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16화 〉 216 ­ 취하면 다들 그렇잖아 (216/243)

〈 216화 〉 216 ­ 취하면 다들 그렇잖아

* * *

얼마간 정강이 부근을 두드리던 미나의 발도 이제는 잠잠했다.

의식도 하지 않고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가 멈칫, 다른 손으로 배를 쓸어내린다. 내가 배가 부른가. 요상할 정도로 얄팍한 뱃가죽은 꽤나 많은 양의 음식물을 퍼부었음에도 부풀어 오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명치 즈음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감각은 인지하면 할수록 점점 커졌다. 포만감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찝찝한 불쾌함. 더부룩함을 성토하는 건 위장이었던 모양이다.

그토록 맛있어 보이던 음식들도 더 이상 식욕을 자극하지 않았다. 식욕이라는 건 인간의 욕구 중에서 가장 빨리 식어버리는 욕구였다. 젓가락을 그대로 내리고는 술잔으로 손을 뻗었다. 알코올을 속에다 부었을 때 내장 소독 작용이 일어나면 좋을 텐데. 왜 소독 작용은 살갗에만 적용되는 걸까.

"한 자안, 더 줄까?"

매가리 없는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이듯 들려왔다.

미나였다. 얼굴이 번졌다. 아니, 번진 건 화장이지.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있는 것도 마냥 귀찮았다. 적잖은 수고를 들여 미나 쪽을 바라보면, 가만히 있어도 몸이 좌우로 흔들리는 꼴이 뭔가 성치 않아 보였다. 달팽이관 어딘가에 손상을 입은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자세히 보면 미나뿐만 아니라 얼음 병도 같이 흔들린다. 위태로워 보였다. 빨리 손을 뻗어서 술병을 내려놔야지. 떨어져서 깨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얼음은 쉽게 깨지잖아.

탁­

병에 얹은 손에 힘을 준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얼음 병이 테이블 위에 안착했다. 병에 닿은 손가락이 차갑다. 마침 손끝에 부드럽고 따듯한 무언가가 걸려서 손가락을 쫙 펼쳤다. 그렇게 접촉하는 면적을 넓히고 넓히자, 물기가 묻어있던 손가락이 금방 온기를 되찾았다.

뭔가 하고 보면 그건 미나의 손이었다. 차갑지도 않은지 아직까지 병을 꽉 붙잡고 있는, 따듯한 손.

"...뭐야. 지금 나 꼬시는 거야?"

담배가 어울리는 손. 우연찮게도 내가 사귄 여자들은 담배를 피우는 경우가 많았다. 개중에는 만난 다음에도 한참 동안 흡연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던 친구도 있더랬지. 정작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문제인데, 지레 겁을 먹어서는. 함께 잔뜩 술을 마시고 나서야 흡연자라고 고백했던 것이다. 눈앞에서 담배를 꼬나무는, 제법 인상적인 연출로.

"따듯하네요."

술에 찌든 혀가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 건지.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이 조금 뭉개진 것 같았다.

따듯한 손과 담배의 상관관계에 대한 고찰을 이어가려다 금방 생각을 바꾼다. 자료 부족. 그녀의 손이 따듯했는지 차가웠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손이라도 자주 잡아볼걸.

어지러워서 고장 난 머리는 옛사람의 얼굴조차 제대로 떠올리지 못했다. 희끄무레한 아무개의 얼굴. 대신 눈앞에 있는 미나를 잡아다 붙인다. 담배를 떠올리게 한다는, 결정적인 공통점이 있기 때문인지 상상 속 그림이 의외로 잘 어울렸다.

"...따뜻해? 뭐야, 진짜 취했­"

"미나 씨, 담배 좋아하세요?"

왠지 모르게 답변이 늦었다. 들끓는 호기심. 대답을 촉구한다는 의미로 미나의 손등을 두어 번 두드렸다. 그녀가 계속 내 다리를 두드렸던 것 마냥.

"무슨, 무슨 그런 질문을 해. 뭔 헛소리를 하는 거야­."

"보통 담배 피우냐고 물어보지 않아요? 좋아하냐고 물어보는 사람은 처음 보는 것 같아."

