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3화 〉 223 맡은 바는 확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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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제외하고는 광원 하나 없는 황무지 밤은 지독히도 어두웠다.
밤이 깊었다. 해가 중천에 뜬 낮에도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를 보기 힘든 황폐한 땅이다. 어둠이 완연히 내려앉은 밤, 살아 움직이는 기척은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희미하게 내리쬐는 별빛을 빌려 캄캄한 황무지를 훑어내리면, 척박하게 갈라진 땅 너머로 거대한 암석처럼 솟아오른 산이 눈에 들어온다. 어둠에 가려진 비경이다. 나무 한 그루 없이 메마른 산맥은 기암괴석을 닮아서, 황무지를 내려다보는 거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고요한 황무지 한복판. 짙은 어둠은 무거운 정적을 동반했다. 세밀하게 귀를 기울여도 들려오는 소리가 없다. 간혹 잔잔히 불어오는 바람에 모래가 쓸려내려가는 희미한 소리가 귀를 간지럽힐 뿐이었다.
"아, 알고 있네요."
노르드가 작게 속삭였다.
네 번째 코어였다. 정글과 화산지대, 사막을 지나 건너온 코어. 게이트를 넘자마자 수색을 시작한 노르드는 어느 순간 끊겨버린 사냥감의 자취를 확인하고 멈춰 선 상태였다.
코어를 거치면서 발달된 시야는 짙은 어둠을 뚫고 광활한 황무지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다. 시야를 막아서는 엄폐물 따위가 거의 없었음에도, 사방은 고요하고 공허했다. 게이트 근처에서 시작된 흔적을 쫓아 추적을 개시한 시점. 엷게 남아있던 흔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금이 간 유리 판처럼 갈라진 땅 위, 불그스름하게 남아있는 얼룩이 마지막 단서였다. 예민한 감각에도 기척은 잡히지 않았다.
"여기서 딱 끊긴 걸 보면 의도적으로 흔적을 지운 건데. 음."
노르드는 기묘한 움직임으로 주변 자리를 맴돌았다. 제자리에 서있지 않고 이리저리 움직이는데, 그렇다고 특정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건 아니었다. 불규칙적인 움직임. 걷는 자취를 따라 선을 이어 그리면 커다란 원이 그려졌다. 정서불안을 운운하는 채팅이 점차 늘어났다.
"모닥불이라도 피우고 기다려볼까요? 첫 타만 피할 수 있으면 할만해."
긍정과 부정의 의견이 뒤섞인 채팅창이 또 한 번 발작을 일으켰다. 코어를 지나오는 과정에서 노르드의 기행이 나타날 때마다 계속 반복되고 있는 패턴이다. 처음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갈수록 노르드의 의견에 동의를 표하는 시청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일까. 지나오는 과정에서 모두가 의문을 던진 노르드의 선택이 단 한 번도 잘못된 결과로 이어지지 않은 까닭이다. 누적된 성과에 대한 신뢰였다.
지금까지 죽인 생존자만 여덟 명. 킬 포인트를 올릴 때마다 상승한 건 숙련도 뿐만이 아니었다. 소문을 듣고 찾아왔는지, 아니면 자신이 시청하던 스트리머를 죽인 당사자가 누군지 확인하기 위함인지. 노르드의 방송은 지금 저스틴 방송 목록 첫 번째에 위치한 상태였다. 방송 미리보기 밑, 광고 방송이라는 타이틀엔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마지막 흔적이 남은 지점 주변에서 빙빙 배회하던 노르드는 돌연 오른손에 들고 있던 손도끼를 가슴께로 들어 올렸다. 자연스럽게 따라붙은 왼손이 도끼날을 천천히 쓰다듬는다. 어둠에 가려진 탓에 광택이 흐르진 않았으나, 그건 확실히 돌 따위로 만들어진 허술한 무기가 아니었다. 투박하게 생긴 날 표면에서 단단한 질감이 느껴졌다.
변한 건 무기뿐만이 아니었다. 의복이라고 부르기 힘들었던 성긴 가죽은 어디로 갔는지, 지금 노르드가 착용한 장비는 표면에 반질거리는 유분이 느껴지는 새까만 가죽 옷이었다. 전신에 두른 검은 가죽 옷은 황무지의 어둠과 동화한 듯했다. 의도치 않은 보호색. 가까이서 바라보지 않는 한 어둠 속에서 판별하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투둑
노르드의 발밑으로 마른 목재가 떨어졌다. 한동안 멈추지 않고 다리를 움직이던 노르드가 주저앉더니 모닥불을 만들기 시작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메마른 땅 위에 작은 나무더미가 만들어졌다. 더 코어 제작 목록에서도 가장 상단부에 위치한 간단한 모닥불이었다.
노르드는 망설이지 않고 부싯돌을 꺼내 들었다.
