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1화 〉 211 첫인상은 생각보다 오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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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인상은 제법 오래 지속되고는 했다.
인상이라는 건 생각보다 포괄적인 것이다. 단순한 얼굴 생김새에 국한된 문제가 아닌 복장이나 자세, 태도, 표정.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사람의 분위기 따위가 전부 뭉뚱그려져 한 사람의 인상을 만들어내고는 했으니. 자기 뜻대로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해도 그걸 쉽게 바꿀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미나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첫인상은 매우 중요했다. 첫인상에 실망해 섣불리 눈을 돌리면 내면이 훌륭한 사람을 놓칠 수도 있다니. 미나에겐 그저 우습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내면이 훌륭하다면, 그 훌륭한 내면이 알아서 좋은 인상으로 승화되는 법이다. 남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사람치고 속이 말끔한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건 그저 가꾸기를 싫어해 내쳐진 사람들이 꺼내는 변명일 뿐이라고, 미나는 생각했다. 적어도 미나가 지금껏 경험한 바에 따르면 그랬다.
그만큼 첫인상은 중요하다. 미나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그 사람을 마주했을 때의 첫인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걸 무시하고 오래 사귄다고 해서 숨겨진 알찬 내면 따위를 발견할 가능성은 한없이 낮았다. 현실에서 반전 매력이라는 말이 얼마나 덧없게 느껴지는지. 정말 그 사람에게 매력이 있다면, 그건 어떻게든 겉으로 튀어나오기 마련인데.
"미나야, 왜 그렇게 멍하니 서있어. 쌀쌀한데 어디 먼저 들어가 있을까?"
미나가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이다. 익숙한 파피루스, 태우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깔끔하게 정리된 머리. 계란형의 얼굴에 흔한 뿔테안경.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큰 키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단정한 갈색 코트를 입었다. 팔을 뻗으면 닿을 듯한 가까운 거리. 낮게 깔린 중저음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미나는 태우의 첫인상을 떠올렸다. 일 년이 조금 더 지났을까. 저스틴 측에서 진행하는 게임 행사에서 처음 마주했을 때의 기억이다. 그때도 분명, 지금처럼 말끔한 모습을 하고 행사장을 돌아다녔더랬다. 야방 중이라며 카메라를 들이미는 스트리머 중 하나였던가. 그래도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렌즈부터 들이댄 스트리머는 아니었다. 그랬으면, 지금 이 자리에 같이 서있는 일도 없었겠지.
눈이 마주쳤을 때, 먼저 접근해서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 쪽이 누구였더라. 그건 아마 미나 자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억지로 웃는 낯짝을 만들고 이곳저곳에 인사를 건네던 미나로써는 좋은 기억을 떠올리기 힘들었다. 그런 걸 감안하면, 평범하다고 생각한 태우의 첫인상은 결코 나쁜 편이 아니었다. 무난하다는 것. 대체로 사람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미나에게, 평범하다는 첫인상은 꽤나 상위권에 속하는 평가였다.
어떻게든 인지도를 쌓고 싶어서 이런저런 발악을 이어나가던 때. 태우가 파피루스임을 알아보고 고개를 숙였던 것도 당연한 일이다. 마주해서 인사를 나누고, 같은 핸드폰 화면에 들어가서는. 방송이 송출되는 얼마간 양쪽 끝으로 올라간 입꼬리를 열심히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래, 태우는 적어도 그런 자신을 끈덕지게 붙잡아 두지는 않았더랬다. 합방을 하더라도 사적으로는 질척대지 않는 깔끔함. 그게 지금까지 파피루스와 우나밍의 인연이 이어지게끔 만든 원동력이었다.
"곧 약속 시간인데요, 뭐. 조금만 더 기다리지. 사실 오빠가 추운 거 아니에요?"
"에이, 무슨. 나는 하나도 안 춥지."
너스레를 떨며 팔을 터는 몸동작도 꼴사납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첫인상이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미나의 인간관계도, 마냥 첫인상 하나에 지배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관계가 지속되면 정이라는 게 생기기 마련이다. 설령 그게 고운 정이 아닌, 미운 정이라고 할지라도. 파피루스와 이런저런 합방으로 인연을 이어 온 지도 어느새 일 년. 얼굴을 마주하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야, 일찍 와계셨네요?"
