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5화 〉 225 업보 청산은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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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송 캘린더의 오늘 자 일정은 비어있었다.
딱히 다른 약속이 있는 날은 아니었다. 일주일 치 방송 일정을 열심히 채워 넣다가, 딱히 채울 게임이 생각나지 않아 공백으로 남겨둔 구간이었다. 캘린더를 만들 당시 방송에 있던 시청자들은 이 공백을 휴방 날로 생각한 것 같지만... 사실 그것도 정해진 건 아니었다. 모든 걸 계획한 대로 진행할 수는 없는 법이 아닌가. 저 빈칸은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그게 진짜 휴방이 될 수도 있었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으면, 공연히 배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침 운동을 갔다 온 직후 아직 한 끼도 제대로 먹지 않은 상태. 드라이기를 오래 쓰기도 귀찮아 대충 말린 머리카락에는 아직 물기가 남아있었다. 베개를 대신해 머리를 지탱하는 팔뚝에서 불쾌한 축축함이 느껴졌다.
가끔 밥을 차려먹는 일이 터무니없이 귀찮게 느껴질 때가 있다. 조촐한 밥상을 차리고, 입안에 밥을 욱여넣은 뒤 설거지로 마무리하는. 그 과정을 상상하기만 해도 얼마나 귀찮은지. 그걸 감당할 바에야 주린 배를 붙잡고 한 끼 정도는 굶는 걸 선택할 때도 많았다. 아무튼 과거나 지금이나 몸뚱이의 연비는 괜찮은 편이어서, 하루를 한 끼로 마무리한다고 해서 일상생활이 힘들어지는 일은 거의 없었으니까. 건강에 지장이 생기는 건... 당장 찾아오는 일이 아니지 않나.
띠링
<혜민/>
언니, 운동 갔다 왔어? 나는 지금 학교에서 밥 먹는 중이야. 오늘은 파스타가 나왔네.
언니도 점심 잘 챙겨 먹어. 또 귀찮다고 대충 넘기지 말고
동생의 문자 타이밍은 언제나 기가 막혔다.
문자를 확인한 즉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건, 혜민이에게 정곡을 찔려서 뜨끔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계속 이렇게 누워 있다간 결국 쥐도 새도 모르게 낮잠에 빠져버릴 가능성이 높았으니. 결국 누워서 속으로 귀찮음을 호소하고 있던 것도 몸을 일으킬 특별한 계기를 찾고 있던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나태한 사람은 채찍질하는 누군가가 있어야 몸을 움직이는 법이니까.
터덜터덜 실내화를 끌며 걸어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보관 중인 음식물보다 빈칸이 훨씬 많은 냉장고는, 점심 메뉴에 대해 고민을 할 기회조차 건네주지 않았다. 애초에 조리가 가능한 식자재가 별로 없는 것이다. 음료 칸에는 캔맥주와 소주 병이 가득 들어차 있었는데... 마트에 들를 때마다 주류 코너만 서성거리는 내 습성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사람이 알코올만으로 살아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역시 만만한 건 계란이었다. 보관도 편리할뿐더러, 조리 방법에 따라 수많은 베리에이션이 가능한 자취생들의 친구. 프라이팬을 꺼내 들고 뭘 만들지 잠깐 고민하다가, 가장 간단한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가스 불을 올리고 계란을 톡 까 넣는다. 몇 개월이 됐는데 아직 절반이 넘게 남은 식용유가, 내 식생활의 진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최근엔 배달 음식 시키는 비중이 더 늘어났는데... 대충 끼니를 해결하는 것과 비교했을 때 뭐가 더 건강에 악영향을 끼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젊다는 건 축복받은 일이었다. 이렇게 먹어도 지병 따위가 생기지 않는 걸 보면.
전자레인지에 데운 즉석밥을 밥그릇에 덜어놓고, 계란 프라이를 얹은 다음 간장을 그 위에 간장과 참기름을 끼얹는다. 사다 놓은 김치도 어제 다 먹은 터라 밥그릇 하나만 올라간 플라스틱 쟁반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출출한 배는 계란과 간장의 고소한 냄새에 반응해 난리를 떨었다. 조촐한 상이야 어찌 됐든 설거지 거리가 최소한으로 줄어든다는 점에서 이건 자취에 최적화된 메뉴였다.
대충 비빈 밥을 입에 쑤셔 넣고 컴퓨터를 실행한다. 컴퓨터가 예열되기 전까지는 발밑이 싸늘하게 냉기가 돌았다. 실내화 위에서 발등을 문대면서 밥을 꼭꼭 씹어 삼켰다.
