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3화 〉 213 나눠 먹으면 기쁨이 두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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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시간에 맞춰 여섯 시쯤 방송을 키겠다는 스벅의 약속은, 여느 때처럼 쉽게 으스러진 상태였다. 한 입으로 두말하기를 빼먹지 않고 실천하는 남자. 방송도 켜지지 않은 스벅의 채널에 미리 들어와 생방송의 붉은빛이 들어오길 기다리던 시청자들은 기어코 채팅창에 불씨를 피워내기 시작했다.
약속 시간으로부터 삼십 분이 지난 시점이다.
스벅이 악질이라 평가받는 이유는, 매번 그만큼의 장작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지각 정도로는 쉽게 피어오르지 않을 불씨. 그는 불에 잘 타는 방송 소재를 잔뜩 구비해두고는 했다.
이를테면, 방송을 기다리는 시청자의 애간장을 태울만한 매력적인 방송 컨텐츠가 바로 그것이다. 여러 날을 고민해서 만들어낸 신규 컨텐츠나, 유명한 스트리머와의 합방, 혹은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던 대회 뒤풀이.
일단 일정이 잡히면, 본인의 방송에서 앵무새라도 된 것처럼 그날을 기대하라며 떠들어대는 것이다. 그렇게 지켜보는 애청자들이 그날을 기다릴 수밖에 없게끔 유도하고는, 방송 당일 지각을 하거나 방송 진행에 차질이 생겨 문제를 일으키고 만다. 그럼 기대감을 한껏 부풀린 시청자는 참지 못하고 방송에 불을 지피고는 했다.
여느 방송인이라면 한 번도 견디지 못할 그런 상황을, 스벅은 몇 번이나 스스로 만들어왔는지. 이젠 불 이모티콘으로 가득 도배된 방송 채팅창도 하나의 밈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큰 실수를 하더라도 '스벅이라면 그럴 수 있지'라며 쉽게 넘어갈 정도였으니. 한순간의 실수로 나락으로 떨어지기 쉬운 인터넷 방송계에서 일종의 보험을 만들어낸 셈이다. 이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일까.
오늘 스벅의 방송에 미리 모여든 시청자들에게도 스벅의 지각은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지각 정도야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사람들이다. 중요한 건, 그렇게 홍보한 방송이 재미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방송만 기대만큼의 재미를 보장한다면, 지각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으니.
결국, 방송이 켜진 건 불어난 시청자들이 채팅창을 새빨갛게 물들일 무렵이었다. 시침이 6보다는 7에 더 가까워질 즈음. 방송이 시작됐다는 알람과 함께 스벅의 채널에서도 생방송 표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모티콘이 도배되던 채팅 사이로 외마디 감탄사가 섞여들었다.
소리가 먹먹하다.
시끄럽다기 보다, 마치 물속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 드는 사운드였다. 뭐라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데도 먹먹함에 묻힌 탓에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방송이 켜졌음에도 검게 칠해진 화면은 호기심만 서서히 부풀렸다.
"해놔서 그런가. 이거 최신폰인데 안 될 리가... 아, 이제 제대로 나온다. 이게 야방용 마이크거든요? 음질 거의 집에서 방송하는 것처럼 나갈 거예요. 자, 이제 방송 켜졌습니다."
물 찬 소리가 사라짐과 동시에 선명한 화면이 드러났다.
넓지 않은 방이다. 벽지부터 원목 느낌이 나게끔 인테리어된 고풍스러운 방. 천장에서부터 내려온 조명이 방 안 곳곳에 스며들어 따스함이 느껴졌다. 방송 송출을 확인하기 위함인지 가까이 다가온 스벅의 얼굴이 화면의 절반을 넘게 차지했다. 당장 비키라는 험한 반응이 채팅창을 밀어올렸다.
"거 참, 그새를 못 참고. 됐어요, 됐어. 이제 소리 잘 들리죠? 저희끼리 떠드느라 방송 키는 게 좀 늦었습니다. 대신 조금 길게 할 테니까 너무 불 지피지는 마시고."
"여기서도 채팅창 못 보겠네요. 얼굴 가까이 가져가야 보이겠는데요? 어우, 저도 야방은 거의 안 해봐서 그런가 조금 어색하네요, 이거."
"그냥 하던 대로 하세요. 시청자분들도 자연스러운 쪽을 좋아하실걸요? 우리 회식 지켜보는 느낌으로다가."
스벅이 들이밀었던 머리를 치우면, 가로막혔던 시야가 한 번에 탁 트이는 듯했다. 넓어진 시야로 회식 자리의 풍경이 그대로 나타났다.
한창 식사가 진행되던 와중일까. 핸드폰이 거치된 테이블 위에는 거창한 상이 차려진 상태였다. 직사각형 모양의 커다란 목재 테이블. 고급스럽게 플레이팅된 회 접시가 가운데 자리를 차지했다.