습도가 높지 않은 마른 땅이다. 한 번 피워 올린 불은 빠른 속도로 마른 풀잎과 장작을 집어삼켰다. 모닥불을 중심으로 삽시간에 불빛이 번진다. 새까맣게 어둠이 내려앉은 황야에서, 모닥불을 피워 올린 지점만 환하게 빛났다. 그 속에서 검은 가죽 옷을 입고 앉은 노르드의 존재감은 도드라질 수밖에 없었다.
"채팅창 렉 걸리니까 슬로우 모드 좀 걸어주세요. 아. 이미 건 거였어? 왜들 그러세요. 불러내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잖아."
여전히 어두운 황야의 밤은 작은 모닥불 정도로 밀어낼 수 없었다. 불빛이 닿는 반경에서 벗어나면, 짙은 어둠은 이전보다 한층 더 두꺼워진 듯했다. 황무지에서 불빛을 피워 올리는 강수에도 불구하고, 즉각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무 타는 소리가 요란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불 꺼진 무대에서 조명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언제 습격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태평한 건 노르드뿐이었다. 불빛에 반응했는지, 갈라진 땅 틈새로 기어 올라온 도마뱀 하나를 한 손으로 잡아챈다. 영문도 모르고 잡힌 도마뱀은 곧장 나무 꼬치에 꿰여 불속으로 들어갔다. 다 구워진 도마뱀을 들어 올리기까지, 노르드는 앉은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당장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것처럼 난리가 난 채팅창의 모습과는 지극히 대조적이었다.
노르드가 도마뱀을 덥석 물어뜯은 순간이다.
그간의 사냥으로 예민하게 단련된 노르드의 감각에도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전조가 없는 공격. 피슉, 하고 들리는 이질적인 효과음이 공격을 당했음을 뒤늦게 알려왔다. 들고 있던 도마뱀이 모닥불 위로 떨어졌다.
곧장 도끼를 쥐고 일어선 노르드의 몸이 흔들렸다.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선명했던 시야가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눈앞에서 밝게 빛나던 모닥불이 저 멀리 위치한 신기루처럼 일렁거렸다. 이어질 후속 공격에 대비해 움직이려던 노르드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독인가? 이거 방향키 입력 거꾸로 먹는 거 같은데."
온갖 초성과 갈고리, 그럴 줄 알았다는 비아냥과 지금이라도 도망치라는 훈수, 아직 제대로 상황 파악을 못한 시청자가 뒤섞였다. 과부하가 걸린 채팅창이 눈에 띄게 버벅거렸다.
어디선가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휘청거리던 노르드가 한순간 몸을 꺾듯 방향을 비틀었다. 오른쪽. 바로 옆으로 쉬익, 하고 섬뜩한 소리가 지나갔다. 귓가를 스치고 간 듯 날카로운 기척이 유난히 가까웠다. 채팅창이 재차 술렁거렸다.
이어진 사격은 한 발로 그치지 않았다. 섬뜩한 소리가 연달아 이어졌다. 독의 효과가 제대로 발휘됐는지, 노르드의 시야는 지금 일렁거리는 걸 넘어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짙은 어둠이 아니더라도 사물을 분간하기는 힘들어 보일 정도였다.
멀리서 날아오는 투사체가 무엇인지 식별할 여유가 있을 리가 없었다. 오로지 소리에 의존한 회피. 어지럽게 일렁이는 노르드의 시야가 격한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기를 반복한다. 미처 피해내지 못한 사격이 있었는지 화면 상단에 체력바가 뭉텅뭉텅 깎여나갔다. 출혈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목숨이 위험하다고 경고를 보내는 것 같았다.
"멈췄다. 둘이 아니라 다행이네요."
사격이 멈춘 잠깐의 틈이었다.
모닥불 근처에서 회피에 급급하던 노르드는, 아무런 전조도 없이 땅을 박차고 뛰기 시작했다. 이미 어딘지 정해놨다는 듯 달려가는 방향을 선정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모닥불에서 남쪽, 게이트로 이어지는 방향이다. 일렁거리는 시야가 더 어지럽게 흔들렸다.
밤의 어둠은 장막과도 같았다. 독 때문에 초점을 잃은 시야로 어둠 너머의 사물을 분간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방향을 남쪽으로 선택한 건 게이트를 통해 도주하려는 판단일까. 비틀거리면서도 필사적으로 질주하는 노르드의 모습은 목숨이 위급해진 짐승의 마지막 발악처럼 느껴졌다. 각기 다른 생각을 내뱉던 시청자들이 다함께 죽음을 확신했다.