휴방을 한다고 마냥 놀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방송을 하느냐고 밀어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인터넷 방송이라는 것도 프리랜서와 비슷해서, 가만히 있으면 한없이 여유롭되 할 일을 찾아 나서면 해야 하는 것들이 무궁무진하게 쏟아지는 구조였다. 당장 가득 찬 메일함을 정리하는 것만 해도 문제인데. 방송 컨텐츠를 만들겠다 마음먹고 주연과 함께 아이디어 회의라도 진행하면, 몇 시간이 금방 지나가고 만다. 편집된 영상을 검수하거나 업로드하는 건 일상적인 업무에 불과했고.
손길이 닿는 대로 저컴 게시판에 들어갔다가, 가장 위에 올라온 최신 게시글 제목이 '노르드 방송 켜'인 걸 보고 커뮤니티 창을 닫아버렸다. 그 밑으로도 죽 방송 키라는 게시글이 한 페이지가량을 꽉 채우고 있었는데... 청개구리 심보인지 저런 걸 보고 있으면 왠지 방송을 켜고 싶은 마음이 더 줄어드는 것 같았다. 저런 뻘글이나 도배하고 있으니까 게시판 트래픽이 과하다는 소리가 나오지.
빨리 수용소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매번 저컴 게시판 사용률 1위를 찍는 것도 낯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밥을 한 술 더 떠놓고 저스틴에 들어갔다. 내가 방송을 하고 있기 때문인지, 날이 갈수록 저스틴에 들어가는 빈도가 증가하는 느낌이다. 이렇게 밥을 먹을 때 누군가의 방송을 켜놓고 먹는다던가 하는 경우도 생겼고. 점점 팔로우한 방송인의 이름이 늘어나는 것도 기분 탓은 아니었다.
내가 팔로우한 스트리머는 대체로 나와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서로 방송을 잘 보고 있다는 의례적인 인사라도 나눈 사람들. 실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은 왠지 더 호기심을 부추겨서, 저 사람이 방송에서는 어떤 모습일까 하는 궁금증을 낳게 했다. 사람이란 모두 자리마다 다른 모습을 보인다고는 하지만, 방송에서 보여주는 모습과 현실의 괴리감이 재밌게 다가오고는 했으니까. 아마 나를 보고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낮 시간. 팔로우한 목록에 생방송을 진행 중인 스트리머는 몇 없었는데, 그중 의외의 인물이 섞여있었다. 이 시간이면 아마 돌쇠 정도나 방송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가장 위에 불을 밝히고 있는 건 칼고였다. 정규 방송 시간은 철저하게 지키는 인간이 무슨 일로 이렇게 일찍 켰는지. 의구심을 품고 방송을 클릭했다.
<"하, 호응을="" 어떻게="" 하라고="" 저렇게="" 들어가."=""/>
방송에선 나이트폴 경쟁전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고성 맵. 양손에 들린 쌍검이 전력으로 게임에 임하고 있음을 대신 알려주고 있었다. 툭 내뱉는 목소리에서 짜증이 묻어 나왔는데, 저렇게 예민한 걸 보면 이번 판이 첫판인 것 같지는 않았다. 몇 게임 연달아 트롤에 휘말린 것처럼 기분이 다운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반쯤 미간을 찌푸린 성현의 얼굴에서 피로가 묻어 나왔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방송을 켜놓고 저렇게 반응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나.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바로 방송 시간을 확인했다. 방송 시간이... 18시간하고도 30분을 더. 그제서야 방송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나이트폴 킹 켠왕, 퀸 500등 시작'. 사람은 실수를 반복하는 미련한 존재라더니, 매 시즌마다 이 짓거리를 반복하고 있었구나. 자연스레 입 밖으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방송을 켜놓고 다른 모니터를 통해 나이트폴 전적 사이트에 들어간다. 500등 대에서 시작해 18시간 동안 빌빌거리고 있는 걸 보면, 어떤 전적일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뻔했는데 역시나. 실시간으로 갱신되는 순위에서 400등 대에 머물러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초반에는 파죽지세로 연승을 이어나가다, 어느 기점에서부터 연패를 내려 박고는 승패 승패를 반복하고 있는 모습. 켠왕을 고려했을 때 최악의 그림이었다. 가망이 아예 없지는 않으니까 포기도 못하고 꼬박 하루를 투자하고 있는 꼴이 아닌가.
어쩐지, 낮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시청자가 평소보다 훨씬 많더니만. 어딜 가나 사람들이 가장 재밌다고 생각하는 그림은 방송인 스스로가 고통을 받는 모습이었다. 알게 모르게 스트리머를 긁어대는 시청자가 많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겠지. 어느샌가 죽어서 흑백으로 물든 화면을 보고, 채팅창이 잠깐 초성으로 가득 찼다. 확실히 정색을 하고 있는 성현의 표정이 재밌게 다가오기는 하더라.
나도 모르게 키보드로 손이 움직였다.
