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6화 〉 226 바지 벗고 소리 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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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늘 성적 정체성에 대해 의식하면서 남자냐 여자냐 따위를 고뇌하지는 않았다.
변화는 충격적이었으되, 이미 생물학적 성별이 고정된 차에 그런 미련한 짓이 또 있을까. 물론 세간에서는 본인의 성적 정체성이 에이 젠더니 젠더 플루이드니 하는 복잡한 이름들을 갖다 대며 아주 세부적으로 분류한다고는 하지만, 내 기준에서 그건 다 개소리에 불과했다. 아무리 주절거리며 떠들어대봤자 고정된 건 고정된 법이다.
그럼 뭐 하러 그렇게 성 정체성을 상세하게 분류하고 앉았는가. 그건 결국 성적 지향이 향하는 바가 그만큼 다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누구랑 섹스를 하고 싶은지의 문제라고. 세상에 이성에게 성애를 느끼는 사람만 존재한다면 저런 복잡한 상세 분류도 존재하지 않았을 게 뻔하다. 성적 정체성을 고민하는 사람도 없을 테고. 그렇지 않으니까 저런 복잡한 분류가 생기겠지.
그러니까 나와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어느 경우에나 예외는 있지 않나.
혜진이 된 이후, 내 성적 지향은 어디를 가리키고 있을까. 삼십 년을 남성으로 살아온 정신에 따라 여성에게 촉이 향할지, 그래도 생물학적 성별에 따라 남성에게 촉이 향할지. 우습게도 그건 나도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게 제대로 작동을 안 했으니까. 여성의 신체엔 남성처럼 성적 흥분도를 측정할 수 있는 안테나가 탑재된 것도 아니라서, 나는 정말 내 성적 지향이 어떻게 되먹었는지 알 수 없었다.
술기운에 지껄였던 불감증이라는 말이 아예 근거 없는 헛소리는 아니었다. 지금 나는 정신적으로 불감증에 가까운 상태였다. 이걸 정신질환으로 분류해야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런 내가 여자냐 남자냐 따위를 두고 고민을 할 이유가 없었다. 실체 없는 남성성을 유지한답시고 억지로 남자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도 웃긴 광대 노릇이 아닌가. 그냥 있는 대로 사는 거지.
혜진이 되고 나서는, 혜진의 몸에 어울리는 옷을 입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긴 머리를 말리거나 화장을 하는 행위도. 다만 그게 익숙지 않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굳이 어색함을 견디고 적극적으로 새로운 걸 시도하지는 않게 되더라. 예를 들면 나풀대는 치마를 입거나 몸 선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옷을 입거나 하는 짓이 그렇다. 그건 쉽게 익숙해질 수 있는 감각이 아니었다. 어색하고 낯 부끄러운 일을 억지로 시도할 이유도 전혀 없었고.
그래, 나도 그렇게 해야 될 이유가 생길 줄은 몰랐지.
"그래서 이걸 입으라고?"
"...아니, 내가 고른 게 아니라 시청자들 투표로"
"아주 훌륭한 정치인 납셨네요."
"...그냥 다른 걸로 할까?"
자기가 일을 만들어놓고, 성현은 머쓱하다는 듯 이리저리 시선을 피했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코스프레 숍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규모가 커서, 나는 의상들이 죽 나열되어 있는 모습에 입이 딱 벌어질 지경이었다.
옷이 가득한 것만 보면 의류점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그 옷들이 전부 심상치 않은 색깔로 빛난다는 걸 고려하면 뭐라 할 말을 잃게 되는 그런 광경. 알아볼 수 있는 의상이 별로 없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껴야 할지 슬픔을 느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무튼 당혹감에 빠진 게 나 혼자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다행스럽기는 했지만.
"너무 대놓고 섹스 어필하는 옷이잖아요."
"큽! 야,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하지 좀 마라. 듣는 사람 민망하게."
뭐가 민망해, 애새끼도 아니고.
뒷말은 내뱉지 않고 속에 묵힌다. 이미 비비 꼬인 배알은 성현에게 한 번이라도 더 쓴소리를 뱉어대라고 재촉했지만, 차분하게 생각해 보면 그렇게 따질 이유도 없던 것이다. 결국 다 내가 자초한 일이나 마찬가지이지 않나. 자책을 하는 내 마음속엔, 그저 그때 방송에 들어가 어그로를 끌어버린 멍청한 선택에 대한 후회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멍청할 수가.