"끄읍. 여러 생각이 드네요. 방송 끄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고, 괜히 껐다는 생각도 들고... 모르겠다, 이제."

"...잘 껐죠. 방종 타이밍이 너무 극적이어서 많이 걸리긴 하는데... 거기서 구라였다고 무마해 봤자 지랄 난 채팅창 감당 못하지. 더 했으면 뭐라도 더 터졌을걸요? 당장 지금만 해도... 어우. 저도 취기 올라와요. 어지럽네."

"으음. 그쵸? 업로드각이고 나발이고 적당히 하는 게 맞지, 음.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면 거기서 성 불감증이라는 드립을 칠 수 있는 거야. 이게 노르드님이 저 표정으로 말하면 존나 농담처럼 안 보이는 거 알죠? 나만 진담으로 받은 거 아니잖아. 진땀 뺐네, 진짜로.

둘이 몇 병을 마신 거야... 2차고 나발이고 정신 나가겠어. 아, 근데 나밍 씨 담배 피우는 거 맞아요? 괜히 나도 궁금한데?"

"...그쪽은 닥치세요, 제발."

청해도 은근히 뇌 용량을 많이 잡아먹는 행위였던가. 옆에서 뭐라 웅성거리는 소리를 일일이 주워 담아 해석하고 싶지 않았다. 흘려 넘긴 소리는 머리를 거치지 않고 저 어딘가로 쓸려 내려간다.

담배를 떠올렸기 때문인지 입안이 텁텁했다. 속은 더부룩하고, 입은 텁텁하고, 목에선 갈증이 느껴지고, 머리는 어지러운. 불평만 나오는 상황 속에서 괜히 기분만 좋은 것이다. 무심코 잔을 입에 가져갔다가, 그 안이 비어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한다. 차가운 술을 몇 번이고 머금었던 술잔은 내용물이 없음에도 찬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담배랑 잘 어울려서요. 담배 피우고 있으면 더 예쁠 것 같아, 미나 씨는."

그래, 생각해 보면 나는 그런 걸 좋아했던 것 같다. 함께 마주 서서 담배를 꼬나무는 행위에서 어떤 무드를 느꼈던가. 아니면 그냥 담배를 태우던 맥락을 좋아했을지도 모르겠다. 잠자리가 끝난 뒤. 노곤함이 전신으로 퍼지는 그 순간은 확실히 담배와 잘 어울렸다.

"뭐... 뭐, 무슨­"

"­방송 끄길 잘 했다. 진짜 좆 될 뻔했네."

"...미나 망가졌는데요? 와, 저건 무슨 작업 멘트야. 나도 반할 뻔했어."

취기가 심하게 올라오는지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는 미나를 앞에 두고 술병을 잡아들었다.

표면에 물기가 가득한 무거운 얼음 병. 안을 가득 채웠던 투명한 술이 거의 바닥을 보이는 상태였음에도, 한 손으로 잡아들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왼손으로 밑바닥을 대충 받친 뒤에야 안정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젠 빈약한 육체에 불평을 쏟아내고 싶지도 않았다. 조만간 아침 운동에 팔운동 코스를 추가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지.

사케가 술잔에 또르르, 하고 떨어졌다. 이게 마지막 잔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괜히 욕심이 솟는다. 둥글게 생긴 술잔의 테두리에 닿을 때까지. 얼굴을 조금 가까이 대고는 조심스레 팔을 기울였다. 왠지 모르게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니, 눈이 떨리는 건가.

"너는... 아니, 됐어. 나랑 같이 화장실 가자. 저희 둘이 나갔다 올게요. 괜찮죠?"

"네? 갑자기? 뭐 담배빵 지지러 가는 거 아니죠? 이거 제가 선생님 지켜줘야 되는 그림­"

"천천히 갔다와. 사람 많은 곳 알아서 잘 피하고."

"응. 고마워요."

뭐야.

표면에 살짝 걸친 술을 보고 만족감에 젖어 있었는데.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미나가 내 쪽을 바라보더니 손짓했다. 당장 일어나라는 제스처. 뒤늦게 흘려 넘긴 대화를 주워 담은 나는 자리에서 주춤거렸다. 분명 화장실 뭐라고 한 것 같았다. 여자란 생명체는 반드시 화장실에 같이 가야 하는 존재인가. 아까는 혼자 갔다 왔으면서, 대체 왜.

