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20화 〉 220 ­ 모든 게임에는 엔딩이 있다 (220/243)

〈 220화 〉 220 ­ 모든 게임에는 엔딩이 있다

* * *

밝은 빛이 가시고 시야가 트였을 때, 내가 서있는 곳은 초목이 우거진 숲 한복판이었다.

온통 선명한 초록색이 가득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이 솟은 밑동 두꺼운 나무들. 나무 잎사귀들은 하도 커다랗고 무성해서, 분명 낮 시간일 숲이 조금 어둡게 느껴질 지경이다. 밝은 햇살이 무성한 잎사귀에 부딪혀 바스러졌다. 자연적인 가림막은 그 효과가 탁월해서, 그걸 모두 뚫고 바닥까지 도달하는 햇빛은 아주 미약했다.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숲이 아닌 깊고 깊은 열대우림에 가까워 보였다. 무성한 초목 사이로 온갖 생명체가 도사리고 있을 것 같은.

그러니까 이게 내 스타팅 포인트였다. 오픈한 서버에 비집고 들어와 캐릭터를 생성한 뒤, 본격적으로 게임을 시작한 지점. 이게 광고 방송을 위해 오픈된 특별한 서버여서 그런 건지, 접속할 때도 별다른 컷신이나 오프닝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런 맥락 없이 시작과 동시에 정글에 떨어진 상황. 맥락이 없는 것도 이 정도면 인정할만했다.

"조작감이 생각보다 묵직하네요. 캐주얼한 느낌일 줄 알았는데."

[그래픽 개좋네]

[왜케 어두움?]

[정글인가]

[아니 시,바 안그래도 캠 어두운데 모니터 조명까지 줄어들면 ㄹㅇ 얼굴 안보이잖아 퍼소 개새기들아]

[모션 실감나는게 ㄹㅇ 갓겜인데?]

천천히 몸을 움직인다.

키보드를 누를 때마다 반응해서 움직이는 몸동작이 전체적으로 무겁게 와닿았다. 일반적인 캐주얼 FPS 게임을 할 때와는 느낌부터가 달랐다. 그런 가벼운 게임은 몸에 무게가 없는 것처럼 모든 움직임이 빠르게 이루어지고는 하는데, 이 게임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스페이스 바를 누르면 부스럭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시야가 살짝 위로 붕 떴다가 털썩 가라앉으며 흔들린다. 떨어진 반동으로 비틀거리는 몸. 점프뿐만 아니라 달리다가 멈춰 섰을 때나, 팔을 휘두를 때. 격한 동작 다음에는 조금씩 딜레이가 발생했다. 조작감이 무겁게 느껴지는 건 이 때문이리라. 가벼운 게임을 목표로 한다면 이렇게 디테일한 조작감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을 텐데.

문득 머릿속으로 이것과 비슷한 조작감을 가진 게임 하나가 지나갔다. 나이트폴. 무슨 샌드박스 게임이 하드코어 PVP 게임과 같은 조작감을 의도한다는 말인가. 누굴 때려죽이라고.

"이 게임은 목적이 뭘까요."

[몰?루]

[UI가 거의 없네 무슨;]

[일단 생존부터]

[파밍해야지]

[욕구같은건 없나?]

당연하게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처음 보는 게임에 호기심을 표하는 건 채팅창도 마찬가지였다. 시청자들에게서 신규 오픈한 게임의 정보를 구한다는 건 미련하고 멍청한 짓이다. 출처가 본인 뇌에서 비롯된 정보들이 얼마나 판을 치는지. 혹여나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한들, 십 초만 기다려도 수십 개씩 올라오는 채팅 속에서 올바른 정보를 골라낼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리가 없다. 그게 가능할 정도면 그 머리로 스스로 판단하는 쪽이 훨씬 나은 결과를 불러올 게 뻔하지.

게임에 대한 얼마 안 되는 정보들을 종합했다. 코어, 그리고 게이트. 내가 떨어진 울창한 정글이 하나의 코어고, 게이트는 코어와 코어를 연결하는 일종의 통로였다. 플레이어는 게이트를 통해 게임에 존재하는 수많은 코어를 오가며 다양한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였나. 쇼케이스에 가까운 광고 방송에서 그걸 전부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가 의문이었으나, 아무튼 내가 아는 것도 그것뿐이었으니. 일단 어딘가에 존재할 게이트를 찾는 걸 목적으로 삼는 게 좋겠다.

주어진 맥락이 없으니 지금 이게 광고 방송이 맞는지도 의문이 생긴다. 광고라는 건 기본적으로 상품을 홍보하기 위함이 아닌가. 게임 정보를 감추는 것도 마케팅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나. 고도의 마케팅 전략 같은 건 너무 어려웠다.