슬쩍 손을 뻗어 시뻘건 옷감을 어루만진다. 손가락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지는데... 이 정도면 내 기준에선 실크나 마찬가지였다. 코스프레 의상은 대체로 싸구려 재질로 만들 거라고 생각하던 내게는 그것만으로도 꽤나 충격적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편견을 갖고 있던 걸까. 이런 옷을 접할 기회가 있었어야지.
성현이 투표로 선정됐다고 말하는 의상은, 지금 내가 만지고 있는 이 빨간 색상의 드레스였다. 빨간 걸 넘어서 새빨갛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짙은 빨간색. 디자인은 무슨 민소매 원피스처럼 보였는데, 대충 가늠해 봐도 기장이 과하게 짧은 느낌이 강했다. 내가 입어도 무릎까지는 전부 내다보일 것 같은데. 무슨 애니의 인기 히로인이라고 설명하던 성현의 얼굴이 제법 인상적이었다. 말을 내뱉기도 부끄러워하는 표정이... 그나마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더라.
"성현 씨는 뭔데요? 나는 이런 거 주고 자기만 멋있는 거 하는 거 아니야?"
"그럴 리가. 나도 미칠 거 같다니까? 그리고 이런 거... 라니. 겉보기엔 멀쩡하잖아, 이거. 길이가 너무 짧기는 하지만."
그게 결코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는 문제인데, 이 화상은 대체 뭔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잠깐 머릿속으로 저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상상했다가, 기겁을 하며 이미지를 지워버렸다. 겉보기보다 다른 것들이 문제였다. 저 상상할 수 없는 노출도를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 허벅다리에서 바람 통하는 느낌을 떠올리면 입기도 전부터 머리가 싸했다. 어떻게든 다른 옷을 찾을 필요가 있겠는데.
연달아 투덜거리는 내가 꼴 보기 싫었는지, 성현은 곧장 자신이 입을 옷을 보여주겠다며 가게 안쪽으로 나를 이끌었다. 겉보기에도 화려한 코스프레 숍은 내부가 더 진국이었다. 어디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든 화려한 옷들부터, 주인장의 취향인지 매장 벽 진열칸을 장식한 다양한 피규어까지. 이 정도면 박물관 내지는 전시관으로 입장료를 받아도 무방할 것 같았다. 아니, 그렇다고 내가 돈 내고 보겠다는 건 아니고.
제 발로 성큼성큼 걸어가길래 미리 위치를 봐 둔 건가 싶었는데, 성현이 찾는 건 옷이 아니라 점원이었다. 하기야 이 복잡한 곳에서 원하는 복장 찾아내기가 쉬울 리가 없겠지. 작은 목소리로 매장 점원에게 캐릭터의 이름을 말하는 모습은 따로 녹화하고 싶을 만큼 우스꽝스러운 장면이었다. 잠깐 야방이라도 킬까 고민을 하다가, 이런 곳에서 옷을 고르는 광경을 목격하면 무슨 지랄이 날지 몰라 참았다.
"...봤지? 나는 애초에 거의 여장이라니까? 이 새끼들 스트리머 엿 먹일라는 건 너도 잘 알잖아."
성현이 보여준 건 화려한 무늬가 잔뜩 그려진 풍성한 느낌의 분홍빛 기모노였다. 이것도 아마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복장이겠지. 옷감에 수놓아진 꽃 모양 무늬는 가까이서 보면 꽤나 조잡했다. 내가 코스프레 복장을 떠올렸을 때의 퀄리티가 딱 이 정도 수준이었는데. 한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의상이라는 걸 제외하면, 옷 자체는 크게 이상하거나 특별하지 않았다. 빨간색 미니 드레스보다는 훨씬 무난하지 않나.
"너무 무난하지 않아요? 분홍색인 거 빼면 그냥 너무 정상적인데. 옷자락이 기니까 치마 같은 느낌도 없잖아요."
"아니, 여기에 가발이랑 이상한 액세서리도 붙어있어. 화장도 다 포함이라고."
뭔가 억울한 듯 얼굴을 굳힌 성현이 원본 캐릭터를 보여주고 나서야, 나는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여성스러운 캐릭터였다. 붉은색의 짙은 눈 화장이 아주 인상적인.
나도 싫은 건 마찬가지였지만, 굳이 비교해 보자면 당연히 여장을 하고 방송을 하는 쪽이 훨씬 흑역사로 기억될 가능성이 높겠지. 사람은 같이 고통받는 사람이 있으면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해지는 감이 있었다.