아, 그랬다. 나쁜 쪽과 비교하면, 평범한 관계도 갑작스레 평가가 우상향하고는 하는 것이다.
태우와 미나는 거의 동시에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른손을 허공에 대고 휘휘 젓는 남자. 반대쪽 손은 바지 주머니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거리를 좁혀오는데, 다리에 힘을 주지 않는 건지 발을 내디딜 때마다 다리가 조금씩 좌우로 흔들렸다. 그 불안정한 자세 때문인지 평범히 걷는 자세도 왠지 건들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것도, 첫인상이 만들어낸 선입견일까. 미나는 굳이 스스로를 설득하고 싶지 않았다.
"스벅님 오셨네요. 그, 노르드님은 같이...?"
"제가 같이 가자고 했는데, 그렇게 번거롭게 만날 필요가 있냐고 까여서요. 저 혼자 왔죠. 아마 곧 오실걸요? 오면서 연락했는데 근처라고 하셨어요."
역시, 노르드는 현명하구나. 스벅의 제안을 걷어찼다는 사실 하나로 미나의 안에서 혜진의 평가가 한층 더 상승했다.
"아, 나밍님! 감사합니다. 솔직히 거절당할 줄 알았거든요. 제가, 크흠. 아무튼 진짜 고마워요."
"아뇨, 뭘요. 저도 재밌어 보여서 오케이 한 건데."
"그쵸? 두 분도 아직 대회 뒤풀이 안 했다고 했을 때 촉이 딱! 하고 왔죠. 이게 아무래도 두 명만 있으면 뭔가 야방 켜기도 좀 그렇잖아요? 진짜 사귀냐면서 우결충들도 몰려들 것 같고. 네 명이면 방송 그림도 살고 훨씬 좋잖아요. 두 분 다 너무 고맙네요."
스벅은 그렇게 너스레를 늘어놓고는, 사람 좋은 웃음으로 인사를 마무리했다. 굵직한 얼굴선에, 남자답다는 평가를 들을만한 얼굴을 하고는 사람이 왜 이렇게 경박한지. 미나는 내키지 않는 속내를 숨기고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미나는 자신의 삐뚤어진 속내를 겉으로 드러낼 만큼 눈치 없는 인간은 아니었다.
스벅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별개로, 미나도 그의 방송적인 감과 능력은 인정하고 있는바였다. 정확히 말하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탄탄한 고정 시청자와 꾸준히 늘어나는 엘튜브 구독자. 인터넷 방송을 하는 인간의 능력이란 고스란히 수치로 나타나는 게 아니던가. 열등감에 차서 이런저런 악담을 퍼부어도, 미나는 결국 성공한 방송인의 능력은 인정하고 납득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부러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은 저렇게 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말씀드렸던 대로 방송은 일단 식당 들어가서 시작할 거예요. 식당에도 양해 드렸으니까 그건 걱정 마시고. 얼마나 할지는 모르겠네요. 다들 불편하지만 않으시면 조금 길게 할까도 생각 중인데, 어떠세요?"
"저야 괜찮죠. 대회 썰 풀기 시작하면 대화 화제도 충분하고. 미나나 노르드님 의견이 더 중요할 거 같은데요. 술이 들어가면 방송 키고 있는 게 조금 그럴 수도 있어서..."
"그래요? 여기 여성분들 두 분 다 술 잘 드시지 않나? 나밍님 어때요?"
"분위기에 따라 다르니까요. 한 병 정도는 괜찮을 거 같아요."
거짓말이다. 미나의 주량은 세 병을 가뿐히 넘기는 수준이었다.
"아 그래요? 생각보다 잘 못 드시네. 엄청 잘 드실 거 같은 이미진데."
"그게 무슨..."
"농담이에요, 농담."
재밌는 드립이라면서 웃어대는 스벅의 정강이가 눈에 들어왔다. 미나가 신고 있는 힐의 굽은 뾰족했다.
"어디쯤 왔나 연락해 볼게요. 다 모였는데 계속 여기서 기다리기도 뭐 하니까. 시간 좀 걸릴 거 같으면 먼저 식당 가서 기다리는 게 낫겠어요. 오늘 꽤 쌀쌀해서."