일단 주변을 탐색할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수색을 시작했다. 묵직한 조작감과는 별개로, 게임의 인터페이스는 깔끔했다. 화면 우측 상단에 표시된 미니맵. 반대편에는 체력으로 추정되는 게이지 밑으로 목마름이나 허기 따위의 욕구가 드러난다. 조금씩 줄어드는 욕구 게이지를 생각하면, 어떤 숨겨진 스토리 라인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이상 일단은 생존을 목표로 돌아다니는 게 첫 번째 목표였다. 마냥 편안하게 집을 짓고 정착하는 게임은 아닌 것 같았다.

주변에는 상호작용 가능한 오브젝트가 가득했다.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 잎사귀, 이상하게 생긴 열매나 돌멩이. 채집을 시작하면 플레이어 캐릭터는 익숙한 솜씨로 열매를 따고 돌을 주워든다. 재료로 추정되는 잡스러운 아이템을 줍다 보면 화면 하단에 무슨 레시피처럼 보이는 조합식이 툴팁처럼 나타났다. 나무와 돌을 합성해서 만드는 돌도끼, 돌칼, 돌창... 원시적인 도구부터 만들어나가는 건 다른 샌드박스 게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 내 취향은 아니었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생존에만 힘쓰는 게임에 무슨 재미를 느낀다고. 뚝딱뚝딱 돌도끼를 만드는 광경을 보고 약간의 허탈함이 솟아났다. 이게 철도끼가 되든 강철도끼가 되든 무슨 차이가 있다는 말인가. 별 감동도 없을 것 같은데.

왼쪽 이어폰에서 으르렁대는 소리가 들려온 건 그쯤이었다.

캐릭터는 아직도 도끼를 제작하는 중이었다. 화면 중단에 표시된 게이지를 확인하면 절반을 조금 넘어섰다. 제작 중에 다른 조작을 가하면 기껏 채운 게이지가 초기화될 텐데. 시간이 아깝다는 내 심리를 읽기라도 하는 건지 짐승의 소리가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이젠 부스럭거리는 발소리도 지척에서 들려왔다.

"공포 게임이잖아요, 이거."

말은 그렇게 해도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런 게임에서 야생 짐승이 한두 마리씩 달려드는 것 정도는 가벼운 해프닝에 불과했다. 무난한 생존 라이프를 재밌게 만들어주기 위한 가벼운 위협이랄까. 내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캐치하자마자 제작을 캔슬하지 않았던 것도, 이게 큰 위협이 아니라는 생각이 바닥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짐승이란 가죽과 뼈를 헌납하는 존재인 것이다. 울부짖는 소리가 생각보다 사실적이라 놀라기 했지만, 기겁을 하고 도망칠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 제작 중인 도끼가 완성되면 처리할 수 있지 않을까. 게이지가 줄어드는 걸 바라보면서 속도를 가늠했다. 점점 가까워지는 기척. 인공지능이 플레이어에게 적대적으로 설정됐는지 망설임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 기세대로면, 거리가 좁혀지는 즉시 공격해 올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삼, 이, 일... 완성. 제작을 마친 캐릭터가 오른손으로 완성된 도끼를 붙잡는다. 그 즉시,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마우스를 틀었다. 때마침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턱밑까지 도달한 순간이다.

그림자 같은 형체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게 무엇인지, 실체를 파악할 시간은 없었다. 준비한 대로 미리 어깨춤까지 당긴 도끼를 사정없이 휘두른다. 아주 짧은 사이 짐승의 노란 안광이 일렁거리는 지점을 포착하고­ 정확히 그곳을 향해 마우스를 당겼다.

으적. 뼈가 박살 나는 소리와 함께 피가 비산했다. 충격으로 시야가 거칠게 흔들렸다.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던 짐승을 후려친 반동이다. 계속해서 이동키를 누르고 있으면, 가까스로 몸을 추스른 캐릭터가 전방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들어 올린 도끼에서 핏방울이 떨어졌다.

도끼를 맞고 나뒹군 짐승이 쓰러진 곳은 몇 걸음 밖이었다. 생긴 걸 보면 평범한 늑대 같은데. 머리를 정통으로 후려쳤는데도 즉사하지 않았는지, 사지를 버둥대며 경련하는 모습이 제법 현실적이었다. 그대로 코앞까지 접근했다. 땅을 바라보고 마우스를 클릭하면, 하늘로 치켜든 도끼를 땅 밑으로 강하게 내려찍는다. 으적거리는 소리가 짐승의 단말마를 대신했다. 조작감이 묵직한 만큼 뒤따르는 타격감도 나쁘지 않았다.

아울­

얼씨구.