가까운 곳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왼쪽, 지근거리. 그 즉시 노르드가 방향을 바꿨다. 정확히 소리가 나는 지점을 향해서였다. 독의 여파로 몸이 비틀거리는 와중에도 노르드는 기묘한 움직임을 이어나갔다. 달리던 중 때때로,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조작. 고개를 내렸을 때 모닥불 근처에서 들었던 섬뜩한 파공성이 머리 위를 훑고 지나갔다. 다시 몸을 일으킨 노르드가 속도를 더 높였다.
달려가던 노르드의 왼손에 어느샌가 단검이 잡혔다. 일렁거리는 시야. 여전히 짙은 어둠만 가득한 곳을 향해 단검을 내던지기 시작했다. 한 개, 두 개. 두 개째를 던지고 난 직후, 선명한 발소리가 노르드의 고막을 두드렸다. 위치를 확정 지은 순간이다.
도끼를 움켜잡은 오른손이 움직였다.
크악!
망설이지 않고 내려친 도끼가 먹잇감을 포착했다. 코앞까지 당도하고 나서야, 흐릿하게나마 기습해온 사냥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사람의 형체가 아른거렸다. 가까이서도 복장을 알아보기가 어려운 게, 노르드가 착용한 가죽 옷처럼 새까만 천을 전신에 두른 것 같았다.
도끼가 파고든 지점은 아마 어깨 부근일까. 내려찍은 곳으로부터 피가 흘러내렸다. 일격을 허용한 사내는, 치명상은 피했는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노르드는 틈을 주지 않고 다시 앞으로 달려들었다. 허공에 들린 도끼날 주변으로 핏방울이 비산했다.
물러나는 척 날카로운 꼬챙이를 앞으로 내지르는 최후의 한 수를, 당연하다는 듯 뒤로 물러나 피해낸 것을 마지막으로.
노르드는 아홉 번째 킬 포인트를 기록했다.
"독침이었네. 그러니까 소리를 못 들었지. 무기가 생각보다 많네요, 이 게임. 독은 이 코어에서만 제작할 수 있는 건가?"
[어이가없노]
[겜알못 쓰레기들아 노르드가 죽겠냐ㅋㅋㅋㅋ]
[황르드!황르드!황르드!황르드!황르드!황르드!]
[방금 죽은거 샤드네 ㅅ,ㅂ ㅋㅋㅋㅋㅋㅋ]
[샤드 방송 시청하던 5만 양1키 바로 나락행ㅋㅋㅋㅋㅋㅋ]
[소름이 돋네 진짜]
[이게 국뽕이지;;]
[그 상황에서 표정 하나 안 변함ㅋ 사람 맞음?]
[같은 화면을 봤는데 왜 이해를 못하겠냐... 앞이 안보이는데 어떻게 찾아서 죽인거임]
[이제 외국애들도 몰려오나]
[방향키 뒤집힌거 찐이냐?]
[이쯤되면 뒤지라고 고사를 지내도 안죽을듯]
노르드는 천천히 시체를 뒤적거렸다.
전리품을 획득하는 과정이다. 시체가 두르고 있던 검은 첫을 뺏어 두른 노르드는 바닥에 주저앉아 출혈이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본격적인 정리를 시작했다. 새롭게 접하는 아이템이 많기 때문인지, 불을 피워놓고 분류하는 과정만 해도 꽤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킬 포인트를 올린 다음, 죽은 플레이어가 누군지 언급하며 소란스러워지는 채팅창도 이제는 제법 익숙한 그림이었다. 이번에 죽은 플레이어는 해외에서 제법 유명한 스트리머였던 걸까. 어느샌가 채팅창에는 영문이 더해졌다. 이해할 수 없는 영문 채팅을 길게 쏟아내며 감정을 토해내는 외국 시청자와, 거기에 반발하여 욕설을 내뱉는 기존 시청자. 혜진은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다 목을 축였다.
"혹시 몇 명 정도 더 남아있나요? 아직 더 코어 방송하고 있는 분."
[헉]
[먹잇감포착ㄷㄷㄷㄷㄷ]
[해외 포함해도 10명안되는거같은데?]
[이젠 그냥 무서워... 노르드는 아가아니야... 학살자야...]
[다 너 때문에 갈려나갔잖아]
[불감증이라더니 사람 감정도 못느끼시네요]
[근데 이래도 되는거임? 이거 원래 이런 게임맞아?]
[꼬우면 뒤지지 말던가ㅋㅋ]
[마지막까지 살아남으면 광고비 더줌?]
[아 이거 광고였지]
시체를 정리하기를 몇 분. 어느샌가 황무지 지평선 너머로 환한 태양이 올라왔다. 짧은 순간, 그토록 짙었던 어둠이 밀려나고 새벽녘의 햇살이 메마른 땅 틈새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밝아진 세상이 넓은 황무지를 온전히 드러낼 무렵.
노르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열 명은 채우고 끝내는 게 그림이 예쁘니까."
아무튼, 광고주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알 수 없는 한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