테이블을 둘러싸고 네 사람이 자리했는데, 카메라와 가까운 쪽에 자리한 사람은 스벅과 파피루스였다. 방송 채팅창을 확인하기 위함인지 두 쌍의 눈동자가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제일 가까우니까 시청자 의견은 제가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채팅 캐치하는 능력 하나는 또 일품이거든요? 믿고 맡기세요. 어... 아, 남자들은 꺼지고 여성분들 보여달라고. 암요 암요. 우리 갓청자님들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제가 몸을 비켜드려야죠. 자, 선생님! 인사해달라고 하네요."
비아냥거리며 물러난 스벅의 옆으로 반쯤 가려져있던 혜진이 온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녹색 빛이 감도는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도중이다. 스벅의 말을 듣고 동작을 멈춘 것 같았다. 허공에 술잔을 띄운 채로, 잔을 들고 있던 하얀 손가락이 술잔의 밑단을 톡톡 두드렸다. 그런 다음에야 혜진이 카메라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백한 피부에 미려한 얼굴. 술기운에 반쯤 감긴 눈에서는 감정을 읽어내기 힘들었다. 기어코 들고 있던 술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둔 혜진은, 앉은 자세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없이 건네는 인사. 왼손을 들어 올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다시 쓸어넘길 때까지, 방송은 유난히 조용했다. 간혹 식기가 덜그럭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와 ㅅㅂ]
[스벅이랑 자리좀 바꿔주세요]
[눈나ㅏㅏㅏㅏ 나죽어ㅓㅓㅓㅓ]
[여기 어디임?]
[나밍이도 보여줘ㅠ]
[노르드사랑해]
[진짜 미쳤다...]
[제발 선생님도 방송 켜주십셔 ]
"나 나왔을 때랑 반응 차이 봐라, 진짜. 아, 나밍님도 인사 좀 해달라네요."
"여러분들, 안냥! 저희는 한창 맛있게 먹고 있었습니다. 여기 음식 되게 맛있어요!"
혜진의 맞은편, 테이블 쪽으로 불쑥 고개를 치켜든 미나가 손을 흔들었다. 활짝 웃는 표정에서 밝은 에너지가 넘쳐흐르는 듯했다.
"저기 계시죠? 사전에 공지한 대로, 오늘은 커플 대항전 파밍 팀하고 더블데이트 형식으로 모였습니다. 뭐 컨텐츠 이름에 데이트 껴 넣었다고 우결로 엮일라는 거 아니니까 메일 테러하지는 마시고. 대회 뒤풀이 기념으로 모인 건데 의외로 대회 얘기는 별로 안 했네요. 밥이 맛있어서 그런가. 뭐 억지로 대회 얘기하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그, 아무튼 저희가 압도적인 실력으로 우승해서 할 말이 없으실 것 같기도 하고. 큼."
"버스타신 스벅님이 그런 말 하는 건 모양새가 좀."
"어허, 버스 승객이 얼마나 대단한 건데. 그것도 엄연히 기여한 겁니다. 그쵸, 선생님?"
"예."
"...성의 너무 없는 거 아니야?"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스벅이 꺼내든 화제는 금방 자리의 흐름을 주도했다. 얼마 지나지 않은 커플 대항전에 대한 비하인드. 한층 언성을 높인 목소리에 이목이 집중되는 건 시청자들도 매한가지라, 끈덕지게 노르드를 찾던 채팅창도 금세 대화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대화를 주도하는 건 스벅이었다. 가장 경계했던 상대부터, 부스 안에서 긴장감에 손을 떨었다는 썰까지. 이 순간을 위해 참았다는 듯 풀어내는 이야기에는 끝이 없었다. 간혹 눈을 흘끗하며 채팅창을 확인하는데, 원하는 반응을 캐치하는 속도가 대단히 빨랐다. 마주한 파피루스도 자연스럽게 대화에 동참했다.
열심히 주절대는 스벅의 옆자리, 술잔을 기울이는 혜진의 모습이 종종 카메라에 포착됐다. 젓가락을 집은 오른손이 테이블 중앙의 회 한 점을 집어갔다. 조심스레 제 앞까지 회를 들고 가 입으로 밀어 넣는 과정은 느긋하고 여유로웠다. 스벅과 파피루스가 함께 대화를 나누는 중임에도, 그걸 집중해서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한 테이블에 별개의 영역이 만들어졌다. 혜진의 잔이 빌 때마다 새로이 술을 채워 넣는 미나가 간간이 그 영역에 발을 들일 뿐이었다.
"그래서, 힘든 걸로 따지면 첫 경기가 더 힘들었던 것 같은데요? 적어도 제가 느끼는 압박감은 그때가 제일 컸죠. 파피루스님하고 랭크 차이가 얼마나 나는데."
"아... 그 게임은 진짜 잘했죠, 스벅님이. 최대한 빨리 끝내고 이 대 일 구도 만들려고 했는데 결국 드리블 당한 거잖아요. 어우, 그 경기 복기하면서 진짜 정신 못 차렸지. 저 때문에 진 경기라서."