파밍 할 게 있을까 싶어 시체를 뒤적거리다, 음산한 울음소리를 듣고 주변을 돌아본다. 오픈월드에 가까운 시스템에서 딱히 특별한 연출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햇빛이 잘 들지 않는 어두운 숲에서 울리는 울음소리. 사방에서 가까워지는 부스럭대는 소리가 스산하게 다가왔다. 손에 들린 피 묻은 돌도끼 하나가 이렇게 빈약하게 느껴질 수 있는지. 습관적으로 채팅창을 한 번 확인했다가, 분위기가 왜 이리 어둡냐는 채팅을 찾고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이 게임, 사실 하드코어한 생존 게임일지도 모른다.

"그냥 불 피울까요? 열대우림도 불 지르면 다 타나. 습도가 높으면 타다 마는 거 아니에요?"

[ㄱㄱㄱ 일단 지르고 생각]

[아니 근데 이걸 어케 살았냐ㅋㅋㅋㅋ 진짜 미쳤네... 겜 존나 가혹하다]

[참 잘도 멈추겠어요 선생님]

[횃불만 만들수는 없나?]

[벌써 뒤진 스트리머들 속출 중임. 뒤지면 겜 끝이라나봄]

[터플도 늑대한테 물려서 죽었다 ㅋㅋㅋㅋㅋ 노르드랑 같은 맵인거같은데]

[씹찐따 새,끼들이 타스언급 계속하네 걍 닥치고 봐]

[습도 높은건 어떻게 알아; 걍 게이트나 찾아보죠]

[중계질 ㄴ]

[이거 광고 맞냐?]

[노르드는 신이야]

현재 시각 7시 30분. 더 코어의 특별 서버가 열리고 삼십 분이 지난 시점이다.

게임 속 시간의 흐름은 현실과 궤를 달리해서, 해가 가라앉은 숲속에 자리한 내 방송 화면은 이미 어두워진지 오래였다.

낮에도 어둡게 느껴졌던 숲 한복판이다. 밤이 된 직후 숲속은 시커먼 어둠에 잠긴 듯했다. 색채를 잃은 어둠 속, 암순응한 시야 사이로 사물의 형체만 희미하게 모습을 비출 뿐이었다. 빼곡한 나무와 수풀 사이. 바닥 한편에 흐릿하게 비추는 형상은, 모두 생명을 잃고 쓰러진 늑대의 시체였다.

한두 마리가 아니다. 주저앉아 휴식 중인 내 주변에는 심상치 않은 숫자의 시체가 쌓여 있었다. 숲에 밤이 오기까지, 달려드는 늑대 무리를 쉬지 않고 상대한 결과였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돌도끼는 진작 망가져서 버려진지 오래. 좌측 상단에 표기된 체력과 욕구 게이지는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철도끼는 지랄. 몇십 분간 이어진 게임에서 발전한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지역 탐색을 했나, 아니면 게이트라도 찾았나. 새로운 도구 제작이고 나발이고, 전투에 집중하느라 다른 건 제대로 신경 쓰지도 못했다. 당장은 갈증을 채울 수 있는 수단도 존재하지 않았다. 널브러진 늑대의 피라도 마실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아쉽게도 그런 건 불가능했다.

채팅창에서 올라오는 이름도 모르는 다른 스트리머의 소식이 그나마의 위안거리였다. 나만 운이 없던 게 아니라, 원래 이렇게 되먹었다고 생각하면 납득할 수 있었다. 죽으면 부활하지 못한다는 소식은 새롭지도 않았다. 밑도 끝도 없는 늑대 무리의 습격을 받아내다 보면 어렴풋이 다가오는 직감이 있던 것이다. 애초부터 이 게임은 가혹하게 만들어진 게임이라고.

느긋한 샌드박스 게임. 웃기지도 않았다.

허기를 채우고자 늑대의 생살을 씹어먹으며 각종 스테이터스를 확인했다. RPG처럼 명확한 레벨이 존재하지는 않았으나, 무슨 행동을 하는지에 따라 숙련도가 올라가는 시스템. 아니나 다를까 공백에 가깝던 상태창에는 새로운 숙련도 항목이 다수 추가되어 있었다. 한번 습득을 하기 전까지는 따로 표기되지도 않는 모양이다.

늘어난 항목 대부분이 전투와 관련된 것들이다. 당연하다. 게임이 시작되고 내가 한 거라고는 늑대랑 투닥거린 것뿐이었으니. 어떤 게 올랐나 하고 항목을 하나씩 읽어내려가다 보면,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게임의 목적과 관련된, 나름대로 원초적인 물음.

"혹시 게이트 찾은 사람은 있어요? 다른 맵으로 넘어가는 거."

[ㅇㅇ 꽤 많던데. 랜덤젠인듯?]

[이미 만난 사람도 있음]

[선생님도 피 좀 그만보고 교류좀 하고 삽시다...]

[아 저쪽에서 먼저 덤볐다고]

[갈증때문에 뒤지겠는데요]

게임에 대한 가닥을 잡은 것도 같았다.

* *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