향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최근 그녀의 인기를 생각하면, 예상되는 정도는 오히려 훨씬 더 크고 강렬했다.

사실, 미나에겐 시청자들의 어그로 이전에 혜진이 보낼 시선이 더 중요했다. 합방을 하자고, 만나자고 달려는 제 문자를 흔한 모기 짓의 일환으로 생각하지 않을지. 자신이 혜진의 입장이라면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게, 미나 스스로가 내린 결론이었다. 미나가 그 짧은 문자를 보내는데 망설이고 있는 까닭은 이랬다.

"아­. 몰라. 머리 아파. 그냥 다 때려치우고 술이나 한잔하자고 할까? 혜진이, 술 좋아하는 것 같던데."

"어휴, 경우 없는 년."

미나가 핸드폰을 배에 올려두고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을 즈음이다.

지잉­

핸드폰을 올려둔 배에서 지잉, 하고 진동이 울렸다.

자연스럽게 핸드폰을 집어 든 미나가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쳐다보기 싫은, 보기만 해도 짜증이 솟는 대상에게서 문자가 날아온 까닭이다. 잠깐 문자를 읽지도 않고 대상을 차단할까 고민한 미나는, 이내 한숨을 내쉬고선 손가락을 움직였다. 아무리 그래도 무슨 문자인지 내용은 확인하고 차단을 하는 게 맞는 순서였다.

<쓰레기벅/>

우나밍님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저희가 같이 대회에 참여하지 않았습니까? 대회연이라고 할까요~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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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플 대항전이니 뒤풀이도 커플 느낌으로! 더블 데이트라고 하면 느낌이 바로 오잖아요!? 이럼 방송적으로도 살릴 수 있지 않을까해서 알아봤는데, 뒤풀이같이 할 커플이 마땅치가 않아서... 혹시 나밍님은 이런 곳에 관심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연락드립니다. 파피루스님한테도 같은 문자 보냈습니다. 정말 재밌는 그림 나올 것 같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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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혹시 대회때 도발에 마음이 상하셨다면!! 제가 사죄하겠습니다... 방송 그림 살리기 위해 움직였던 거 아시죠!!?? 결코 조롱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탁­

"존나 열받지만 일단 쓰벅으로 등급 상승."

"뭐라는 거야."

미나가 스벅의 이름을 다시 설정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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