아직 약속 시간은 십 분도 넘게 남아있었다. 제각각인 방송 패턴으로 약속 시간을 정하기가 힘든 스트리머들의 생태를 고려했을 때, 이렇게 이른 시간에 과반수가 넘는 사람이 모인 건 특기할 만한 사항이었다. 그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나머지 한 명이 조금 늦게 도착하는 것도, 크게 의아한 일은 아니었다.
어제, 노르드의 방송이 몇 시까지 이어졌던가. 미나는 기괴만 모양을 그리며 깊게 땅굴을 파내려 가던 어제의 혜진을 떠올렸다. 그 기묘한 게임만 클리어하고 나면 곧장 나이트폴을 하겠다는 말만 믿고, 대체 몇 명의 시청자가 땅 파는 행위를 지켜보고 있었는지.
미나가 방송을 마치고 노르드의 방송을 확인했을 때에도, 혜진의 땅 파기는 여전히 진행 중에 있었다. 뒤늦게 들어간 방송. 멘틀까지 뚫을 거냐며 울분을 토해내던 시청자 하나의 채팅이 제법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노르드는 결국 땅 파는 게임의 엔딩을 보고 나이트폴을 할 수 있었을까. 미나는 그게 궁금했다.
"여보세요, 선생님?"
"...계속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거야?"
"그런가 보죠."
"예? 예. 네, 맞는데. 어 혹시 안경 매장 안 보이세요? 횡단보도 옆에. 저희 그쪽에 있거든요? 네. 그쪽 아."
뭐라 설명을 이어가던 스벅이 입가에서 핸드폰을 떼어내고는 멀뚱히 액정을 바라본다. 반대쪽에서 통화를 끊어버린 모양이다. 두꺼운 눈썹이 삐뚜름히 기울어진 게 어처구니없다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듯싶었다.
도로 맞은편, 마침 초록불이 켜진 횡단보도를 천천히 가로지르는 혜진을 가장 먼저 발견한 건 미나였다.
첫인상이 인간관계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말했던가. 무난하기 그지없던 태우의 첫인상도, 밉상으로 다가왔던 스벅의 첫인상도. 노르드, 혜진에 비하면 얕게 느껴졌다. 뚜렷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람은 그만큼 첫인상도 뚜렷하게 남기기 마련이다. 미나는 혜진과 처음으로 마주했을 당시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의 긴장감보다 더 선명할 정도로.
걸어오는 혜진을 바라보면, 자연스레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혜진을 몇 번 더 마주해야 이 플래시백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쉽게 익숙해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다들 일찍 오셨네요."
"어이구. 전화 뚝하고 끊어버리더니, 바로 오셨네. 오늘은 안 늦으셨네요?"
"맨날 늦는 것처럼 말하지 마세요."
제법 익숙하다는 듯 대화를 주고받는다. 미나는 자신이 스벅을 부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경우가 생길 줄은 몰랐는데.
미나의 시선이 빠르게 노르드의 전신을 훑어내렸다. 허리춤보다 살짝 아래로 내려오는 갈색 숏 코트. 추위 때문에 여민 옷깃 사이로 흰색 터틀넥 니트가 눈에 들어온다. 하의는 밝은 베이지색의 부츠컷 슬랙스를 입었는데, 새로 사 입은 옷처럼 옷감이 빳빳했다.
대충 정리해서 내린 검은 생머리가 바람결에 따라 흩날렸다.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미나는, 이내 혜진의 눈이 정확히 자신의 시선과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걸음하고 반 정도. 힐을 신었기 때문인지, 미나의 눈높이가 조금 더 높았다. 살짝 고개를 올려 자신의 눈을 쳐다보는 혜진. 미나는 숨을 삼켰다.
"미나 씨, 안녕하세요. 대회 끝나고 오랜만이네요."
"응, 혜진아."
침묵.
스스로가 내뱉었음에도 혜진이라는 이름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당혹감에 별다른 말을 이어가지 못하는 자신이 얼마나 수치스러운지. 자신이 지금 침대에 누워있다면, 이불이라도 벅벅 차올릴 것 같은 기분이다.
미나는 들키지 않게 살짝 혀를 깨물었다. 들어간 힘이 조금 과했는지, 혀끝에서 살짝 비릿한 맛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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