[오늘 방송 일찍 키셨네요 ㄷㄷ]
엔터키를 누르면 곧장 채팅창에 내가 쓴 채팅 한 줄이 올라왔다. 내 닉네임 옆에 관리자를 상징하는 검 모양의 아이콘이 달려있어서 인지, 일반적인 채팅보다 어그로를 배는 더 잘 끌어모으는 것 같았다. 몇 번인가 방송을 들락날락하기는 했는데, 대체 언제 자동 관리자 설정을 해둔 건지. 채팅을 치자마자 따라붙는 무수한 채팅들을 보고 있자니 살짝 당황스러웠다.
<"...뭐야. 노르드="" 왔다고?"=""/>
아, 어그로 끌렸다.
시청자 포지션에서 관심을 받는 건 또 새로운 느낌이라, 나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표정을 의식하는 듯 검지로 미간을 짓누르던 성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약간 측면으로 비틀린 게 다른 쪽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채팅창을 훑어보는 걸까.
나는 별안간 대단한 관종이라도 된 것처럼 열심히 채팅을 써갈겼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 상황이 무척 재밌었다. 열여덟 시간째 방종도 못하고 고통받고 있는 성현을 보고 있다는 게.
[마라톤도 세 시간이면 끝나는데 킹까지 가는 길은 멀고 험하네요...]
채팅을 써넣으면 금방 시청자들의 반응이 뒤따랐다.
[악질떳네]
[ㅋㅋㅋㅋㅋ 칼고 놀리러왔누]
[노하~ 방송 켜 텐련아]
[뭐야 찐이야?ㅋㅋㅋㅋ]
[개악질인거 같은데 10분 차단박죠;;]
[선생님 여기서 뭐하세요]
[노르드 방송켜!!!!]
[헉... 칼고님 지금 찐텐인데]
생각한 것보다 열렬한 반응이었다.
성현도 내가 쓴 채팅을 확인했는지 대번에 인상을 확 찌푸리는 게, 썩 마음에 드는 표정 변화였다.
흑백 화면이 풀리고 부활한 상태. 리스폰된 장소에서도 칼 부딪히는 소리가 저렇게 선명히 들리는 걸 보면, 이미 게임의 승패는 기울었다고 할 수 있겠지. 성현도 그걸 알았는지 부활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고개를 까딱거렸다. 억지 같은 게 아니라 진심으로 화가 난 느낌인데. 하기야, 저 인간도 승부욕은 참 대단했지. 아직까지 커플 대항전 결승전 운운하는 꼴을 보면 그건 확실했다.
잔뜩 피로에 절어있는 성현의 눈 밑에 짙게 음영이 졌다. 24시간 방송. 말이 24시간이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내가 저렇게 길게 방송을 하면 아마 의식하지도 못하고 쓰러져 버리지 않을지. 그런데도 저 모습을 보고 있는 게 재밌는 건, 나도 어쩔 수 없는 시청자기 때문일까.
<"하... 켠왕="" 실패="" 벌칙="" 투표할까요?="" 도저히="" 못="" 버티겠네요,="" 이제."=""/>
어라. 포기하는 게 생각보다 너무 빠른데.
갑작스러운 전환이 낯설게 다가왔다. 성현의 성격을 생각하면, 켠왕을 선언한 이상 되든 안 되는 쓰러지기 직전까지 게임을 계속할 거라고 예상했던 터다. 실제로 지금까지 킹 달성에 실패한 적이 없었다고 들었으니까. 조금 긁은 정도로 쉽게 포기할 거라고는... 게임이 그렇게 안 풀렸나. 몇 판 연속으로 트롤을 만났다든지.
포기하겠다는 성현의 선언은 시청자들에게도 갑작스러웠던 것 같다. 시시덕거리며 칼고를 놀리던 채팅창이 한순간에 갈고리로 돌변하는 모습이란, 왠지 내 방송 채팅창이 떠오르는 모습이다.
아니, 이렇게 되면 내가 잘못한 거 같잖아. 남은 밥을 입 안으로 쑤셔넣으면서 어떻게 성현을 설득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켠왕하는 건 더 보고 싶은데.
신중히 무슨 채팅을 칠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피곤한지 앉은 자리에서 목을 풀어주던 성현이, 돌연 미소를 짓고는 카메라를 직시했다. 의미심장한 웃음. 뭔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대신 저="" 옛날에="" 노르드한테="" 받은="" 소원권="" 아직="" 안="" 썼거든요?="" 이럴="" 때="" 써야지="" 어디에="" 쓰겠어.="" 여러분="" 투표="" 결과="" 나오는="" 대로="" 노르드랑="" 같이="" 벌칙="" 받겠습니다.="" 다들="" 신중히="" 선택해="" 주세요."=""/>
[???]
아무튼, 언젠가 업보는 돌아오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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