좁은 방광을 비워낸 지도 얼마 지나지 않았다. 또다시 일어서는 게 꺼려지는 건 당연했다. 우리가 자리한 방은 식당 끝자락에 위치해서, 반대편에 있는 화장실까지 가는 건 너무 귀찮은 일이었다. 사실 편의를 위해 반쯤 벗어둔 신발을 다시 신어야 한다는 게 더 싫었다. 움직이고 싶지 않아.

안타깝게도 미나는 내 거절을 수용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 소심한 거절 의사를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또각또각 하는 구두 소리를 내며 걸어온 미나는 내 손목을 잡아챘다. 가까워진 얼굴에서 쏘아대는 눈초리가 매섭기 짝이 없었다. 그제야 나는 이게 단순히 화장실을 같이 가자는 제안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뭘 잘못했던가.

...술 배분을 잘못했나? 흘러넘칠 정도로 가득 채워 줬어야 했나.

"뭐해? 일어나."

나는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상했던 대로, 미나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화장실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화장실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레 식당 밖으로 걸어갔다. 오른쪽 손목이 붙잡힌 나는, 미나가 가는 방향에 따라 목줄이 걸린 개처럼 끌려갈 뿐이었다. 힐을 신었으면서 속도는 왜 그렇게 빠른 건지. 나는 어디로 가는 건지 질문도 하지 못하고 미나를 따라가는데 급급했다.

"계단, 조심하세요."

"응."

밖으로 나갈 때까지 나눈 대화라고는 고작해야 저 한마디가 전부였다.

결국 나는 미나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당연하게도 밖은 추웠다. 급하게 나오느라 외투도 걸치지 않은 상태. 별로 두꺼운 편도 아닌 니트는 차가운 저녁 공기를 온전히 막아주지 못했다. 찬바람이 스며들듯 옷 사이로 침투하면, 어지러운 머리가 조금은 맑아지는 것 같았다. 그새를 못 참고 흩날리는 머리를 왼손으로 쓸어넘긴다. 달아오른 볼따구가 빠르게 식어갔다.

식당 건물 밖으로 나온 뒤에도 미나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제법 많은 사람이 보이는 인도를 쓱­ 하고 둘러보더니, 금세 다시 내 팔을 잡아끌었다. 입김이 나오나 허공에다 숨을 뱉어대던 나는 체념하고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머리로는 미나가 날 끌고 나온 이유가 무엇인지 온갖 추측을 반복하면서. 사실, 막상 나오고 보니 썩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폐부에 들어온 찬 공기가 제법 상쾌하게 느껴졌다.

망설이지 않고 다리를 움직이던 미나가 멈춰 선 곳은, 건물과 건물 사이에 위치한 작은 골목이었다. 인도에 늘어선 입간판에 의해 교묘히 가려진 장소.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새어들어올 뿐인 골목은 당연히도 어둡고 인적이 보이지 않았다.

과연, 담배를 피우기엔 참 적절한 장소였다.

"방송하고 있어도 말했을 거 같아, 너. 얼마나 취했는지도 모르겠어."

벽 앞에 서서 나를 마주한 미나가 말했다. 건물 그림자에 반쯤 가려졌음에도, 날 쏘아보는 눈빛만은 유독 선명했다.

"많이 취하진 않았어요."

"그렇게 마셔놓고? 나도 거의­ 으응. 됐어. 이런 말 하려고 끌고 나온 건 아니니까."

미나는 고개를 젓고는 걸쳐 입은 외투의 안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금세, 그녀의 손에 담배 한 갑과 라이터가 잡혀 나왔다. 왼손 검지로 자연스럽게 담뱃갑을 열어젖힌 그녀는, 익숙한 솜씨로 담배 한 대를 빼어 물었다.

립스틱이 많이 묻어나지 않게, 필터 끝자락을 살짝 무는 모습. 불을 붙이기 위해 살짝 고개를 숙이고 바람을 막기 위해 한 손으로 가림막을 만든다. 이윽고 담배에 불을 붙인 미나가 허공에다 연기 한 모금을 흩뿌렸다.

역시, 잘 어울렸다.

"잘 어울리잖아요."