화려한 기모노를 잡고 이리저리 둘러보다, 문득 의문 하나가 떠올랐다. 시청자들은 대체 왜 이런 캐릭터를 추천한 건지. 애초에 어떤 것들이 선택지에 포함되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 자세한 내막을 알 리가 없다. 그땐 열불이 나서 방송을 끄고 나가버렸으니까.
"왜 이거 골랐대요? 얘가 요즘 제일 잘나가는 캐릭터인가."
"아... 쟤가 쌍검 들고 나오거든. 게임에서."
"진짜 좆도 없는 이유네요?"
"야, 화 난건 알겠는데 말 좀."
방송하는 것도 아닌데, 뭐.
"그럼 제 복장은요."
그래, 사실 진짜 궁금한 건 이거였다.
먼젓번에는 바로 대답한 성현이, 두 번째 질문에는 이상하게 어물쩡거리며 대답을 망설였다. 사람이 질문을 했는데 저런 식으로 대처하면 호기심을 부추기는 것밖에 더 되나. 바로 가까이 접근해서 대답을 촉구한다. 자꾸 눈이 마주치는 걸 피하는 꼴이 얄미웠다.
"...그냥 너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고른 거 같은데."
"진짜로? 어딜 봐서."
"내가 고른 것도 아닌데 왜 나보고 그래? 크흠, 니가 내 카페 들어가서 확인해 보던가."
"제가 성현 씨 팬카페 가입할 리가 없잖아요."
"자꾸 열받게 할래?"
저게 진짜 이유는 아닐 것 같은데. 더 찔러대는 것도 이상해서 그냥 봐주기로 했다. 아무튼, 성현이 죄를 지은 사람처엄 내가 투덜대는 걸 전부 받아주는 것도 사실이었다. 여기선 나도 선을 지킬 필요가 있겠지.
결정을 하는 것도 머리 아픈 일이었다. 성현이 점원에게 부탁해 저 요란한 기모노를 포장까지 마쳤을 때도, 나는 투표로 결정됐다던 내 복장 앞에서 고민에 빠졌다. 저걸 입고 방송을 한다는 게 과연 맨정신에 가능한 일일지. 벌칙 방송은 성현의 집에서 진행하기로 결정된 상태였는데...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 앞에서 저 꼴을 하는 것도 고역인 건 마찬가지였다. 어울리고 말고를 제쳐두고서라도.
벌칙 방송이라는 걸 굳이 함께해야 하나. 따지고 보면, 소원권이라는 애매한 무언가 때문에 성현의 방송 벌칙을 함께 받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여기서 입 싹 닫고 모른 척하면 금방 조용해질 일일 텐데.
그럼에도 성현의 제안을 받아 코스프레 숍까지 함께 찾아온 건, 결국 내가 방송각까지 고려해서 내린 결단이었다. 성가시다는 마음 한편으로 재밌을 것 같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도 부정할 수 없겠다. 방송을 하면 할수록 관종 끼는 왜 늘어만 가는지. 이제 스스로 불구덩이로 떨어지는 것도 제법 자연스럽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아니, 불구덩이로 뛰어들면 일단 재미는 있을 거 아니야.
아, 모르겠다.
"그냥 이걸로 하죠."
"...괜찮겠어?"
"뭘 어째요. 어차피 다른 거 입어봤자 약속 어겼다면서 채팅창 불 날 거 뻔한데. 벌칙 수행하고도 욕먹느니 제대로 가는 게 낫지 않겠어요?"
"나야 그편이 훨씬 좋은데 이건 좀 직접 보니까 내 생각보다 더 짧아서 그래. 진짜 불편하면 내가 잘 말해 줄 테니까 그냥 빠져도 돼. 어차피 그땐 나도 정신 나간 상태라 아무 말이나 지껄인 거니까."
"부담스럽게 왜 그래. 저 단 거 별로 안 좋아해요, 초코칩 빼고는."
"...뭔 소리야?"
그래서, 결론적으로 나는 내 긴... 짧은 인생 처음으로 아주 극단적인 복장을 입고 방송을 하게 될 위기에 처했다. 절반쯤은 내가 자초해서.
"응? 아니, 그건 뭐예요."
"네? 아, 이 코스튬에 포함되는 스타킹입니다."
"...스타킹? 스타킹도 있었어? 무슨 계집이 드레스에 스타킹을 신어."
"야! 제발 입 좀."
어쨌든 벌어진 일은 되돌릴 수 없었다.