"전략은 비슷했네요? 우리도 선생님이 나밍님 뚫는 게 전략이었는데. 나밍님이 노르드님 상대로 너무 잘 버텨서 힘들 뻔한 경기를 제가 딱, 일 인분 이상하면서 이긴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저보고 개버스충이라는 소리 좀 그만해야 돼요. 이건 확실히 집고 넘어가야... 선생님?"
동의를 구하기 위해 고개를 돌린 스벅이 마주한 건 또 한 번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혜진이었다.
알 수 없는 기시감이 고개를 갸웃하게 했다. 저 모습. 미려하다 싶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술을 마시고 있는 혜진의 모습이 왜 이리 익숙하게 느껴지는지. 생각해 보면 자신이 대화를 주도하는 동안 저 장면을 몇 차례나 목격한 것 같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아니, 곁눈질로 확인한 게 이 정도였으니 진상을 파헤치면 몇 잔 째인지 헤아리기도 힘들었다.
스벅이 빠르게 혜진의 얼굴을 훑어내렸다. 티 한 점 없는 깨끗한 얼굴은 이전과 다를 게 없는 것 같았다. 볼따구 쪽에 발갛게 홍조가 일어나지도 않았고, 몸을 흐느적거리는 기색도 없었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이쪽을 마주 바라보는 동공도 풀린 것 같지는 않고. 별로 취기가 느껴지지는 않는 몰골이다. 그나마 하나를 꼽자면 조금 힘이 풀린 듯 나른하게 내려앉은 눈꺼풀 정도일까. 그것 하나만 가지고 사람을 취객으로 몰아가기에는 증거가 턱없이 부족했다.
스물둘. 속으로 혜진의 나이를 가늠한 스벅이 고개를 저었다. 술 먹을 때 실수하기에 딱 좋은 나이기는 했으나... 아무리 그래도 그 노르드가 취해서 술 주정을 부릴까 하고. 그전에 있었던 뒤풀이 때도 멀쩡한 안색으로 집으로 돌아갔던 혜진이다. 당시 뒤풀이가 제법 길었다는 걸 고려하면, 일단 혜진의 주량이 낮은 것 같지는 않았다.
스벅이 자연스레 술병이 있는 쪽으로 팔을 내뻗었다.
"아니, 무슨 벌써 반이 넘게 비었어. 이거 병도 엄청 큰데. 선생님, 너무 빠르게 달리는 거 아니에요?"
"반이나."
"...그래요, 반이나. 그, 괜찮으신 거 맞죠? 이거 도수가 꽤 높은 술이라."
"사케가 맛있네요. 안주가 좋아서 그런가."
뭔가 동문서답을 하는 것 같은데, 평소에도 엉뚱한 인간이라 구별을 할 수가 없었다. 이게 취해서 이러는 건지, 아니면 멀쩡한 상태인데 저러는 건지. 발음이 정상인 걸 보면 역시 아직 괜찮은 것 같은데... 스벅의 고뇌가 깊어질 무렵이다.
"부족하면 더 시키면 되죠. 왜 눈치를 주고 그러세요?"
"무슨 눈치를 줬다고 그래요?"
스벅이 미나를 쳐다봤다.
대화를 나눈 사이, 혜진과 대작을 이어나간 쪽은 이쪽이었던 모양이다. 혜진과 달리 미나의 볼에는 선명한 홍조가 나타난 상태였다. 이전에 보였던 밝은 미소는 어디로 갔는지,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 웃음기가 사라진 미나는 의외로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당황스러운 와중에도, 스벅은 미나의 손가락 사이에 담배 하나가 끼어든 모습을 상상했다. 몸 이곳저곳에서 소싯적에 놀아본 본새가 드러나는 듯했다. 기분 탓인지, 단순히 마주한 눈동자가 이쪽을 째려보는 것 같았다.
자기 앞 술잔을 들어 올린 미나는, 이내 단숨에 내용물을 비우고는 탁, 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에 술잔을 내려놨다. 술잔을 내려둔 손은 곧장 술병으로 움직였다. 익숙한 솜씨로 병을 잡은 미나가 혜진을 향해 병을 기울였다. 병 주둥이가 내려앉는 곳으로, 자연스럽게 잔 하나가 자리한다. 태연하게 잔을 집어 든 건 혜진의 손이었다.
"아니... 무슨 대작을 하러 오셨나. 나밍님 분명히 주량 한 병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정해진 주량 같은 게 어딨어요? 그냥 들어가는 대로 마시는 거지."
평범하게 대답을 하는 것 같은데도 알 수 없는 표독스러움이 느껴지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할 말을 잃은 스벅이 조용히 입을 다물면, 어느샌가 술병을 받아든 혜진이 미나의 잔에 술을 채워 넣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 광경이 계속된 걸까. 어쩐지 채팅창이 어수선하다 했더니, 그 이유는 확실했다. 잠깐 이걸 말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며 술병을 든 혜진을 바라보고 있을 때다.
"한 잔 드릴까요? 아직 차가운데."
...친절하기도 하셔라.
스벅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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