"...그거 진짜 칭찬이니? 누가 들어도 그건 비꼬는 말이잖아. 여자 스트리머한테 담배 피울 거 같다고 말하는 게."

"예쁘니까 하는 말인데."

"­예쁘다고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하지마. 기분 이상하니까."

다시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다. 커피향 섞인 담배 냄새가 내가 서있는 자리까지 진하게 다가왔다. 뭔가 몽롱한 와중에도 나는 미나의 담배가 냄새를 숨기기 힘든 타입이라는 걸 생각하고 있었다. 저런 걸 피우는 걸 보면, 골초는 아닌 것 같다는 참 쓸모없는 추측과 함께. 언제나 에너지를 함부로 낭비하는 머리통이다.

"...한 대 피울래?"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 내가 어떻게 보였는지. 잠시 말없이 담배를 태우던 미나가 내 쪽으로 담뱃갑을 내밀었다.

자연스레 뻗어나가는 팔을 억지로 몸에 붙인다. 아무튼 이런 순간에 혜진의 흡연 아다를 떼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아뇨, 저는 금연 중이에요."

그래, 금연 중이지. 조금 복합적인 의미기는 했지만.

"하아, 금연. 나 담배 피우는 거 구경만 할 거야? 내 약점만 드러내는 것 같잖아. 나도 너 보고 싶은데."

"왜 약점이에요? 이렇게 예... 멋있는데."

"...됐어. 멋있다는 말도 금지."

커뮤니케이션 도중 특정 어휘 사용을 금지당하는 것도 드문 일이었다. 홍조가 짙어진 미나의 얼굴. 괜히 금칙어로 설정된 단어를 남발하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혹시, 전에 사귄 남자가 애연가였어? 비밀로 할 테니까 말해줘. 나도 비밀 하나 알려준 셈이잖아."

미나가 손가락 사이로 담배를 굴리며 말했다.

아. 미나가 던진 질문은 정곡이었다. 무심코 고개를 끄덕일 뻔할 정도로 정확히 맥을 짚은 질문.

나는 대답을 대신해 미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담배 한 개비를 끼어둔 미나의 손가락이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담배 연기가 향긋하게 느껴지면, 그건 분명 중증이라는 증거일 텐데. 술과 담배를 연결해서 인지하는 습관은 내 뇌리 깊숙이 새겨졌나 싶었다. 적어도 이게 청정한 혜진의 생각은 아닐 것 아닌가.

"잠시만요."

"...응?"

대답을 기대하는 미나에게서, 담배 한 개비를 훔쳐 들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담배 필터의 부드러운 감촉이 입술에 닿았다. 깊게 빨고 싶다는 충동을 참아낸 건, 어느 정도 술기운을 몰아낸 찬바람 덕이었다.

부드러운 연기가 담배를 타고 목구멍 언저리까지 밀려 들어왔다. 매캐함보다는 커피 향기가 훨씬 짙게 다가왔다. 연기를 핥아내듯 혀를 움직이다, 허망한 짓거리를 그만두고 담배를 떼어냈다. 입술 틈새 사이로 연기가 새어 나왔다. 폐까지 다 빨아들이지도 않은 담배 연기. 입술을 핥은 혀끝에서 아련한 단맛이 느껴졌다.

최초라고 뭐든 극적인 체험이 되는 건 아니었다. 내 진짜 첫 흡연은 어떤 기분이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떠오르지도 않았으니. 오래간만에 피운 담배는 내게 큰 감흥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기침이 나올 정도로 깊게 연기를 빨았다면 또 모르지만, 그러려고 담배를 뺏어든 건 아니었으니까.

"대답 대신 이걸로 퉁쳐요. 저도 보여드렸으니까 됐죠? 자, 담배 다시 받으시고­ 미나 씨?"

미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선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담배를 피우던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대고는, 입을 틀어막는 자세. 자세히 보면 손이 살짝 떨리는 것도 같았는데... 아직도 적잖이 어지러웠던 나는 그게 미나의 떨림인지 아닌지를 제대로 구분하기 힘들었다.

"미나 씨, 담배 다 타요."

무안하게 들어 올린 손 위로, 담배 불씨만 희미하게 아른거렸다.

* *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